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81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 [29장 1-2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9장은 신약의 성례 중 하나인 주의 성찬에 대한 내용입니다. 앞에서 세례에 대하여 살폈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간 것을 세례와 관련하여 설명합니다(고전10:1-2). 이어서 그는 그들이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고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 말하는데(고전10:3-4), 이는 만나를 먹이신 것과 반석에서 물을 내신 사건이 성찬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할례와 세례가 서로 비교되는 것처럼, 성찬은 무엇보다도 구약의 유월절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이해됩니다. 실제로 오늘 우리가 살필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유월절 식사 가운데 성찬을 제정하셨습니다. 유월절이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는 예식이었다면 성찬은 그 유월절이 예표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기념하고 확증하는 새 언약의 성례입니다. 따라서 만나와 반석의 물도 성찬을 예표하지만, 성찬의 가장 직접적이고 대표적인 구약의 배경은 유월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찬에 대하여 1항은 성찬의 제정자와 그것이 가지는 의미 혹은 목적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배반당하셨던 밤에 세상 끝 날까지 자신의 교회에서 준수되어야 할 주의 성찬이라 일컫는 자신의 몸과 피의 성례를 자신의 죽음에서 자기 자신의 희생을 영원히 기념토록 하기 위해서, 이와 관련된 모든 은택들을 참된 신자들에게 인치기 위해서, 그들의 영적 영양분과 성장을 자신 안에서 갖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이 자신에게 마땅히 행해야 할 모든 의무들 안에서 및 그 의무들에게로 보다 더 매이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과 그들의 교통 및 자신의 신비스러운 몸의 지체들인 그들 상호간의 교통의 띠와 보증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제정하셨습니다(고전11:23-26, 10:16,17,21, 12:13).
먼저 신앙고백서는 우리 주 예수께서 배반당하셨던 밤에 세상 끝 날까지 자신의 교회에서 준수되어야 할 주의 성찬이라 일컫는 자신의 몸과 피의 성례를 자신의 죽음에서 자기 자신의 희생을 영원히 기념토록 하기 위해서 제정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복음서들을 보면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1장 23절 이하 26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일단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께서 자신에게 계시하셔서 알리신 것을 너희에게 전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찬은 언제 제정되었는가?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우리 주 예수께서 배반당하셨던 밤에 제정하셨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부터 잡히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번역에 따라 배반당하셨다는 말 대신 잡히셨다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1장 26절은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함으로 주께서 제정하신 성찬이 언제까지 실행되어야 하는지를 알립니다. 즉 신앙고백서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세상 끝 날까지 자신의 교회에서 준수되어야 할 성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세례에서도 확인한 바가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8장 1항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 성례는 그리스도 자신의 명령에 의해 세상 끝날 까지 그의 교회 안에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7항에서 고백한 내용과 다르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금 오실 때까지 교회는 세례와 성찬을 계속해서 실행해야 하지만, 세례의 경우 누구에게나 한 번 외에 실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7항 내용입니다. 반면 성찬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여 세례를 받았다면, 혹은 유아세례의 경우 공적인 신앙고백을 한 이후에는 계속해서 참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런 차이를 잘 설명하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77문입니다. “세례와 성찬은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까? 세례와 성찬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세례는 단 한 번만 실행되되, 우리의 중생과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짐의 표와 인이 될, 물로 실행되며, 유아에게도 마찬가지로 실행됩니다. 반면에 성찬은 자주 실행되되, 영혼의 영적 영양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보여주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지속성과 성장을 확증할, 떡(빵)과 포도주의 요소들로 실행되며, 오직 자신을 점검할 수 있는 나이와 능력에 속한 자들에게만 실행됩니다.”
