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17
에베소서 2장 1-3절 [제17-19문]
모든 인류는 아담의 첫 범죄 안에서 함께 타락한 자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맺어진 언약은 아담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과도 맺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모든 인류의 대표로 세워 그와 언약을 맺으셨던 것입니다. 때문에 일반적 출생에 의해 아담의 혈통인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범죄 했으며, 그의 첫 범죄 안에서 그와 함께 타락했습니다.
이런 타락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인류의 상태와 관련해서 설명하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7문부터 19문까지입니다. 우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7문을 보면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인류가 어떤 상태를 초래했는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제17문. 타락은 인류에게 어떤 상태를 초래했습니까?
답. 타락은 인류에게 죄와 비참함의 상태를 초래했습니다(롬5:12).
아담의 첫 범죄와 그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타락하게 되었을 때 일반적인 출생에 의해 태어나는 사람은 누구도 예외 없이 죄와 비참함의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럼 죄의 상태는 무엇이고, 비참함의 상태는 무엇인가? 이어지는 18문과 19문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제18문. 인간이 타락한 상태에서의 죄악됨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답. 인간이 타락한 상태에서의 죄악됨은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 원의의 결핍, 그리고 보통 원죄라고 불려지는 아담의 전 본성의 부패와 아울러 그 원죄로부터 나오는 모든 실제적인 범죄(자범죄)가 있습니다(롬5:10-20, 엡2:1-3, 약1:14-15, 마15:19).
제19문. 인간이 타락한 상태에서의 비참함은 무엇입니까?
답. 모든 인류는 그들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과 교제를 잃어버려(창3:8,10,24) 진노와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엡2:2-3, 갈3:10). 그래서 현재의 생애에서의 모든 비참함, 죽음 자체, 지옥의 영원한 고통에 놓이게 되었습니다(애3:39, 롬6:23, 마25:41,46).
우선 인간의 죄악 된 상태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할 때 모든 사람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일부 말씀을 드렸습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죄를 지었다고 할 때 그 죄는 원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원죄는 죄책과 부패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든 인류는 바로 아담으로부터 전가된 죄책과 그 죄책의 형벌인 전적 부패 아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죄의 전가가 부모에게서 받는 것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일반적인 출생을 따라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있다고 하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뭔가를 물려받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죄의 전가는 부모가 아니라 아담 안에서 함께 범죄 한 자로 있기 때문에 아담으로부터 죄를 전가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원죄는 우리의 첫 조상의 범죄를 통해 모든 인류에게 미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소요리문답에서는 원죄로부터 나오는 모든 실제적인 범죄, 즉 자범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소요리문답 제18문에 대해 우리가 좀 생각해야 될 부분이 있는데, 인간의 죄악 된 상태에 대하여 소요리문답은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 원의의 결핍, 그리고 보통 원죄라고 불려지는 아담의 전 본성의 부패와 아울러 그 원죄로부터 나오는 실제적인 범죄, 즉 자범죄까지를 설명합니다. 일반적으로 원죄의 구성 요소라고 할 때 죄책과 부패로 되어 있다고 설명하는데, 방금 읽어드린 소요리문답에서는 원죄를 아담의 전 본성의 부패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말로 번역할 때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도 있습니다. 고려서원에서 나온 시편찬송 뒷부분에 보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는데, 거기 번역을 보면 18문과 관련된 답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이 타락한 지위에서 가지는 죄성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사람이 타락한 지위에서 가지는 죄성은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과, 원의가 없는 것과, 온 성품이 부패한 것인데, 이것을 보통 원죄라 칭하며, 아울러 이 원죄로 말미암아 나오는 모든 자범죄를 말합니다.”
