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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후서

221120설교 / 베드로후서3장8-13절 / 주의날이도둑같이오리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2.11.20|조회수903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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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38-13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라

 

베드로후서 2장에서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경고와 경계에 대해 말씀했지만, 베드로후서 3장은 특별히 말세에 그리스도의 강림을 부인하는 자들에 대하여 경고하고 경계합니다. 이들은 어떤 자들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되 무엇보다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것에 대하여 조롱하는 자들입니다. 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다시 말해 죽은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대로 있는데, 무엇을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것이라고 말하는가?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저들에 대하여서도 정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강림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의 심판도 받아들여야 하며, 그리스도의 심판이 있다고 할 때는 오늘 본문을 통해 권면하는 것처럼 자신을 살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주의 오실 날을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벧후3:11-12). 그러나 그런 삶이 싫기 때문에, 오히려 정욕대로 행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강림을 부인하는 것은 아닌가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런 자들 역시 율법에서 자유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에 매여 살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자들일 가능성도 매우 높습니다.

어쨌든 이런 저들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대로 있는 게 아님을,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셔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임을 말합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창조에 대하여 말하되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창세기 11절의 경우 하늘과 땅 안에서 모든 만물을 말하지만 사도 베드로는 물로 가득한 세상에서 하늘이 드러나게 하시고 궁창 아래 물을 한 곳으로 모아 뭍을 드러내시면서 모인 물을 바다로 칭하신 둘째 날과 셋째 날을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이 중요한데, 이렇게 시작된 지구의 역사 속에서 노아 시대 사람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홍수 심판을 행하신 바가 있음을 알립니다. 이 역시 물로 심판하셨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심판하신 것이 더 중요합니다. 물은 창조 때나 심판 때나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창조하시고 그의 말씀으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대대적인 심판이 노아 시대 때만 있었던 것으로 끝이 아니라 장차 또 있을 것인데, 그때가 언제냐?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물이 아니라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이든 불이든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저들이 말하는 것처럼 주의 강림이 늦어지는 것처럼 보임으로 약속하신 바가 성취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오늘 본문 8절과 9절의 증거처럼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는 대상, 바로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즉 택자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영원 전에 심판의 때까지 정하셨지만 그 시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볼 때 주의 강림이 늦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사도 베드로는 하늘과 땅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처럼 동일한 말씀으로 하늘과 땅은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되고 있는 것이고,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 역시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을 받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주의 강림이 왜 늦어지는 것처럼 보이는지에 대하여 설명하는데, 먼저 하나님의 시간 개념이 우리와 다르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시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지난 시간에 잠시 언급했지만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시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시간이 창조되기 전에도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으로서 아니 계신 적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시간을 창조하셨을 때 시간 안에서 역사하시지만 반드시 시간 안에만 계시느냐? 시간 밖에서, 다시 말해 시간을 초월해서 계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모든 역사를 다 아십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작정하셨기 때문에 모르실 수 없지만 하나님께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현재로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시간에 예속이 되어 과거와 현재, 미래가 있고 또 길고 짧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면서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말함으로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권합니다.

조롱하는 자들의 경우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조롱하지만, 다시 말해 약속하신 바가 너무 늦어지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주의 강림 자체를 부인하는 것으로 조롱하지만 하나님의 시간대는 우리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것이 대략 2,000년 전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역사와 함께 생각해 보자면 창조 이후 굉장히 긴 시간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가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할 때 하나님께는 그 긴 시간의 역사가 하루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순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간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초월해 계시며, 과거 미래가 없는 언제나 오늘로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강림이 더딘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을 우리 입장에 맞춰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예비해 두신 나라는 영원한 나라인데, 영원에 비해 우리가 길다고 말하는 이 시간대는 사실 순간일 뿐입니다. 우리가 시간의 범주 안에 있기 때문에 길다, 짧다고 말하지만 영원으로 들어가면 우리의 삶은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원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은 모세조차 시편에서 어떤 고백을 하느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90:10) 간혹 우리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10대 때는 시간이 10km로 가지만, 20대 때는 20km, 30대 때는 30km, 40대와 50대 때는 40, 50km로 가는 것 같다. 시간 자체는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시간 안에서도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원이라는 세계에서 우리의 삶은 어떻게 느껴지겠습니까? 단지 느낌이 아니라 순간이라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 시간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일 수도 있고, 천 년이 하루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5절에서 조롱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을 일부러 잊으려 한다고 말함으로 심판 역시 일부러, 고의로 잊으려고 하는 자들과 달리 너희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자로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시간 개념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본문의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말할 때 6일 동안 지으신 것을 하루가 천 년 같다는 것으로 6,000년 동안 지으셨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으시지만 바로 그 시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밤이 되고 낮이 되었다고 말함으로 하루라고 할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그 하루를 말하는 것이지, 사도 베드로가 말한 이런 내용으로 적용하는 것은 결코 바른 해석으로 있지 못합니다.

