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베드로전서 1장 22-25절
중생,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신 목적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한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로 삼은 자들이 자신과 같이 거룩한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15절에서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있어서 거룩한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할 이유 두 가지를 설명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설명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것에 대하여 심판하실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의 아버지이시기도 하십니다. 공의로 판단하실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남처럼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처럼 자녀를 대하시듯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면 너희의 마땅한 바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과 상관없는 자가 아니라 거룩을 위하여 힘쓰되 아버지께 모든 것을 구하면서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하신 일은 무엇인가? 본래 우리는 우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 가운데 있는 자였습니다. 아담 이래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는 이상 구원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런 행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대속을 받았습니다. 은과 금 같이 없어질 세상의 것으로 대속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임과 동시에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대속함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구약의 모형으로 설명하되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로 설명합니다. 그에게서 점과 흠을 발견할 수 있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피를 흘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셨는데, 어떻게 다시금 거룩과 정반대인 죄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사도 베드로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었다고 말합니다. 영원 전부터 택하신 자기 백성을 위한 수단으로 예비 되어 있었고, 그것이 구약에서는 모형으로 신약에서는 실체로 나타나신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택하신 자기 백성을 위하여 영원 전부터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때가 되어 준비해 놓으신 바를 그대로 실행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보자면 우리는 영원 전부터 택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로마서 9장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신 자들입니다(롬9:11). 내가 원해서, 혹은 내가 달음박질해서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롬9:16). 택함의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가 차매 아들을 보내셨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고, 우리의 의를 위해 다시금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우리의 영광을 위해 그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이런 모든 내용을 믿을 수 있도록 믿음이라는 선물도 주셨습니다. 믿음만 주셨는가? 소망도 주셨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있도록 하신 자들이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뜻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절은 이런 내용에 근거해서 다시금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이 권면은 14절과 15절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4절과 15절을 보시면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있어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이 순종하는 자식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본문 22절은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곧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너희를 거룩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3절에서는 이 진리가 무엇인가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거룩에 이르는 길이라고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였다고 설명합니다. 너희는 이미 깨끗하게 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된 상태라면 왜 거룩을 요구하는가?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는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요13:6), 어떻게 주님께서 제자의 발을 씻기실 수 있습니까? “내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요13:8a)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13:8b)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대해 시몬 베드로는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요13:10)는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 사도 베드로를 통해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믿음을 주셨고, 또한 소망을 가지게 하신 자로서 이미 깨끗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깨끗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거룩하지 않아도 될 만큼 깨끗한 상태에 있는가?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온 몸은 깨끗하여졌지만 여전히 발을 더럽습니다. 더럽기 때문에 씻어야 합니다.
22절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권면이 되고 있는 겁니다. 너희가 이미 진리에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였다. 이때 영혼은 전인을 의미합니다. 전인이 깨끗함을 받았지만 영혼으로 표현한 것은 우리의 모든 불순종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즉 근본적인 변화는 내부의 변화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되며, 그런 차원에서 너희는 너의 영혼으로부터 시작해서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깨끗함을 받았는가?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 어떻게 함으로 깨끗함을 받았는가? 순종함으로 깨끗함을 받았다. 즉 복음의 말씀이 주어졌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변화는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 특별히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 주신 율법에 순종함을 통해 나타나는데, 지금 너희가 그런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미 깨끗하여졌지만 여전히 씻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처럼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지만, 실제로 형제 사랑의 실천이 있었지만 여전히 완전함으로 있지는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해 점과 흠 없이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되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거짓 없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진리에 순종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래서 영혼의 깨끗함을 받지 않았을 때에는 온통 거짓투성이였습니다. 사랑을 하더라도 진리에 합당한 사랑, 말씀에 합당한 사랑이 아니라 거짓된 사랑으로 가득하였습니다. 한 예로 로마서 1장에 보면 거짓된 사랑, 왜곡된 사랑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1:26-27)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들의 죄 때문인데, 특별히 성적인 문란함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보면 이런 성적 문란함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숨겨져 있었지만 지금은 드러내놓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진리에 합당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위배된 사랑이요, 그런 만큼 거짓되고 왜곡된 사랑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죄로 지적될 수밖에 없는 모습이요, 그 죄로 인하여 형벌로 나타나는 형태가 이런 성적 문란함으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죄를 낳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로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순종하는 자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면, 그래서 영혼의 깨끗함을 받았다면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되 율법이라는 형식을 통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럼 이웃만 사랑하면 되는가? 성경에서 이웃 사랑을 말할 때는 하나님 사랑의 증거로써 이웃 사랑을 말할 때가 많습니다. 이웃 사랑을 말한다고 해서 이웃 사랑만 말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 사랑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율법의 총체를 한 면으로만 말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어쨌든 15절에서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할 때 사도 베드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웃 사랑하기를, 그 가운데서도 형제 사랑하기를 더욱 힘써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거룩이란 무엇인가? 