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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5설교 / 베드로전서2장9-12절 / 택하신족속이요왕같은제사장이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2.06.05|조회수1,224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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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2장 9-12절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

 

우리의 거듭남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처럼 거듭난 자가 자라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 말씀에 대하여 순전하고 신령한 젖으로 비유하면서 갓난아기가 엄마의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모할 것을 권면합니다. 무엇보다 이 말씀을 통해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길 원하기에 계속해서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것을 권합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시기에 그에게로 계속해서 나아가라고 권하는가?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여 보배로운 산 돌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집을 위한 돌로 그가 터가 되어 그 위에 안전한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또한 모퉁잇돌로 건물을 지탱할 뿐만 아니라 각 부분들을 연결하는 그런 역할을 위한 돌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보배로운 산 돌을 사람들이 어떻게 했는가? 건축자들에게는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그 돌을 버렸습니다. 버렸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의 말씀에 대하여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도, 심지어 신약 시대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도 동일하게 나타났던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의 경우는 그의 복음서 1장에서부터 이렇게 증거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11)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는 겁니다. 그러나 모두가 영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이어 이렇게 증거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이들이 누군가? 오늘 본문에서는 9절의 내용으로 표현되고 있는 자들입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로 여겼지만, 너희는 어떤 자들인지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방금 읽어드린 요한복음 1장의 내용으로 하자면 너희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이다.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다. 그것을 사도 베드로는 오늘 본문 9절 상반부에서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여긴 것이 아니라 보배로운 산 돌로 여긴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할 때 사도 베드로는 택하신 족속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8절 마지막 부분에서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는 말씀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영원 전에 누구는 선택하신 자로, 누구는 버리시는 자로 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지예정의 교리를 믿는 자들처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지 아니면 믿지 않을지를 미리 보시고서 정하신 것이 아니라,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서만 그렇게 정하셨습니다(롬9:11 참조). 한 마디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으로 택하신 것입니다.

물론 구약에서는 맨 처음 수없이 많은 족속들 중에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족속을 택하셨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그들 모두가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처럼 여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셨지만 택하신 자들을 버릴 수도 있는가? 여기에 대한 성경의 답은 적어도 궁극적인 의미에서 볼 때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베드로 역시 이 사실을 베드로전서 1장 5절을 통해 증거 하기도 했습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절에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는 자들은 결국 7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된 것인가? 언제 말씀드린 바 있지만 선택이라는 단어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선택하셨다는 의미가 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버리신 자들과는 달리 선택하신 자들이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가 하나님의 선택 된 민족으로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로마서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은 아닌 것입니다(롬9:6).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택하신 족속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이지만 그들 모두가 알곡이 아니라 거기에는 가라지도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선택을 말할 때는 주로 알곡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하지만 모든 선택이 그렇게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 베드로가 택하신 족속이라고 말할 때는 8절 마지막 부분과는 대조적인 의미에서 사용합니다. 즉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란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선택된 자들. 때문에 구약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처럼 버리실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한 번 택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면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버리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미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5절에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 것을 권했습니다. 여기서는 거룩한 제사장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설명합니다. 제사장 직분을 가진 자로만 있는 게 아니라 왕 직분도 가진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대해 들어보셨을 텐데,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 직분과 함께 제사장 직분, 왕 직분을 실행하십니다. 선지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심으로 그 직분을 실행하십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4문).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려고 자신을 단번에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 그리고 우리를 위해 지속적으로 중보하심으로 그 직분을 실행하십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5문).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우리를 자신에게 복종시키시고, 우리를 다스리시고 보호하시고, 그와 우리의 모든 대적들을 제어하시고 정복하시므로 그 직분을 실행하십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6문).