 

어쨌든 이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마치 미루시는 것처럼 하는 이유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택하신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9절을 보시면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우선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의 약속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앞에서 언급된 조롱하는 자들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3-4).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여기에는 조롱하는 자들의 말을 듣고 주의 강림에 대하여 왜 이렇게 더디 오시는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약속하신 바에 대하여 굳건히 믿기보다는 믿음이 흔들리는 자들이 있을 수 있는데, 사도 베드로는 조롱하는 자들의 말에 대하여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즉 저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더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딘 것처럼 보이는 거기에는 주께서 너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바가 있기 때문이고 말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택자의 구원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모든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시작부터 마지막 심판까지를 다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작정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죄에 대한 작정도 있었고, 죄에서 구원하시되 구원의 방편으로써 그리스도와 구원의 서정까지도 작정하셨습니다. 심지어 구원의 방편으로써 그리스도를 작정하셨다고 할 때 그가 언제 오시는지 그리고 언제 죽으시는지, 언제 부활하시는지, 언제 승천하시고 언제 재림하시는지에 대해서도 영원 전에 다 작정해 놓으셨습니다. 이런 작정의 실행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매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습니다(4:4). 뿐만 아니라 공생애를 사시다가 때가 되어 죽으셨는데, 때가 되지 않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때가 되지 않았다고 알리기도 하셨습니다(7:8). 때가 되었을 때는 인자가 자기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12:23, 17:1). 부활도 마찬가지요, 승천하시고 난 뒤 모든 것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심지어 인성을 취하신 아들조차 인성을 따라서는 그 날과 그 때를 모른다고 할 정도이기 때문에(24:36) 언제 재림하실지 모를 수밖에 없지만, 모른다고 해서 작정하신 바가 변경되는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변하신 분으로서 작정하신 바에 대하여 변경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작정의 내용 가운데 인격적 피조물과 관련하여 예정하신 바가 있는데, 선택과 유기가 그 내용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3항과 4항에 보면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데, 우선 3항에서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생으로 예정되었고, 다른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사망으로 예정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어 4항에서는 그렇게 예정된 이 천사들과 사람들은 각자 불변하게 정해져서, 그들의 수는 매우 확실하고 정확하며, 증가되거나 감소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의 수가 고정되어 있는데, 고정되어 있는 그 수가 차기까지, 다시 말해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이 다 구원을 받기까지 주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시는 법은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이 다 구원을 받는 그때가 주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시는 때인데, 그때를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모른다고 해서 그때를 미루거나 당기거나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이 비춰 생각해 보면 사실 주의 약속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모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조롱하는 자들로 인하여 연약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흔들릴 수 있기에, 또 실제로 베드로 당시 흔들리는 자들이 있기에 이런 근원적인 내용보다는 가까운 방식으로 설명하는데, 왜 주께서 더디 오시는 것처럼 하느냐? 오직 주께서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라고 부르는 대상은 8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고 있는 대상입니다. 1차적으로는 베드로 당시 교회 안에 있는 신자이지만, 근원적으로 보자면 말씀의 대상인 모든 교회요 택자입니다. 물론 택자라 할지라도 베드로가 편지를 쓸 당시 믿음 가운데 있지 못한 자들도 있지만,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셔서 믿음을 주실 때는 그들 또한 이 말씀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너희, 다시 말해 신자 된 너희, 나아가 택자인 너희에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한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신자 된 자들을 향해서는 믿음에 있어 견고한 것이 아니라 흔들리기 때문에, 또한 여전히 부패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자로서 죄를 짓는 자로 있기 때문에 오래 참으시면서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것이고, 택자이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아 부르심을 받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더더욱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란 것입니다. 가깝게는 이런 내용으로 말미암아 깨어 있도록, 경성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고, 멀게는 영원 전에 택하신 자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림으로 조롱하는 자들의 말과 같이 결코 더디게 오는 것이 아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 된 우리가 이 말씀 앞에 설 때는 항상 주의 오심을 바라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경성하도록 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차원에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1장에서부터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권했던 것입니다(벧후1:10).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 있으며(벧후1:5-7), 이것으로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고 한다는 것이 동일한 이유인 것입니다(벧후1:8).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 대상이 신자요, 택자로 제한하여 이해하지만,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한다는 말 때문에 타락한 모든 인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4절의 말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내용이나, 로마서 1132절의 말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는 내용과 함께 만인 구원 혹은 보편 구원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인데, 성경 표현이 모든 사람으로 되어 있다고 해서 그 모든을 모든 인류로 보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혹은 이런 내용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만인이 회개하고 모두 구원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22:14) 하나님의 의도는 모든 사람의 구원이지만 결과는 혹은 효력은 믿는 자 혹은 택자에게 만 있다는 것도 주의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원 전에 작정하시기를 어떤 자는 택하시고 어떤 자는 유기하기로 하셨다고 한다면 실행의 역사에 있어서도 동일한 뜻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 전에 작정하실 때는 택자와 유기자로 작정하셨는데, 실행의 역사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고 한다면 이미 하나님 안에 모순이 있게 됩니다.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와 10절을 보시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 말씀하는데, 이 편지를 받아보고 있는 교회와 신자를 향하여 깨어 있어야 한다, 경성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지만,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다시 말해 아무도 모르게 갑자기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둑이 도둑질하면서 몇 일 몇 시에 갈 테니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할 도둑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의 날, 다시 말해 주의 재림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항상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으로 준비해야 하는가?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베드로후서 1장의 있는 내용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는 것으로 준비해야 하고, 이것으로 열매 없는 자가 아니라 열매 있는 자가 되어야 하고, 또한 이것으로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함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방편을 통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준비는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 준비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1장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말했던 것입니다.

