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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60607설교 / 갈라디아서5장13-15절 / 사랑으로써역사하는믿음뿐이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6.06.07|조회수3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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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13-15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라

 

갈라디아서 24절에서 바울은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다시 말해 은밀하게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만 의롭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율법의 행위, 그런 행위로서 의식에 대한 준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식에 대한 준수로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할례를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거짓 가르침에 대하여 반박하면서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고 할 뿐만 아니라, 의식에 대한 모든 준수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임을 말했습니다.

대표적인 부분이 갈라디아서 324절과 25절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좀 더 직접적으로 갈라디아서 48절 이하 1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고 말하면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갈라디아서 안에서 디도의 할례 문제를 언급하기도 했지만, 할례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전파되는 과정 속에서 늘 논쟁의 핵심이 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총회도 할례를 받아야지만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한동안은 이 문제가 늘 교회 안의 논쟁의 핵심 쟁점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은 지난 시간에 살핀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로 말미암아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할 때 의와 구원을 위한 할례는 거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할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분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좀 더 부연하자면 할례를 행해야지만 의와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장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율법 전체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통해서는 자신의 무능함을, 그래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실만 확인하게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행해야지만 의와 구원을 말할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 확인될 뿐입니다.

 

이런 내용 속에서 바울은 저들이 말하는 거짓된 복음이 아닌 참된 복음의 내용을 이렇게 밝힙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와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5:5-6) 그러니까 우리는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참된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자들은 할례를 받거나, 율법 전체를 행함으로 자신의 의와 구원을 말하는 자들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믿음만을 말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고 할 때는 의의 시작만이 아니라 의의 완성까지 내다보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시작부터 완성까지 성령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믿음을 따라 나아가는 것이 신자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의 특성은 무엇인가? 사랑으로써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좀 더 분명하게 설명되는데, 정리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가 할례와 같은 의식이라는 종의 멍에를 메어서는 안 된다면, 그래서 지난주에 살핀 내용 속에서 할례에 대하여 경고를 했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어떻게 쓸 것인가 할 때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이렇게 권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여러분, 갈라디아서 5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고 할 때 그 자유는 할례와 같은 의식 준수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좀 더 확장하자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01항의 의미에서의 자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죄책과 하나님의 정죄와 진노와 도덕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이 악한 세상과 사단의 속박과 죄의 지배, 고통들의 악과 사망의 쏘는 것과 무덤의 이기는 것과 영원한 정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자유이고, 자유를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고 할 때 동일하게 신앙고백서 201항의 내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유가 주어지기 전, 다시 말해 종으로 있을 때의 상태가 어떠했는가? 이 부분에 대하여 바울은 갈라디아서 4 8에서 이미 밝힌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이때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1 21절 이하 23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그런데 이런 우상숭배 자체도 더 깊은 문제의 결과입니다.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그 결과 참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인간의 우상숭배는 인간의 타락의 결과입니다. 한 마디로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 근본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죄인의 성격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불순종한 결과인데, 거기에는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교만이 있었습니다. 말씀에 불순종한 것은 인간의 교만의 결과인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는 어디 아래 있게 되었는가? 에베소서 2 2절과 3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런데 그런 우리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종에서 자유자가 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신앙고백서를 통해 잘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죄책으로부터 자유하도록, 하나님의 정죄와 진노로부터 자유하도록, 도덕법의 저주로부터 자유하도록, 현재 이 악한 세상과 사단의 속박과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하도록, 고통들의 악과 사망의 쏘는 것과 무덤의 이기는 것과 영원한 정죄로부터 자유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당연히 여기에는 갈라디아서가 말하고 있는 의식법으로부터의 자유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외에도 의식법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보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던 의식법의 역할을 초등교사(3:24), 후견인과 청지기(4:1-2), 그리고 이 세상의 초등학문(4:3),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4:9)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의식법으로부터의 자유이지, 모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아닙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01항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하면서 무엇까지 말하는가? 