다시 고린도전서 11장의 내용으로 오면, 예수님께서는 떡과 잔(포도주)으로 주의 성찬 혹은 주의 만찬이라고 일컫는 성례를 제정하셨는데, 이는 24절과 25절 끝부분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몸을, 그리고 자신의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포도주)을 먹고 마심으로 자신을 기념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는 자신의 몸과 피의 성례를 자신의 죽음에서 자기 자신의 희생을 영원히 기념토록 하기 위해 제정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찬 제정의 첫 번째 의미요 목적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신앙고백서는 몇 가지를 더 말합니다. 둘째, 이와 관련된 모든 은택들을 참된 신자들에게 인치기 위해서 제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구속의 모든 은택들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본래는 하나님과 원수 된 자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죄 외에 내놓는 것이 없었다면, 이제는 그의 성령과 말씀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이끄십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은택들이 우리의 행위나 공로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희생에서 얻어진 것이라면,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성찬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다면, 우리는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모든 은택들을 기억할 뿐 아니라, 그것들이 참으로 우리에게 속하였음을 확증하는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1장 24절과 25절을 다시 보시면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잔에 대해서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찬을 통해 먹는 것은 떡이요, 마시는 것은 포도주이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는 그의 몸이 우리를 위한 것이요, 그가 흘리신 피가 새 언약을 위한 것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때 새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우신 은혜언약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8장 10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는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겔36:26-28 참고). 이러한 은혜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그가 이루신 모든 은택을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데, 그 사실을 인 치기 위해 제정하신 것이 무엇이냐? 성찬이란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고린도전서 10장 16절에서는 이런 표현까지 씁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성찬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참여한다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은 떡이요, 마시는 것은 포도주이지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의미하기 때문에 실제로 성찬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누리며, 그가 획득하신 구속의 은택들을 더욱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그들의 영적 영양분과 성장을 자신 안에서 갖도록 하기 위해서 제정하셨습니다. 소위 성찬에 대하여 영혼을 위한 양식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54절과 55절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물론 요한복음 6장이 직접적으로 성찬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찬의 원리 맞물러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신다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식인(食人)’의 의미로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7)고 할 때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신 것처럼(요6:29),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신다는 것은 믿음의 방식입니다. 성찬 역시 먹는 것은 떡이요, 마시는 것은 포도주이지만, 믿음의 방식 안에서 요한복음의 표현처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에게서 영적인 생명과 힘을 공급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날마다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듯이, 우리의 영혼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공급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4절과 5절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가지가 포도나무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듯이 성도는 그리스도로부터 생명과 능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을 제정하여 교회로 하여금 실행하게 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 우리의 영적 영양분과 성장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확증하게 하십니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신령한 음식으로 만나를, 신령한 음료로 반석의 물을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 것은 단지 육신을 위한 만나와 반석의 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영혼을 위한 만나와 반석의 물이 되신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분을 먹고 마셔야지만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영양분을 공급 받고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 그들이 자신에게 마땅히 행해야 할 모든 의무들 안에서 및 그 의무들에게로 보다 더 매이도록 하기 위해서 제정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1장 26절을 다시 보시면,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성찬에 참여한 자들의 마땅한 의무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늘 전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은, 특별히 그의 죽으심에 대하여 전한다는 것은 말로만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할 때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에 새 생명이 시작되는데, 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는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교회들을 향한 편지들을 보면 종종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상태와 믿은 이후의 상태를 비교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의 죽으심을 전하라는 것은 이런 전반적인 내용입니다. 그것을 신앙고백서는 자신에게 마땅히 행해야 할 모든 의무들 안에서 및 그 의무들에게로 보다 더 매이도록 하기 위해 성찬이 제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생각하면 우리의 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과 함께 우리들의 의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사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자로 하여금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고린도전서 10장 16절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성찬이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것이라고 할 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4절에서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그러니까 성찬이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더 이상 우상에게 자신을 내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에서는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는 말까지 합니다. 우상숭배는 여러 예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성찬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에게 참여한 자들은 그분께 속한 자로서 살아가야 하며, 그에 따른 마땅한 의무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성찬은 마땅히 행해야 할 모든 의무들 안에서 및 그 의무들에게로 보다 더 매이도록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다섯째, 자신과 그들의 교통 및 자신의 신비스러운 몸의 지체들인 그들 상호간의 교통의 띠와 보증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제정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고린도전서 10장을 보시면 16절과 17절에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일단 성찬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 참여합니다. 성찬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교통이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나’라는 한 사람만 교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하는 떡을 먹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하는 포도주를 마시는 모든 사람들, 곧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처럼 떡은 하나이지만 많은 우리가 그 떡을 먹음으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자리에 앉아 있고, 그 안에서 교제하기 때문에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그리스도에게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 이미 한 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단순히 그리스도와 나 사이의 교통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성도들의 연합도 함께 드러내 보여 줍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확인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 상호 간의 교통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찬은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의 교통을 확증할 뿐 아니라, 성도와 성도 사이의 교통을 더욱 굳게 묶어 주는 교제의 표가 됩니다. 신앙고백서가 말하는 것처럼 성찬은 자신과 그들의 교통 및 자신의 신비스러운 몸의 지체들인 그들 상호간의 교통의 띠와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행전 2장 42절에서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고 할 때 말씀 안에서의 교제뿐 아니라 떡을 떼는 성찬 역시 성도들 상호 간의 교통을 더욱 견고하게 묶어 주는 띠와 보증의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1항이 성찬의 의미 혹은 목적을 통하여 성찬이 어떤 것인지를 말한다면, 2항은 성찬이 아닌 것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즉 가톨릭의 미사에 대한 반박인데, 미사(Missa)라는 단어 자체는 라틴어 “mittendo”[미텐도]에서 파생된 “missio”[미시오], 즉 보냄, 파견, 발송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를 “missa”[미사]로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뜻의 미사가 5세기쯤부터 교회에서 사용되면서 7세기경에 성체성사를 나타내는 용어로 굳어져 오늘에 이르렀는데,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 미사를 단순한 기념이나 성례가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의 죄 사함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바치는 참된 속죄 제사로 이해합니다. 여기에 대한 반박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9장 2항이 있습니다.