노아 홍수에 대한 언급도 있었지만 노아의 때만 보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이 갑작스레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4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24:37-39) 물론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전혀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 방주를 짓게 하셨을 때 심판에 대한 경고도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2 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오직 의를 전파했다는 것은 저들에 불의에 대하여 경고했다는 것입니다.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했다는 것입니다. 방주를 짓는데 방주를 짓는 이유가 하나님의 심판 때문임을 증거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언제인지는 알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런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르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왜 저들이 홍수로 인해 멸망했는지에 대한 이유도 설명하는데,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저들이 일상의 삶을 살았다는 의미에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다는 게 아닙니다. 일상의 삶을 살면서 하늘을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것들만 보면서 거기에만 소망을 가질 뿐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의 삶을 위해 전혀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바로 주의 재림에 대한 소망과 함께 하늘에서 영원토록 살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준비가 베드로후서 1장의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도 일상의 삶을 삽니다. 일상의 삶을 살지 않고 하늘의 삶을 위해서 일상의 삶을 등진다면 한때 교회와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모습과 같게 되는데, 그것은 결코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일상의 삶을 살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바라보도록 하시느냐? 하늘을 바라보도록 하십니다. 땅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도록 하시지만 땅에서의 삶이 모든 것인 양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세상 안에 살면서도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도록 가르치며, 그런 점에서 주의 말씀을 따르라고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노아 시대 사람들처럼 말씀과 상관없이 그저 일상의 삶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날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선진들조차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부터 그들의 소망이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들조차 그러했다면 우리는 더더욱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좋은 것들, 세상의 편안한 것들, 세상의 재미있는 것들만 쫓아가면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지 못한다면, 하늘에서의 삶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것보다 어리석은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라고 하면서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갑니다. 13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서 하늘은 새 하늘과 새 땅과는 다른 하늘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 땅과 대조적으로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을 의미합니다. 그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간다는 것입니다. 또한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게 된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물질은 공기, , 흙 등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매튜 풀 주석 참조). 그것이 뜨거운 불에 풀어진다는 것은 불에 녹아 해체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게 된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는 감춰져 있던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말씀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 11절과 12절 상반부를 보시면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말씀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이 주께서 재림하시는 마지막 때 하늘은 떠나가고 물질은 불에 풀어지면서 녹아 해체되기에 너희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즉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이 무엇입니까? 베드로후서 1장에서 말한 내용입니다. 달리 말하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것은 비록 하늘은 떠나가고 물질은 불에 풀어지면서 녹아 해체되지만 주의 백성만큼은 이 심판의 날에 완전한 자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심판의 날에 완전한 자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처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주의 강림에 대한 약속을 조롱하는 자들은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자기 정욕대로 삽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기 때문에 죄 된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볼 때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 다 드러납니다. 주 앞에서 드러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심판 때까지는 마치 보호를 받고 보존을 받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신자 된 자들의 마땅한 바는 무엇인가? 자기 마음대로, 정욕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정욕을 제어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거룩한 행실을 따르고, 그 말씀으로 경건하게 사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고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2절 하반부부터 13절을 보시면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다시금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게 되지만, 한 마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사라지게 되겠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하늘과 땅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소망하면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이해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하늘과 땅이 변화되는 것처럼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혁주의 안에서도 화란 개혁파 신학자들이 그런 입장에 있다고 하는데, 로마서 821절에 보면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는 말씀을 통해 피조물조차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자유에 이른다는 것은 재창조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더 이상 저주 아래 있지 않도록 새롭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해합니다. 요한계시록 215절에도 보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표현도 있는데,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천국이 아닌 또 다른 곳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까? 만약 새 하늘과 새 땅을 천국이 아닌 또 다른 곳으로 이해하게 되면 주께서 재림하시기 전 택하신 백성들은 어디에 가 있는 겁니까? 우리는 천국에 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천국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중간 지점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겁니다. 일단 우리는 가톨릭의 중간 상태에 대하여 거절합니다. 예를 들어 림보 사상을 거절하는데, 림보란 말은 구약 시대 조상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완성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장소 혹은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유아의 경우 원죄 상태로 죽었지만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 머무는 곳을 의미합니다. 전자의 경우 선조림보라 하고, 후자의 경우 유아림보라고 하는데, 천국 혹은 지옥이 아닌 중간에 머무는 곳이 있다는 게 림보 사상입니다. 이런 사상에 대하여 우리는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2장 죽음 이후 사람들의 상태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첫 번째 항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죽음 이후의 사람들의 몸들은 먼지로 돌아가고 부패를 보게 됩니다(3:19, 13:36). 그러나 그들의 영혼들은 (죽거나 잠들지 않는) 불멸의 본질을 지니고 있으면서, 즉시 그것들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23:43, 12:7). 의인들의 영혼들은 그 때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가장 높은 천국 안으로 영접되며, 거기서 그들의 몸들의 충만한 구속을 기다리며, 광채와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봅니다(12:23, 고후5:1,6,8, 1:23, 3:21, 4:10). 사악한 자들의 영혼들은 지옥 안으로 던져지고, 거기서 그들은 고통들과 전적인 어두움 중에 머물며, 최후심판의 날까지 보존됩니다(16:23-24, 1:25, 6-7, 벧전3:19). 그들의 육신들로부터 분리된 영혼들을 위한 이 두 장소들 외에 성경은 다른 어떤 장소도 알지 못합니다.”

