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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34-마22장37-40절[제41-42문]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1.11.03|조회수191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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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34

마태복음 22장 37-40절 [제41-42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첫 번째 부분은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믿어야 할 바에 대한 내용이고 두 번째 부분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무에 대한 내용입니다. 지난 시간부터 두 번째 부분을 살피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소요리문답 39문).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규범을 위해 도덕법을 계시하셨는데(소요리문답 40문), 이 도덕법을 율법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율법이 아니라 의식법과 재판법을 제외한 율법입니다.

일단 도덕법은 하나님께서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에게 주신 순종의 규범으로 아담 이후 모든 시대, 모든 장소, 모든 사람에게 구속력이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 도덕법으로부터 예외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율법을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본성적으로 율법을 지킬 때가 있습니다(롬2:14). 성경은 이것을 양심의 증거라고 하는데(롬2:15), 이 양심을 통해 사람은 사회 전반에 어느 정도 질서와 공의를 세우게 됩니다. 비록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가 함께 타락하였지만, 그래서 양심도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가 모든 것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양심을 통해 사회가 어느 정도 질서와 공의를 보존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이 주신 도덕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고, 때문에 누구도 도덕법에 대하여 핑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양심의 법, 다시 말해 도덕법을 모세 시대 때 기록의 형태로 남기셨는데, 그것을 요약한 것이 십계명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41문을 보면,

 

제41문. 도덕법이 간략하게 포함되어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답. 도덕법은 십계명에 간략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신10:4, 마19:17).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모세 시대 때 주신 율법, 그 안에서도 의식법과 재판법을 제외한 열 개의 계명을 통해 하나님은 도덕법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열 개의 계명을 요약한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인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42문을 보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제42문. 십계명의 개요는 무엇입니까?

답. 십계명의 개요는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우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마22:37-40).

 

여기서 우리는 십계명이 비록 열 개의 계명으로 되어 있지만 두 부분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할 때 어떻게 사랑하라고 하시는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할 때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 오늘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본문의 내용이 나오게 된 것이 한 율법사의 다음과 같이 질문 때문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6절을 보시면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여기에 대해 37절 이하 40절의 말씀으로 답변하신 겁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즉 열 개의 계명 중 처음 네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이고, 나머지 여섯 계명에 대해서는 그와 같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 돌판 부분인 하나님 사랑에 있어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신명기 65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럼 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시는가? 신명기 64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실제로 오늘 본문과 동일한 내용을 말하고 있는 마가복음의 경우는 신명기 6장 5절만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4절까지를 언급합니다. 마가복음 12장 29절과 30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신명기 6장에서는 여호와가 오직 유일한 여호와로 표현하고 있다면, 이것을 인용하면서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이 유일한 주님이시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여호와요, 주님이시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여러분, 여호와란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하나님만 스스로 계시기 때문에 스스로 계신 분외에 나머지는 피조물입니다. 스스로 계신 분, 즉 하나님에 의해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고백합니다. 모든 피조물을 지으신 하나님, 때문에 그분만이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측면만 보더라도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모든 피조물은 본문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만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사랑해야 할 피조물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서는 마땅히 하나님을 섬겨야 할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자신 혹은 피조물을 섬기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서 23절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나 이런 저들을 내버려두셨는가? 모두는 아닐지라도 영원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을 구속자로 말미암아 죄와 비참함의 자리에서 건져내어 구원의 자리로 이끌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은혜언약을 맺으셨는데, 그 언약을 위해 유일한 구속자로 세우신 분이 누구시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할 때 창조라는 측면에서는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타락한 존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속자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데, 구원자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의 주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십계명의 처음 네 개의 계명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주십니다.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출애굽기 20장 3절 에서 11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각 계명에 대해서는 우리가 살펴나갈 것이기 때문에 세세하게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첫 번째 계명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계명은 무엇입니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 자리에 무엇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을 때 사람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리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이나 피조물을 대체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 물론 이런 내용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지만 중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떤 모습이 자주 비춰지는가? 하나님을 다른 신으로 바꾸지는 않으나 겸하여 섬기는 일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섬기지만 하나님 외에 우상도 섬기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혼합주의 신앙이 나타나더란 것입니다. 이것을 마태복음에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면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기도 하는데(마6:24), 하나님만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나눠지지 않는 것입니다.

