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호세아 2장 19-23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과 음행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너희가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벌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에 조금이라도 어떤 변화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랑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그의 신부라고 할 때 신랑에게 걸맞은 신부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벌을 주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즉 벌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벌은 무엇을 위한 벌인가?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벌을 주겠다고 하셨지만 내가 그를 타이르겠다,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 하겠다,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겠다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어렸을 때 그리고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노래하도록 만들겠다고 까지 하셨는데, 과거 출애굽의 역사처럼 지금도 동일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죄악 된 자리에서 이끌어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전에는 하나님이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남편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을 남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이상 바알을 남편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이끌어 내겠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파괴되었던 창조의 질서가 회복되게 됩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다스려야 했지만, 죄는 이 관계를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이런 창조의 질서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되는데, 율법의 정신처럼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 또한 사랑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파괴되었을 때 이웃 사랑이 아니라 전쟁의 역사였다면 하나님 사랑의 회복은 그런 전쟁의 역사도 그치고 평안의 때가 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은혜를 베푸시는지에 대해 다시금 말하는데, 19절과 20절입니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본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다른 신으로 하여금 남편을 삼았습니다. 즉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한번 깨어져 버렸습니다. 이혼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금 이스라엘에게 장가들겠다고 하십니다. 너를 내 아내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비록 네가 잘못한 일이 있지만 그 잘못을 잊어버리겠다는 말입니다. 그 잘못을 지워버리겠다는 말입니다. 음행한 사실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영원히 살되’라는 말을 덧붙이십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본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남편아 아내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아내 쪽에서 잘못함으로 인해 한번 그 관계가 깨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를 다시금 회복하게 하실 때는 또 다시 헤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은 시작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시작과 함께 완성까지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신다는 것입니다(빌1:6). 물론 그 과정 가운데 호세아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음행이 한번만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있습니다. 한번의 실수로 끝나면 좋겠지만 우리의 부패한 본성은 끊임없이 음행을 저지릅니다.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여기에도 기웃거리고 저기에도 기웃거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만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하십니다. 490번이 한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살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영원히 살게 될 때까지, 영원히 살 수 있는 수준이 될 때까지 하나님은 용서하고 또 용서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은총을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용서하심에 대하여 악용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는 방식은 이어 설명하는 것처럼 세 가지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우선 19절에 보면 공의와 정의가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 은총과 긍휼이 나옵니다. 그리고 20절에서 진실함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통하여, 그런 다음 은총과 긍휼을 통하여, 그리고 그것을 진실함 혹은 성실함으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14절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타이르되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 공의와 정의를 행사하시는 겁니다. 왜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시는가? 호세아 2장 6절로 말하자면 왜 가시를 주시는가? 이스라엘 백성 쪽에서 잘못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잘못에 대하여 그냥 내버려두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시를 주십니다.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십니다. 어려움을 주시는 것이고, 고난을 주시는 것이고, 잘못에 대한 징계를 행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지금 공의와 정의입니다. 쉽게 말해 죄에 대한 벌 혹은 징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징계와 벌을 주신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행한 만큼의 징계와 벌은 아닙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행한 만큼 징계와 벌을 받아야 한다면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자범죄를 계산하지 않고 원죄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겠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너희와 영원히 살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되, 거기에 은총과 긍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행하시는 공의와 정의는 은총과 긍휼에 기초한 공의와 정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공의롭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택자 편에서는 그들이 받아야 할 벌만큼 주시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리스도에게 택자가 받아야 할 벌을 충분하게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죄에 대하여 공의와 정의를 행사하시는데, 그 공의와 정의를 택자에게게 내리신 것이 아니라 택자의 모든 죄 짐을 그리스도에게 전가시켜 그에게 내리셨던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이 있는 겁니다.
