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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02-롬11장36절[제1문]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0.09.13|조회수507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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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02

로마서 11장 36절 [제1문]

 

지난주 우리는 서론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배워야 하는지를 살폈습니다. 특히 소요리문답과 같은 내용을 배워야 할 이유로 그것이 거짓 해석으로부터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작성된 것, 다시 말해 성경 해석의 산물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로마서 12장 6절의 말씀으로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정당한 해석으로 자리하는지에 대해 살폈습니다. 오늘부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내용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첫 번째 문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문.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답.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고전10:31, 롬11:36)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시73:25-28).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전 삶의 목적을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데, 소요리문답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둘째는 그분만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두 가지 내용 가운데 첫 번째 부분과 관련해서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소요리문답을 보면 인간의 목적을 말하면서 제일 되는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여러 가지 목적들이 있겠지만 그 중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목적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의식주와 관련해서 말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의식주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주 가운데서도 식(食), 즉 밥과 관련해서는 기본적인 요소 가운데서도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먹고 마시지 않고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많은 사람들이 삶을 살아간다고 할 때 먹고 마시는 문제로 고민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삶의 목적인 것처럼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기본적인 것보다 좀 더 높은 목적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 중 하나가 인간애(人間愛)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좁게는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넓게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하는 모든 것이 인간애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테레사 수녀, 오드리 햅번과 같은 사람은 이런 면에서 칭찬과 존경을 받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대부분의 목적은 무엇을 향해 있느냐 하면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거나 좀 더 고차원적이라면 인간이 중심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의 삶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로 염려하지만, 그것은 너희 삶의 목적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마6:31 참조). 인간에 대한 사랑, 그것도 중요합니다. 성경의 가르침 가운데 이웃 사랑이 있기 때문에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의 삶의 목적은 그것으로 다 표현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오히려 고린도전서 10장 31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것조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기본 중에 기본인 먹고 마시는 것조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이고,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것보다 높은 차원의 목적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즉 무슨 목적을 가지든 그것은 제일 되는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이웃 사랑의 정신도 중요하지만 앞서 하나님 사랑이 먼저 있어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는가?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그 이유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일단 오늘 본문이 나오기까지의 내용을 간략하게 생각해 보겠는데, 로마서는 성경의 다른 책들보다 교리적으로 가장 잘 요약해 주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로마서를 통해 우리는 ‘이신칭의’를 배우게 되는데. 이신칭의란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칭해지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는 것입니다. 이 교리가 종교개혁자들에게는 매우 뜻 깊은 내용이었는데, 왜냐하면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의 교리 가운데는 믿음만이 아니라 행위가 있어야지만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톨릭의 교리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을 말 하는가 했을 때 로마서는, 로마서뿐만 아니라 사실은 모든 성경이 동일하게 말하는데, 바로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로마서 하면 이신칭의를 떠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가 그것만 말하느냐? 거기까지만 말하느냐? 분명 우리는 로마서를 통해 이신칭의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것이 핵심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핵심이 시작이고 끝이냐 할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질문해 봅시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습니까? 대부분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할 때 “예수님 믿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것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었다고 할 때 그 믿음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다시 말해 믿음의 출처가 어떻게 되는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이 대표적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기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도 확인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이 ‘그 은혜에 의하여’라는 말의 수식에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그 은혜가 아니면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믿음은 무엇인가? 너희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로마서에서도 이런 내용이 확인됩니다. 그러니까 로마서가 이신칭의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이신칭의까지만 말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좀 더 간단히 말해 예수 믿어야지만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만 말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신칭의를 말하면서도 그것이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란 것도 말합니다. 심지어 좀 더 근원적인 내용으로까지 들어가는데, 그것이 로마서 9장 이하 11장까지의 내용입니다. 바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되, 그 믿음을 누가 누구에게 주시는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선택하신 자들에게만 주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선택만 말하지 않고 유기도 말합니다. 그런 선택과 유기는 예지예정을 말하는 사람들처럼 누가 믿을지, 누가 믿지 않을지를 미리 보시고서 선택하고 유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으로 말미암아 선택과 유기가 있다는 것까지 말씀합니다. 단순히 예수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준다는 것까지 말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선택하셨지만 구원의 은혜를 받는 시기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기 때문에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어 그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실 때 우리에게 있는 어떤 조건이나 공로를 보시고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 전에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통해 알려지는 그리스도를 알게 하심으로 믿음 안에서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은혜로 말미암아 된 일임을 가르칩니다. 우리로부터 출발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라 할 때 그 핵심을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에만 둔다면 그것은 복음을 다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달리 말하면 복음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시작과 끝은 아니란 소리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9장 이하 11장의 내용이 확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오늘 본문 앞에서는 어떤 말씀까지 하시느냐 하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11:33-35) 이신칭의의 교리, 나아가 선택과 유기와 관련된 예정의 교리 등 이 모든 가르침이 얼마나 깊은지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판단을 헤아린 자가 없으며, 그의 길을 찾은 자가 없습니다. 특히 35절에서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고 말씀하시는데, 한 마디로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총체에 있어서 인간에게 돌아갈 수 있는 어떤 공로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군가에 의해 좌우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그리고 하나님 홀로 일하실 뿐입니다.