하나님께로의 그들의 자유로운 접근도 말합니다. 또한 노예적인 두려움이 아닌 자녀다운 사랑과 기꺼운 마음으로부터 그에게로의 그들의 유순한 순종도 말합니다. 죄책과 하나님의 정죄와 진노와 도덕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게 아니라, 그들이 소유하게 된 자유는 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향해 더욱 나아가도록 하는 자유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자유를 정의하면서 양심에 있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유의 행사는 하나님과 관계될 뿐만 아니라 사람과도 관계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해 더욱 나아간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는 것이고, 그 순종은 결국 율법의 요약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에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종 노릇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할 때 죄책으로부터의 자유, 하나님의 정죄와 진노로부터의 자유, 도덕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를 말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 죄의 책임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죄와 진노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또 도덕법으로 인하여 저주를 받는 일은 없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처럼 여겨셔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가 우리로 하여금 방종이나 분수에 넘는 남용으로 갈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늘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면서 그에게 순종하는 방향으로 있습니다. 때문에 무엇을 말할 수밖에 없는가? 육체의 기회가 아닌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신 목적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1 3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1:3-6)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 다시 말해 영원 전부터 어떤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택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는 6절의 말씀이 그 목적으로 있습니다.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답하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보면 또 다른 목적도 말합니다. 다시 말해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목적하신 바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4절 후반부입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는데, 왜 택하셨는가?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입니다. 그러니까 선택의 목적이 어디 있느냐?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묶여 있도록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늘 우리에게 영원 전 선택, 선택에 따른 부르심, 그런 부르심이 효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 그리고 그런 역사로 말미암은 믿음과 믿음에 따른 의롭다 하심, 자녀 삼으심을 말할 때 이런 명령을 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11:45) 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할 때 방종이나 분수에 넘치는 남용을 말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갈라디아서의 배경이 되고 있는 내용에서처럼 이런 명령에 순종한다면 그런 순종이 마치 자신의 공로가 되는 것처럼 여긴다는 쪽으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특히 가톨릭에서는 자신들의 행위 공로를 위해 믿음의 칭의는 결국 선행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반박하면서 자신들의 교리가 맞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육체의 기회를 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도록 하는 믿음입니다. 다시 말해 참된 믿음은 사랑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요, 결코 선행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말하면서도 선행을 파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이라면 결코 선행을 파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런 사랑, 그런 선행이 공로가 될 수 없는 것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11:45)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이렇게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20:7-8) 분명 거룩을 명하시지만, 갈라디아서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 앞에서는 자신의 무능만, 자신의 죄됨만 볼 뿐입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거룩하라는 말씀 앞에서 거룩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하라고만 말씀하지 않고, 내가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을 밝히십니다. 때문에 이 땅에서 거룩하게 되고, 죽음을 통하여 거룩이 완성되는 모든 것은 인간의 노력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그런 노력조차 무()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는다고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에베소서 1장을 보시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선택의 목적이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이지만, 결국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되는 목적으로 간다고 할 때 거기에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은혜의 영광입니다. 선택과 선택의 목적으로서의 거룩이 다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내용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라디아서 5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할 때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그 자유가 우리로 하여금 방종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하면서 육체의 기회로 삼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학 안에서는 반율법주의가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가운데 순종과 성화의 중요성을 경시합니다. 신자는 더 이상 하나님의 도덕법 아래 있지 않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회개와 거룩한 삶의 필요성이 약화됩니다.