말씀에 대한 순종이요, 말씀의 요약은 사랑이기 때문에 실천적인 의미에서 형제를 사랑하되 더욱 뜨겁게 사랑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2절의 내용에서 칼빈은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능력을 우리 자신에게 돌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사도는 바로 뒤에 ‘그 영을 통해서’라는 수식어를 덧붙인다고 언급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헬라어 원문에는 이런 표현이 없지만 칼빈 시대 때 사용한 사본에는 이 표현이 있었기 때문에 주석에서는 번역하고 있는데, 이 표현이 있든 없든 이 부분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고 할 때 그렇게 할 수 있게 만든 주체가 누군가를 밝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없지만 없다고 해서 그 주체를 사람에게 돌릴 수 있는가? 전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칼빈주석에서 언급한 이 부분은 좀 더 명확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고 할 때 거기에는 성령의 은밀한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권면에 이어 사도 베드로는 거듭남에 대해 설명하는데, 가깝게는 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라고 할 수 있고 조금 넓게 본다면 왜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너희가 거듭났기 때문에 거룩해야 한다,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23절을 보시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너희가 거듭났기 때문에 거룩해야 하고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데, 너희가 어떻게 해서 거듭나게 되었는가? 너희의 거듭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에 의하면 우리의 거듭남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는다고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이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 보면 바리새인 중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과 예수님의 대화 중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이때 니고데모는 거듭나는 것을 육체적인 것으로만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3:4)라는 의문을 던집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설교 때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여기에서 물은 성령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성령을 때로는 불로 설명하는 것처럼 여기서는 물로 설명하는데, 성령의 깨끗하게 하시는 역사가 있어야지만 거듭날 수 있다는 의미로 물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분명 성령의 깨끗하게 하시는 역사가 있어야지만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럼 사도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사도 베드로의 경우 성령의 깨끗하게 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거듭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성령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편을 통해 일하시는가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너희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간혹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과 상관없이 일하실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분들이 있지만,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친히 증거 하시기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의하면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이런 점에서 성령 하나님은 말씀과 상관없이, 말씀을 통해 확인 받을 수 없는 일조차 행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혹 이렇게 말하는 것이 성령의 일하심은 제한시키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이 증거 하는 만큼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성령의 일하심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성령과 말씀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고까지 고백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내적인 역사라고 한다면, 말씀의 역사는 외적 역사라고까지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과 20절에 보면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토마스 카트라이트라는 개혁자는 이 구절을 통해 그리스도의 왕직을 설명하기도 하는데,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통치하실 때 무엇을 수단으로 사용하시는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있다고 합니다. 내적인 것은 성령이고, 외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령 따로, 말씀 따로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을 사용하여 역사하는 방식으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은 말씀과 상관없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말씀과 함께 일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가 너희의 거듭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고 할 때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없는, 그냥 말씀 자체만으로 거듭남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거듭남이 있다면 거기에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역사만으로 거듭남이 있는가? 말씀과 상관없이 거듭남이 있는가? 그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은 말씀과 함께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은 거기에 말씀의 역사도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거듭남에 대하여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썩지 아니할 씨가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 하나님의 말씀과 무엇을 대조하고 있는가? 썩어질 씨와 대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썩어질 씨란 무엇입니까? 그 자체가 썩은 것이요, 썩었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생명이 나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썩지 아니할 씨입니다. 썩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도 베드로가 이어 설명하는 것처럼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활력이 있습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운동력이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을 사용하신다는 측면에서입니다. 동일한 말씀이지만 살아 있는 그 말씀이 영혼을 살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살아 있는 말씀이지만 영혼을 살리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거듭남을 좌우하는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의의 역사가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거듭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주체는 누구인가? 성령 하나님입니다. 말씀은 성령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도구로 사용되는 말씀이 교회 안에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사도 베드로는 이 말씀에 대하여 썩어질 씨가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살리는 역사를 일으킨다는 것이고, 항상 있는 말씀이시기 때문에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말씀은 그만큼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히브리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과 13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마치 말씀은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말씀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의 외적인 거만 아니라 내적인 것도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나게 만듭니다.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 만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면, 본래는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지만 다시금 살려 주셔서 새 생명을 얻게 하셨다면 15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 본문 22절의 내용으로 하자면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중생된 자다. 말씀으로 중생된 자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중생된 자다. 다시금 산 자가 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겠는가?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거듭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살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죽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나게 만들었습니다. 살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죽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나게 만들 뿐 아니라, 살아난 자로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시면서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하셨던 겁니다(신8:3).
