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호세아

210620설교 / 호세아3장1-5절 / 여호와와그의은총으로나아가리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1.06.20|조회수633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호세아 3장 1-5절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향하여 공의와 정의로 일하시되 은총과 긍휼로 자기 백성을 대하신다는 것을 알리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일하시는 것이 진실함과 성실함으로 대하신다는 것을 알리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에 대하여 기뻐하지 않으시며 그 죄에 대한 공의를 반드시 행사하십니다. 그러나 공의를 행사하신다고 해서 은총과 긍휼이 없는 공의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는 은총과 긍휼을 베풀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부르신 자들에게는 반드시 공의 가운데서도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는데, 그 일을 진실함과 성실함으로 행하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이 저지르는 죄는 끊임없이 반복적입니다. 그러나 공의를 행하시되 은총과 긍휼로 대하시는 것이 한 번 내지 두 번 혹은 세 번 정도가 아니라 계속해서, 끝까지 그렇게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긴다는 것이고, 내 백성이 아니었던 자에게 너는 내 백성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데,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향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런 고백을 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참되게 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참된 고백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전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합니다. 우선 호세아 3장 1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비유하고 있느냐? 호세아 맨 첫 장에서부터 말씀하신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것을 통해 알리십니다(호1:2).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도 다시금 말씀하시는데, 본문 1절 후반부를 보시면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즉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1장에서부터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실 만큼 다른 신들을 섬기는 데 빠져 있었던 것이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은 마치 음행한 것과도 같기 때문에 비유로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서 음행을 하고 있을지라도 나는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한다고 해서 다른 신을 섬기는 것 자체를 두둔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만약 다른 신을 섬기는 것 자체를 두둔했다면 공의와 정의를 실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공의와 정의를 실행하겠다고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기 때문이요, 하나님께서 결코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의와 정의를 실행하겠다고 알리기도 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지금 하나님께서 너희가 다른 신을 섬기고 있을지라도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는 이 말씀은 죄가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뿐,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 때문에 죄조차 괜찮다, 상관없다는 쪽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다른 신을 섬기고 있을지라도 너희를 사랑한다는 이 말씀은 저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서기 전일지라도 그 사랑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달리 말하면 다른 신을 섬기다가 이것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제는 돌아서고자 할 때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알리시는 것이 아니라, 돌아설 마음조차 없을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한번 사랑하기로 한 대상에게는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다시 1절 내용을 보면 ‘다른 신을 섬기고’라는 말 뒤에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호세아 2장 8절에서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는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신을 섬기고 있을 때는 그에게 주어지는 모든 물질적인 축복이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신이 준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 건포도 과자를 즐긴다는 것은 다른 신이 준 것으로 즐긴다는 그런 생각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2장에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들의 물질적인 축복을 다 빼앗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제공해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호세아 2장에서는 도로 찾으며 빼앗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호2:9).

그러나 그렇게 하시는 것이 결코 사랑 없이 하는 것이 아님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가 다른 신을 섬기고 또한 그들이 줬다고 생각하는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조건을 따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다른 신들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물질적인 축복을 주셨다가도 얼마든지 자신의 뜻을 따라, 그리고 그들의 잘못에 대한 징계로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방신의 특징은 얼마나 그들에 대하여 지극정성이냐에 따라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보다는 이방신이 쉽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그들이 축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원리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이방신을 향하여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향하여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만약 조건에 따라 사랑하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조건에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조건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신을 섬기고 있지만, 그리고 그들이 줬다고 생각하는 건포도 과자를 즐기고 있지만, 여전히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이런 사랑이기에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비유로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맨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호세아 선지자로 하여금 음란한 여자를 취하라는 말씀이 실제로 그렇게 하도록 하는 내용으로 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개혁자들이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유적인 말씀으로 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1절 이하에 보면 호세아 선지자가 음녀가 된 여자를 사랑하기 위해 행하고 말씀하는 모든 내용은 사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2절을 보시면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라고 말씀합니다. 우선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음녀가 된 여자를 삽니다. 비록 많은 양은 아니지만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음녀가 된 여자를 삽니다. 음녀가 되었지만 음녀의 자리에서 꺼내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아내로 삼기 위해서 산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죄인 된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피 값을 주고 사신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구속(救贖)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자 표현으로 하자면 건지다, 구원하다는 말과 함께 재물을 바치고 죄를 면제받다 혹은 바꾸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의 자리에 우리 대신하여 그리스도가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면제 받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하여 피를 흘리지 않으셨다면, 우리 대신하여 죽음의 형벌을 받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대신하여 속죄제물로 자신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내놓으셨던 겁니다.

