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19
갈라디아서 4장 4-5절 [제21-22문]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죄와 비참함의 상태에서 멸망하게 내버려두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완전히 선한 기뻐하심으로부터 영원 전에 어떤 자들을 영생으로 택하셨는데, 그들을 구속자로 말미암아 죄와 비참함의 자리에서 건져내어 구원의 자리로 이끌기 위하여 은혜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때 은혜언약의 내용은 무엇인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창17:7-8). 이것은 최고선이신 하나님 자신을 가장 큰 상급으로 주시겠다는 약속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창15:1). 최고 상급이신 하나님 자신을 주시되 주시는 방식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무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자격이나 공로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이루신다는 측면에서 은혜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언약의 모든 내용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의 내용을 누구에게 주시는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입니다. 예정론의 내용에서 선택과 유기가 있다고 할 때 바로 택하신 자들에게 이 은혜의 내용을 주시는 겁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들을 위하여 중보자를 세워주시고, 죄인들로 하여금 중보자와 관계를 맺도록 하십니다. 바로 이 중보자를 통하여 영생과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택한 자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중보자를 통해 이루신 모든 일을 믿게 하시고, 믿음에 합당한 열매까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채우십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살피겠지만 성화 부분에 있어서도 성경을 따라 고백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면 ‘성화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사역’이라고 고백할 정도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사역이기 때문에 성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은 전혀 필요가 없는가? 성경이 그렇게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요리문답 역시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그리고 그런 감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도록 권면합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도록 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모든 것에 있어 하나님의 은혜가 앞선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부분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언약의 모든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라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믿음의 자라남도 경험하지만 때로는 믿음이 떨어지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러나 은혜언약 안에 있는 자들은 결코 믿음에서 완전히 떠나는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외아들조차 우리를 위해 주실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외아들까지 주실 정도인데, 어떻게 그들을 버리실 수 있겠습니까? 즉 시작부터 과정,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은혜로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십니다(출34:6).
오늘 우리가 살필 내용은 은혜언약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중보자에 대한 내용인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20문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완전히 선한 기뻐하심으로부터 영원 전에 어떤 자들을 영생으로 택하시고, 그들을 구속자로 말미암아 죄와 비참함의 자리에서 건져 내어 구원의 자리로 이끄신다고 할 때 소요리문답 21문은 이 구속자는 누구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제21문.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들의 구속자는 누구십니까?
답.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들의 유일한 구속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딤전2:5-6).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요1:14, 갈4:4). (그 때부터) 구별된 두 본성과 한 위격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으로 그렇게 계셨고, 그렇게 계속 영원히 계십니다(롬9:5, 눅1:35, 골2:9, 히7:24-25).
이어 22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람이 되셨는가를 설명합니다.
제22문.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람이 되셨습니까?
답.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참된 몸과(히2:14,16, 10:5) 지각있는 영혼을(마26:38) 취하사 성령의 권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심으로(눅1:31,35,42, 갈4:4)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죄는 없으십니다(히4:15, 7:26).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고 그와 함께 타락하였다면 죄와 비참함에서 구속하시는 분도 오직 한 분이신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담이 모든 인류의 대표이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의 대표 혹은 모든 택자의 대표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면서 사람이 되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오늘 본문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을 보시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고 그와 함께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와 비참함에서 구속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고자 하셨는데, 아담의 범죄 이후 곧바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한참 후에야 보내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때와 기간에 대해서도 정하신 바가 있었고, 바로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주셨지만 아들을 보내시기 전에는 다른 구속자를 필요로 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유일한 구속자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다만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기 때문에 구약의 경우 히브리서 1장의 증거처럼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실 때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속함을 받게 하셨다면 신약의 경우는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속함을 받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본문을 통해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과 아들을 보내실 때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누구신가 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과 더불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와 같이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씀합니다.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한 분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성부로부터 나셨다는 것인데, 주의해야 할 것은 나셨다고 하기 때문에 나지 않은 때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아리우스 이단의 경우 나셨다는 것 때문에 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 역시도 피조물이라는 주장을 하여 이단으로 정죄된 바가 있었는데, 이것은 나셨다는 말을 사람이 태어나는 것처럼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자의 나심을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증거 합니다. 삼위일체와 관련해 살필 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삼위로 계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설명하는 말씀은 성자이신데,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칭해지는 하나님은 말씀과 함께 계셨다고 말하는 분과는 구별됩니다. 즉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삼위로 계신다고 할 때 위격상호간의 관계를 따라 성부 그리고 상자, 성령 이렇게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에 앞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배웠는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영이시며, 그의 존재, 지혜, 권능, 거룩, 공의, 선하심, 진실하심에 있어서 무한하시며 영원하시며 불변하십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4문). 이때 하나님은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 성령이 동일한 속성을 가집니다.