그런데 그런 분이 우리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 사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터요 모퉁이 돌로 표현하면서 우리는 그의 신령한 집이라고 설명합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교회를 그의 몸으로 비유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하는데, 거기 보면 이런 표현까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4-5)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선지자요, 우리의 제사장이요, 우리의 왕이시지만 우리 역시 그분과 함께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분을 행하는 자로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 예로 요한계시록 1장 5절 하반부와 6절을 보시면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는데,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하셨는가?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나라와 제사장이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은 오늘 본문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표현과 동일합니다. 요한계시록 5장 10절에도 보면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 된 백성은 어떤 자들인가? 어떤 자로 세우고자 하시는가? 구약에서처럼 신약 시대에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너희는 영적으로 제사장 직분을 가진 자요 너희는 영적으로 왕의 직분을 가진 자라고 알리고 있는 겁니다. 구약 시대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처럼 성별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할 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너희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할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너희는 영적인 왕 직분을 가진 자로 앞서 요한계시록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땅에서 왕 노릇하는 자임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에서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여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0장에서는 좀 더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계20:6) 여기서 첫째 부활은 거듭남, 중생을 의미합니다. 이들에게는 둘째 사망, 즉 영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지옥 형벌의 죽음을 겪지 않게 되는데, 그런 자들이 이 땅에서 살면서 어떤 자들로 있는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한다고 말합니다. 누구와 더불어 드리고 다스려야 하는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자신을 드리고 모든 것에 대하여 다스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사도 베드로는 거룩한 나라라고 설명합니다. 많은 나라들이 있지만 그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구별하여 세우신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방의 부정한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기 위해 구별하셨다는 것이요,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따르도록 하기 위해 구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어떤 자들인가? 거룩한 나라로 이방의 부정한 것들로부터 분리시켜 하나님의 법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구별시킨 자들이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설명합니다. 소유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위해 어떤 대가를 지불하여 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로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모든 만물을 하나님께서 다 창조하셨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나 섭리 안에서 타락이 있다는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사단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유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다시금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신 것은 타락하게 만든 원인, 바로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즉 죄 값을 지불하셨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지불하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먼저 너희가 어떤 자들인지를 알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다,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너희는 거룩한 나라다, 너희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리시는 것이 왜 너희를 택하셨는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는가?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부르셨는가? 다음의 목적을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9절 하반부를 보시면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즉 택하신 목적, 영적인 직분을 주신 목적, 구별하시고 그의 소유로 삼으신 목적이 무엇인가?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기 위해서란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어떤 자들이었는가? 어두움 가운데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고 말씀하는 것처럼 철저히 무지한 자요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로 하여금 불러내어 들어가게 하신 곳이 있는데, 거기가 어딘가?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의 말씀처럼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라고 말할 수 있는 자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경우는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길에서 빛을 찾을 때 주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셨다면 그것은 하나의 은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무지의 구렁텅이와 흑암의 깊은 골짜기에서 불러내신 것은 더 큰 은총이 아닐 수 없다.” 한 마디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들어간 것은 은혜 위의 은혜의 역사, 은혜의 과잉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란 겁니다. 그래서 기이하다, 경이롭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이런 기이하고 경이로운 일을 경함했기 때문에 너희는 너희를 그렇게 인도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덕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지혜와 선하심과 권능과 의와 그 밖의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칼빈). 좀 더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속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우리를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내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9절 상반부 내용처럼 우리를 택하신 목적, 영적인 직분을 주신 목적, 우리를 구별하시고 그의 소유로 삼으신 목적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의 속성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서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알리고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를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10절은 방금 설명한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을 좀 더 확증하기 위한 호세아서의 인용 구절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호세아의 경우 주로 북이스라엘 백성을 대상으로 사역하던 선지자였고, 그런 점에서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선택이라는 단어에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그들 모두가 참 이스라엘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참된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졌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습니다. 오히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고, 자기 소견에 옳다고 여기는 것을 지지하는 선지자들을 더욱 반겼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하나님은 더 이상 저들의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로루하마’, ‘로암미’입니다. ‘로’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부정적인 뜻으로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루하마’는 긍휼히 여긴다는 뜻이고 ‘암미’는 내 백성이라는 뜻인데, 거기에 ‘로’라는 부정어가 들어가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 내 백성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호세아서 1장에서 언급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바로 동일한 장에서 하나님은 방금 말씀하신 것을 바꾸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호1:10-2:1)

