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베드로전서 2장 1-5절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하나님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성도들이 하나님 자신처럼 거룩해 지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마지막 때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며, 나아가 거룩과 반대되는 죄가 사함을 받은 것은 아무런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다시 말해 대속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다시금 죄를 향해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자로 있어야 하는 것이 나그네로 사는 성도의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성도의 삶이 항상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방향으로만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속의 은혜를 받았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부패성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언급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목욕을 한 자로 있지만 지상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발을 더럽히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을 명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진리를 순종함으로 영혼을 깨끗하게 하였지만 더 이상 깨끗하지 않아도 될 만큼 깨끗한 상태에 있지는 않기 때문에 더 깨끗하도록 하기 위해서, 달리 표현하면 죄를 멀리하고 의를 가까이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을 명하시는 것입니다.
더불어 사도 베드로는 거룩을 위해 힘써야 할 이유 한 가지를 더 언급하면서 거듭남에 대하여 말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 즉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전서를 통해서는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는 언급하지는 않지만 너희에게 있어 말씀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알린다는 차원에서 너희의 시작, 다시 말해 영적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라 함은 그 말씀이 살리는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까지 보장하는 그런 말씀임을 알립니다. 거듭남, 다시 말해 중생의 은혜만이 아니라 그 말씀이 항성 너희와 함께 있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기까지 하는 그런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너희가 들었고 지금도 복음의 내용으로서 듣고 있다면, 그래서 그 말씀이 너희에게 계속해서 머물러 있다면 어떻게 거룩과 상관없이 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죄를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 1절과 2절로 오시면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간단히 말하면 거룩과 반대되는 것들을 버리고 더욱 거룩을 위해 힘써야 하는데, 그 방편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는 것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가깝게 말하면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거듭남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본래는 죄로 말미암아 죽었지만 성령의 은밀한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할 때 새 생명을 얻었다면 새 생명을 얻은 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권면이 바로 1절과 2절의 말씀입니다. 모든 죄악을 버리고 거룩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1절에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거듭나기 전 우리의 본성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의 모든 본성을 열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갈라디아서 5장 19절 이하에서 이 부분보다 좀 더 다양한 면으로 말한 바가 있는데, 거기 보면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5:19-21)고 말합니다. 이때도 거듭나기 전 우리의 모든 본성을 다 열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면을 말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우리의 본성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데, 한 마디로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죄악의 덩어리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악독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할 때 갖는 악의(惡意), 혹은 다른 사람이 해를 당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마음입니다. 모든 기만은 다른 사람을 속이는 모든 종류의 사기와 협잡입니다. 외식은 속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 입에 발린 말을 하며 그럴듯한 표정과 태도를 나타내는 거짓된 호의입니다. 시기는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마음입니다. 모든 비방하는 말은 다른 사람을 향해 무고히 중상 모략하거나 악담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죄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으로부터 나올 수 없는 것들, 그렇기 때문에 죄요 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버리라고 권면하는 이유는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즉 베드로전서 1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깝게는 너희가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로 있었지만 다시금 살아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중생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모든 죄악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너희가 죽었다가 산 자가 되었다고 할 때 너희 죄를 위하여 대신하여 죽으신 분이 있다는 것도 죄악을 버려야 할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래는 우리가 죽어야 했지만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옛 본성에 걸맞은 옷을 입은 자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 앞에서 죄악의 옷을 다시금 입는다는 것이 잘 하는 것인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죄악 된 모든 것들, 그것이 어떤 것이든 버려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취해야 하는가? 버리라는 단어가 오랫동안 입어 해어진 낡은 옷으로부터 취한 은유라고 말하는데(매튜 풀), 그런 점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옛 본성의 옷이 아니라 우리 죄를 대속해주신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롬13:14). 그리스도 옷 입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로 하자면 그의 지혜가 우리의 지혜요, 그의 의로움이 우리의 의로움이요, 그의 거룩함이 우리의 거룩함이요, 그의 구원함이 우리의 구원함이 된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를 본받아 행하는 데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는 말씀이 있고, 이 내용과 관련해 로마서 6장 3절과 4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결국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그의 죽음 안에서 우리가 죽었다는 것, 특히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 나아가 그의 부활 안에서 우리가 다시금 살아났다는 것, 특히 의에 대하여 살아났다는 것을 알고 새 생명을 얻은 자로서 새 생명에 걸맞은 자로 행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그리스도와 동일한 형상을 갖는 것,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똑같아지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이런 내용까지 나오지는 않지만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해야 하는가 할 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이런 내용으로 요약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사도 베드로는 2절의 권면을 합니다.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갓난아기들, 젖과 같은 표현은 베드로전서 1장에서 거듭남에 대하여 말한 부분과 연관이 있는데, 갓 태어난 아기들이 엄마의 젖을 먹고자 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태어난 자들, 다시 말해 거듭나고 중생한 자들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란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하는가?