이런 말씀인데 우리는 얼마나 이 말씀에 대하여 귀하게 여깁니까?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까?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할 때 떡은 매일 매일 섭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합니까? 떡이 우리 육체를 위한 양식이라면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혼의 양식인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나 자주 먹고 마십니까?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 우리는 바로 이 말씀만을 주목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사용하시지만 성경은 성령 하나님을 주목하도록 하라고 하기보다 는 방편으로 주신 말씀을 주목하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계속해서 사도 베드로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있다는 사실을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설명합니다. 24절과 25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여기서는 인생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조하는데, 우선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거듭나기 전의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표현한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볼 때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래서 육체적으로 어떤 영광을 취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풀과 같고 풀의 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꽃은 아름답지만 그런 아름다움이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 버리는 것처럼 인간에게 주어지는 모든 영광도 사라질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23절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썩어질 씨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인생이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은 썩어질 씨가 아니라 썩어지지 아니할 씨,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으로 살리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씀이 한 순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세토록 있다고 말씀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신 것처럼 그의 말씀도 영원토록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 있는 말씀이 죽은 자로 하여금 살리는 것처럼 항상 있는 말씀, 세세토록 있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을 보장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우리를 살릴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무엇인가 할 때 베드로는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즉 영원한 생명은 복음 안에서는 주어지는 것이고, 이 복음을 믿지 않는 이상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비교를 하자면 앞서 성령과 말씀의 관계처럼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라고 할 때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고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주체는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시는 분,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누구를 도구로 사용하시는가?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이런 관계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누가 주체인가를 다음의 말씀으로 드러냅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5-7) 특히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은 그들의 수고와 노력이 전적으로 헛되다는 게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로 말하자면 그것조차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란 것입니다. 내 수고, 내 노력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조차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사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도구로 쓰임 받는 자들이 무가치한가? 무가치하기 때문에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가?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한 예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4:15) 3장에서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사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다고 할 때 마치 내가 너희의 아버지와 같은 자로서 너희를 가르쳤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을 소개하기까지 합니다. 그만큼 복음을 가르치는 자에 대하여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다음과 같은 권면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17절입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잘 다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들에 대하여 배나 존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하라고 권합니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들을 존중하지 않아도 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다시 본문의 내용으로 와서 말씀을 사용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시고 거듭난 자로 하여금 영생에 이르도록 이끄십니다. 주체가 누구냐?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은 거듭나게 하시고 영생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십니다. 복음의 말씀을 들려주시되 말씀 사역자를 세워 그 일을 하게 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이 주체이시기 때문에 수단으로 주신 말씀에 대해 강조하지 않으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다음 주에 보겠지만 베드로전서 2장 2절에 보면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만든다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거듭나게 할 뿐만 아니라 자라게 하고 결국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아이가 엄마의 젖을 찾는 것처럼 그렇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찾고 그것을 먹고 마심으로 취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말씀의 유익을 얻을 수 있는가? 원리적으로는 빌립보서 2장 13절의 말씀처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십니다. 사모함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뜻하시면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이 게으름을 조장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교훈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자세가 나태한데도 말씀의 유익을 얻을 수 있는가 할 때 결코 얻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모함이 없는데 어떻게 말씀이 유익이 되겠습니까? 때문에 우리를 거듭나게 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념해야 합니다. 마치 아이가 엄마늬 젖을 찾는 것처럼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한 것도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4:13)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사역자든 말씀 사역자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든 주께서 이를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과, 권하고 권함을 받는 것, 또한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일에 온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을 더욱 견고하게 해야 하고, 나아가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신 것처럼 우리 역시 말씀으로 말미암아 더욱 거룩해져 가는, 그래서 더욱 뜨겁게 형제를 사랑하는 자로 서야 합니다. 말씀의 역사 없이는,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 없이는 결코 주어질 수 없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이 복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셔서 권면하시는 겁니다. 너희는 중생된 자다. 말씀으로 중생된 자다. 그 말씀은 너희 영원까지 보장한다. 그 말씀으로 너희를 권면하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실천적으로 형제를 뜨겁게 사랑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고 있는가, 우리의 생명처럼 여기고 있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