그런데 신앙고백서는 어떻게 말합니까? 도덕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지, 도덕법 자체로부터의 자유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때문에 도덕법에 대한 순종을 경시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죄에 대한 회개와 의인답게 살아가야 할 것에 대한 강조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는 육체의 기회를 삼지 않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말할 때, 그 고백이 공로주의로 나아가서도 안 됩니다. 믿음과 함께 율법의 행위를 말하고, 의식 준수를 말하고, 할례를 말하는 자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강하게 대적한 것도 바로 이러한 가르침입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는 로마 가톨릭의 칭의 교리가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이러한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소위 율법주의도 구원의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두지 않고 인간의 순종과 행위를 결부시키려는 성격을 가집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칭의에 있어서 인간의 협력과 공로를 함께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인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받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우리의 순종과 선행은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그런 열매에 대한 강조가 지난 시간에 본 갈라디아서 56절에 있는 것이고,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더욱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갈라디아서 본문으로 와서 14절을 보시면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육체의 기회를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인 내용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인 율법의 행위, 그런 행위로서 의식 준수에 대하여 반박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런 저들을 의식하면서 바울은 의식을 지키는 데만 주목하지 말고,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자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온 율법을 말하면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고 말합니다.

사실 온 율법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22 37절에서 40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첫 번째 돌판 부분을 빼고 두 번째 돌판 부분만 언급하고 있는 것은 결코 첫 번째 돌판 부분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의미에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경중을 따지자면 첫 번째 돌판 부분이 더욱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사랑이 없는 이웃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웃 사랑이 그것 자체로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 사랑의 증거로 나타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은 첫 번째 돌판 부분을 요약하면서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두 번째 돌판 부분을 요약하십니다. 두 번째 돌판 부분은 반드시 첫 번째 돌판 부분에 근거해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형제 사랑이라는 것이고, 반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증거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더 중요한 하나님 사랑을 빼면서 온 율법으로 이웃 사랑을 말하는가? 갈라디아서는 율법의 행위와 행위로서의 의식을 강조하는 자들에 대한 반박이 강합니다. 비록 의식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지되었지만, 의식법을 폐하셨다고 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까지 폐하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여전히 1계명에서 4계명을 통해 예배와 경건에 관한 교리와 의무를 도덕법으로 가르치십니다. 이런 첫 번째 돌판 부분은 사실 우리 눈으로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건으로 나타나는 부분에 있어서 인간의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적다는 것입니다.

반면 두 번째 돌판 부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로서 종종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 부분에 있어서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외적으로는 사랑의 모습을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는 일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을 나타낸다고 할 때 성경은 두 번째 돌판 부분으로 확인하게 하실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마태복음 25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먼저 양에게 하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25:34-36) 이때 의인들은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묻자 이런 답변을 하십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25:40) 염소에 대해서는 이 말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13 8에서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가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할 때 거기에는 율법의 첫 번째 돌판인 하나님 사랑에 근거한 이웃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이 여기서 온 율법을 말하면서 단지 두 번째 돌판 부분만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첫 번째 부분, 다시 말해 예배와 경건에 대한 첫 번째 부분을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제로 깔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의식 준수를 강조하고 있는 저들에게 의식법은 폐지되었다고 말하면서 다시금 예배와 경건에 대한 교리와 의무를 강조하기보다는 그런 예배와 경건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를 설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배와 경건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를 설득하면서 그것이 공로가 아닌 은혜에 대한 감사로서 지극히 마땅하다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어떻게 그것을 율법의 행위로 연결시키면서 마치 공로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에 반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럼 왜 이런 말을 하는가? 이 문제로 인하여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 가운데서도, 혹은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 안에서도 큰 논쟁이 일어나고 그것으로 큰 다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5절은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진리 밖이라 할지라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갈라디아서 전체 가르침과 배치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종의 멍에를 메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율법이 명하는 바 사랑으로서는 종 노릇 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린 바가 있지만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이고(고전13:6),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은 결코 서로 물고 먹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진리를 변호한다는 측면에서 언어적인 폭력이 동원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과 관련해서는 가톨릭의 경우 자신들의 교리를 주장하면서 자신들에게 반대되는 자들에 대하여 박해를 가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칼빈은 오늘 본문에서 물고 먹는다는 이 표현이 모든 언쟁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모든 불의한 행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는데,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 가운데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일의 결과는 피차 멸망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를 편든다는 이유로 언쟁과 불의한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하여 주의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것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진리에 대하여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결코 아닙니다. 진리는 하나님 사랑과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관계된 이상 경중을 따지자면 진리를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살핀 11절과 12절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서 칼빈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구원보다 훨씬 탁월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황홀케 하여 그 영광만을 사랑하며 거기에만이 온갖 열정을 쏟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만을 진지하게 바라는 신자들은 이 세상과 인간의 문제를 잊어버리고 무엇을 하든지 어떤 경우에서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되는 것보다 차라리 온 세계가 멸망당하는 편이 낫다는 사태가 일어난다... 그런데 이것은 사랑과는 모순된 것처럼 무자비하다는 비난은 받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 본문에서 이웃 사랑과 관련해서 말한다고 할 때 그것은 진리 안에서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사랑을 말할 때 거기에는 이런 성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4절과 5절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한편으로 다른 복음에 대하여 저주를 선언하고 있지만, 그 저주는 실제로 저주 받기를 바란다는 측면에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 이스라엘 백성을 세워 축복과 저주를 말씀하실 때 저주를 받도록 하기 위해 말씀하신 것이 아님과 같습니다. 저주를 피하고 축복을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저주를 말씀하시는 것은 저주를 받아 마땅한 그 일에서 피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축복의 자리로 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의식법은 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에게 도덕법에 대하여 순종할 것을 명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때 진리에 있어서는 양보해서는 안 되겠지만, 진리를 주장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죽이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을 세우기 위한 모습으로 있어야 합니다.