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즉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만들기 때문에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거듭남은 지난 시간에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 그래서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생명이 있는 한 생명과 항상 함께 있는 말씀, 그래서 영원까지 보장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말씀이 우리의 영의 양식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양식을 먹고 마시지 않는 한 너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자랄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달리 말하면 너희가 너희 구원을 위하여 무엇을 먹고 마셔야 하는가 할 때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없다고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이 말씀에 대하여 신령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몸이 아니라 영혼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을 위한 양식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방편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순전하다는 것은 매튜 풀 주석에 의하면 거기에 사람들의 허탄한 생각에 의해 오염되거나 혹은 그것과 섞이거나 혹은 그것에 의해 희석됨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우리가 사모해야 할 말씀은 사람의 것이 섞이지 않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사모하여 먹고 마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사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다시 말해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완성된 구원으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구원의 완성에 이르도록 자라게 만듭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4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말씀하기도 합니다. 11절부터 보시면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1-15)
왜 하나님께서 주의 몸 된 교회 안에 말씀 사역자를 세우시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하나님 말씀의 전파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의 전파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이런 자라남이 있을 때 어린 아이처럼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것은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인데, 왜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 택자에 한해서 그들은 거듭났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는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사모함 없이 오히려 세상에 대하여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말하면 여기에 기웃, 저렇게 말하면 저기에 기웃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거듭났다면, 그리고 죄악 된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 아버지처럼 거룩하게 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다음 주에 보게 되겠지만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넘어진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약 시대로 와서 구약에서 예표 하던 예수 그리스도가 실체로 오셨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던 것도 사실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8절 하반부에서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저들의 넘어짐은 결국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란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말씀을 사모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요,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는 것, 그것은 결코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광야 생활을 하면서 만나를 먹이신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2-3) 광야 40년은 저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징계요, 형벌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저들을 낮추시고자 하십니다. 낮추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도록 만들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리기 위해 만나를 사용하십니다. 소위 육체의 필요한 떡을 주시면서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 알게 하려 하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떡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우리 육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넣더라도 우리는 그것으로 사는 존재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것을 위해 삽니다. 먹고 마시기 위해서는 물질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물질을 위해 살기도 합니다. 혹은 명예를 위해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으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물질로 사는 존재도 아닙니다. 사람은 명예로 사는 존재도 아닙니다. 무엇으로 사는 존재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물론 우리 육체를 위해서 먹고 마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먹고 마시기 위해서 물질도 필요합니다. 때로는 명예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먹고 마시는 것이 있어도, 물질이 있어도, 명예가 있어도 결국 말씀이 없다면, 베드로전서를 통해 말씀해 주고 있는 것처럼 말씀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되고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라나는 것이 없다면 그들의 결국은 영원한 형벌로 결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생에 먹고 마시는 것, 물질, 명예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6-27)
역사 속에서 어떤 왕은 여러 나라를 정복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그런 일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대단한 업적인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방금 읽은 말씀처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지옥 형벌에 놓일 뿐이라면 사람들이 칭송하는 그런 업적을 남겼다 한들 그것이 그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보다 못한 인생이라고 말한다면 과한 말이겠습니까?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말씀 없는 인생이란 죽은 자요, 죽음을 향해 나아갈 뿐입니다. 말씀이 없다는 것은 중생이 없다는 것이고, 중생이 없기 때문에 영생으로 나아갈 수 없는 삶, 죽은 자로서 죽음을 향해 나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에 말씀으로 거듭나는 일이 있게 된다면 그래서 말씀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를 알게 된다면 갓난아기가 엄마의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즉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는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허탄한 생각으로 오염된 말씀, 사람의 허탄한 생각이 섞여 있는 말씀, 사람의 허탄한 생각으로 희석된 그런 말씀이어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15:3),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15:6),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15:9)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오늘날 이 말씀에서 제외된다고 할 수 있는 자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성경으로부터 보증 받을 수 없는 온갖 절기들을 지키면서도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온 것인 양 하고 있는 오늘 우리의 모습들, 과연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순전한 말씀, 순수한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지상교회에서 완전함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교회의 표지로 그 안에서 복음의 순수한 교리가 전파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도록 하고 있다면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복음의 순수한 교리가 전파되는 그런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교회가 크냐, 크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많은가, 많지 않은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재정이 넉넉한가, 넉넉하지 않은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고 있는가, 되고 있지 않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를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 인정하여 그의 뜻만을 전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3:10-15)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 터에 무엇으로 짓는가? 