이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샀다는 것은 더 이상 이전 주인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사탄의 종이요, 마귀의 종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착각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주인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인 우리는 한번도 자신이 주인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피조물인데 어떻게 주인일 수가 있겠습니까? 창조주만이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게 되었을 때는 사탄이 우리의 주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탄도 역시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을 주인으로 여기지 않고자 했을 때 피조물인 사탄을 주인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2) 실제로 맨 첫 사람 하와를 유혹한 사탄의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4-5) 본래 주인인 적이 없었지만 마치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말로 유혹했던 겁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신데,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것처럼 해서 유혹했던 겁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것은 죄에 대한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이고, 더 이상 사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값으로 지불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입니다. 본래 하나님이시고 지금도 하나님이시지만 성자로 하여금 인성을 취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 십자가 형벌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셨던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으로 다시 오면 호세아 선지자가 음녀가 된 여자를 위해 지불은 값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입니다. 많은 양이 아니라 적은 양입니다. 비싼 값이 아니라 싼 값에 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산다고 할 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값을 치르셨는데, 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는 적은 양의 값을 치르셨다고 말하는가? 이것은 아마도 우리의 가치를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우리의 가치는 결코 비싸지 않습니다. 적은 값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가장 비싼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가치 있는 자로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치는 가치를 매기는 분에게 있습니다. 세상 앞에서 우리의 가치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만을 짓는데 무엇을 가지고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우리를 가치 있는 것처럼 여겨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로 하셨기 때문에 가치 있다고 여겨 주시는 겁니다. 실제로 가치가 있어서 가치 있다고 하시는 게 아니라, 가치 있다고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9-10) 본래는 무명한 자요, 가난한 자요, 아무 것도 없는 자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유명하게, 부하게, 모든 것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주 본문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라는 말씀을 하셨지만(호3:23), 오늘 본문 2절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그러나 단지 하나님 자신의 유익을 위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이기적인 면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이기적이라고 할 것 같으면 우리를 구원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낼 필요도 없습니다. 그로 하여금 십자가 형벌을 받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하셨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택하신 백성을 사랑하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나를 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 곧 우리를 위한 것이고,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곧 우리의 구원의 유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3절을 보시면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값 주고 사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많은 날 동안 하나님과 함께 지내도록 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 호세아 선지자로 하여금 음녀가 된 여자에게 말하기 때문에 ‘많은 날’, 다시 말해 언제가 죽을 때가 있기 때문에 제한적인 의미에서 많은 날이라고 하고 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많은 날이 아니라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을 값 주고 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의 가치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천국하면 영원히 산다, 그것도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좋은 것들이 충만하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사실이지만 천국의 가치는 그곳에서 하나님께 영원토록 함께 사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 살도록 하기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겁니다. 거기에 좋은 것들이 충만한 것은 결코 하나님 자신보다 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큰 선물, 비교할 수 없는 선물은 하나님 자신인 겁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부터 훈련하시는 것도 하나님만을 최고 상급으로 여기느냐의 훈련을 하십니다.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느냐를 훈련하십니다. 그것을 위해 물질을 주시기도 하시고, 그것을 위해 주신 물질을 거두어 가시기도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어떤 고백으로 인도하시기 원하시느냐? 하박국 3장 17절과 18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는 것은 이런 고백까지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욥기 1장에서 욥이 고백한 바가 여러분의 고백이 되도록 훈련하셔야 합니다.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신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주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주신 분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실 때는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이전이 훨씬 좋았다고 말하지만 거기에도 하나님의 선한 목적, 그리고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그것이 곧 자기 백성들의 유익과도 직결되는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물론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더 중요한지, 무엇이 더 가치 있는 것이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물질도 주십니다. 영적인 것들도 주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최고 상급으로 그의 백성에게 주고자 하시는 겁니다.

