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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후서

220403설교 / 베드로전서1장1-2절 / 흩어진나그네에게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2.04.03|조회수492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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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1장 1-2절

흩어진 나그네에게

 

오늘부터 베드로가 쓴 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본 서신의 기록자는 베드로이지만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할 때(딤후3:16) 이 말씀의 참된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일차적으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말씀하신 내용이고, 나아가 히브리서에서 표현된 것처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히11:16)하는 마음으로 이 땅에서 사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럼 왜 베드로는 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가? 성경의 기록 목적과 동일합니다. 즉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 위해서입니다(딤후3:16).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권면하여 이 세상을 부인하고 세상을 멀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로 하여금 육체의 정욕과 모든 세상적인 장애물로부터 떠나 자유토록 하기 위해서, 그들의 온 마음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나라를 사모하도록 하기 위해서, 참된 인내와 소망이 그들을 뒷받침하여 신앙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용기와 인내로 신앙을 굳게 잡아 그들로 하여금 온갖 종류의 시험을 이기게 하기 위해서, 일생동안 이 길을 따르고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 이 편지를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칼빈주석).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기록한 이 말씀을 대할 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을 부인하되, 육체의 정욕과 모든 세상적인 장애물로부터 떠나 자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온 마음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나라를 사모해야 하되, 인내와 소망으로 우리의 신앙을 굳건하게 해야 합니다. 나아가 온갖 시험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일생동안 주의 말씀만을 붙들고 그 말씀으로 보증 된 길만 따르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1절과 2절의 말씀은 일반적인 편지의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발신자, 수신자, 그리고 수신자에게 보내는 인사의 내용입니다. 우선 발신자는 베드로인데, 1절 상반부에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가톨릭에서는 교황을 사도 베드로의 정통성을 잇는 후계자로 내세우고 있지만, 사도 베드로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보내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가 보내셨다는 것은 자신의 가르침이 자신의 주장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만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편지를 보내는 자는 베드로 자신이지만,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보냄을 받은 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성령의 감동으로,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너희에게 전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가톨릭이 아무리 사도 베드로의 정통성을 잇는 후계자로 교황을 내세운다 할지라도, 그리고 교황의 말이 곧 교회의 법이 되도록 한다 할지라도, 심지어 그렇게 교회의 법이 되게 할 때 교황의 말이 성경 위에 있는 것처럼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들의 주장일 뿐 사도 베드로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전혀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사도 베드로의 정통성을 잇는다고 말하려면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과 일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도 일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은 전하는 자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톨릭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일일이 다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만 한 마디로 그들의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가르침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결코 베드로의 정통성을 잇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가톨릭뿐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지 않는 가르침을 가르친다면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는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교회 역사 안에서 존중 받는 자라 할지라도 그의 가르침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다 일치되는 그런 가르침을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한 예로 칼빈은 고린도전서 3장에 있는 내용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건축하되, 그러나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인간적인 견해를 불어넣어 주기도 하고, 혹은 무지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한 순수성에서 빗나가 곁길로 가기도 한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어거스틴을 말하기도 합니다. 어거스틴 혹은 칼빈에 대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7장의 내용을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7장의 내용의 경우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가장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침 자체만 놓고 볼 때 그리스도의 말씀과 일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말씀이라 할 수 없고,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불법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을 받았다, 받지 않았다는 구원을 논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되는 그런 가르침을 가르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비상직분으로서 사도의 직분은 계시의 완성과 함께 더 이상 교회 안에 없는 직분이지만, 그래서 새로운 계시도 없지만,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냄을 받았다고 할 때 그의 말씀만을 전했다고 한다면, 모든 말씀 사역자 역시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가르침만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되지 않는 가르침에 대하여는 배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되는 가르침만 수용하여 거짓된 교회가 아니라 참된 교회로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가 편지를 써 보낼 때 수신자는 흩어진 나그네인데, 1절 하반부와 2절 상반부를 보시면 이렇게 소개합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지금 그들은 어디에 흩어져 있는가? 본도, 갈리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지역입니다. 오늘날 지도로 보자면 이스라엘 위에 레바논, 레바논 위에 시리아, 시리아 위에 터키가 있는데, 본도와 갈리다아와 갑바도기아 그리고 아시아와 비두니아 지역은 터키 지역에 위치합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라 이방 나라입니다.