천국의 또 다른 표현으로 낙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다른 장소가 아니라 동일한 장소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14:2)라고 말할 때 문장 자체로는 거처를 예비하기 위해서 간다는 것이지만, 이때도 그 거처가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준비되지 않았다면 가톨릭이 말하는 것처럼 구약의 우리 조상들은 천국이 아닌 다른 장소에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나라는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입니다(25:34).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할 때 보이는 나라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나라까지 다 예비해 두셨습니다. 그 장소가 천국이요, 낙원이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비하러 간다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의 목적이 자기 백성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칼빈). 그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 창조의 역사를 통해 다 마련해 놓으셨지만 마련해 놓으신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잠시 너희를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종 성경의 표현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처럼 말한다 할지라도 그런 표현 때문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하늘과 땅을 새롭게 다시금 만든다는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천국에 있으며, 천국이 우리의 영원한 처소로 소개한다면 바로 그곳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새 하늘과 새 땅이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기에 불의함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의 불의도 들어올 수 없는 그런 곳이라는 겁니다. 지금 우리의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 의인이라고 칭해지고 있지만,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갖추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갖추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거기에는 조금의 불의함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몸을 입는다고 할 때는 지금 지상에서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이 육체를 벗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은 성화의 과정 가운데 있지만 그때는 완전 성화를 겪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로운 단계에 이르게 되는데, 그런 상태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됩니다. 거기에 어떻게 불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를 때까지는 영적인 싸움이 있는 지상에서의 삶을 산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이 영적 싸움은 죄와의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죄와의 싸움이기 때문에 불의를 버리고 의를 구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사도 베드로는 11절에서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주의 날에 완전 성화를 거쳐 영화로운 모습을 가질 것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 정욕대로 살아도 된다는 게 아니라, 베드로후서 1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적 본성에 참여하는 자로 부르셨다면 그런 부름에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역으로 우리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주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주께서 우리를 영원 전에 택하심으로 택하심 자체를 취소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는 것처럼 주께서 그런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오래 참고 계시다는 것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준비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결코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심판은 아닐지라도 일시적인 심판을 통해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음으로 인해 두려워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이 다 소멸할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채워지지 않음으로 인해 그렇게 애를 쓰지만 그 모든 것이 마지막 때는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그것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평생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살피되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갖추도록 더욱 주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 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로 있다면 우리는 주의 심판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 심판 때문에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의 말씀대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갖추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도록 자신을 말씀으로 좀 더 돌아보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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