때문에 하나님 자신을 최고 상급으로 받았다면 반드시 영적인 것도 선물로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것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실 수도 있지만 주시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주시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물질의 유무를 통해 확인 가능한 게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주기도 하시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거두어 가기도 하십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명심해야 합니다. 물질적인 것, 외적인 것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수 있는 것,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많은 날 동안 함께 지내고자 하실 때 다음과 같은 당부를 하십니다. 음행하지 말라.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신랑이 있는데 신랑을 두고서 음행을 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그래서 음행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하나님 외에 것을 올려놓는 것, 그것은 다 제거해야 할 것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단지 재물만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재물로 대표되는 모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다음의 말씀도 하십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10:36-37) 어떻게 집안 식구가 원 수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한 식구임에도 불구하고 원수까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구만을 섬겨야 하는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만 요구하시지 않고 하나님 자신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나님의 속성으로 보자면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하여 항상 이런 분으로 계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내가 너에게 그러한 것처럼 너도 내게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호세아 2장 후반부에서 회복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강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등한시해도 되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음행하지 말라는 것이요,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시지만, 하나님이 하신다고 해서 아무 것도 안 해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 중요한 원리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시면서 순종하길 원하십니다. 첫 번째 내용을 통해 우리는 모든 공로주의를 배격해야 합니다. 이것은 두 번째 내용 속에서도 변함없는 사실로 있습니다. 우리에게 명령하신다고 해서, 그리고 그 명령을 따른다고 해서 그것을 우리의 공로로 여길 수 있는가?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에도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내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격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런 게으름을 배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도 네게 그리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아도 그런 분으로 계시지만, 내가 너희에게 그런 자로 있다면 너희도 역시 나에게 그런 자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음행하지 말라는 것이요,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만으로 만족해야 하고, 하나님 외에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 사랑 때문에 재물이라 할지라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본문 4절과 5절로 오시면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여기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호세아 213절에서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내가 그에게 벌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벌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입니다.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총을 베풀 때까지는 왕도 있었고 지도자도 있었습니다. 그나마 제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제사는 변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상도 있었고 드라빔도 있었습니다. 주상은 돌이나 나무로 기둥처럼 만들어 세운 신상인데, 바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드라빔은 가정 수호신으로 점치는 일에 사용됩니다. 에봇의 경우는 제사장이 입는 의복 중 하나인데, 주상과 드라빔 사이에 위치한 것으로 봐서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언급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이 없는 상태에서 많은 날을 지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이스라엘 나라가 없다는 것입니다. 왕과 지도자도 없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예배든, 거짓된 예배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박탈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하시는가? 5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이후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왔을 때, 이때 돌아오는 자들은 남은 자들이 돌아오게 되는데, 그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에게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란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여기 보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는다고 되어 있는데, 이때 다윗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남은 자들은 결국 돌아오게 되는데, 그때는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하나님과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왕이요, 지도자임을 알게 되어 결국 그를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고도 하는데, 여기 보면 ‘마지막 날에’ 그렇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참되게 경외하는 그 일은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갑자기 하나님의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돌아오게 하셨을 때부터 점진적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한 번에 변화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 때까지 점진적으로 변화시켜서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하나님과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은 이 은총이라는 단어가 선하심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될 때마다 하나님의 백성은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징계와 심판을 주시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백성을 향한 선하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 본문 전체를 통해 다시금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한다고 해서 징계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심판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징계하시고 심판도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총 베풀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힘써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아야 하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불러야 합니다(사55:6). 그리고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경외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두려움의 하나님으로만 아는 것은 하나님을 너무 무겁게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기도 하시지만 멀리 계시기도 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때 시편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시34:9). 이 고백을 위하여 하나님은 지금도 공의와 정의로, 그러나 긍휼과 은총으로, 그리고 그것을 진실함과 성실함으로 행하시는 겁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