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44
출애굽기 20장 16절 [제76-78문]
십계명의 여덟 번째 계명의 내용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으로 소유에 대한 부분을 가르칩니다. 욥기 1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리고 주신 것을 거두실 수 있는 이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실 때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도록 주셨다는 것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하여 청지기의 자세를 가지고 관리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소유에 대해서도 불의하거나 불법적인 방법으로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제8계명에 대한 해석으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의 부와 외적 재산의 합법적인 획득과 증진을 요구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의 부와 외적 재산의 합법적인 획득과 증진을 부당하게 방해하거나 방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금한다고 가르칩니다.
오늘은 십계명의 아홉 번째 계명에 대해서 살피겠는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76문부터 78문까지 제9계명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76문은 계명 자체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제76문. 제9계명은 어떤 것입니까?
답. 제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출20:16).
보통 거짓이라고 하면 사실과 어긋난 것이거나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민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왜 거짓을 말하는가? 일반적인 이해로 말하면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좀 더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진리가 그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 누구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자로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어떤 존재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즉 거짓의 시초가 누구인가 할 때 마귀란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마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는가? 본래부터 그런 것은 아닙니다. 유다서에 보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에 대하여 언급하는데(유1:6), 이들이 마귀입니다. 본래는 자기 지위,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고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 지위를 지키지 않고 버림으로,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은 결국 진리를 대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데, 이것을 요한복음 8장은 진리가 그 속에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없기 때문에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거짓을 멀리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더 이상 마귀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귀에게 속했을 때는 마귀를 따르는 자로 거짓을 좋아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면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더 이상 거짓을 좋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대하든지 하나님께서 항상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시고, 또한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의 눈은 피하거나 속일 수는 있을지 모르나,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의 눈은 피하거나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럼 9계명을 통해 가르치고자 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제9계명에 대한 해석으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77문은 9계명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78문은 9계명이 금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제77문. 제9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9계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실(슥8:16) 그리고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의 명예의 유지와 증진을 요구합니다(요삼1:12). 특히 증거 할 때에 더욱 요구합니다(잠14:5,25).
제78문. 제9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9계명은 진실(진리)에 해가 되거나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금합니다(삼상17:28, 레19:16, 시15:3).
제6계명이 생명, 제7계명이 순결, 제8계명이 소유와 관련해서 말씀하고 있다면, 제9계명은 명예와 관련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자신과 이웃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거짓을 말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명예를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선한 거짓말’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거짓을 말하기도 하지만, 죄악 된 본성을 따라 나는 모든 거짓은 자기 자신을 위하는 쪽으로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거짓으로 자신을 유익하게 하거나 반대로 거짓으로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제9계명을 통해 요구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일단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을 요구하십니다. 한 예로 에베소서 4장 25절에 보면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고 말씀합니다. 거짓은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특별히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향하여 참된 것을 말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몸이라는 것이고, 한 지체라는 것입니다. 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거짓을 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자기 자신에게 거짓을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또 유익하도록 하기 위해서 거짓을 말했지만, 그것이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여기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주님의 몸 된 교회만 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 머리되신 그리스도까지 해를 받게 됩니다. 물론 본유적인 영광이 감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거짓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이 아니라 정직이요,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상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이 우리의 지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들에게 착한 행실을 보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앞에 거짓이 아니라 정직과 진실을 나타내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특히 세상은 거짓으로 가득합니다. 죄성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고의든 아니든 항상 거짓이 가득합니다. 자신을 스스로 변호하거나 방어하기 위해서 거짓을 말하기도 하고, 남을 오해하거나 혹은 헐뜯기 위해서도 거짓을 말합니다. 이런 거짓에 대하여 얼마나 심각함을 느끼지 못하느냐 하면 소위 만우절과 같은 날을 만들어놓기까지 합니다. 이런 세상 앞에서 성도는 무엇을 나타내야 하는가? 정직이요, 진실이란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의 명예의 유지와 증진도 요구하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 자신은 비록 하나님 앞에서는 부족하고 연약한 자로 있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선한 사람이 되도록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이것은 누군가 나에게 선으로 행할 때만 선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 행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로마서 16장 19절에서는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로마서 15장 2절과 3절에서는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도 있는데, 왜 우리가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하는가?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야 하는가?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길을 걸어가셨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베드로전서 2장 12절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마태복음 5장의 말씀대로 하자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웃 앞에서 착한 행실을 나타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신의 명예를 유지하고 증진시키는 일입니다.
