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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80
창세기 17장 7-12절 [28장 4-7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8장은 세례에 대한 내용인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된 신약의 성례 중 하나입니다. 세례에는 여러 가지 의미들이 있습니다. 가시적 교회 안으로 세례 받은 당사자를 엄숙하게 받아들이는 승인을 위한 표와 인이라는 의미, 세례 받는 당사자에게 은혜언약의 표와 인이라는 의미, 그리스도께 접붙여짐의 표와 인이라는 의미, 중생 그리고 죄 사함의 표와 인이라는 의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생명 안에서 걷기 위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다는 표와 인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성례는 그리스도 자신의 명령에 의해 세상 끝날 까지 그의 교회 안에 지속되어야 한다는 게 1항의 고백입니다.
2항은 이 성례에서 사용되는 외적 요소는 물이며, 그 물로 세례 받는 당사자는 합법적으로 소명 받은 복음의 사역자에 의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고백입니다. 이어지는 3항에서는 물 안으로 사람을 살짝 잠그는 것은 필수적이지 않고, 오히려 세례는 사람 위에 물을 붓거나 뿌림으로 바르게 실행된다는 고백입니다.
이제 4항은 세례의 대상자가 누군가 하는 것인데, 믿음의 고백이라는 책의 표현으로 하자면 한 부분에 있어서는 전혀 논쟁거리가 되지 않지만 다른 한 부분에 있어서는 많은 논쟁거리가 되는 내용입니다.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 것은 세례가 믿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즉 누가 세례를 받는가 할 때 믿는 자라면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의 자녀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할 때 모두가 동의하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단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4항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실제로 고백하는 자들뿐만 아니라(막16:15,16, 행8:37,38), 두 분 모두 믿거나 한 분이라도 믿는 부모의 유아들도 역시 세례 받아야 합니다(창17:7,9, 갈3:9,14, 골2:11,12, 행2:38,39, 롬4:11,12, 고전7:14, 마28:19, 막10:13-16, 눅18:15).
방금도 말했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실제로 고백하는 자들은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할 때 여기에는 전혀 논쟁거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서가 인용하는 구절을 먼저 보면, 마가복음 16장 15절과 16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지난 시간 마태복음 28장 19절도 보았지만, 예수님께서 사도로 부르신 제자들에게 명하신 것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제자로 삼는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16장의 말씀처럼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에 대하여 믿는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명하신 것이고, 마가복음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고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사도행전 8장 37절과 38절도 근거 구절로 제시하는데, 한글 말 성경에는 37절이 ‘(없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만 각주에 보면 어떤 사본에 다음의 말씀이 있다고 기록해 놓기도 하는데, 각주의 내용과 38절을 연결해서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빌립이 이르되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35절에서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고, 36절에서는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게 되면서 세례를 받고자 할 때, 37절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고백하고 난 뒤 38절에서 세례를 베풀었다는 내용입니다.
신앙고백서는 두 구절만 인용 구절로 제시하지만, 그 외에도 많습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에서 33절입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사도행전 18장 8절입니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그러니까 세례를 받는다고 할 때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런 믿음이 참되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순종하고자 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믿음과 함께 순종을 고백하는 자들은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는 자의 자녀, 그것도 유아들의 경우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의견이 나뉩니다.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실제로 고백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두 분 모두 믿거나 한 분이라도 믿는 부모의 유아들도 역시 세례 받아야 한다고 고백하는데, 사실 신약 성경에서 이 부분을 명시적으로 말씀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딕스혼은 “만일 신학이 명시적인 증거 본문만을 토대로 세워져야 한다면, 우리는 어른들의 세례만 이야기하고 거기서 멈추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믿음의 고백 참고).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성경에 대한 내용, 6항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 및 인간의 구원과 믿음과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에 관한 하나님의 전체 뜻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거나, 선하고 필연적인 결과로 성경으로부터 유추될 수 있다. 성경에는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지 인간의 전통들에 의해서든지 아무 것도 어느 때에 추가될 수 없다...” 물론 우리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살피면서 모든 부분에 대하여 동의할 수 있는가 할 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란 것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위 유아세례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할 때 분명 명시적으로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충분히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근거 구절로 제시하고 있는 본문들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오늘 본문으로 읽은 창세기 17장의 내용입니다. 인용 구절은 7절과 9절이지만, 7절 이하 12절까지를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지난 시간에도 말했지만, 신약의 성례인 세례는 할례가 대체된 것이라고 할 만큼 그 의미와 내용이 같습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7장 성례에 대한 5항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구약의 성례는 그로 말미암아 의미하게 되고 나타나게 된 영적인 것들과 관련해서 본질상 신약의 성례와 동일하다.” 그런데 할례를 명하실 때 하나님은 누구에게까지 말씀하시느냐? 유아까지 포함시키십니다.
