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베드로전서 1장 13-17절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사도 베드로는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에 대해 나그네로 표현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본향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것이고, 하늘에 있는 본향은 이 땅에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심으로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게 하셨습니다(히11:16).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한 마디로 산 소망에 있게 하셨다고 표현합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세에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와 함께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늘의 유업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유업은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산다고 할 때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은 고난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하늘에서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지만 이 땅에서는 고난과 역경과 온갖 어려움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여러 가지 시험이 있다는 것이고, 그 시험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흔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의 시련을 통해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시며, 결국에는 우리로 하여금 칭찬과 영광과 존귀와 함께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얻게 하십니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지혜와 우리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하신 결과로 얻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으로 표현 합니다.
이런 구원에 대하여 지난주에는 구약에서부터 증거 해 온 말씀이라고 하면서 당시 선지자를 통해 선지자가 살던 시대의 백성을 위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 신약에서 비로소 알려진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알려졌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하늘의 유업은 구약 백성보다는 신약 백성에게 보다 더 부요하게, 보다 더 풍성하게, 보다 더 판명하게 받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이 땅에서부터 받아 누리고 있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하게 됩니다. 13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지난주에도 잠시 언급했지만 이 땅에서의 삶은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않을 수 없는 삶입니다. 물론 이런 시험은 영원한 하늘에서의 삶에 비해 잠시 잠깐일 뿐이지만 영광이 아니라 고난의 삶이란 측면에서 어렵지 않다, 가볍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어려울 수 있고, 그 시험의 무게가 무거울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표현하는데, 허리를 동이다, 허리를 졸라맨다는 것은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준비하는 자세를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밭일을 하려고 하는데 허리를 졸라매지 않고 놔두면 바지가 흘러내리게 됩니다. 그러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허리를 졸라매야지만 하려고 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허리를 동이라는 것은 그런 준비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에 대하여 준비해야 하는가?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말 번역을 그대로 표현하자면 너희 마음에서부터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번역하고 있는 단어는 이해, 정신, 생각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인데, 그런 점에서 너희 생각의 허리를 동이라, 너희 생각에서부터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근신하라고 권면하는데,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의 마음, 너희의 생각, 그리고 마음과 생각이 어떤 행동으로 나타날 때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생각에 떠오르는 대로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 자로 있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선악 간에 심판하기 위해 다시금 이 땅에 재림하실 때, 한 마디로 이 세상 종말에 주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준비 해 놓고 계신데, 너희가 그것을 소망하는 자로 있다면 이 땅에서의 삶은 너희 마음, 너희 생각에 있어서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과 생각을 삼가고 조심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것, 그것도 마지막 때 받을 영광의 은혜는 5절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은 결과로 있을 뿐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기 때문에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가? 근신하지 않아도 되는가? 깨어 있지 않아도 되는가?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은혜가 있으니 더욱 깨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를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생각을 삼가고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어디를 향해 있어야 하는가?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기 때문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에 있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기 때문에 장차 주어질 영광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은 현실 문제에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말씀하신 바를 빗대어 설명하자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대하여 민감하기보다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문제가 더 민감하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고난과 어려움이 있을 때 세상의 염려, 그리고 헛된 욕망에 얽매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하늘을 바라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절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생각을 졸라매야 합니다. 근신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마땅히 그 날을 기다린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생각을 삼가고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오시기까지 준비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처럼 전혀 준비하지 못한 자가 아니라 함께 졸고 잠잘지라도 준비되어 있는 자, 그런 측면에서 깨어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마25:13).