얼핏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변덕스러운 분인 것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변덕스러운 분이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하신 백성에게 더 이상 긍휼을 베풀지 않겠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영원 전에 작정하시고 예정하신 내용이 변경된 것이 아닙니다. 불변하신 하나님의 뜻은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선택에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에 속한 자로 있게 하셨지만 그것이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던 겁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 속한 자로 있게 하셨지만 더 이상 긍휼을 베풀지 않겠다,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기 때문이요,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보배로운 산 돌이시지만 저들은 그 돌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로 여겼기 때문에 로루하마, 로암미라고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때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까지 오래 참으셨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한번 잘못한 것 때문에 곧바로 로루하마, 로암미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잘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잘못에 대하여 참된 선지자를 통해 회개할 것을 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로루하마, 로암미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모두에 대하여 로루하마, 로암미라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남은 자들, 혈통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일 뿐만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로루하마, 로암미에서 루하마, 암미라 부르십니다. 긍휼을 베풀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긍휼을 베풀겠다고 하셨고, 더 이상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다시금 내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던 겁니다. 그럼 그들은 죄를 짓지 않았는가? 그들도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 같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 자들과 동일한 결과를 맛보지 않은 것은 그들이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기 때문에 긍휼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지금 사도 베드로가 이런 호세아서를 인용한 것은 단순히 북이스라엘 백성을 대상으로만 염두 해 두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미 호세아서 자체를 통해서도 북이스라엘, 나아가 남유다, 더 나아가서는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되는 내용을 보여주는데, 사도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여기는 것이 아니라 보배로운 산 돌로 여기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할 때 본래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래는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긍휼을 얻은 자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어 11절과 12절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좀 더 상세히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도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이렇게 밝힙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이것은 사도 베드로가 맨 처음부터 수신자를 향해 말했던 내용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거류민과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비록 지상 나라에 살지만 지상에 있는 나라가 자신의 본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히브리서 11장에서 증거 하고 있는 것처럼 하늘에 있으며, 때문에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가 바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마땅한가? 사도 베드로는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권합니다. 여기 보면 영혼과 육체가 대조되고 있지만 영혼은 깨끗한 반면 육체는 더럽다는 의미에서의 대조는 아닙니다. 이때 영혼은 거듭난 자로서 영적으로 죽었다가 다시금 살아난 자를 의미합니다. 반면 육체는 비록 거듭난 자이지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책이 제거되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부패성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이 부패한 본성은 계속해서 거듭난 자로 하여금 거슬러 싸우게 만듭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정욕을 따라 살도록 부추깁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는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대조하지 않고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시는 성령과 육체를 대조하지만 의미는 같습니다. 바로 이 육체의 소욕을,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육체의 소욕, 육체의 정욕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갈라디아서 5장 19절 이하 21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런 것들을 제어하라는 것입니다.

9절에서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다고 할 때 육체의 정욕은 다 어두운 데 있는 자들이 맺는 열매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어떤 자들인가? 어두운 데 있는 자가 아니라 이제는 빛 가운데 있는 자요, 너희가 세상의 빛이란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어두움 가운데서 맺을 수 있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어하라고 합니다. 물론 제어하라는 것은 여전히 우리 안에 부패한 본성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 행하던 습관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를 거룩한 나라로 부르셨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이방의 부정한 것들로부터 분리시켜 하나님께 드리도록 구별하셨다는 것이요, 나아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구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 본성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제어하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사도 베드로는 제어할 것만 말하지 않고 행해야 할 것까지 말하는데, 이렇게 권합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지라. 이것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22절과 23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는 내용과 같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럼 왜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가?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마태복음 5장 16의 말씀과 같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오늘 본문 9절에서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한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선한 행실이란 것이고, 그것은 곧 성령의 열매란 것입니다. 그것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조차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거류민과 나그네의 삶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오시는 날에’라고 할 때 그 날이 언제인가에 대한 의견이 나뉩니다. 어떤 이들은 재림의 날, 그 책임을 물으시는 날로 이해합니다만 너희 선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 불신자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영광을 돌린다는 그런 의미로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여겨집니다. 하나님이 불신자를 통해서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를 알리심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앞에서 불신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여기에 대해 “불신자들이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돌아와 순종함으로써 그에게 영광을 돌리게 된다... 곧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거룩하고 정직한 생활을 통해서 방황하는 자들을 바른 길로 되돌아오도록 준비시키신다는 뜻으로 본다.”고 설명하는데, 쉽게 말해 불신자들이 회개하는 날로 이해를 합니다. 하나님이 불신자들을 복음으로 말미암아 부르시는 은혜로운 오심의 날에 그들도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데, 그 일을 위하여 우리가 저들 앞에 어떤 자로 있어야 하는가? 모든 행실에 있어서 선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에서 표현한 것처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그리고 거듭난 영혼이 원하는 바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로마서 7장에서는 어떻게까지 표현하는가?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1-24) 그만큼 우리는 연약한 존재로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우리의 거듭남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구원의 완성까지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셨는가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 곧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기 위해서, 나아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영혼을, 우리의 육체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수 있도록, 또한 우리의 모든 행실이 선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이고, 실제로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도록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결코 거듭남, 다시 말해 중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영광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 10절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생명을 얻은 것으로만 안심할 것이 아니라 주께서 오신 목적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 것이듯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그 생명이 더 풍성해 지도록 우리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로 사는 자의 삶의 목적이요, 방향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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