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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60614설교 / 갈라디아서5장16-26절 / 성령을따라행하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6.06.14|조회수32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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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16-26

성령을 따라 행하라

 

갈라디아서 5장으로 와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기 때문에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합니다. 율법의 행위, 그런 행위로써의 의식 준수, 특별히 할례를 행함으로 우리의 의와 구원을 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전체 내용의 핵심은 이런 종의 멍에를 반박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율법의 모든 내용을 거절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그 성격상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써 서로 종 노릇 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율법의 내용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 사랑에 근거해서 이웃 또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이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에 대한 사랑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듣고 안다고 해서 육체의 기회가 아닌 사랑으로써 종노릇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럴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담 안에서 함께 타락한 이 육체를 완전히 벗어버린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설명하자면, 죄의 구성 요소가 원죄와 자범죄로 되어 있다고 할 때, 그리고 원죄의 구성 요소가 죄책과 부패로 되어 있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부패에서 벗어나지 못한 육체를 가지고 있고, 그로 말미암아 자범죄를 짓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라는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우리가 육체의 기회가 아닌 사랑으로써 종노릇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로마서 7에서 이런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 모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1-25)

여기서 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을 본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로서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선만 행하기 원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이 함께 있는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선과 악이 함께 있을 때 어느 쪽이 승리하는가? 바울은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본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곤고하다고 말합니다. 거듭난 자로서 원하는 것은 선이지만, 죄의 법이 나를 이끌어 간다고 할 때 그 사실이 비참하고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참함과 고통스러움은 단순히 죄책감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고백입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나,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를 돌립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8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8:1)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의식법으로부터의 자유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죄와 진노로부터의 자유요, 도덕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이런 말을 합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8:3-4) 우리 스스로는 선과 악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누가 하시느냐?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모두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16절을 보시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즉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할 때, 그리고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가 아닌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해야 한다고 할 때 너희는 너희의 힘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신비주의 쪽에서 말하는 직통계시나 초이성적인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의 공생애를 마치기 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 26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한복음 15 26도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한복음 16 13절과 14도 같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할 때 말씀과 분리된 성령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 사도 바울이 자유를 말하면서 육체의 기회가 아닌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고 하는가? 그것이 율법 전체의 핵심이요, 나아가 복음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튜 풀 주석은 본문에 대하여 설명할 때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종합적으로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너희의 모든 행실은 한편으로는 복음이라는 외적인 규범을 따른 것이 되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희 안에 거하시고 역사하셔서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내적인 역사와 감화와 지시하심을 따른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할 때 이 말씀의 근거가 되는 부분들을 다시금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성령에 대한 말한 구절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먼저 바울은 갈라디아서 3에서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믿음으로냐고 묻습니다(3:2). 그리고 이어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말합니다(3:3). 정확하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 가운데 있게 되지만, 성령의 어떤 역사들이 나타나는 것은 결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들이 성령으로 시작했다고 육체로 마치려는, 다시 말해 율법의 행위, 행위로써의 의식 준수로 돌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어지는 내용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들면서 14로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 다시 말해 은혜언약과 관련된 복의 내용이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미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의 내용 가운데 무엇이 있느냐?