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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8설교 / 베드로전서5장5-11절 / 너희염려를다주께맡기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2.08.28|조회수245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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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5장 5-11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베드로전서 5장으로 와서 사도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권하는데, 먼저 자신을 소개하면서 나도 역시 너희와 함께 장로 된 자로,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 나아가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 소개합니다. 사도로 부름 받았지만 너희와 다를 바 없이 가르치는 장로, 다시 말해 목사로 부름 받았다는 것이고, 목사로 부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증거 할 뿐만 아니라 그 고난의 길을 자신도 따르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고난을 따르는 자로 있다고 할 때 고난에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 있다는 것도 말하는데, 자신이 장로 된 자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하는 자로 있다면 함께 장로 된 자들 역시 동일한 길을 걸어가는 자임을 자신을 소개하면서 알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부름 받은 자들만이 아니라 사실은 주의 몸 된 모든 교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1장에서 4장까지 주의 몸 된 교회를 향해 권면하면서 말했던 핵심 가운데 하나가 고난과 영광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말씀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주의 몸 된 교회 전체가 고난과 영광에 참여할 자로 있지만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 사실을 주지시킨다 할 수 있으며, 그런 차원에서 사도 베드로는 자신을 너희와 함께 장로 된 자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 소개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고 난 뒤 장로들에게 권하는데,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라,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라,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이렇게 할 때 장차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장로 된 자만이 아니라 이런 직분을 받지 않은 자들 역시 억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할 때,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않고 기꺼이 할 때,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본을 보이는 자세로 할 때 고난 이후 영광을 받겠지만 장로 된 자들은 가르치는 자요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배우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할 자들이기 때문에 이런 권면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권면에 대하여 격려한다는 차원에서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 베드로는 다시금 교회를 향하여 권면하는데, 오늘 본문 5절에 보시면 ‘젊은 자들아’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장로라는 말이 나이가 많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베드로전서 5장에서는 직분으로서의 장로, 특별히 가르치는 자들과 관련해서 말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여기서 젊은 자들은 가르치는 자로부터 가르침 받는 자들에 대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장로들에게 먼저 권면하고 난 뒤 5절에서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라고 말하기 때문에 나이가 많다는 의미와 대조적인 의미에서 젊다는 말을 사용했다기보다는 직분자인 장로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라는 의미에서, 실제 나이와 상관없이 장로와 대조적인 의미에서 젊은 자들로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혹은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단 젊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주장이 강한 시기입니다. 시편 119편에서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라고 말할 때 청년 시기는 가장 고삐 풀릴 수 있는 때이고, 그렇기 때문에 한 시라도 빨리 말씀으로 살아야 할 중요한 시기입니다. 본문에서 젊은 자라고 말할 때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고삐 풀릴 수 있는 그런 시기, 권위와 질서에 대하여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그런 시기가 젊은 때이고, 바로 그들에게 특별히 무엇을 요구하는가?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모든 가르침 받는 자들이 정당한 가르침에 대하여 순종해야 하지만, 특별히 젊은 자들은 더더욱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젊은이들만 권위와 질서에 대하여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던 그런 본성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아담과 하와는 피조물인데, 피조물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질서를 파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이런 본성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장 활발할 때가 언제냐? 항상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주로 청년의 때요, 젊을 때라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사도 베드로가 1차적으로 권면하는 대상은 젊은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들에게 좀 더 특별한 권면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장로들에게 특별한 권면을 하고 있고, 여기서는 젊은 자들에게 특별한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로들에게 권면하면서도 그 권면이 오늘날 모든 성도에게까지 적용할 수 있는 것처럼 젊은 자들에게 권면하는 것 역시 오늘날 모든 성도에게까지 적용할 수 있다는 것도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종합적으로 이해하자면 ‘젊은 자들아’라고 부르고 있지만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라고 할 때 장로들로부터 가르침 받는 모든 자들,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젊은 자들은 더더욱 장로들에게 순종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장로들이 가르치는 바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 사역을 위해 그들을 부르시고 세우셨다는 측면에서 모든 성도들은 자신들을 가르치는 장로들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왜 남편들이 아내를 귀하게 여겨야 하는가?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부부와의 관계도 그렇다면 장로와 성도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성도들이 장로들에게 순종해야 하는가? 장로들이 가르치는 바가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그 말씀이 그들에게 막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정당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면 그 가르침에 있어 막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장로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들을 존경해야 하고, 그들이 가르치는 바에 대하여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이어 사도 베드로는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권합니다. 직분으로 하자면 장로는 가르치는 자이고 사도 베드로가 ‘젊은 자’라고 말하는 대상은 가르침을 받는 자입니다. 한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는 자이고 다른 한쪽은 그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런 관계이기 때문에 한쪽만 겸손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겸손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왜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 받는 자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다스리고 다스림 받는 자의 관계 속에서 겸손보다는 교만하기 쉬운 입장이 가르치는 자, 다스리는 자에게 있습니다. 소위 권위와 질서로 볼 때 윗사람이 교만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합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권위와 질서 상 윗사람으로 세우셨다 할지라도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특히 가르치고 다스린다고 할 때 가르치고 다스리도록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무엇으로 가르치고 다스리도록 하시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다스리도록 하신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장로들은 양 무리의 주인이 아니란 것입니다.