그럼 이방 나라이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편지를 보낸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베드로전서 1장 18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이란 유대교 안에서 행하던 각종 규례와 의식에 대한 것인데, 이런 점에서 흩어진 나그네로 불리는 대상은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2도 보겠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방인 중에 있지만 그들 안에서 착한 행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목적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 흩어진 나그네의 일차적인 대상은 유대인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의 경우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 말씀도 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갈2:7-8) 베드로의 경우 할례자의 사도라는 대표성을 가지고 있고, 바울의 경우는 이방인들의 사도라는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흩어진 나그네라고 할 때 ‘흩어진’이라는 단어의 헬라어가 ‘diasporav’[디아스포라]인데,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서 벗어나 열국에 흩어져 살게 된 독특한 처지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흔히 사용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의 뜻을 보면 ‘흩어짐’이라는 뜻과 함께 ‘외국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가? 칼빈의 경우 갈라디아서 2장에서 할례자의 사도로 삼았다는 부분을 언급하면서 흩어진 나그네에 대하여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으로 보는 것에 대하여 크게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까지 설명하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경우도 로마와 고린도와 에베소 등에 거주하고 있던 회심한 이방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가운데서도 그들 가운데 있는 유대인들 즉 같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과 더불어 함께 한 몸을 이루고 있었던 회심한 유대인들을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매튜 풀 주석). 갈라디아서 2장에서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말하지만 그들과 함께 있던 유대인들을 배제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도 베드로 역시 할례자의 사도이지만 이방인을 배제시켰는가? 이방 땅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할 때 거기에 이방인이 제외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라 하는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는 내용도 나옵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라 분명 이방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4-35) 그리고 조금 뒤에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행10:45) 사도행전 8장에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행8:14)라는 말씀도 있고,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교회가 세워졌을 때 바나바를 보내기도 했습니다(행11:22). 이런 내용들은 비록 갈라디아서 2장에서 베드로를 할례자의 사도로 칭하고 있지만, 반드시 할례자에게만 복음을 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흩어진 나그네라 할 때 일차적으로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여기에 이방인을 배제했다고 할 수 있는가 할 때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흩어진 나그네’라 할 때 서두에서 말씀드렸지만 히브리서 11장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자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도성을 사모하는 자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자들에 대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히11:16,13).

 

오늘날 성도들의 경우 베드로가 편지를 쓸 당시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있지는 않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한 처소로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것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을 마련해 두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리고 그곳은 히브리서가 증거 하는 대로 하늘에 있되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이라고 말하는 그곳에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바로 그곳이 우리의 본향인 줄 알아야 합니다. 본향이 하늘에 있기 때문에 성도는 이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하늘에 계십니다. 때가 되면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금 내려오실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러 가신 거처는 결코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요14:2-3 참조).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동안 이런 말씀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8:20) 이미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조차 이곳은 나의 처소가 아니라고 알렸던 겁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처소가 이곳이 아니라면 몸 된 우리의 처소도 이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 무엇을 소망하며 살고 있습니까?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우리의 머리 둘 곳을 마련하기 위해서만 이 땅에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도 베드로가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한다고 할 때 일차적으로는 그 당시 유대인들, 나아가 이방인들을 포함한다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우리 그리고 다음 세대를 향해서도 하나님께서 친히 이 말씀을 주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흩어진 나그네입니다. 우리의 본향이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영원에 비해 굉장히 짧은 시기를 살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잠시 잠깐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의 몸 된 교회도 사실은 이 땅에서 머리 둘 곳이 없는 자들인 겁니다. 때문에 이 땅은 우리의 안식처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나그네로서 끊임없이 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그래서 이 땅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안식은 본향에 가기까지 미뤄져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베드로를 통해 당시 흩어진 나그네에게 이 말씀을 주심으로 참된 인내와 소망을 가지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으로 권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보시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하면서 우리말 성경에는 맨 뒤에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은 택하심은 받은 자들이 먼저 나오고, 흩어진 나그네가 바로 이어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한다는 게 가장 먼저 나옵니다. 수신자는 누구인가?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누군가? 흩어진 나그네란 것입니다.