이웃에 대해서는 이런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데, 빌립보서 2장 3절과 4절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이웃의 명예를 유지하고 증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자 합니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아래에 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한 사람에게 모든 것, 즉 부족함이 없도록 주신 적이 없습니다. 이 말은 나에게 없는 것을 저 사람에게 주셨다는 말도 됩니다. 때문에 나보다 나은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또 실제로 낫다고 여겨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하지 모릅니다. 그런 우리가 낫다면 얼마나 낫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다른 사람에 대하여 낫다고 여겨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낫기에 나의 부족함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하고, 혹 다른 사람의 부족함, 연약함을 보더라도 그런 부족함과 연약함을 세워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자세가 이웃의 명예를 유지하고 증진하는 자세입니다.
여러분, 거짓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고 정직을 말하면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실과 정직보다는 거짓 쪽을 택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진실과 정직을 택하여 고난을 받기보다는 거짓을 택하여 평안하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을 택하여 평안을 유지한다면 그 평안은 거짓된 평안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성경은 고난이 진실과 정직으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면 그것이 곧 복되다고 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복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럼 제9계명을 통해 금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진실(진리)에 해가 되거나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금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45문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제9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진실을 해하거나,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이웃의 명예를 해하는 모든 것들(삼상17:28, 삼하16:3, 1:9,10,15,16), 특히 법원에서(레19:15, 합1:4) 거짓 증거를 제출하고(잠19:5, 6:16,19) 거짓 증인들로 거짓 맹세를 시키고(행6:13) 악한 소송을 위해 고의적으로 출두해서 변론하고 진실을 대적하고 뒤집어엎는 것(렘9:3,5, 행24:2,5, 시12:3,4, 52:1-4); 부당한 판결을 통과시켜(잠17:15, 왕상21:9-14) 악을 선이라고 선을 악이라고 부르게 하며, 의인들의 행위를 따라 악인들에게 악인들의 행위를 따라 의인들에게 갚는 것(사5:23); 위조(시119:69, 눅19:8, 16:5-7), 진실 은폐, 정당한 소송에서 부당한 침묵(레5:1, 신13:8, 행5:3,8,9, 딤후4:16), 부정한 행위에 대해 우리 스스로 책망해야 하거나(왕상1:6, 레19:17) 다른 사람들에게 고소해야 할 때(사59:4) 침묵을 지키는 것; 진실을 부적합하게 말하거나(잠29:11) 잘못된 목적을 위해 악하게 말하거나(삼상22:9,10, 시52 표제,1-5) 잘못된 의미로 왜곡시키거나(시56:5, 요2:19, 마26:60,61) 의심스럽거나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진실이나 공의에 해를 입히는 것(창3:5, 26:7,9);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함(사59:13), 거짓말(레19:11, 골3:9), 중상(시50:20), 험담(시15:3), 비방(약4:11, 렘38:4), 나쁜 소문을 퍼뜨림(레19:16), 수군거림(롬1:29,30), 비웃음(창21:9, 갈4:29), 욕설(고전6:10), 무분별하고(마7:1) 엄하고(행28:4) 불공평한(창38:24, 롬2:1) 비난; 의도들과 말들과 행동들에 있어서 지나친 오해(느6:6-8, 롬3:8, 시69:10, 삼상1:13-15, 삼하10:3); 아첨(시12:2,3), 허영심 가득한 자랑(딤후3:2),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너무 높이 혹은 너무 초라하게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눅18:9,11, 롬12:16, 고전4:6, 행12:22, 출4:10-14); 하나님의 은사들과 은혜들을 부인하는 것(욥27:5,6, 4:6); 보다 작은 잘못들을 보다 크게 문제 삼는 것(마7:3-5); 값없이 고백해야 할 때 죄들을 숨기거나 핑계대거나 가볍게 여기는 것(잠28:13, 30:20, 창3:12,13, 4:9, 렘2:35, 왕하5:25); 연약함들을 불필요하게 들춰내는 것(창9:22, 잠25:9,10); 거짓 소문들을 일으키고(출23:1), 악한 소문들을 받아들여 좋게 여기고(잠29:12), 공정한 변호를 대적하여 우리의 귀를 막는 것(행7:56,57, 욥31:13,14); 악한 의심(고전13:5, 딤전6:4); 어떤 사람의 당연한 명예를 시기하거나 슬퍼하고(민11:29, 마21:15), 그것을 손상시키려고 노력하거나 바라고(스4:12,13), 그들의 불명예와 악평을 기뻐하는 것(렘48:27); 조롱으로 가득한 멸시(시35:15,16,21, 마 27:28, 29), 무분별한 칭송(유16, 행12:22); 합법적인 약속들 파기(롬1:31, 딤후3:3); 선한 소문에 해당된 것들을 무시하거나 게을리 하고(삼상2:24), 불명예를 초래시키는 것들을 우리 자신이 행하거나 피하지 않거나 우리가 할 수 있는데도 다른 사람들을 막지 않는 것입니다(삼하13:12,13, 잠5:8,9, 6:33).”