그리고 이어 나오는 말씀이 오늘 본문인 36절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한 마디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을 빼놓고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물의 창조와 다스리시고 붙드시는 것, 나아가 완성이 그분에게 있다면,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앞서 “왜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는가?” 했을 때 오늘 본문이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고 했는데, 이런 이해 속에서 창조와 구원의 전 과정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모든 만물의 출발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창세기 1장 1이 그것을 분명히 증거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 없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즉 시간과 공간이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천지라고 말하기 때문에 단순히 하늘과 땅만이 아니라, 모든 만물을 다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시간 안에서 살고, 공간 안에서 살지만 본래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시간과 공간까지도 다 만드셨습니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 외에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모든 것을 다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죄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럼 죄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인가? 하나님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하나님은 죄의 창조자이신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는 속성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은 죄를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 없이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작정하실 때 죄에 대한 작정을 하지 않으셨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것을 작정하실 때 죄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없었는데 소위 우연처럼 생겨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죄의 저자가 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를 뜻하시되 자신이 죄의 저자가 아닌 방식으로 뜻하실 수 있으십니다. 어려울 수 있고 이해되지 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속성의 어떤 부분도 충돌되어야 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한계로 있을 뿐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죄가 있을 수 없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생각해 본다면 결코 죄의 창조자, 죄의 승인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런 분이 모든 만물을 만드실 때 그냥 만드신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시고 만드셨는데, 그 목적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100편 3에 보면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라는 표현이 있는데,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는 창조만이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를 올려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내용입니다. 달리 말하면 구속하실 때의 목적만이 아니라 우리를 지으신 목적 또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7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요한계시록 4장 11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그러므로 모든 인생은 이 창조만 생각해 보더라도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창조의 목적대로 인간이 살아갔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의 조상인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우리와 같은 전적인 부패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죄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모든 것을 허락하시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한 그 한 가지 명령을 어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선악과 명령의 본질은 창조 질서를 나타내는 데 있습니다. 모든 만물을 만드시되 맨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모든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모든 만물의 으뜸입니다. 그러나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지만 그도 역시 피조물임을 기억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명령을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허락하셨지만 먹지 말라고 한 하나의 금지령을 통해 사람이 누구 아래 있는지를 확인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 아래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살아야 할 존재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금하신 것을 따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인간이 불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죄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하지만, 더 이상 영화롭게 하지 않겠다고 반응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마땅히 순종해야 할 자가 순종하지 않는 것, 소요리문답 제14문으로 하자면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있어서 어떤 결핍이 있거나 혹은 그 법을 범하는 것, 이것이 죄입니다.