이 성례 안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아버지께 드려지는 것도 아니며, 살아있는 자나 죽은 자의 죄사함을 위해 실제적인 어떤 희생물이 되시는 것도 아닙니다(히9:22,25,26,28). 오히려 오직 십자가에서 자신을 자신에 의해 단번에 드리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며, 동일한 이유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모든 찬양을 영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고전11:24-26, 마26:26,27). 그래서 교황주의자들이 일컫는 미사, 즉 교황주의적인 미사의 희생은 오직 한 번인 그리스도의 희생, 즉 택자의 모든 죄들을 위한 유일한 속죄제물에 지극히 혐오적인 해를 입히는 것입니다(히7:23,24,27, 10:11,12,14,18).
먼저 신앙고백서는 두 가지를 반박합니다. 이 성례 안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아버지께 드려지는 것도 아니며, 살아있는 자나 죽은 자의 죄사함을 위해 실제적인 어떤 희생물이 되시는 것도 아니라는 내용입니다. 왜 이런 고백이 있느냐?(이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참고)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찬의 성례를 거룩한 속죄 제사라고 하면서 성체성사가 구주 그리스도의 유일한 제사를 재현하고 교회의 봉헌도 담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트렌트 공의회 제22회기, 미사성제에 관한 교리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먼저 제2장입니다. “제물은 유일하고 동일하며, 그때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바치셨던 분이 지금 사제의 직무를 통해서 봉헌하시는 바로 그분이시다. 단지 봉헌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이어 제3장입니다. “십자가 제단 위에서 단 한번 당신 자신을 피 흘려 봉헌하신 저 그리스도께서 그 똑같은 제사를, 미사로 거행되는 이 신적 희생 제사에서 피 흘림 없이 제헌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 희생 제사는 참으로 속죄의 제사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근본 이유가 무엇인가?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실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톨릭 교리에 대하여 신앙고백서는 이 성례 안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아버지께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신앙고백서는 살아있는 자나 죽은 자의 죄 사함을 위해 실제적인 어떤 희생물이 되시는 것도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저들은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성부 하나님께 드려진다고 생각하지만, 또한 성찬을 통해 죄 사함을 위해 실제로 희생제물이 되신다고 생각하지만, 신앙고백서는 다음의 말씀들을 통하여 반박합니다(이하 믿음의 고백 참고).