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까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복, 다시 말해 은혜언약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17:7)고 하실 때 창세기에서는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을 통해, 또 이삭의 아들로는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통해 이루시지만, 갈라디아서는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않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3:16).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실 때 이러한 약속은 이삭이나 야곱을 통해 이루시는 게 아니라, 사실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시는 게 아니라, 지금 갈라디아서는 성령의 약속까지 말합니다. 그 일을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구분하자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 은혜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십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4:4)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고 해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고 또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성령 하나님의 역사, 즉 성령 하나님께서 믿음을 일으키셔야 합니다. 이것을 지금 갈라디아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3:14).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할 때 이 점을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언약 안에 있는 자이고, 그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가 되셨고, 또한 성령 하나님께서 너희 가운데서 역사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갈라디아서 4에서는 하갈과 사라에 대한 비교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9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라디아서의 하갈과 사라의 비교는 유기자와 택자의 비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종과 자유 있는 여자의 비교요, 두 언약에 대한 비교입니다. 소위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비교입니다. 이때 여종의 아들은 육체를 따라 난 자로 말합니다. 반면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난 자를 성령을 따라 난 자로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 여종의 아들이 아니라,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입니다(4:31). 비록 이방인이지만 성령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혈통으로는 아브라함과 전혀 상관이 없지만, 영적인 의미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런 논증에 근거해 지금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하는 겁니다. 특히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어떤 말씀까지 있느냐? 29절에서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하는 일이 있지만, 30에서는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는 말씀까지 있습니다. 그러니까 장차 받을 유업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은 은혜언약과 그 언약의 성취와 적용이 어디까지 내다보도록 하는 것인가? 장차 받게 될 모든 유업까지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가나안 땅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과(5:21), 로마서 8장의 상태에까지 이르게 될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30) 즉 장차 받을 유업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나라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는 영광스러움까지 보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을 보장해 놓고 보장된 그 길이 어디인지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성도에게 어떤 윤리적 노력을 요구하는 말이 아닙니다. 너희는 이미 성령으로 시작한 자들이다(3:3). 또한 성령의 약속을 받은 자들이며(3:14), 성령을 따라 난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들이다(4:29,31).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장차 받을 유업까지 보장하신 자들이다. 너희가 이런 대상임을 안다면 너희가 걸어가야 할 길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종의 자녀처럼 육체를 의지하여 살지 말고,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답게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은 은혜언약의 백성답게 살라는 요청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의 역사가 장차 영화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완성될 것을 믿고 그 길을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가장 좋은 것을 보장해 놓고 그 길을 제시한다고 해서 그 길로만 갈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 길이 가장 좋은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 길을 갈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구원의 시작점에 있어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출발은 했지만, 종점까지 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라고 하시는 것이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는 것입니다(8:3-4).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하시는가? ‘그 영을 따라서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을 따라 가는 그 길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즉 우리 안에서는 끊임없는 선과 악의 싸움이 있어 투쟁하지 않고는 그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여기서 바울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을 대조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이 둘이 서로 거스르고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육체의 소욕이란 칼빈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본성’, 곧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부패한 본성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부패한 본성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육체의 소욕은 불신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에게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육체의 소욕이라는 표현 때문에 몸에만 있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한때 육체의 소욕을 이런 의미로 이해해서 육체를 쳐 복종시키는, 그런 의미에서 육체에 고통을 주는 일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육체의 소욕이라고 할 때 감각적인 부분과 이성적인 부분으로 나눠 감각적인 부분만을 의미한다고 보아서도 안 됩니다. 인간의 본성이란 타락하지 않은 부분이 어느 한 곳이라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전 존재가 부패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감각적인 부분도 타락했고, 이성적인 부분도 타락했습니다. 그 결과 비록 신자라 할지라도 육체의 소욕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일이 있게 됩니다.