무엇보다 창세기의 내용을 보면 사단이 유혹할 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하니까 그것을 따먹게 되는데, 이런 면은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의 피조물로 살기 싫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픈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 결과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래서 숨게 되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핑계와 탓을 할 뿐 하나님의 속성에 합당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심지어 창세기를 살펴보면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태어난 친 형제 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살인 사건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입니다. 이후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점점 세상에는 죄가 관영할 뿐 그 죄를 다스리는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홍수를 내리셔서 모두를 쓸어버리셨습니다. 노아를 비롯한 여덟 식구만을 남겨놓고는 다 죽이셨습니다. 이것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후 노아의 식구로 시작해서 온 땅에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인류를 번성하게 하셨지만 죄는 여전히 근절되지 않았습니다. 노아 전의 상태처럼 죄는 계속해서 관영해 갈 뿐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인류의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게 뭐냐?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노아에 대해서도 언급했지만 노아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성경은 노아에 대하여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로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합니다(창6:8). 그러나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할 때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창6:7). 달리 말하면 노아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된 것은 그의 남다름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먼저 은혜를 베푸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노아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는 자로 있을 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로마서는 어떤 표현까지 합니까?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즉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누구도 예외 없이 죄인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죄인이기에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 바로 구원의 역사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로마서 11장에 기록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관련해서 기록된 내용입니다. 누구도 그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심판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두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중 일부를 구원하시는데, 로마서 9장에 의하면 이미 영원 전에 구원하시기로 할 자와 그렇지 않는 자를 구별해 두셨습니다. 이것이 선택과 유기입니다. 그러나 선택 받은 자가 그들 스스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부터 전 과정이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맨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죄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찾으시는 분이 누구시냐?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시는데, 그 가운데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소위 원복음이라는 내용입니다. 노아 역시 무엇이 앞섭니까? 그가 의인이라고 불리지만 앞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음을 증거 합니다. 어떻게 해서 의인이라 칭해질 수 있었는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그의 아버지 데라가 고향에서 다른 신을 섬기고 있었는데, 아브라함도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그를 찾아가셔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죄로 말미암아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만 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먼저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가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일부를, 예정론으로 말하자면 영원 전에 선택하신 자들을 찾아가시고 말씀하심으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구원의 시작은 누구를 통해서냐? 하나님입니다. 이미 영원 전부터 택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먼저 그를 찾은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우리를 선택하시고, 또한 그 선택에 따라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죄를 생각해 본다면 영원한 지옥 형벌이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우리를 구원하신 겁니다. 이 은혜에 대하여 마땅히 감사 찬송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런 측면에서 인간이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 시작만 하시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고 할 때 모든 구원의 과정, 그리고 구원의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친히 이끄신다는 것까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빌립보서 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구원을 시작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까지 역사하신다는 겁니다.

물론 같은 빌립보서 2장에서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어떤 이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기 때문에 구원을 이루어가야 할 자는 바로 이 명령을 듣고 있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구원의 일부를 담당하시지만 인간도 구원의 일부를 담당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이 있다고 해서 구원의 일부라도 인간에게 돌릴 수 있는 것이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선한 것들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라고 말씀하기도 하는 겁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시지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누구시냐?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은혜로 말미암아 수고함이 있었지만 그 수고조차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전적 자기 부정이 있는 겁니다. 바로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때 이런 의미에서 말하지 않는 은혜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은혜, 성경은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오늘 본문을 보시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이라고 말씀합니다. 창조든, 구속이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앞서 창조에 대해서만 말했지만 섭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온 우주만물에 대하여 하나도 빠짐없이 다 섭리하십니다. 즉 그분이 친히 다스리시고 그분이 친히 유지하시며 그분이 친히 이끌어 가십니다. 오늘날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마치 우주만물이 스스로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어떤 법칙들을 말하지만 하나님의 붙드심 없이는 어떤 것도 그것이 그것으로서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인격적 피조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먹고 마시고 누리는 모든 것은 누구로 말미암느냐?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고 고백해야 하는 것이 모든 만물이요, 무엇보다 인격적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믿지 않는 자가 받아들이는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부인하고, 하나님의 창조 그리고 섭리도 부인합니다. 부인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때문에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심판 외에는 없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음으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데(행12:23), 헤롯은 어떤 인물인가 하면 믿는 자가 아닙니다. 믿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고 있는 것은 믿는 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신다는 측면만으로도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않는 모든 자는 심판 외에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자들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으며, 또한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 대하여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조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조차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때문에 모든 인간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지만 실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자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들 외에는 없습니다. 마땅히 믿는 자들은 그들의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인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에베소서 1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1:3-6) 창세전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때가 되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마땅한 바는 무엇인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첫 번째 문항입니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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