여러분,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가운데 구원으로 선택되었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표현하는 것처럼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이때 선택은 반드시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으로부터 분리하여 하나님에게로 구별시키는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흩어진 나그네라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죽지 않는 이상 이 땅에서 살 수밖에 없지만, 그런 우리를 나그네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우리를 영원 전에 선택하셨기 때문이요, 그 결과 때가 되어 우리를 부르시되 세상으로부터 구별시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곧’이라고 말하는 표현 이후의 내용입니다. 우선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라고 표현하는데, 예지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 보면 예정론을 인정하지만 선택의 원인을 예지에 둠으로써 하나님의 선택이 마치 인간에게 어떤 원인을 두는 것처럼 표현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예지예정이라고 합니다. 지금 베드로전서 1장에서 선택 곧 예지라고 말할 때는 이런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성경은 어떤 경우에도 미리 아심, 다시 말해 예지를 원인과 조건으로 선택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지보다 작정이 앞선다고 말합니다. 예지는 속성이고 작정은 사역인데 어떻게 속성보다 사역이 앞설 수 있는가? 그러나 이때 작정은 하나님의 의지의 결과로 이해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예지보다 작정이 앞선다고 할 때 미리 아심보다 하나님의 의지가 앞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성에는 우선순위가 없다는 측면에서 예지 자체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선택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예지와 작정을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리 아신다고 할 때 알미니안주의자들처럼 사람에게 있는 어떤 것을 미리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하시는 바를 아신다는 측면에서 개혁자들은 작정보다 예지가 앞선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분명히 정리해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이 사람에게 있는 어떤 원인과 조건이 되도록 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 곧 하나님의 미리 아심은 우리 자신의 어떤 뜻과 조건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로마서에서 표현한 것처럼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설 뿐입니다(롬9:11). 하나님 선택 곧 그의 미리 아심은 오직 그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른 결과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선택, 이런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말하면서 너희는 흩어진 나그네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흩어진 나그네란 말의 배경에는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실제로 베드로 당시 교회를 향한 박해가 있었고 그 결과 흩어지게 되기도 했는데, 그런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은 우리의 본향이 아니기 때문에 궁극적인 의미에서 안식을 누릴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온갖 시험을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시험과 어려움 속에서 넘어지기도 합니다. 우리의 본성을 따라 말하자면 우리는 자주 넘어지는 자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사실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있는 어떤 원인과 조건을 보시고서 우리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겁니다.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으로만, 그리고 그것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흩어진 나그네로 있다 할지라도, 그래서 수없이 많은 시험과 어려움을 만난다 할지라도, 나아가 그런 가운데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그 뜻에 있어서는 어떤 경우에도 무효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위로가 있습니다.

 

더불어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선택이 어떤 목적을 가지는지에 대해서도 알리는데,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의 순종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2절에서는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라고도 말씀하는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선택하셨다, 때가 되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겁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1장 4절과 5절에서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진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순종의 주체는 누구인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하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여러분, 본래 우리의 본성은 진리에 대하여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맨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 때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고, 그런 만큼 지식과 의와 거룩과 같은 성령의 열매들이 인생의 기초와 틀이 되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불순종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런 우리를 진리에 순종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영원 전에 택하시고 때가 되어 효력 있게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의 주체가 누구냐?