왜 이렇게 번역이 다른가 하면 ‘보통 원죄라고 불려지는’(which is commonly called Original Sin)으로 해석되는 부분을 바로 앞에 있는 ‘아담의 전 본성의 부패’에만 연결시키느냐, 아니면 ‘아담의 전 본성의 부패’만이 아니라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 원의의 결핍’까지를 연결시키느냐에 따라 달리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The sinfulness of that estate whereinto man fell, consists in the guilt of Adam's first sin, the want of original righteousness, and the corruption of his whole nature, which is commonly called Original Sin; together with all actual transgressions which proceed from it.).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 1차 자료가 영어인데, 영어권에서는 세 가지 전체를 연결시키지 않고 ‘보통 원죄라고 불려지는 아담의 전 본성의 부패’로 설명한다고 합니다. 만약 세 가지 전체를 연결시키는 것이라면 ‘which is’가 아니라 ‘which are’로 받아야 하지만 ‘which is’로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에 ‘보통 원죄라고 불려지는’이라는 표현이 ‘아담의 전 본성의 부패’에만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가? 아마도 원죄를 설명함에 있어 부패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이 보편적이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실제로 이 부분과 관련해서 윌리엄 커닝함이라는 신학자는 원죄에 대하여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역사신학, 제19장 1),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고 할 때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간이 타락한 죄성의 상태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나 요인들을 포괄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반면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고 할 때는 실질적 모든 범죄들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인간의 선천적이고 보편적 편견이나 경향, 즉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려는 경향, 또는 인간성의 도덕적 타락이나 부패만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나 대요리문답과 관련해서는 원죄라는 이 말이 본성의 타락, 즉 실질적 범죄의 직접적 근원인 선천적인 타락 혹은 부패에만 적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원죄의 구성 요소는 죄책과 부패이지만, 소요리문답이나 대요리문답 등은 부패 중심으로 원죄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드시 주의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패 중심의 설명은 부패를 중심으로 죄책을 설명하는 간접전가의 입장에 서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혁자들이 그런 입장에 서 있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전가보다는 자유의지나 은혜, 그리고 공로와 같은 주제들이 논쟁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좀 더 뚜렷하게 표현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패를 중심으로 설명한 것을 무조건 간접전가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펠라기우스의 경우 우리의 첫 조상들의 죄는 그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 결코 후손에게 전가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모방하는 것 이외에는 전혀 전가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소시누스란 인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세례파의 경우 후손들의 죄책이 첫 조상들의 타락 때문임을 부정했고, 알미니안주의의 경우는 죄의 전가라는 말을 사용하는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하였습니다. 아담의 후손이 그처럼 순결하고 흠 없는 상태로 태어난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본성이 전적으로 부패했다거나 선을 행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가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를 흐리게 만들면서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이 있는데, 그들이 말하는 것이 간접전가입니다. 일단 간접 전가란 무엇인가? 간접 전가란 우리의 부패, 우리의 오염을 매개로 하여 죄책이 전가된다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모든 인류는 일반적인 출생을 통해 아담의 부패한 본성을 물러 받아서, 아담과 함께 공유하고 있는 생득적인 부패성 때문에 그들도 역시 배역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아담의 부패한 본성을 물러 받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담의 죄가 전가된다고 할 때 죄책이 아니라 부패가 전가된다고 말하고, 그런 부패로 말미암아 죄의 책임을 묻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럼 성경을 따라 우리가 말하는 바는 무엇인가? 부패를 통해 죄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함께 타락했다고 할 때 무엇보다 법적으로 죄의 책임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있다고 말하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패는 그런 죄책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직접 전가 입장입니다. 즉 아담의 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된다고 할 때 무엇보다 법적으로 죄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부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죄를 설명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죄책보다는 부패로 설명하는 경우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죄책을 짊어졌기 때문에 부패한 상태로 태어난다(직접전가)는 설명이 아니라, 부패를 설명하면서 죄책을 논하는 경우들이 많다는 것입니다(간접전가). 조직신학자인 루이스 벌코프는 종교 개혁자들의 경우 원죄의 본성에 대하여 스콜라 신학자들과 입장을 달리했지만, 전이 개념에 있어서는 별반 새로운 것이 없었다고 하면서 인류의 대표로서의 아담, 그의 죄책의 후손에의 ‘직접적인’ 전가 같은 사상이 그들의 글에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조직신학, p.456).