나머지 2에서 4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과 어떤 것이든 섬기기 위하여 형상화하지 말라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 그리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무엇이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구체적인 내용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계명들 지킴으로, 그것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지킴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겁니다.

 

두 번째 돌판 부분인 이웃 사랑을 생각하기에 앞서 율법사가 질문한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그의 질문은 율법 중 어느 계명이 큰가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첫째 되는 계명과 둘째 되는 계명으로 답변하십니다. 얼핏 첫째 되는 계명이 크고 둘째 계명은 작은 것으로 오해될 수 있고, 실제로 유대인들은 크고 작은 계명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작은 계명의 경우 큰 계명을 지킬 때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등한시하기까지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고르반입니다. 그런데 이 고르반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느냐? 마가복음 7장 11절에서 13절입니다.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너희의 전통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폐하기까지 하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어떤 말씀도 폐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은 어느 하나라도 등한시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마5:17). 그런 측면에서 첫째와 둘째로 나누었지만 첫째는 중요하고 둘째는 덜 중요해서 나눈 게 아닙니다. 대상이 하나님이냐, 사람이냐에 따라 나누었을 뿐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면서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설명하면서 둘째 계명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느냐?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둘째도 첫 번째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토마스 카트라이트라는 개혁자는(기독교교리강론 제19장) 첫 번째 돌판에서 얻은 유익의 풍부함에 따라 우리는 두 번째 돌판에서 유익을 얻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 있어서 두 번째 돌판 부분에서 요구하는 의무들에서 전진함으로서, 첫 번째 돌판의 의무들에 대해서 성실해지고, 공정해질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한 마디로 첫 번째 돌판과 두 번째 돌판은 따로 떼어 낼 수 없을 만큼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답변은 율법사의 질문처럼 어느 계명이 큰가에 초점을 맞춰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선해야 할 부분은 첫 번째 돌판 부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번째 돌판 부분을 소홀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측면에서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특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할 때 요구하시는 그 뜻은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이웃 사랑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외에는 다 미워하라는 그런 의미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도덕법으로서 두 부분으로 된 내용을 말씀하셨다면 어느 하나도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 돌판 부분인 이웃도 사랑해야 하는데, 이웃 사랑과 관련해서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첫 번째는 하나님 사랑이고, 두 번째는 자기 자신 사랑이고, 그리고 세 번째가 이웃 사랑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사랑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 내면의 상처에 대한 관심이 많고, 그래서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 할 때 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으로 뭔가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는 시도들이 있는데, 이웃 사랑에 있어서 ‘네 자신과 같이’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네 자신을 먼저 사랑하라는 의미로서 말씀하신 것인가?