먼지 히브리서 9장 25절과 26절입니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여기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옛 언약 제도에서 드려지던 제사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거듭 자기를 드리려 하거나 거듭 고난을 받으려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26절 후반부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제물로 드리되 단번에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이 나타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의 속죄 제물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속죄 제사 혹은 희생 제사는 단 한번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드림으로 끝났습니다. 성찬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서는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도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소위 피 없는 속죄 제사, 희생 제사는 속죄를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가톨릭에서는 미사를 말할 때 피 없는 희생 제사라고 말하는데, 여기에 어떤 효력을 기대할 수 있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례 안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아버지께 드려지는 것도 아니며, 살아있는 자나 죽은 자의 죄사함을 위해 실제적인 어떤 희생물이 되시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고백서는 오히려 오직 십자가에서 자신을 자신에 의해 단번에 드리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며, 동일한 이유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모든 찬양을 영적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1장을 보면, 24절에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25절에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성찬을 통해 예수님은 이미 자신을 드리신 일을 기념하도록 하신 것이지,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해 다시금 제사를 드리도록 하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믿음의 고백 참고),
마태복음 26장 26절과 27절에서는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고 말씀하시는데, 예수님께서는 떡과 잔을 취하여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먹고 마시도록 하십니다. 그러니까 성찬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는 제사의 성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은혜를 받는 성격으로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심으로 속죄를 완성하셨으므로, 성찬은 그 완전한 희생을 기념하고 선포하는 예식이지 그 희생을 반복하는 제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도들은 성찬 가운데 그리스도의 구속을 감사하며 찬양과 헌신의 영적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1장 26절에서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한 말씀 역시 이런 의미에서 말씀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모든 찬양을 영적으로 드린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말로써도 전하고 우리의 모든 삶으로도 전하는 것이 영적인 제사인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런 점에서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교황주의자들이 일컫는 미사, 즉 교황주의적인 미사의 희생은 오직 한 번인 그리스도의 희생, 즉 택자의 모든 죄들을 위한 유일한 속죄제물에 지극히 혐오적인 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서가 인용하는 구절들로 정리하자면, 먼저 히브리서 7장 23절과 24절입니다.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가톨릭의 미사가 제사라고 할 때 거기에는 제사장을 필요로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제사장이 되시고 난 뒤 또 다른 제사장은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구약 제사장처럼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토록 계시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 외에 또 다른 제사장이 필요치 않습니다.
히브리서 7장 27절에서는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구약의 제사장들은 제사가 불완전하였기에 계속해서 같은 제사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속죄를 완성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사는 반복될 필요가 없으며, 반복될 수도 없습니다. 만일 미사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다시 드려진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충분하지 않았거나 완전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신을 드려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반복되는 희생 제사가 아니라, 이미 완성된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고 선포하는 성례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을 근거 구절로 말하는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11절과 12절을 보시면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구약의 제사장들은 날마다 서서 반복적으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들의 사역이 계속된 것은 그 제사가 죄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한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후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앉으셨다는 표현은 속죄 사역이 완성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더 이상 드려야 할 희생이 남아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단번의 제사만으로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계속하여 제사로 드린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하신 사역을 사실상 미완성인 것처럼 만드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14절에서는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시고, 18절에서는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한 번의 제사가 택자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는 효력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일시적이거나 불완전한 제사가 아니라 영원한 효력을 가진 완전한 속죄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이 이미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완전히 이루어졌다면, 죄를 위하여 또 다른 제사를 드릴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앙고백서는 성찬을 속죄를 위한 희생제사로 이해하지 않고, 이미 완성된 그리스도의 속죄를 기억하고 믿음으로 참여하며 그 유익을 누리는 성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만 히브리서의 이런 내용에 있어 주의해야 할 것은, 그렇기 때문에 구약 백성들의 죄 사함이 신약 백성들의 죄 사함보다 뭔가 모자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서가 구약의 제사들이 죄를 온전히 제거하지 못했다고 말할 때, 그것은 구약 성도들이 불완전한 사함만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의 제사 자체에는 죄를 없이 하는 능력이 없었으며, 그것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희생을 가리키는 그림자와 예표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 성도들 역시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죄 사함을 받았고, 신약 성도들은 이미 오신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죄 사함을 받습니다. 구원과 죄 사함의 근거는 시대를 막론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단번의 희생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7장 5항과 6항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먼저 5항입니다. “이 언약은 율법 시대와 복음 시대에 다르게 실행되었다. 율법 아래에서 이 언약은 유대인들에게 전해진 약속들, 예언들, 제사들, 할례, 유월절 양, 다른 모형들과 규례들에 의해 모두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실행되었다. 그것들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택자들을 약속된 메시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지도하고 세우기에 그 때를 위해 충분하고 유효적이었고, 약속된 메시야로 말미암아 택자들은 완전한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가졌고, 이 언약은 구약이라 칭해진다.” 다음으로 6항입니다. “복음 아래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졌을 때, 그 안에서 이 언약이 실행된 규례들은 말씀 설교 및 세례와 성찬의 성례들의 실행이다. 그것은 수적으로는 보다 적을지라도 보다 단순하게 그리고 외적 영광이 덜하게 실행된다. 그러나 그것들 안에서 보다 충만하고 확증적이며 영적으로 효력있게 모든 민족들, 즉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이 언약은 제시되며 신약이라 칭해진다. 그러므로 실체에 있어서 다른 두 개의 은혜언약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륜들 아래 하나이며 동일한 은혜언약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