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의 글을 보면 죄를 말할 때 부패성에 무게를 실어서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앞서도 말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도 간접전가 입장에 서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후 간접전가와 직접전가에 대한 내용이 논쟁의 중심으로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아담의 부패성도 우리에게 전가되었지만 무엇보다 죄책이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즉 부패성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죄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아담의 첫 범죄 안에서 함께 죄를 범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담과 그의 후손들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 됨이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언약을 맺으실 때 아담과만 맺으신 것이 아니라 아담을 대표로 한 모든 인류와 언약을 맺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로마서 5장 14절은 아담의 범죄와 동일하게 죄를 짓지 않은 자들에게도 사망이 왕노릇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최소한 아담의 범죄를 모방하지 않고도 후손들에게 죽음이란 결과가 있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15절에서는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논리가 있음으로 한 사람의 대표적 죄와 죽음의 형벌이 모든 사람들에게 실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설명들은 결국 아담의 죄와 모든 이들의 죽음의 직접적인 연결, 아담의 죄와 모든 이들의 정죄의 직접적인 연결, 아담의 죄와 이들의 죄의 직접적인 연결 등의 추론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의미에서 직접 전가가 성경의 지지를 받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8문과 관련해 한 가지를 더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원의의 결핍과 관련해서입니다. 보통 ‘원의’라고 하면 타락하기 전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의를 말하는데, 대체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은 이미 살펴본 것처럼 골로새서 3장 10절을 근거로, 또한 에베소서 4장 24절을 근거로 지식과 의, 거룩과 같은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지식, 의, 거룩과 같은 성령의 열매들이 인생의 기초와 틀이 되도록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일단 개혁자들 대부분은 이런 의미에서의 원의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경우는 ‘원의’라는 말 자체를 스콜라 신학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해서 거절했다고 합니다. 물론 스콜라 신학으로부터 왔다고 해서 모든 것을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원의라는 말 자체는 거절했는데 여기에 대해 자세하기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측에서 원의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역사신학, 제19장 3). 즉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자신의 도덕성의 확언적 자질로서 원의를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러한 원의가 그에게 자연적이지 않고 초자연적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주장을 했는가?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구분함으로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타락과 함께 상실하게 되었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타락함에도 불구하고 상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인간이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초자연적인 은사는 상실할 수 있고 다시금 취해질 수도 있지만, 그래서 자신의 도덕적 성격의 단호한 자질로서 지금은 의가 없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합당한 자연적 능력들은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면 초자연적 은혜들이 없어도 아담이 기원적으로 부여 받은 자연적 도덕적 능력들을 가졌기에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초자연적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금 받기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종교개혁자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총대들이 원의라는 말을 쓸 때 이런 의도를 가지고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원의에 대하여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이라는 것,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실했다고 말할 때도 무상으로 받은 은사들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도덕적 본질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구성하는 요소들이 상실했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원의’라는 말 자체를 사용하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봤으면 하고, 또한 소요리문답 안에서도 부패를 설명할 때 원의의 결핍이라고 말하는 부분을 설명할 수 있지 않나 라는 점에서 굳이 이 표현이 들어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의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정하셨고 작정하신 바대로 실행하신다고 할 때 그리스도 없는 의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히려 타락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없이는 결코 의를 생각할 수 없도록 까지 하셨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지음 받은 가치와 의미가 전혀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원의라는 표현 자체는 칼빈의 입장처럼 거절해도 무방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8문은 인간이 타락한 상태에서의 죄악됨에 대하여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 원의의 결핍, 그리고 보통 원죄라고 불려지는 아담의 전 본성의 부패로 설명하고 있고, 또 그 원죄로부터 나오는 모든 실제적인 범죄로 설명하고 있지만, 인간이 타락한 상태에서의 죄악됨은 간단히 원죄와 원죄로부터 나오는 자범죄로 되어 있고, 원죄는 죄책과 부패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정리해 두시면 될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7문에서 타락은 인류에게 어떤 상태를 초래했는가 할 때 죄와 비참함의 상태를 초래했다고 말하는데, 비참함의 상태에 대해서는 소요리문답 제19문을 통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내용인즉슨 모든 인류가 그들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과 교제를 잃어버려(창3:8,10,24) 진노와 저주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엡2:2-3, 갈3:10). 그래서 현재의 생애에서의 모든 비참함, 죽음 자체, 지옥의 영원한 고통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애3:39, 롬6:23, 마25:41,46).