보통 순종을 생각하면 흔히 내가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결심, 나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리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결코 인간의 결심이나 노력에 의해 결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령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하게 하시는 이 순종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흩어진 나그네로 어려움을 겪고 그 가운데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무엇만큼은 변함이 없는가? 하나님의 선택과 그 선택이 목적한 진리에 대한 순종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주시면서 말씀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과 함께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도록 성령의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도 베드로는 수신자인 흩어진 나그네가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하게 함으로 우리를 격려하고 위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어 말씀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라는 말씀은 죄 사함과 관련된 것으로 율법 아래에서 희생제물의 피를 뿌리는 것을 빗댄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할 때 순종함이라고 했고, 그 순종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순종하게 되는 근거는 어디 있는가?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따라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그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따라 순종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무엇까지 정하시고 역사 안에서 실행하셨는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기까지 내어놓으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가? 그래서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몸과 영혼을 가지고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야 했기 때문에 결코 죄는 없으셔야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겁니다. 바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람을 받게 하여 결국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따라 순종하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비록 장소로 하자면 어떤 자들은 본도에, 어떤 자들은 갈라디아에, 어떤 자들은 갑바도기아에, 어떤 자들은 아시아에, 어떤 자들은 비두니아에 흩어져 있지만, 심지어 우리의 본향이 이 땅에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고 있지만, 특히 흩어지게 된 배경 가운데 교회를 향한 박해가 있지만, 그래서 고난과 어려움과 환난 가운데 있지만, 무엇이 저들에게 진정한 위로와 소망의 내용인가? 너희는 이런 자라고 알리는 그것을 통해 위로와 소망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흩어진 나그네로 이 땅에서 산다고 할 때, 그래서 수없이 많은 시험과 어려움을 맞는다고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만한 어떤 원인과 조건, 공로가 있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음 가운데 내놓으셨습니다. 매튜 풀 주석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죄책으로부터 양심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가 적용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본래는 순종할 수 없는 우리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말미암아 순종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죄와의 갈등 가운데 있기에 하나님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하도록 하기까지 하는 역사를 보인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후서 1장 10절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까지 하시는데, 우리가 실족하는 것, 우리가 어떤 부분에 있어 넘어지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작정의 실행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 나아가 그 성취하신 바를 성령 하나님을 통해 적용하시는 데 있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바를 적용하는 데 있어 나에게 그것을 맡긴다면 어떻겠습니까? 누구도 예외 없이 구원과 상관없는 자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설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세우시는 분이 누구시냐?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과 분리할 수 없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보다 더 큰 위로와 소망은 없다는 뜻에서 수신자인 흩어진 나그네를 향해 너희는 이런 자라고 알리고 있는 겁니다.

우리의 위로와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움이 있고, 힘든 일들이 있을 때 우리는 당장 어려움 자체가 없어지는 게 위로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돈 문제가 생겨서 어려움을 당할 때 돈 문제가 해결되는 거기에 위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심지어 그 어려움으로 우리의 목숨이 위태롭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로 하셨다는 것, 그래서 우리 편이라는 사실 그것보다 더 큰 위로는 없다는 것입니다.

말라기서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우리의 형편을 보면, 우리가 살아 온 과정을 보면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고 있다면 어떻게 어렵고 힘들고 곤란한 일만 생기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들에 대하여 답변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말2:2-3) 정확하게 예정론으로 자신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난이 있기 때문에 고난을 없애주는 것으로 자신의 사랑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는 것을 통해 자신을 알리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사도 베드로의 권면, 더욱 힘써 우리를 부르신 그 부름과 우리를 택하신 그 선택을 굳게 해야 합니다.

 

끝으로 사도 베드로는 흩어진 나그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라는데, 2절 하반부에 보시면 “...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표현합니다. 은혜라는 말은 인간의 열심, 인간의 노력, 인간의 땀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값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값없이 제공하시는 것,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평강은 요한복음 14장 27절의 말씀처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는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비록 흩어진 나그네로 있지만, 그래서 시험과 어려움과 낙심 가운데 있지만, 너희가 어떤 자들인지 생각해 보라는 것과 함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들을 값없이 끊임없이 채워주시기를 바란다는 것이고, 나아가 시험과 어려움과 낙심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이 너희 마음 가운데 있기를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기를 바란다는 것은 그만큼 수신자인 흩어진 나그네로 있는 자들이 어려움 가운데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할례자의 사도라고 할 때 이방 땅에 세워진 교회들을 얼마나 방문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한번도 방문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거리상 자주 방문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난과 고난, 어려움 가운데 있는 주님의 몸 된 교회에게 무엇이 진정한 위로와 소망이 되느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너희를 택하셨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미리 아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너희 죄를 위하여 피 흘리게 하셨다고 알리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하도록 하신다고까지 알리십니다. 바로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너희 가운데 더욱 많아지길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역시 우리에게 닥치는 어떤 일들이 있든지 간에 우리를 부르시고 그 부름에 앞서 택하셨다고 할 때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마음을 붙들어 주시도록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할 때 그 문제가 해결되면 좋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허락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단지 해결되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모든 어려움과 곤란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은혜와 평강으로 붙들어 주시도록, 그래서 모든 어려움과 곤란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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