그럼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무엇을 삼가고 조심해야 하는가?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14절과 15절을 보시면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우선 순종하는 자식처럼 되라고 말씀합니다. 본래는 어떤 자들이었는가? 에베소서 2장 2절과 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르는 자들, 그래서 불순종할 수밖에 없는 자들, 불순종하기 때문에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믿음이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럼 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는가?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자녀로 삼으신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그 일을 행하는 자로 있게 하기 위해서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동일한 의미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우선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라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전에 알지 못할 때란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라고 할 수 있지만,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부름 받기 전을 뜻합니다. 수신자가 흩어진 나그네라고 할 때 여기에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있었다는 것을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부름 받기 전에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계시 된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서는 참되게 하나님을 알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표현을 로마서에서 하게 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유대인의 경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을 때는 하나님 지식에 근거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었지만 그런 열심조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열심, 오히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는 공로로써의 열심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열심 또한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열심으로만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열심으로만 있을 뿐인 것입니다. 유대인이 그렇다면 이방인은 하나님 지식 자체가 없는데 어떠하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 지식이 없을 때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사욕, 정욕, 욕망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면, 그래서 거듭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 지식이 없을 때처럼 자신의 사욕, 정욕, 욕망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특히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거룩한 자가 되라고 권면하는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고 알립니다. 그가 거룩하시기 때문에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거룩이라는 속성 외에 다른 속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자와 긍휼이 많은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어떤 자가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선함처럼 우리도 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함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처럼 우리도 인자하고 긍휼이 많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할 때 모든 행실에 있어 거룩한 자가 되라고 권면하는데, 어떤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모든 부분에 있어서 거룩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마지막에 말씀하신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베드로후서에서 다음과 같이 권하기도 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3절과 4절입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는 것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순종하는 자식이 된다는 것은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우리의 모든 사욕, 정욕, 욕정을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로 아들 된 우리가 아버지를 닮아가기 위함입니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 오늘 본문에서처럼 거룩한 자가 되되 모든 행실에 있어서 거룩한 자가 되는 것,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상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평생에 가져야 할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 지는 것! 그러나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사욕을, 우리 안에 있는 정욕을, 우리 안에 있는 죄악 된 욕망을 버리지 않고서는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왜 여러 시험이 있는가? 왜 끊임없이 고난과 고통들이 있는가? 어떤 면에서 우리 안에 있는 이런 죄악 된 욕망을 버리게 하기 위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버려야지만 야고보서를 통해 말씀하는 것처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약1:4).
오늘 본문 16절에서는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하면서 구약에 있는 한 말씀을 인용합니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레위기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왜 거룩하라고 하시는가?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영적으로 하자면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목적이 무엇인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우리도 거룩한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위해 레위기는 각종 제사법을 알려줍니다. 또한 각종 정결 규례에 대해서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끊임없이 죄로 말미암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자들을 정결케 함으로 구별된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제사법을, 각종 정결 규례를 알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방금도 말했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죄로 말미암아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결코 거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해져야 하지만 이 땅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내용으로 있을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수준이 우리가 도달할 수 있을 만큼 낮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수준이 그렇게 높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부패성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죄를 향하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결코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이런 명령을 하시는가?
우선 레위기 20장 7절과 8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 7절과 8절 상반부는 오늘 본문 16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은 그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같은 측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라고 말씀하시고, 사도 바울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5)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거룩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이라는 방편을, 그리고 기도라는 방편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편들을 잘 사용한다고 해서 거룩해지는가?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온전해지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 없기 때문에 성화되어 간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그 일이 우리의 노력, 우리의 열심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명령과 함께 명하신 바를 친히 이루시는 것이 자신임을 밝히십니다. 우리가 이룰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거룩하라는 명령은 단순히 명령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약속이 담겨져 있는 명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거룩한 것처럼 내 자녀로 삼은 너희도 거룩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거룩하라는 명령 앞에 내가 그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레위기 20장 8절 하반부 말씀은 거룩하라는 명령을 하셨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만약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부패성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럼 앞서 질문한 것으로 돌아가 우리가 할 수도 없는데 왜 명령을 하시는가? 명령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무가 무엇인지 알도록 할 뿐만 아니라, 안다 할지라도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우리는 그 명령을 지킬 수 없는 죄인으로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3장 20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7장 7절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리니까 명하시지만 그 명령을 통해 순종하지 못하는 우리를 보게 하시는 것이 율법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여기에 또 다른 목적이 있는데, 인간의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칭의 만이 아니라, 우리의 성화와 관련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요, 의로움이요, 거룩함이요, 구원함이 되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고전1:30).