여러분, 죄로 물든 인간은 빛보다는 어두움을 더 좋아합니다. 진실과 정직보다는 거짓을 더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소견을 더 좋아합니다. 스스로가 속을 정도로 인간은 거짓됩니다. 때로는 인간 스스로가 거짓되다는 것을 알아도 침묵합니다. 성경의 참된 가르침과 이웃의 진실과 명예에 무관심합니다. 그런 거짓됨과 이기심은 신앙을 가진 이후에도 지속되어 영적 이기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종교적 명분을 내세워서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아니면 사랑과 화평의 이름으로 진리와 무관한 일들을 진행시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거나 감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롬1:21).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될 뿐 아니라 결국 이웃에게도 해를 끼치는 거짓이 됩니다. 제9계명은 이 모든 것을 금합니다(이상 총회 공과 참조).
지난주에도 언급했지만 토마스 카트라이트의 경우 거짓말 혹은 불성실한 언사에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공적인 거짓말 혹은 공적으로 불성실한 언사와 관련해 사회적인 것 외에 교회에서 행해지는 것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사역자들이 기초적인 교리를 가르치지 않거나 교리를 잘못 적용하는 것이다. 혹은 어떤 사람이 교회 앞에서 진리를 거절하거나 말씀에서 나온 공적인 사역자들을 거절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진리답게 증거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요,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희 교단에서 나온 소요리문답에 대한 해설 가운데 보면 다음의 내용을 제9계명에서 금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는 것은 가장 심각한 왜곡과 사기입니다(롬1:25). 시대에 따라, 대상에 따라, 연령에 따라, 형편에 따라 말씀을 퍼즐 맞추듯이 하는 것은 거짓 위에 거짓입니다. ‘천부께서 심지 않은 것은 다 뽑힐 것이며, 하나님께서 만드시지 않은 모든 것은 다 폐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기억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마15:13, 겔6:6하).
또한 성경 자체를 말하거나 성경을 인용하여 말하면 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미신입니다. 사단은 말씀 자체이신(요1:1, 계19:13) 예수님조차 말씀으로 시험했고, 이에 대해 예수님은 “또 기록되었으되”라고 답하셨습니다(마4:7).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인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해석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정직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러분, 창세기 4장 7절에 의하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4장 7절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말씀합니다. 죄를 지어야지만 죄가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아니하는 것 자체가 죄로 고발되고 있는 겁니다. 성경은 어떤 표현도 있는가? 로마서 14장 23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세상 사람들이 선이라고 할만한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을 하나님이 선으로 여겨주시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않았다면, 믿음 안에서 하지 않았다면,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로서 선을 행치 않았다면 세상 사람 기준으로 선이라고 할 만한 것도 사실은 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정의하고 있는 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것은 죄를 직접적으로 범할 때만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거나 믿음으로 행하지 않을 때도 죄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바 있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죄를 어떻게 정의합니까? 제14문에서 죄는 무엇인가 할 때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있어서 어떤 결핍이 있거나 혹은 그 법을 범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거짓말과 관련해서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안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심각한 거짓은 조금 전에 언급한 진리의 훼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와 진실을 보존하며 고집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가 거짓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직과 진실은 무엇인가? 성경 진리를 따르는 것이요, 성경 진리를 따라 사는 데 있습니다.