이것을 바꿔 말하자면, 신자 안에는 분명 성령 하나님이 계십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6장에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고 할 때 성령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성전으로 삼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런 몸이 부패한 본성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를 뿐만 아니라 성령 또한 육체의 소욕을 거스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둘이 서로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자들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분명 신자이기 때문에 선을 원하지만, 육체의 소육은 우리로 하여금 선이 아니라 악을 행하고 죄를 짓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18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분명 많은 부분 17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육체의 소욕이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중생 된 자로서 하나님의 의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 우리 마음 가운데 주시는 소망인데, 간단히 말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11:45)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고자 하는 마음입니다(12:1). 신자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육체의 소욕 또한 있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지 못하도록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는 탄식을 할 수밖에 없지만,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는 말은 율법이 죄인에게 행사하는 정죄와 속박의 권세 아래 있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3:13).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이신 분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보내어 율법 아래 나게 하셔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4:4-5). 그래서 결코 정죄를 받거나 속박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는 탄식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지 못하지만, 신자는 그렇다고 해서 다시금 율법의 정죄와 속박 아래 매이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죄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정죄와 속박 아래 매이도록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이라고 할 때 참된 신자는 이러한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가 여러분이 주일에 예배드리기 위해 나온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너희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말씀하는 게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라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역사하신다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더욱 말씀에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일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주목하면서, 너의 마음을 말씀 가운데 쏟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본성은 늘 성령을 거스릅니다. 성령을 거스르기 때문에 거룩이 아닌 죄를 향합니다. 이런 우리의 본성을 조금이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릴 수 있는 것은 말씀을 따르는 것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따르는 거기에도 점과 흠이 있어서 사실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은 우리의 의와 거룩이 되시는, 그리고 결국 우리의 영화가 되실 수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런 약속의 말씀에 힘입어, 그리고 장차 주어질 유업을 바라보면서 말씀을 따르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조금 더 직접적으로 무엇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고, 무엇이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것인지 맺히는 열매를 통해 확인하도록 합니다. 먼저 19절 이하 21절에서는 육체의 일에 대하여 말합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사실 타락한 모든 사람이 육체의 소욕을 따른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타락에 대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이라고 하면서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데 있습니다(17:9).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자신의 부패한 마음을 외식과 위선으로 감추고자 하는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부패함을 숨길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런데 비록 사람들이 자신의 부패한 마음을 외식과 위선으로 감춘다 할지라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습니다. 혹 감추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드러날 수밖에 없지만, 지금 바울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른다고 할 때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이상 육체와 관련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육체의 일입니다. 이런 육체의 일은 너무나도 분명한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성과 그의 모든 명령과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열매를 맺는다고 할 때 누구도 부정하거나 핑계할 수 없습니다. 결국 육체의 일이란 인간의 부패한 마음, 다시 말해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열매들입니다. 이런 육체의 일과 관련해 바울은 몇 가지를 열거하는데,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죄를 다 열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육체의 일이란 이러한 것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21절에서 이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육체의 일로 나타나는 열매의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고린도전서 6에서도 언급됩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6:9-10) 우리는 장차 받을 유업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런 열매를 맺는 게 합당하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21:8)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영적으로 죽은 것이 첫째 사망이라면, 거기서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결국 육체의 일로 나타나는 열매만을 내놓다가 둘째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사망입니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열매를 불신자들만 맺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도 맺습니다. 신자는 분명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의에 합당한 열매만을 맺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일로 나타나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부패한 이 육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원죄의 구성 요소가 죄책과 부패라고 할 때 지금 우리의 육체는 여전히 부패함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패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육체의 죽음 밖에 없습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때 비로소 완전 성화에 이르게 됩니다.