특히 인용 구절인 7절과 9절은 은혜언약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은혜언약을 상기시키실 때 단지 아브라함 개인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함께 그의 후손까지임을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10절에서 할례를 명하시는데, 은혜언약의 표와 인입니다. 이때 주의해서 볼 것은 은혜언약의 성취가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통해, 이후 에서가 아닌 야곱을 통해 이루어 가신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마엘은 할례를 받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도 에서 역시 할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론으로 하자면 가시적 교회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용 구절은 갈라디아서 3장 9절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4절에서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유대인, 그리고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으로 말미암은 복을 계획하셨습니다. 그 일의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 승천하시면서 복음을 ‘모든 민족’(마28:19), ‘땅 끝까지’(행1:8) 전하라고 하십니다. 분명 혈통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지만, 그들도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과 약속의 표로서 할례가 명해지고 있다고 할 때, 신약 시대 시대는 유아를 제외시킨다고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비록 신약 시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와 함께 모든 의식법이 폐지되었지만, 특히 갈리디아서를 통해 그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할례를 대체하여 세례를 명하셨습니다. 그런 세례에서 할례에서 허락한 유아가 제외될 수 있는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할례와 세례를 비교해 보면 구약 할례는 유대인 중심입니다. 그리고 여자가 아닌 남자만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으로 와서 세례는 유대인 중심이 아니라, 유대인과 함께 이방인까지입니다. 그리고 남자만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딕스혼은 언약의 대상이 축소된 것이 아니라 확장되었다고 말하는데(믿음의 고백 참고), 이런 점에서 구약 유아에게 할례를 행하던 것이 신약에 와서 축소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인용 구절은 할례가 세례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골로새서 2장 11절과 12절입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할례의 의미를 드러내는데, 그것은 육의 몸을 벗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16장에서 이스마엘을 낳고, 17장에서 다시금 은혜언약을 확인시키실 때 할례를 명한 것은 인간의 모든 방식을 끊어내라는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의 할례가 세례로 나타난다고 하면서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 정리하자면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그것이 육적이든 영적이든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자녀는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이고, 에서가 아니라 야곱입니다. 그런 은혜언약의 약속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가 되는데, 그 이후로는 구약의 모든 의식법이 폐지가 됩니다. 할례도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할례 대신 세례를 명하셨는데, 그 의미는 할례와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 스스로 믿음을 고백하지 못한다고 해서 한쪽이라도 믿는 부모의 유아로 있다고 할 때 그들에게 세례를 줄 수 없는가? 할례를 받았다면 세례 역시 주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 38절과 39절에서 전한 말씀도 다르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38절만 보면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약속이 있는가? 죄 사함의 약속이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선물을 받는 약속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약속이 누구에게까지 확장되는가? 너희만이 아닙니다. 너희와 너희 자녀, 그리고 모든 먼 데 사람입니다. 성인들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까지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 모두를 의미하는데, 하나님은 성인들만 부르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 나이의 사무엘도 부르셨고, 심지어 세례 요한의 경우 모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하리라는 예언도 하셨습니다(눅1:15).
신앙고백서가 인용 구절로 제시하는 고린도전서 7장 14절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결혼은 원칙적으로 권장되는 결혼 형태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러한 경우가 존재하며, 때로는 두 사람 모두 불신 상태에 있다가 한쪽이 먼저 믿게 되기도 합니다. 이때 믿는 배우자의 존재로 인해 믿지 않는 배우자와 자녀는 복음과 신앙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7장 14절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믿지 않는 배우자와 자녀가 단순히 부정한 관계나 완전히 언약 밖의 상태로만 취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는 자와의 관계 속에서 거룩하게 되는, 구별되는 그런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대상 가운데 유아인 자녀가 있다면 구약 할례가 이방인과의 구별됨을 보여주는 표로 있었던 것처럼 세례 역시 구별된 표로 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유아세례를 받은 자가 단지 구별된 표로만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구별되는 일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유아세례 반대자들은 이것 때문에, 특히 구별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불신자보다 더 악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일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회의 영광을 가린다는 측면에서 참된 신앙을 고백하기까지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도로 택하심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 가룟 유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도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이루시더란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과 교회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세례를 받았다면 세례의 의미가 드러날 수 있도록 돌아봐야 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유아 세례를 받았다면 그러한 세례가 무익한 것이 되지 않도록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고백에 합당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주께 구하고 받아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부정적이라고 해서 주께서 허락하신 것을 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주께서 그것을 교회에게 허락하셨다면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이 더 많은 것으로 알고 행해야 합니다.