예를 들어 성부가 무한하시다면 성자도 무한하시고 성령도 무한하십니다. 동일하게 성부가 영원하시다면 성자도 영원하시고 성령도 영원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성부가 불변하시다면 성자도 불변하시고 성령도 불변하십니다.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시지만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속성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백하는 바는 삼위 하나님이 동일본질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동일본질이시기 때문에 모든 속성이 각 위격마다 동일한 내용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 위격마다 속성이 동일하다고 해서 구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표현을 통해 각 위격의 고유성 혹은 구별성이 분명 있습니다. 이런 구별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면 성부는 곧 성자고, 성자는 곧 성령이고, 성령은 곧 성부라는 식으로 이해하게 되는데, 이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별성은 성부는 성자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성자는 성령이 아니라는 사실, 성령 또한 성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통해 나타납니다. 성부는 오직 성부이시고, 성자는 오직 성자이시고, 성령은 오직 성령이십니다. 특히 성부에 대하여 성경은 누구로부터 났다(발생), 누구로부터 나오신다는 표현이 없습니다(발출). 그래서 성부를 전 신성의 근원으로 표현합니다. 반면 성자의 근원은 성부이십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자가 성부로부터 났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근원은 성부와 성자이신데, 왜냐하면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났다, 나오신다는 표현을 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 나오지 않은 때가 있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은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요한복음 1장의 내용으로 와서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할 때 누군가 생각하는 것처럼 말씀은 결코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부에게 돌아가는 모든 속성은 성자에게도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성부가 영이신 것처럼 성자도 영이십니다. 성부가 무한 영원 불변하신 것처럼 성자 역시도 무한 영원 불변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 않았고, 그분은 물질적인 존재도 아니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증거 하고 있는 것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표현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성육신하셨다고 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사람이 되셨다고 할 때, 요한복음 1장 14절의 표현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할 때 그분의 신성에는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성자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신성을 포기하고 사람으로 변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성을 취하셨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님이심을 부정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2장 9절에 보면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표현합니다. 육체를 취하셨지만, 그래서 사람이 되셨지만, 신성이 없는 분으로 계신 것이 아니라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자께서 인성을 취하셨다고 할지라도 영원 전부터 인성을 취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때가 차기까지는 인성을 취하신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 전부터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사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혹은 이 땅에서 사역하는 동안에는 인성을 취하셨지만, 승천하신 이후로는 신성만 가지고 계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셨고, 이후로도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의 죽음 그리고 부활, 승천과 재림까지 모든 내용이 인성을 취하신 상태에서 행하게 되는 내용으로 있습니다.
세 번째는 성자께서 성부와 성령과 동일본질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성부 성자 성령이 동일본질이기 때문에 성자 외에 성부도, 그리고 성령도 인성을 취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즉 여자에게 나시고, 이후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금 사시고, 하늘에 오르셨다고 다시금 이 땅에 내려오시는 분은 오직 성자만이 하신 것입니다. 성부와 성령께서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자께서 성육신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재림하시지만, 이 모든 것을 통한 구원의 전 역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이런 신성과 인성에 대하여 451년 칼케돈 신조에서는 신성과 인성은 나눠지거나 분리되지 않으며, 서로 혼합되거나 전이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고백 때문에 칼빈은 성찬에 임하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단순히 영적 임재라고만 말하지 않고 Totus[토투스], Totum[토툼]으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보통 영적 임재라고 할 때 신성으로 임한다는 것을 말하지만 신성과 인성은 나눠지거나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 해 두었던 겁니다. 그래서 칼빈은 성찬에 임하는 그리스도는 전(Totus) 그리스도가 임하되, 그리스도께 속하는 모든 것(Totum)이 임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던 겁니다.