오늘 본문으로 읽은 에베소서 2장 1절 이하 3절이 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우선 1절을 보시면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말 번역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고 되어 있지만, 원문에서는 “너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우리 한글 번역은 2장 전반적인 내용을 서두에 요약식으로 첨가하여 번역하고 있지만 본래는 과거 너희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나 하는 것을 밝혀주고자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래 우리는 어떤 자인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입니다. 이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로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가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육체적으로 죽습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입니다. 소위 하나님과의 단절되었다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지금 에베소서 2장은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너희가 하나님과 단절되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난 뒤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숨게 됩니다. 창세기 3장 8절입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죄를 짓기 전에는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걸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을 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걸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피하여 숨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거부감, 이것이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창세기 3장 10절에서는 어떤 말도 하는가?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전에는 어떻습니까?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었고,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고 난 뒤 부끄러움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러움만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마음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심지어 24절에서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에덴 동산이 하나님과의 교제 장소라면 이제 그곳에서 쫓겨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음을 외적으로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영적인 죽음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과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모든 만물을 통해 하나님이 영원한 신성과 능력을 보이고 계시지만, 또한 칼빈의 말처럼 종교의 씨앗이 그들 속에 있어 하나님에 대하여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고, 또한 찾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피해 숨게 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상태에 있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것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떨 때 비참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학생으로서 시험을 망치게 되면 비참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왕따라는 말이 있고 학교폭력이 이슈처럼 되고 있는데, 왕따를 당하고 학교폭력의 피해대상이 되면 비참합니까? 직장인으로서 충분한 물질을 벌지 못할 때 비참하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그것도 비참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 외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비참한 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비참이요, 하나님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 비참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되 단순히 싫다는 의미에서 두려워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비참하다고 느껴야 할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 느끼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있다고 하면서도 못 느낍니다. 매 주일 예배를 드리러 옵니다. 정말 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고 인식해야 할 것이 있는데, 세상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우리로 하여금 비참하게 만들 수 있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비참함은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데 있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을 보시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는 영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2절과 3절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의 비참한 상태는 하나님과의 단절만이 아니라 이제는 진노를 받아 마땅한 자가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되, 그렇게 원하는 것이 다 죄만을 향해 가는 자들입니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결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선이 아니라 악을 향해서만 갈 뿐입니다.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죄를 항해서만 나아갈 뿐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거나 행하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러운 존재, 하나님의 원수, 죽음의 상속자인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비참함입니다.
우리의 비참함은 하나님과의 단절, 그리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비참함은 타락으로 인하여 현세와 내세에 형벌을 받게 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현세에서는 어떤 벌을 받느냐? 일단 마음의 눈이 어두워졌습니다(엡4:18).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상실한 마음 그대로를 내버려두었습니다(롬1:28). 유혹을 통해 거짓 것을 믿게 하도록도 하셨습니다(살후2:11). 마음이 강퍅하여 회개하지 않으며(롬2:5), 양심이 공포에 사로잡혀 두려워 떨게 하셨습니다(창4:13, 사33:14). 그리고 수치스러운 욕정에 끌려 가도록도 하셨습니다(롬1:26). 이것이 현세의 내적인 형벌이라면, 외적으로는 수고해야 먹고 마실 수 있는, 그리고 여자에게는 잉태의 고통, 그리고 여러 가지 악의 문제들이 사실 형벌의 내용으로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형벌은 어떤 형벌과 연결되는가? 장차 오게 될 세상에서 받는 형벌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것(살후1:9), 또한 영과 육이 영원한 지옥 불에서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 것(막9:43,48, 눅16:24)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우리의 본래적인 상태를 보게 하는가? 이런 처지를 알 때 우리의 모든 자랑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요, 도리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로 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받는 위로만이 우리의 참된 위로임을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죄는 아담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법적 선언을 분명히 합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일반적인 출생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는 예외입니다. 즉 그리스도 외에 모든 인류는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죄책을 가지는데, 그 결과 모든 인류는 전적인 부패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인간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며(렘17:9, 마15:19), 인간의 지혜는 오류에 휩싸여 어둡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그 분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악으로 가득 차 있어서 모든 영적 선을 전적으로 싫어할 뿐만 아니라 행할 수도 없습니다. 악으로 전적으로 기울어져 선을 행하고자 하지도 않습니다(창6:5, 롬3:10-19, 8:7-8, 엡2:1-3). 인간의 양심은 더러우며(딛1:15), 모든 지체는 불의의 도구가 됩니다(롬6:13). 이런 본성의 전적인 부패로 말미암아 우리가 실제적으로 죄를 범하는 자범죄가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우리를 위해 오셨고, 이런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이런 우리를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는 데 있습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높고 깊은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죄와 비참함이 어떠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높고 깊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