이 외에도 신약성경에는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는 구절들이 있는데(행16:14-15, 29-34, 고전1:15-16), 여기에 혹 유아가 있다면 결코 빠질 이유가 없다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더불어 신앙고백서가 인용하고 있는 마가복음 10장이나 누가복음 18장에서는 아이의 부모들이 예수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왔을 때 용납하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내용도 있습니다. 그런 대상이 은혜언약의 표와 인인 세례에서 제외될 수 있는가? 적어도 부모 중 한 사람이라도 믿는 자로 있다면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례에 대하여 신앙고백서는 5항에서 세례와 구원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설명합니다.
이 규례를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큰 죄일지라도(눅7:30, 출4:24-26), 사람이 세례 없이는 중생될 수 없거나 구원받을 수 없을 정도로(롬4:11, 행10:2,4,22,31,45,47), 혹은 세례 받는 모든 자들이 의심 없이 중생될 정도로(행8:13,23), 은혜와 구원이 그렇게 세례와 비분리적으로 결합된 것은 아닙니다.
먼저 신앙고백서는 이 규례를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큰 죄임을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1항에서 고백한 것처럼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여 교회와 성도에게 성례로 주셨다고 할 때 거기에는 분명한 유익이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 있다고 할 때 누가복음에서는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아니한 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30절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세례 요한이 전한 것은 무엇입니까?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입니다(눅3:3). 그런데 세례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죄 사함을 위한 회개를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도록 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을 세우셨습니다. 또한 그가 주의 길을 준비한다고 할 때 주께서 세례 요한 뒤에 오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세례를 받지 않겠다는 것은 회개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눅3:9)
이 규례를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큰 죄라는 사실은 모세의 예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4장 24절 이하 26절입니다.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애굽에서 40년, 그리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고 난 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세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 애굽으로 가려고 하는데, 이때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할례를 통해서도, 그리고 세례 요한의 세례를 통해서도 경고하시는 이런 말씀들이 있다고 할 때 예수님께서 제정하여 우리에게 주신 세례 역시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결코 작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가 믿는 자가 되었다면, 그래서 참된 신앙을 고백한다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또한 믿는 자로서 자녀를 낳게 되면 약속의 자녀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그가 세상으로부터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유아세례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고백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세례 없이는 중생될 수 없거나 구원받을 수 없을 정도로, 혹은 세례 받는 모든 자들이 의심 없이 중생될 정도로 은혜와 구원이 그렇게 세례와 비분리적으로 결합된 것은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세례를 받지 않으면 중생될 수 없다,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으로 세례를 받기만 하면 누구도 예외 없이 중생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언제입니까? 창세기 15장 6절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런데 창세기 16장에서 이스마엘 사건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13년 후, 아브라함 나이 99세 때 하나님은 다시금 은혜언약을 상기시키시면서 할례를 명하시는데, 창세기 17장 10절과 11절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이러한 창세기 말씀에 근거해서 바울은 로마서 4장 11절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례는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할례를 받지 않았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된 의가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된 의가 분명히 있지만, 그 사실을 다시금 인장을 찍듯이 한 것이 할례라는 것입니다.
세례가 할례를 대체한 것이라고 할 때 세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는 사도행전 10장에 기록하고 있는 고넬료를 제시하는데, 그는 의심의 여지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입니다. 여러 구절들이 있지만, 2절만 보면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데, 그때 성령의 가시적인 역사로서 방언을 말하게 됩니다. 이것을 보고 베드로는 47절로 말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그러니까 세례를 받아야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지만 그 사실을 나타내고 인 친다는 의미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예도 있는데, 사도행전 8장에 기록된 마술사 시몬에 대한 것입니다. 13절에 의하면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믿었다고 할 때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냐? 이후에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이 23절입니다.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세례를 받는 것이 곧 구원이라면 이렇게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례가 구원은 아닙니다. 세례는 구원의 표일 뿐입니다.