그럼 육체의 죽음을 겪지 않고는 완전성화에 이를 수 없는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 있는 신자들이 있을 것인데, 그들은 죽지 않고 주님 품에 안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죄 있는 상태에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과 방불한 일이 그때 일어나는데,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1-52)

분명한 것은 신자라 할지라도 부패한 본성을 가진 육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일로 나타나는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바울은 이전에도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한다고 하면서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즉 육체의 일은 너희에게 어울리는 열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싸움을 싸우라, 그리하여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칼빈은 21절에 대한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한편 그렇다고 하면 구원얻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왜냐하면 이와 같은 죄들 중 어느 하나라도 범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대하여 답한다. 바울이 범죄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나라에서 반드시 추방당한다고 위협한 것이 아니고 다만 범죄하고도 그 죄를 회개하지 않고 그와 같은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는 자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성도들도 때로는 중대한 죄를 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저들은 본 길로 돌아서 간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위협은 우리를 회개로 부르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6절에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할 때 우리는 육체의 일로 나타나는 열매에 대하여 싸우되, 혹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일이 있다면, 그래서 성령을 거스르는 일이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닌 줄 알고 속히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걷도록 하신 길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불신자와 신자의 다른 점입니다.

여러분, 신자라고 해서 불신자보다 낫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받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신자와 비교해 낫다고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사실은 굉장히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다만 우리가 낫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은 육체의 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또한 은혜의 방편으로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말씀으로 경고하시고,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개로 이끄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입니다. 즉 회개할 수 있는 것,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복을 받고 있는 자들이 가야 할 마땅한 길은 무엇인가? 성령을 따라 행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절과 23절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앞에서도 말했지만, 부패한 본성를 가지고 있는 육체로부터 나오는 것은 육체의 일밖에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실 때만 가능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성령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즉 참된 신자만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물론 불신자들 가운데서 이런 열매의 외형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성품에 있어서 온화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성실하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대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제 또한 얼마나 잘 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점에서 불신자들 가운데서 법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도 말했지만,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외식과 위선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성령을 선물로 주신 바가 없으며, 성령을 선물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경우도 성령의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15:4-5) 포도나무로부터 포도 열매가 나오듯, 성령의 열매 또한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결코 인간 스스로로부터 나올 수 없습니다. 때문에 신자라고 해서 이런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신자들 가운데 역사하셔야지만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 역사는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새겨질 때 나타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아닌 하나님 편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극적이어야 된다, 소극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열거하면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런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개혁파 신학에 있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이 부분입니다. 왜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나열하고 있는가? 우리의 본성은 육체의 일로 나타나며, 성령의 열매는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야 하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에서가 아닙니다. 만약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라면 거기에는 육체의 일로 나타나는 열매 외에는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말씀에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말씀에 합당한 것만을 생각하고, 그런 생각이 말로, 행동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열거하고 난 뒤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명령하시는 것이 이러한 열매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51절의 의미가 아니라 13절의 의미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의식법으로부터의 자유요, 나아가 도덕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요, 하나님의 정죄와 진노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도덕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종 노릇 하라고 했는데, 그런 열매들에 대한 열거가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통해 보자면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권장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신자에게서 기뻐하시는 것이 있다면 이러한 법에 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한다고 해서 모든 것에 대한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 즉 도덕법에 매이는 자유입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는 겉으로만이 아니라, 안으로도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바울은 2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우리가 예수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매일의 삶 가운데 이것을 확인하는 싸움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육체의 일을 하는 존재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의 일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시되 무죄한 자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그분의 죽음은 대속을 위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무죄하신 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여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 완성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던가, 아니면 우리가 죽어 육체로부터 우리의 영혼이 분리되어야 하지만, 그리고 거기에 죄에서 벗어나는 완전성화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옛 본성이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더 이상 육체가 원하는 대로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가운데 육체의 일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육체의 일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생이 끝날 때까지, 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휴전 없는 영적 전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여전히 정욕과 탐심이 있으며, 그런 정욕과 탐심은 결국 육체의 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는 성령으로 사는 자가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성령으로 행하는 자가 되라, 그리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지만, 우리가 누군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언약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은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8:32)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여기에 영화까지 있습니다(8:30 참고). 은혜언약의 백성으로 장차 받을 유업까지 보장되어 있는 자들이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령까지 선물로 주셔서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얼마든지 성령으로 행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어떠한 열매를 맺으며 살고 있는지를 늘 살펴야 합니다. 우리로부터 맺히고 있는 열매가 육체의 일인지, 아니면 성령의 열매인지 살펴야 합니다. 맺히는 열매를 보면 그것이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이지, 아니면 우리의 본성, 다시 말해 육체로부터 나온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육체의 일이 나온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가 나온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내 능력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할 때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종 노릇 하라고 하면서 마지막 부분에서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5:15)는 권면을 했는데, 동일한 권면으로 마칩니다. 26절을 보시면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 가운데 바른 복음과 다른 복음으로 인하여 물고 먹는 일이 있다고 할 때 분명 거기에는 도가 지나친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 헛된 영광을 구하는 일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칼빈은 헛된 영광을 남보다 높아지려고 하는 명예욕이라고 말합니다. 매튜 풀 주석은 자신을 자랑하고 뽐내고 싶어하는, 사람들로부터 명예와 칭찬을 구하는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왜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라고 하는가? 그것이 이런 헛된 영광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는 진리의 보존을 위하여 싸워야 합니다. 그 진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보존을 위하여 싸우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명예욕이 될 때가 있습니다. 자기 자랑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앞에서 말한 육체의 일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외적으로는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진리를 편든다는 것 때문에 다르게 보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일 때 그것은 헛된 영광일 뿐입니다.

그럼 헛된 영광이 아닌 참된 영광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돌아가야 할 모든 영광을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례 요한이 말한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다시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30) 바른 복음을 위하여 바울이 저주를 말하고, 바른 복음을 위하여 다른 복음에 대하여 반박하고, 그러면서도 주의 몸 된 교회가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결코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바울은 어떤 말까지 합니까?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9:3) 그만큼 복음을 반대하는 원수 같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구원의 은혜가 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혹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것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간절한 것입니다. 바른 복음에서 다른 복음으로 이탈한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에 대하여 저주를 말하면서까지 반박했던 것이고, 참된 복음을 전함으로 돌아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 가운데 일어난 논쟁은 그런 성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편드는 것 같지만 성령의 열매가 없습니다. 나타나는 것은 육체의 일로 나타나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기에는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는 일 밖에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자극하면서 시기하더란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권하는 것이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이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 아니냐?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아니냐? 이미 성령으로 사는 자가 되었다면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헛된 영광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고 말할 수 있는 열매의 풍성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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