더불어 680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그리스도의 의지가 단일하다는 것에 대하여 정죄하면서 그리스도에게는 두 의지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신성으로서의 의지와 인성으로서의 의지가 그것입니다. 다만 두 의지이기 때문에 신성으로서의 의지와 인성으로서의 의지가 충돌되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성으로서의 의지가 신성으로서의 의지에 복종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겟세마네라는 곳에서 기도하실 때 잘 드러납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을 읽어드리면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인성으로서의 의지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너무나도 큰 고통이기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지나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런 인성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 달리 표현하면 신성의 의지에 복종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때가 차매’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이 되셔야만 했는가? 오늘 본문 5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4절에 보면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다고 말하는데, 율법 아래 나게 하신 이유가 뭐냐?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달리 말하면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하기 위해서란 것입니다. 사람이 되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그것도 모든 사람이 아니라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특별히 여기 ‘속량’(贖良)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속’(贖)이라는 단어의 한자는 재물을 바치고 죄를 면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헬라어 원문의 의미로는 자유하게 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한데, 본래는 우리가 누구의 종이었냐 하면 죄의 종입니다. 그런 자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속량금이 되어 주셔서 죄에서 자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몇 주 전에 배웠던 것처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안에서 죄의 책임과 부패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 모두가 죄의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의 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외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어떤 자들을 선택하시되, 죄를 고려하지 않고 택하셨습니다. 때문에 그들을 버릴 수 있는가? 하나님의 속성상 결코 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가 있는 상태 그대로 그들을 받으실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언약을 맺으셔서 죄의 종으로 있던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물론 죄의 종으로 있던 우리를 해방시키실 때 그냥 해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죄의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하나님의 율법에 합당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사람이 죄에 대한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담 이후 모든 인류는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때문에 죄의 값을 그 스스로가 지불할 수는 없습니다. 그 스스로 지불할 수 있는 것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거기서 구원을 논할 수 있는가? 자유를 논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필요한가 하면 죄 없는 사람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인을 대신해서 죄 값을 지불할 죄 없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되 인성을 취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성을 취하시되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취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신성으로 계셨지만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이때 인성은 우리와 같은 육체와 함께 영혼을 취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모든 것에 있어서 우리와 동일하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는데, 죄는 없으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4장 15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러분,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은 인간이 겪는 모든 것을 친히 겪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성과 함께 인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은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신성을 따라서는 슬픔도 없고 고통도 받으실 수 없지만, 인성을 따라서는 슬픔도 있고 고통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40일 동안 금식하심으로 배고픔도 느끼셨습니다. 또한 백성들을 보면서 슬퍼하기도 하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습니다.
조금 더 정리하자면 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때 성경은 어떤 때는 신성을 따라서 하는 말이 있고, 어떤 때는 인성을 따라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빌립보서 2장에 있는 말씀을 따라 표현하기도 하는데, 6절과 7절에 의하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여기서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과 종의 형체라는 말이 나오는데, 신성을 따라 하는 말 혹은 하나님의 본체를 따라 하는 말과 인성을 따라 하는 말 혹은 종의 형체를 따라 하는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본체로는 성부와 성령과 동등하십니다. 그러나 종의 형체로서는 성부와 성령과 그 자신보다 작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가 나보다 크시다는 말도 하는 것이고(요14:28),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무엇을 한다고도 말씀하시는 겁니다(마12:28). 동일하게 하나님의 본체로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으며(요1:3), 종의 형체로는 여자에게서 나시고 율법 아래서 나셨습니다(갈4:4). 하나님의 본체로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시며(골1:15), 종의 형체로는 그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골1:18). 하나님의 본체로는 성부와 하나이시며(요10:30), 종의 형체로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오셨습니다(요6:38-39). 하나님의 본체로는 성부의 것이 다 그의 것이지만(요16:15), 종의 형체로는 그의 교훈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분의 것입니다(요17:10, 7:16).
여러분, 성령에 대하여 우리는 이중발출을 말합니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시고, 성자로부터도 나오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본체로는 성령을 주십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받으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때는 하나님의 본체가 아니라 종의 형체를 따라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본체로는 율법을 주셨지만, 종의 형체로는 율법에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로는 아버지와 동등하시기 때문에 기도를 들으시는 분으로 계시지만, 종의 형체로는 아버지보다 작으시기 때문에 기도를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심판과 관련하여 그 날과 그 때에 대하여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른다고 하면서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마24:36) 할 때는 무엇을 따라 한 말이겠습니까? 종의 형체를 따라 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본체를 따라서는 모를 수가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가 하나인데 어떻게 모르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종의 형체를 따라서는 모른다고 말하시는 겁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함께 인성을 가지고 계신데, 인성은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는 죄와 결부되어 있지만, 예수님은 결코 죄와 결부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죄가 없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님께서 대신하여 죽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담이 모든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못함으로 죄인이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택자들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뿐 아니라 그 모든 죄의 값을 치르심으로 의의 첫 열매가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누가 받느냐? 믿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마태복음 1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한 자라는 뜻입니다. 모두가 아닙니다. 자기 백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제한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담은 불순종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택자의 머리로서 순종하기 위해서 오셨고, 그 순종으로 말미암아 의를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의만 주시는가?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춰져 있는데, 그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거기에 거룩이 있고, 거기에 영화가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인 이상 어느 누구도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이상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것이라는 말은 로마서 14장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더 이상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이전에는 죄의 종으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율법 아래에서 율법을 거스르며 살았습니다. 율법의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의 것이 된 이후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자가 되었습니다(롬14:8).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감사함으로 율법을 따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물론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요일일서 5장에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한다고 말씀하시지만(요일5:18) 이것은 사탄의 괴롭힘이 전혀 없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욥처럼 괴롭힘 당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만 당할 뿐이고, 나아가 그런 일이 있다고 해서 사탄에게 내어준 바 되는 그런 일은 결코 없다는 뜻입니다. 환난도 있고, 곤고도 있고, 핍박도 있고, 기근도 있고, 적신, 위험, 칼, 사망과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지만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들조차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누가 끊을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우리는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것도 우리를 흔들지 못한다고 분명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