다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문제를 해결 받았다고 할 때 죄책이 제거된 것이지, 부패가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닙니다. 남아 있는 부패성,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자범죄가 여전히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되 여전히 공의와 정의와 함께 자신의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은총과 긍휼을 베푸신다고 해서 공의와 정의 없는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총과 긍휼만으로는 저들이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아서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이상 하나님은 죄의 길에서 돌아서도록 하기 위해 공의와 정의를 실행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벌을 내리시되 필요한 만큼의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진실함이 추가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진실함이란 신실함 혹은 성실함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런 공의와 정의,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는 일을 신실하게 성실하게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한번 행하고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혹은 두 번, 세 번 정도만 행하시고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계속해서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을 통해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겠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20절 마지막에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공의와 정의로 일하시며, 또한 은총과 긍휼로 일하시되, 진실함 성실함으로 일하실 때 너희는 여호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역사란 단순히 일반계시의 차원이 아님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반계시를 통해서도 자신을 알리셨지만 구원의 지식과 관련해서는 특별계시로만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때문에 너희가 여호와를 알게 된다고 할 때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외적 증거로써의 말씀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 삶에 있어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고,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되 신실하게 성실하게 행하시지만, 앞서 그의 말씀으로 이 사실을 알리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으로 징계하시고 그의 말씀으로 위로하시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죄를 나타내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끊임없이 공의로 행하시되, 은총과 함께 신실함으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말씀의 효력이 있다는 것은 그 말씀과 함께 일하시는 내적 증거로써의 성령의 일하심이 함께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입니다.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하심으로 말미암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가? 그의 말씀과 그의 성령으로 나타납니다. 특별히 그의 말씀으로 나타난다고 할 때 거기에는 공의와 정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은총과 긍휼도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함, 성실함도 있습니다. 책망과 벌이 있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은총이 있는 것이고, 그 일을 성실하게 실행하시는 일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기 때문에 시작하신 그 일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루시기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교회는 무조건 사랑만 외치는 곳이 아닙니다. 사랑도 있지만 책망도 있습니다. 왜 책망이 있는가? 근본적으로 사람은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이상 지상의 교회가 말씀으로 책망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씀으로 권징을 하지 않는다? 그 교회는 참된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책망이 있고 권징이 있는 교회가 참된 교회로 분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의 표지라고 할 때 말씀과 성례와 더불어 권징이 들어가는 겁니다. 권징 없는 교회, 책망 없는 교회를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21절과 22절을 보시면 여호와를 알게 된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부터 응답하셔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그러나 여기에 있는 22절은 앞선 말씀 20절의 내용 없이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에 대하여 땅에서 나는 것들을 충분히 먹고 마실 때 주어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복의 시작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알리시는 바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실 때 시작된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을 위해 인간의 죄를 제거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아내로 삼을 때 참된 복이 시작된다고 알립니다. 이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 지상의 축복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용납되고 우리와 거룩한 혼인이 맺어지고 또한 그가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를 보존하시며 우리가 그의 보호와 방어 아래 안전하고 평안하게 된다는 약속을 받을 때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선지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지상의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본래부터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것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바알로부터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끊어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될 때는 다시금 지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겠다고 하시는데, 지난주 살핀 15절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그러나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고 하십니다.
우선 응답한다는 것은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아닌 바알로부터 공급된다고 하는 모든 것을 끊어버리심으로 실제로는 바알로부터 공급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십니다. 그럼 누가 공급하시느냐?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에게 공급해 주시기를 기도하느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누가 주체인지 알게 하셨고, 누가 주체인지 알게 되자 주체이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이 얼마나 무지한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알리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그들에게 공급하시는지 순서를 따라 말씀하십니다. 그런 측면에서 뒤에서부터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곡식과 포도주, 기름을 얻는 것은 땅으로부터 얻습니다. 그럼 땅만 있으면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땅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야 합니다. 해가 있어야 하고, 비가 있어야 하고, 그 외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여러 요소들이 하늘로부터 제공되어야 합니다. 그럼 하늘은 그 자체로 땅에 필요한 것은 공급하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주관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무지는 어떻게 나타나느냐? 주체를 빼 버리는 데 있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땅으로부터 얻어야 한다는 것은 압니다. 또한 땅은 하늘로부터 공급 받아 제공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입니다. 하나님에게까지 올라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 그 영광을 돌립니다. 이방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무지를 깨우치기 위해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응답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응답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22절 마지막에 ‘이스르엘’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왜 이스르엘입니까? 이미 호세아 1장에서 하나님은 너희의 이름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르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로 불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거룩하고도 영광스러운 이름인데, 더 이상 그 이름으로 불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공급하신다는 겁니다. 즉 너희가 바알로부터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던 때도 사실 내가 너희에게 공급했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알리시고 있는 겁니다. 지금은 너희가 하나님을 아는 자로 있지만, 그래서 하나님께 공급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지만, 너희가 알기 전부터,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르엘로 불릴 때부터 사실은 하나님이 계속해서 공급해 주신 주체라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여 알리고 있는 겁니다. 때문에 결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체인 것을 빼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지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땅으로부터 얻는다고 해서 땅이 주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땅은 하늘로부터 공급 받는다고 해서 하늘을 주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열심과 노력이 있습니다.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열심과 노력이 주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과정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체이십니다.