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교만한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까? 그러나 아담과 하와조차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바가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런 본성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안에는 교만하고자 하는 본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달리 표현하면 겸손으로 옷을 입으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로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로라고 해서 항상 성도들보다 한 발 앞선 자로만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성도가 앞선 자로 있을 때도 있습니다. 이때 성도는 장로보다 낫다는 것 때문에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좀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의 실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나의 나 됨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내 실력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나의 나 됨이 있는데 거기에 어떻게 교만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하고 있지만 진리의 순서로 볼 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앞섭니다. 은혜가 앞서고 그 은혜를 분명히 깨닫는 자가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입장에서는 은혜 위에 은혜를 베풀고자 하시는 바가 있는 것이고, 은혜를 받는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법이 교만한 자세가 아니라 겸손한 자세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 앞에서 더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따라 정당하게 안다면 어느 누구도 교만할 수 없습니다.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라면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나는 존재 자체가 부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은혜를 안다면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해서 사도 베드로는 6절에서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합니다. 겸손하되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즉 우리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있는 자임을 먼저 알라는 것입니다. 가르치고 다스리는 자든, 아니면 가르침을 받고 다스림을 받는 자든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가 좀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주시고,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런 진리를 따라서만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지만 거기에 인간의 자리를 마련해 두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 역사 안에서 계속해서 나왔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이렇게 가르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있다는 것은 그분만이 주체로 계시다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있다는 것을 알고 겸손할 때 하나님은 때가 되면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높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겸손한 자를 높여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때까지 우리는 낮아지고 또 낮아지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낮아짐은 높아지기 위한 낮아짐이어서는 안 됩니다. 겸손하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우리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하나로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위에 계시다는 사실 하나로 겸손이 우리의 체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를 높이시고자 하시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 우리를 부르셨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요, 그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 영광을 위하여 고난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시고자 하시지만 지금 당장 높이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4절에서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라고 말하는 것처럼 마지막 때가 우리를 완전히 높이시는 때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의 손 아래에서,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에서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을 거슬러 겸손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교만하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을 거슬러 겸손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안에도 보면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고, 이것에 대하여 제자들이 시기하기도 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런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런 겸손의 자세와 관련해 7절에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특히 염려라고 할 때 어떤 염려든 예외일 수 없지만 앞선 내용 속에서도 말했고 오늘 본문 9절을 통해서도 말하는 고난과 관련된 그런 염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염려에 대하여 다 주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고난 때문에 염려할 만한 일들이 우리 인생 가운데 있다는 것이고, 그럴 때마다 다 주께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너희를 돌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6절에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 능력에 있어 제한이 없으신 분, 그래서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너희를 돌보고 있기 때문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하는 겁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양 무리로,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목자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목자장이 자신의 양 무리를 맡기실 때 그들을 목자라고도 표현합니다. 목자의 경우는 양 무리를 잘 돌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목자의 경우는 양 무리를 잘 먹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목자의 경우는 양 무리를 잘 다스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잃은 양을 목자장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찾으십니다. 그리고 돌보십니다. 어떤 사자가 오더라도 자기 양을 잃어버리시는 바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지금 사도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권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겸손은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의 나 됨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을 인정하는 자만이 진정으로 겸손한 자입니다. 이렇게 겸손한 자들은 어떤 일이든 다 주께 맡기는 자로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도 하나님께 미루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주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겸손한 자는 모든 일에 대하여 주를 의지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고난으로 말미암은 염려가 있다 하더라도 그런 염려 가운데서도 주를 의지하는 자, 그가 겸손한 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도의 인생 가운데 고난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해서만 영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영광을 주시고자 하시는데 그냥 주시는 게 아니라 반드시 고난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런 고난이 우리에게 염려로 있게 되기도 하지만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분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주님 외에 우리를 돌볼 수 있는 자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고 맡기는 것에 대하여 우리를 매우 주의를 해야 합니다. 한 예로 시편 146편에서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시146:3-4)고 말씀합니다. 동일하게 이사야 2장에서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2:22)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인생만이 아니라 인생 가운데 있는 피조물의 어떤 것도 의지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은 결코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창조 명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서 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누구만 의지해야 하는가? 창조주 하나님만입니다.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만 우리의 의지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방금 시편 146편을 언급했지만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5)

 