거짓과 관련해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선한 거짓말’에 대한 것입니다. 선한 거짓말의 예는 출애굽기 1장에서 히브리 산파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 수의 증가로 인하여 남자 아이면 산파가 해산을 돕다가 죽이도록 명령하게 됩니다. 그러나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는 해산을 도와주면서도 해산을 돕기 전에 아이를 낳았다는 거짓을 말하게 됩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거짓을 말하게 된 내용입니다. 여호수아 2장에도 이런 내용이 나오는데, 우리가 잘 아는 두 정탐군을 숨겨준 라합에 대한 내용입니다. 두 정탐꾼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거짓을 말하게 되는, 소위 선한 거짓말로 분류되고 있는 거짓입니다.
우리는 이런 거짓에 대해 선한 의도를 가진 것이기에 괜찮다고 여깁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할 때 거짓 자체보다는 생명을 살린다는 데 무게를 둡니다. 물론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이것 역시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칼빈의 주석을 좀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출애굽기 1장 히브리 산파에 대한 내용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본질에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죄악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여인들이 거짓말했다는 점과, 거짓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므로 그들은 죄를 범했다는 점은 모두 인정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용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 두 산파들이 하나님을 경외한 것으로 인해 칭찬받고 있다는 점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답하셨다는 점에는 사실상 어떤 반박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을 아버지로 돌보실 때, 그들의 선한 행위가 더러운 것들로 어느 정도 오염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정결한 것처럼, 그 선한 행위를 여전히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여호수아 2장 라합에 대한 내용입니다. “허위진술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그것이 비록 좋은 뜻에서 나온 거짓말이라 해도 거기에 잘못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요컨대 소위 말하는 직무상의 거짓말을 완전히 정당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진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귀한 것인가 하는 점을 충분히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의 의도가 형제들을 돕고, 그들의 안전을 도모하며 그들을 구출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거짓말이 합법적일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어긋나는 것이 옳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다... 전반적으로 정탐꾼들이 구출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그는 거짓 진술을 통해 그들의 생명을 구하는 행동은 인정하지 않았다.”
우르시누스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9계명에 대한 해설에도 보면 동일한 정신으로 말합니다. “진실을 숨기고 덮은 모든 거짓말은 물론 예의로 하는 거짓말이나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 선의로 하는 거짓말도 여기서 정죄하는 것이다... 산파들이 왕에게 거짓말을 했으나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선의의 거짓말을 변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신 것은 그들이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아이들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선의의 거짓말에 대해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해를 주는 법이”라고 말하면서 “그런 거짓말이 누구에게 유익이 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발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선한 의도를 가진 거짓말, 선한 목적을 위한 거짓말에 대하여 괜찮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거짓 자체는 분명 진실하신 하나님의 속성과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거짓이 아니라 진실과 정직으로 말해야 한다면 출애굽기 1장과 여호수아 2장의 경우 어떤 답을 내놓아야 하는가? 사실 이 부분이 우리로 하여금 매우 연약한 모습으로 반응하게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에스더가 말한 바를 기억해야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에4:16)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그만큼 연약하기 때문에 거짓을 동원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거짓으로 보호하는 것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때 우리는 이런 거짓에 대하여 선한 의도, 선한 목적이기 때문에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형태든 거짓이 동원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대하든지 하나님께서 항상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속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피하거나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람들은 모를 수 있고 또 인정해주지 않을 수 있지만 거짓이 아닌 정직한 자, 진실한 자를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정직으로 인하여 고난 받은 자들을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만을 참된 목격자요 증인으로 삼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