때문에 그리스도가 빠진 거룩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거룩은 말씀이라는 방편을 통해, 그리고 기도라는 방편을 통해 거룩해져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십니다. 한꺼번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주십니다. 점진적으로 주시기에 완전한 것으로 주시기까지 그것을 소망하는 자로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13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는 무엇입니까? 이미 살핀 바 있는 베드로전서 1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성화의 과정 이후 결국 우리를 영화롭게 만드시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에게 주어질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 자로서 이 땅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14절에서 16절입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거룩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이지만,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이미 5절의 말씀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지만, 그리고 명령 안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태해서는 안 된다는 측면에서 너희를 부르신 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차원에서 17절의 권면도 하십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외모로 보시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조건에 따라 불공평하게, 편파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에서는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기도 하는데,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런데 중심을 보신다고 할 때 사람들은 우리의 진심 쪽으로 해석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진심, 우리의 열심에 따라 마치 하나님이 뭔가를 하시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도 우리의 진심, 우리의 열심에 따라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철저히 자신의 자유로우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사람에게 원인을 두지 않습니다. 물론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고 할 때 외적인 어떤 조건이 아니라 말 그대로 중심을 보신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중심을 그렇게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원인을 두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외모로 보지 않는다고 할 때 하나님은 사람에게 있는 어떤 조건을 따라 불공평하게, 편파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데, 한 마디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란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기 때문에 너희는 결코 나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원리로 하자면 내가 공의로우니 너희도 공의로운 자가 되라, 공의에 합당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은혜라는 말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부과하신 의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그런 분을 너희가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아버지로 대하기도 하신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는 것처럼 우리의 부족함을, 우리의 연약함을 채우시는 분으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나그네로 있는 동안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나태함이나 소홀함이 아니라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으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디에서 행하는가? 나그네로 살 동안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마지막에 우리에게 주실 은혜는 영광입니다. 그때는 거룩하고자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거룩이 완성될 것입니다. 완전 성화로만 있는 게 아니라 영화의 모습으로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이 보장되어 있는데, 나그네로 살 동안은 무엇에 힘써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한 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있어 결코 나태함이나 소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내용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의 시작부터 완성까지 주체로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우리의 마땅한 자세는 무엇인가 할 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구원에 이바지할 수 있는 어떤 공로가 있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해석한 모든 내용은 성경의 다른 구절로부터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정통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될 수밖에 없는 해석입니다.
그것을 더욱 분명히 해 주는 것이 이어지는 말씀인데, 13절에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지만 그 일을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가 누구신가?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측면에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 홀로 일하심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마음을 품지 않아도 되는가? 아무런 열심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을 주체로 하지만, 다시 말해 하나님 홀로 일하시지만, 그것이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수고와 노력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홀로 일하신다 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주시면서 일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 나태해도 되는 것처럼 마음을 먹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나태해도 괜찮은 것처럼 하는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두려운 마음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특히 말씀으로 그런 마음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말씀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그 마음에 두려운 마음을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과 같은 권면이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 동안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정신을 차려야 하고 마음과 생각을 삼가고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옛 본성을 버리고 하나님 아버지가 거룩하신 분인 것처럼 자녀인 우리도 모든 행실에 있어 거룩해져 가도록 두려움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런 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공의로서만 판단하자면 누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때로는 졸기도 하고 때로는 잠을 자기도 하지만 깨어나 주님 오심을 맞이할 수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다시금 오실 때까지 우리는 우리를 부르시되, 그가 거룩하신 분으로서 우리를 부르신 것처럼 우리 역시 거룩해져가는 은혜가 있도록 자신을 부지런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더욱 살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