금이나 은, 보석으로 짓는가? 아니면 불에 타 없어질 나무, 풀, 짚으로 짓는가? 칼빈은 금, 은, 보석에 대하여 터 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어울리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반면 나무, 풀, 짚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터와 어울리지 않는 것, 인간에게서 날조되어 나온 것,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금과 은과 보석과 같은 가르침이 아니라면, 오히려 나무와 풀과 짚과 같은 가르침이라면 그런 가르침에 대하여 사모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모해야 할 말씀은 무엇인가? 순전하고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금과 은과 보석과 같은 가르침입니다. 불로 연단하여도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와서 3절을 보시면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다면, 다시 말해 주의 말씀을 통해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다면, 갓난아기가 엄마의 젖을 맛보고 그 맛을 아는 자처럼 너희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다면 더욱 순전하고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순전하지 못한 말씀에 대하여 경계해야 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말씀 사역자들을 통해 전해지는 모든 설교가 다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은 모든 설교가 다 순전하고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순전하고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지라도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밭의 비유처럼 어떤 밭이냐에 따라 결실하기도 하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밭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것입니다.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구원에 유익이 있습니다. 적어도 택자에 한해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구원에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데도 거룩하게 만드는가? 거룩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일은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 거룩함을 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터와 어울리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거룩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그의 거룩이 우리의 거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터와 어울리지 않는 말씀이 어떻게 거룩을 줄 수 있으며, 우리 구원에 유익을 줄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는 결코 자라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저 사람이 어떤 열심으로 교회에 봉사하는가로 자라남을 판단할 때가 많지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변화되는 것, 거기에 자라남이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권합니다. 오늘 본문 4절과 5절을 보시면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 곧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지만 그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되는데,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3절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다면’이라는 말을 했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산 돌, 살아 있는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한다. 이때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수식하는 말이 ‘사람에게 버린 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에게 버린 바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더 자세히 살피겠지만 요한복음 1장에 있는 표현으로 하자면 이것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9-11)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십니다. 여기서 돌이란 표현은 5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신령한 집과 관련된 것으로 그분이 신령한 집의 터요, 기초가 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 돌, 즉 살아 있는 돌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분이 살아 있기 때문에 터이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는 신령한 집이 그분으로부터 살아나 산 자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란 영원 전에 미리 정해지기를 택자를 위한 살아 있는 돌로써 신령한 집의 터요, 기초라는 것입니다. 바로 신령한 집의 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이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는 것이요, 그것이 곧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5절의 말씀처럼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고 권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산 돌인 것처럼 너희도 산 돌로 말미암아 살아난 돌, 살아 있는 돌로 서로서로 연합을 이루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권합니다. 구약과 같은 제사 방식은 폐지되었지만 로마서 12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제물로 드린 것처럼 우리 역시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난 돌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으로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나아가 자신을 하나님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서 고린도전서 1장 30절을 언급한 바 있지만 그리스도께 나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의 지혜가 우리의 지혜가 되는 것이고, 그의 의로움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는 것이고, 그의 거룩함이 우리의 거룩함이 되는 것이고, 그의 구원함이 우리의 구원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이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는 것이고, 거기에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위한 자라남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주의 말씀 안에서만 믿음의 내용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의 내용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인가? 로마서 12장 2절에 의하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거기에 있습니다.
언제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칭해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 앞에서 성도라고 불릴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영광의 모습을 가질 수 없습니다. 왜 성경이 그리스도 중심인가? 그리스도 없이는 구원의 시작도, 구원의 완성도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참된 개혁주의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틀로 풀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기는 하지만 시작과 과정 그리고 끝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조차 선택의 수단으로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길과 방편으로서 선택의 수단이란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에게 원인을 돌리고자 한다면 구원의 원인이라는 말은 가능하지만 그때도 매개체, 다시 말해 수단 혹은 방편이라는 의미에서 ‘질료적 원인’으로 돌릴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럼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완성에 이르기 위해서, 그리고 그때까지 자라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께 계속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그리스도만을 본받아 따라가는 것, 거기에 우리의 구원의 모든 것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