일단 성경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주의하라고 가르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과 2절에 보면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딤후3:1-2)라고 말씀합니다. 말세에 나타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자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말씀하시는 내용은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 부정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를 사랑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되 얼마나 사랑하는가? 죄성을 가진 인간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합니다. 죄가 없었던 맨 첫 사람도 죄의 유혹을 받았을 때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자기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죄성을 가졌다면 더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가? 나아가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당연히 이웃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존재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두기만 하면 사람은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혹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인류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자신을 희생해서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하지 않은 사람이 그런 일을 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양심의 주인으로서 선을 더욱 장려하도록 하기 위해 그런 역사를 펼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불신자의 선은 하나님 앞에서 선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믿음을 따라 행한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선으로 여기고 칭찬을 하는 면이 있고 또 실제로 우리도 그런 모습을 통해 칭찬해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선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들 안에도 여전히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숨겨져 있는 것처럼 있을 뿐이지, 자기 사랑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누구도 예외 없이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를 사랑합니다. 자기애(自己愛)가 강한 존재요, 그래서 자기를 향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웃 사랑을 말씀하실 때 이웃 사랑의 규범으로 이웃을 너와 동등하게 여기며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네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에 동일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2에 보면 이웃 사랑과 관련해서 이런 식으로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소위 황금률,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윤리의 근본 원리라고 알려진 내용인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면 너 자신이 남을 대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을 대접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남으로부터 대접을 받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가르침, 심지어 선지자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의 정신은 무엇인가? 본성은 남에게 대접을 받기를 원하지만 그와 같은 마음으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과 관련해 골로새서 3장 23절과 24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대상은 이웃에게 행하는 것으로 있지만 누구에게 하듯 하라고 하시는가? 주께 하듯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이웃 사랑에 힘쓰도록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알라고 말씀하고 있고, 나아가 너희는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즉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의 마땅한 바는 이웃 사랑인데, 이웃에 대하여 주께 하듯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에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구약 성경 전체는 바로 이 두 계명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오경부터 시작해서 선지서에 이르기까지 구약의 모든 말씀을 통해 목표로 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되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되 최우선적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이고, 그 사랑은 반드시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향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면서 정리를 하겠는데, 누가복음 10장 25절에서 28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여기 보면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하여 본문과 같은 답을 내놓으십니다. 그리고 이를 행하면 살게 된다고 말씀하심으로 마치 율법을 지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물론 율법을 완전히 지키면 영생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타락 이후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가? 완전하게 그리고 온전하게 지킬 수 있는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갈2:16). 그럼 왜 율법을 주셨는가?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롬3:20).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7:7) 그럼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고 알게 되기 때문에 율법이 악한 것인가? 혹은 율법이 죄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있는가? 로마서 7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오히려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롬7:12). 따라서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타락한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기능 가운데는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그것을 통하여 인간의 불의를 알리고 책망하며 정죄합니다. 특별히 악인들에게는 공포심을 일으키고 절망 상태에 빠지게 하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과 인자를 바라게 합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3:24) 더불어 율법의 기능 가운데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유용성이 있는데, 바로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서의 기능을 한다는 데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는 이런 유용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대요리문답에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도덕법은 타락 이후에도 모든 사람에게 유용함을 주는데, 타락 이후 도덕법에 의해 의와 생명을 이를 사람은 없을지라도(갈2:16)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뿐만 아니라 비중생자들이나 중생자들 각각에게 개별적으로 크게 유용합니다(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94문). 이것을 대요리문답 95문에서 97문을 통해 설명하는데, 먼저 모든 사람에게 도덕법이 어떻게 유용한가?(95문)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과 뜻 및 그들의 의무를 그들에게 알려줘서 그들로 따라 행하도록 매이게 합니다. 그리고 그 법을 지키기에 그들이 무능하고 그들의 본성과 마음과 삶이 죄로 오염되었음을 깨닫게 해주며, 자신들의 죄와 비참함을 느껴 그들로 겸손케 합니다. 그로 인해 그들이 그리스도를 지녀야 할 필요와 그의 순종의 완전하심을 보다 더 잘 볼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줍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 대한 율법의 유용성이라면, 비중생자들과 중생자들에게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비중생자의 경우 다가올 진노를 피하도록 그들의 양심을 일깨워 그들을 그리스도께 몰아가거나, 아니면 죄의 상태와 길에 그들이 여전히 있는 것에 대해 그들로 핑계치 못하도록 하고, 그로 인해 저주 아래 있게 합니다(96문). 반면 중생자의 경우는 중생되고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행위언약으로서의 도덕법에서는 해방되었지만, 그래서 그로 인해 그들이 의롭게 되는 것도 아니고 정죄되는 것도 아니지만,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그 법의 일반용도 외에 그들에게 특별한 용도로 사용이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도덕법의 성취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 그들을 대신해서 그 법의 저주를 견디신 것 때문에 그들이 그리스도께 얼마나 많이 매여야 할지 그들에게 보여주고, 그로 인해 보다 더 감사하도록 자극하여 그들의 순종의 규범으로서의 도덕법에 자신들을 일치시키도록 보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동일한 감사를 나타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97문).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도덕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십계명을 배우는 게 아닙니다.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킬 수 없다는 것을 통해 우리 대신하여 도덕법을 완성하신 그리스께 더욱 매여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더욱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동시에 지킬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나태하거나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의 완성까지 주시기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감사는 하나님의 법을 지킴으로 그의 계시된 뜻에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비록 도덕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은 이 땅에서 불가능하지만, 명하신 바를 어김으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이루어 가는 것이 바로 감사로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이 도덕법이 올바른 삶의 규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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