 

앞에서 율법주의, 반율법주의라는 말도 했지만, 우리는 율법주의를 거절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데, 거기에 율법의 행위나 의식의 준수와 같은 것이 들어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율법주의를 거절한다는 것이 반율법주의로 나아가도록 해서도 안 됩니다. 모든 율법에 대하여 거절해도 되는 것처럼, 그래서 율법에 대하여 방임주의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5:17)는 말씀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율법의 완성자이십니다. 완성자이시기 때문에 한편으로 의식법은 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의식법은 오실 그리스도를 내다보도록 하는 성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셨다면 그것은 더 이상 붙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율법의 완성자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도덕법에 대한 의무를 지우셨습니다. 그분이 완성자로 계시기 때문에 사실은 도덕법까지 그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야지만 하지만, 그런 측면에서 그분이 우리의 의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거룩도 되시지만, 완성자로서 그것을 우리에게 온전히 주시기까지 거기에 매여 살도록 명하고 계시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비록 그것에 매여 살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시 말해 이웃 사랑을 실천할지라도 하나님 수준만큼의 이웃 사랑은 결코 나타낼 수는 없지만, 그만큼 이웃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도 점과 흠이 있지만,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이 그 모든 것을 덮어 결국 완성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그런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자로서(5:5)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는 결코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디도서 2의 말씀만 확인하고 마치겠습니다. 11절부터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2:11-15) 택하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양육의 성격은 무엇인가? 경건하지 않은 것, 이 세상 정욕은 다 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서 살도록 하면서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육하시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무엇인가? 자기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영원 전부터 자기 백성으로 삼았지만, 이 땅에서 자기 백성이 되도록 만들어 가신다는 겁니다.

특히 이 말씀을 15절에서는 목회자 디도에게 전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교회 앞에 이 사실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육하신다는 것, 그런 양육의 성격이 죄를 버리고 의를 향해 나아가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할 수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양육하시기 때문에 공로주의는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런 양육이 죄를 버리고 의에 합당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이 명하는 바에 대하여 방임주의로도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것에 근거해 사랑으로써 역사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이 끝나는 마지막 자리를 소망하는 자들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바른 길로 가고 있는가를 점검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가진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야고보서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사랑과 선행에 있어 열심을 내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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