이처럼 우리의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길 수 있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돌보시기 때문인데, 오늘 본문 8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가 있다는 것도 알립니다. 그래서 권면하기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7절에서도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했지만 마지막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대적 마귀는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삼키기 위해서 찾고 또 찾습니다. 때문에 근신하라, 깨어 있으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7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주께서 너희를 돌보신다고 말합니다. 이때 돌보신다는 것은 견인의 은총까지 생각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8절에서 너희 대적 마귀에 대해여 언급하고 있지만 그런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마귀에 의해 삼켜지는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시적으로 삼켜지는 것처럼 보이는 일은 있겠지만 마귀에게 완전히 삼켜지는 일은 없습니다. 요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가 있었지만 때가 되었을 때 다시금 뱉은 것처럼 마귀를 통해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능력 아래 있는 이상 우리의 구원이 취소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 8절은 어떻게 권면합니까?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에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기면 내 쪽에서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것처럼 여길 수 있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돌보시기 때문에 너희는 더욱 근신하라, 깨어 있으라고 말씀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작정을 말하고 작정의 실행으로써 섭리를 말한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섭리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피조물에 매이지도 않기 때문에 그가 기뻐하실 때는 얼마든지 방편들 없이, 방편들 너무, 방편들을 거슬러 자유롭게 일하실 수 있습니다. 반드시 해가 있어야지만 빛을 비추시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해 없이도 빛을 비추신 역사가 맨 처음 창조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러나 통상적으로는 그의 섭리 안에서 방편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5장 3항 참조). 그리고 그 방편에는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들과 그것들의 모든 행동들, 그리고 그것들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사용하십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5장 1항 참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방식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방식들이 있겠지만 우리로 하여금 근신하고 깨어 있는 방식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십니다. 하나님이 돌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될 의무조차 하지 않는 그것을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근신하고 깨어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대적 마귀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또한 그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기 위해 지금도 역사하는 줄 알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근신하도록, 깨어 있도록 하셔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상적인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어떤 경우에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애쓸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예전에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어떤 한 수도사의 자세와 다를 바 없습니다. 즉 택한 백성의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 것, 또한 작정하신 바 변경되지 않는다는 것은 맞지만 그것 때문에 근신하지 않는 것, 깨어 있지 않는 것은 진리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그런 자세는 분명 틀렸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근신해야 한다,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가 근신한 만큼, 우리가 깨어 있는 만큼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욱 근신할 수 있도록, 더욱 깨어 있도록 하시는 방식으로 일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섭리 안에서 제1원인, 제2원인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1원인 없는 2원인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칼빈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원인임을 말하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을 원인으로 두지 않는 곳에는 언제나 인간의 공로가 자리할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근신하라, 깨어라는 말씀을 통해서도 근신 자체, 깨어 있는 것 자체에 원인을 두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오히려 누가복음 17장에서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는 말을 통해 근신이 공로가 되고, 깨어 있는 것이 공로가 아니라, 만약 그것을 공로로 여긴다면 교만한 것인데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가 근신하고 깨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때도 겸손으로 허리를 동여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성도가 나그네로 이 땅에서 살 때 우리를 대적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고, 우리를 대적하는 존재가 영적인 존재라는 것이며, 할 수만 있다면 우리를 집어 삼키기 위해 지금도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신해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주의 말씀을 따라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럼 근신하고 깨어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6:11-13) 우리의 싸움의 성격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통치자들, 권세자들,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한 것입니다.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무엇으로 무장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해야 합니다. 즉 근신하고 깨어 있는 삶이란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이후 계속되는데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9절을 보시면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때 믿음은 믿는 나에게 원인을 두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원인을 두는 것입니다. 믿음을 굳건하게 하라는 것은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왜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하는가? 왜 하나님만을 믿으라고 말하는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이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하라는 것입니다.