다만 세례가 구원 자체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세례를 경멸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5항은 이 사실을 먼저 분명히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가 곧 중생이요, 구원와 비분리적으로 결합된 것은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6항은 세례의 효력이 언제 나타나는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세례의 효력은 세례가 실행되는 때의 그 순간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요3:5,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규례의 올바른 사용에 의해 하나님 자신의 뜻의 의논에 따라 그의 정해진 때에 (성인이든 유아들이든) 그 은혜에 속한 자들에게 약속된 은혜가 제공될 뿐만 아니라 성령에 의해 실제로 나타나고 주어집니다(갈3:27, 딛3:5, 엡5:25,26, 행2:38,41).
5항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례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중생되지 못하거나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세례의 효력은 세례를 받는 그때 무조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는, 세례의 효력은 세례가 실행되는 때의 그 순간에 매여 있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신앙고백서는 여기에 대하여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말씀하신 사실을 제시하는데, 5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5항 내용으로 하자면 세례를 받아야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일은 사람에게 달린 일이 아니요, 사람이 정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중생, 다시 말해 거듭남이 사람에게 달린 일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 달린 일이라면, 그것도 성령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뜻에 달린 일이라면, 중생의 표와 인으로 주신 세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결코 세례에 매여 일하시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항에서 이 규례를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큰 죄라고 한 것처럼 세례에 대하여 경멸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고백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규례의 올바른 사용에 의해 하나님 자신의 뜻의 의논에 따라 그의 정해진 때에 (성인이든 유아들이든) 그 은혜에 속한 자들에게 약속된 은혜가 제공될 뿐만 아니라 성령에 의해 실제로 나타나고 주어진다고 고백합니다. 단적인 예가 유아세례입니다. 유아들이 세례를 받을 때 세례의 효력이 나타나는가? 거의 드물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규례의 올바른 사용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면, 다시 말해 2항에서 고백한 것처럼 세례의 외적 요소인 물을 가지고 합법적으로 소명을 받은 복음 사역자에 의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의 의논에 따라 그의 정해진 때에 성인이든 유아들이든 약속된 은혜가 제공될 뿐만 아니라 성령에 의해 실제로 나타나고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는데, 그 대상이 누구냐? 신앙고백서는 ‘그 은혜에 속한 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세례를 받은 모든 자에게 세례의 효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속한 자들, 다시 말해 대상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그때 곧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세례의 효력이 나타나도록 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서가 제시하는 구절들로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세례 받은 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로 옷 입게 하시고(갈3:27), 성령에 의해 계속하여 새롭게 하시고(딛3:5),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5:26), 성령의 선물을 주신다는 것입니다(행2:38). 택자에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그렇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교회 안에서 세례를 받을 때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세례가 보이는 말씀 가운데 하나인데, 보이는 말씀만이 아니라 들리는 말씀에 대해서도 우리는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말씀 없이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7항은 세례의 횟수에 대한 고백입니다.
세례의 성례는 누구에게나 한 번 외에 실행되어서는 안 됩니다(딛3:5).
왜 세례의 성례가 누구에게나 한 번 외에 실행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가? 세례가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서가 근거 구절로 제시하고 있는 디도서 3장 5절을 보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말씀합니다. 1항에서도 살폈지만, 세례 안에는 중생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죄 사함 혹은 죄를 씻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런 중생과 죄 사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습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하여 여러 번 죽으시는 게 아니라, 한번만 죽으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하여 성경은 ‘단번에’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롬6:10, 히9:12,26,28).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중생과 죄 사함은 이런 측면에서 단회적입니다. 그러므로 중생과 죄 사함의 표와 인인 세례도 단회적입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는 세례의 성례는 누구에게나 한 번 외에 실행되어서는 안 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발생한 재세례파는 유아 세례를 부인하고 성인 세례만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기존 교회에서 받은 세례가 모두 무효라며 자신들의 종파에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참고), 어떤 면에서 6항에서 고백하고 있는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례의 효력은 결코 사람의 뜻, 사람의 의지, 노력에 의하여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한 것처럼 이 규례의 올바른 사용에서 나타납니다. 세례의 외적 요소인 물을 가지고 합법적으로 소명을 받은 복음 사역자에 의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실행할 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가톨릭에서 영세를 받고 개신교로 들어왔다고 할 때 다시금 세례를 실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받은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가 실행될 때 하나님은 택자에 한해 정하신 때가 되면 약속된 은혜가 제공하실 것이고, 성령에 의해 실제로 나타나도록 주신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