하늘에 있는 해로부터 빛을 주시고, 또한 구름을 통해 비를 내리시고, 그래서 땅을 적십니다. 그 결과 땅으로부터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열매를 위해 인간의 노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 결국 열매를 맺어 얻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르엘로 불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이 그들에게 돌려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먹고 마시는 문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펠라기안주의에게도 적용되고, 반펠라기안주의에게도 적용됩니다. 당연히 알미니안주의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주체이신데,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모든 자들은 감히 말씀드리지만 이스라엘로 불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그들의 주장을 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그들이 이스르엘로 불릴 수밖에 없다 해도 변함없는 사실은 하나님이 주체시라는 겁니다. 항상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3-36)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셔서 우리에게 알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숨기시는데 누가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부분에 있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의미입니다. 출발만 하느냐? 과정도 하나님이 주체로 있는 것이고, 마지막도 결국 하나님의 주체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영광은 사실 하나도 없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우리가 받은 면류관을 다시금 돌려드리는 내용도 있는데, 바로 이 사실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천국에 가면 상급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공로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모든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물론 천국에 가면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상급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상급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공로의 상급은 아닙니다. 결코 공로의 상급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마지막까지 이르게 하시기 때문에 공로의 상급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상급일 뿐입니다. 때문에 상급을 받을만한 무엇을 내놓았다면 여러분으로부터 출발한 게 아님을 알아야 하고, 그런 측면에서 교만이 아니라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했다고 해서 교만하다는 것은 공로주의의 결과이지 결코 성도의 합당한 열매가 아닙니다.
더불어 23절로 오시면 곡식과 포도주, 기름의 풍성함만이 아니라 그것을 먹을 수 있는 백성의 수 또한 많아질 것을 말씀합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호세아 1장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그러나 이 말씀의 뜻은 이사야 10장 22절의 의미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때문에 혈통으로만 볼 때는 그 수가 많지 않습니다. 회복의 말씀이 적용되는 대상은 남은 자들이기 때문에 육적 이스라엘 자손으로만 보면 그 수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마치 씨처럼 땅에 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수를 많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처럼 이스라엘 자손의 수를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헤아릴 수 없도록, 셀 수 없도록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때 이스라엘 자손의 수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를 포함합니다. 남은 자가 씨가 되어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되는 것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ㄱ 버니다.
그리고 그들을 땅에 심는다고 할 때 그것은 이미 호세아 2장 1절에서 말씀하시던 방식과 같이 할 것이라고 하시는데, 간단히 말하면 루하마요 암미입니다. 본래는 로루하마요, 로암미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고, 내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들의 음행 때문입니다.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지 못하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주체이신 하나님 자리에 우상을 올려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어떤 가능성을 보고서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가능성은 없습니다. 찾아볼려고 해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도 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긍휼을 베풀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내 백성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당연이 이때도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를 포함합니다.
오늘 본문 23절 맨 처음에 나오는 ‘내가 나를 위하여’라는 말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위하는 것은 결코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 우리더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까? 하나님이 이기적이기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기적일 것 같으면 굳이 우리를 구원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아들까지 세상에 보내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 형벌을 받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 즉 내가 너를 선택했기 때문에, 내가 너를 사랑하기로 했기 때문에, 무선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기로 했기 때문에 내가 나를 위하여 그 일을 이루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때문에 하나님은 한번 선택하신 백성을 버리시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버림을 받았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택한 자기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 아담 안에서 범죄한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 탓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택자 역시 동일한 죄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정하신 바를 결코 변경함 없이 실행하십니다.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그들을 돌이키게 만든 후에 다시금 긍휼을 베풀겠다, 내 백성이 되리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때서야 비로소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주는 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 홀로 일하신 결과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다고 할 때 그것은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말한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 말씀처럼 남은 자를 통하여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시고, 그 수를 많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이루셨고, 지금도 이루고 계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번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얼마나 신실하게 역사하시는지를 다시금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가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말씀하시고서 이루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만큼 신실하십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시는 것은 그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에게 유익으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누리겠습니까? 즉 하나님을 위한 것이 사실 하나님의 백성의 유익으로 있는 겁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너를 위해 살지 말고 나를 위해 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겁니다. 즉 그를 위하여 사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복된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길로 있는 겁니다.
여러분,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견인이라는 말 자체는 ‘인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신학에서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영원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인내를 말할 때 내 쪽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인내해야 한다고 권면할 때 여러분이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도 분명 말합니다. 그러나 그때도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확신을 합니까?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만약 사람이 주체면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너무나도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단 1%라도 이바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된다면 그것은 100% 하나님께서 견인의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신부라면 철저히 그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인 줄 알고 그런 방향으로만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이루어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에 그분에게만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긍휼을 입은,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는 자들의 마땅한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