8절에서 마귀를 우는 사자와 같다고 비유하면서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자의 입도 막으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졌을 때 하나님은 사자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비록 마귀를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로 표현하기도 하지만(엡2:2) 그가 하나님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도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욥기 1장에서 잘 증거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한계를 정하시는 범위 안에서만 그의 뜻을 펼칠 수 있을 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는 사자처럼 두루 삼킬 자를 찾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고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마귀의 한계일 뿐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있다 할지라도 그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일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이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이것이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나는데(롬10:17 참조) 말씀 사역자들, 앞서 말한 장로들에 대하여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하게 증거 되고 있다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오늘 본문 9절 나머지 부분을 보면 마귀와 싸우고 있는 우리에게 작은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마귀와의 싸움, 이런 영적인 싸움에 대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런 고난을 나만 받는 게 아니라 세상에 있는 너희 모든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간혹 왜 이런 일을 나만 겪느냐는 것에 대하여 원망합니다. 엘리야가 850명의 거짓 선지자와 싸우고 난 뒤 자신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이세벨로부터 도망하면서 마치 자기만 남은 것처럼 말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에게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을 남겨두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만 홀로 믿음 가운데 서 있는 자가 아니라 내가 너와 같은 자롤 남겨둔다는 것입니다. 내가 남겨둔다. 그 말은 너가 싸운 것도 너 홀로 싸운 것이 아니라 내가 너와 함께 싸웠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믿음은 엘리야를 보호하신 하나님께 근거를 둔 것이지 자신에게 믿음의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우리만 고난 받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으로 부리신다고 할 때 고난은 필수라고 말했지만 성도 중 어느 누구도 고난 받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래도 저 사람은 나보다 낫지!”라고 말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칠천을 남겨두신다는 그 사실을 아직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런 고난에 대하여 복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고난에 대하여 복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 자세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나만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믿음의 형제들이 동일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주의 몸 된 교회가 이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적 마귀는 지금도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있다는 것은 영광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영광을 누가 우리에게 주시는가?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10절과 11절의 내용으로 더욱 분명한 위로를 주는데,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우선 하나님을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빼 버리면 나의 나 됨이 없습니다. 나란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때문에 은혜의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나란 존재, 우리란 존재가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합니다. 나를 나 되게 하시는 것, 우리를 우리 되게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가 할 때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가게 하실 목적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영원한 영광으로 부르시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셨는데, 그분이 누구시냐?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는 현재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도 나타나는데, 비록 하나님의 뜻 안에서 고난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신다고 설명합니다. 9절에서 권면하기로는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즉 마귀를 대적하라고 권하였지만, 그 일의 실제적인 주체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은혜의 하나님인 것이고, 이 하나님께 우리는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겁니다. 심지어 권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기를 바라면서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게만 모든 것이 달려 있고 그것을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너희를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셨다는 것이고, 단지 부르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을 목적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실패할 일이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영광을 목적으로 부르시면서 잠깐의 고난을 허락하시는데, 왜 고난을 허락하시는가? 10절 말씀에서 말하는 것처럼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기 위함이요, 굳건하게 하시기 위함이요,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이고,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그만이 나의 의지의 대상임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젊은 자들아’라고 하면서 겸손하라, 염려를 주께 맡기라,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고 권하고 있지만, 그리고 그런 권면을 통해 겸손해야 하고, 염려를 주께 맡겨야 하고,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하지만, 은혜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지 아니하시면 우리가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견인은 내가 견디고 인내해야 하는 외형으로 있지만 그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견디고 인내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런 견인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비록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만드심으로 은혜를 베푸십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만 권능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모든 염려를 맡길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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