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갈라디아서

260621설교 / 갈라디아서6장1-5절 / 그리스도의법을성취하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6.06.21|조회수24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갈라디아서 61-5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가 육체의 기회가 아닌 사랑으로써 서로 종 노릇하는 것이라고 할 때, 신자조차 자신의 능력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만, 아담 안에서 타락한 육체를 완전히 벗어버린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할 때 원죄의 구성 요소는 죄책과 부패입니다. 그리고 부패로부터 자범죄를 짓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의롭다 함을 받는데, 여기에는 죄책으로부터의 해방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과 함께 의에 대하여 살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패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즉 신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함과 함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 의롭다 함을 받지만, 부패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으로써 서로 종 노릇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로마서 7장의 진술을 살펴보았지만,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거듭난 자로서 선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런 신자에게도 악이 함께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면서도,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로 하자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선에 있어, 사랑에 있어 무능력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이상, 그리고 그의 성령을 선물로까지 주신 이상 우리로 하여금 영광에 이르기까지 친히 역사하십니다. 즉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과 말씀으로 역사하여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버리고 의를 향하여 나아가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써 서로 종 노릇하라고 할 때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성령이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기 때문에 말씀에 따라서만 행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도 우리의 무능력은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육체의 소욕이 있고, 그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계속해서 거스릅니다. 역으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에 대해서 거스를 수밖에 없습니다. 휴전 없는 싸움이 지상에 사는 동안 계속됩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비록 휴전 없는 싸움에서 백전백승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오히려 자주 넘어지고 패하는 일이 더 많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은 더 이상 율법이 죄인에게 행사할 수 있는 정죄와 속박 아래 있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우리로 하여금 육체의 기회가 아닌, 사랑으로써 서로 종 노릇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결코 방종이 아닌, 감사로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과 함께 지난 시간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할 때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것은 무엇인지 열매로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하면서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대조시키기도 했는데, 신자일지라도 육체의 일로 나타나는 열매를 맺습니다. 왜냐하면 부패한 육체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의 일로 나타나는 열매에 대하여 어쩔 수 없다고만 말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열매를 맺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 할지라도 장차 받을 하나님 나라의 유업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참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은 장차 받을 하나님 나라의 유업에서 떨어져 나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일을 나열하면서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은 이러한 열매들이 신자가 맺어야 할 합당한 열매가 아니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인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할 때 우리로 하여금 맺도록 하고자 하시는 바가 이러한 열매라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마지막 절에서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5:26)고 권면합니다. 서로를 자극하여 분노하게 하거나, 서로를 시기하고 경쟁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성령의 열매가 아니다, 그런 모습은 하나님의 영광과 무관한 인간의 교만과 자기 과시에서 비롯된 헛된 영광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갈라디아 교회들 가운데는 심각한 갈등과 분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5:15)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갈등의 배경에는 참된 복음과 다른 복음의 대립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단호하게 책망하며 그들의 가르침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진리와 거짓을 동일하게 취급해서는 안 되고, 언제나 진리 편에 서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생각해야 합니다. 진리를 붙들고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참된 복음을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서도 교만과 자기 과시, 분냄과 다툼, 시기와 경쟁심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말과 행동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육체의 일이 드러난다면, 비록 우리가 옳은 주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헛된 영광을 구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굳게 붙들어야 할 뿐 아니라, 그 진리를 붙드는 방식에서도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올바른 교리를 고백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과 온유와 오래 참음 가운데 그 진리를 드러내는 삶을 기뻐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내용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먼저 1절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라디아 지역 교회들 안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참된 복음에서 이탈하여 다른 복음을 따르는 일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계속해서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여기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교회가 아닌 보이는 교회를 향해 있지만, 그런 점에서 곡식만이 아니라 가라지도 함께 있지만, 곡식이라고 해서 넘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때 넘어졌다고 해서 형제에서 원수가 되는가? 넘어지지 않은 사람만 형제인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되었다는 것은 에베소서 2장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2:22).

그러므로 바울은 넘어지지 않은 자들만이 아니라 넘어졌다 할지라도 주님의 몸 된 교회와 그 지체들에 대하여 형제라고 부릅니다. 형제라고 부름으로 인해 오늘 본문에서도 권면하지만 넘어진 자들은 속히 일어나길 원하고, 넘어지지 않은 자들은 더욱 견고하게 서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단지 사도의 마음만이 아니라, 사실은 교회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기 때문입니다(1:23). 예수 그리스도 자체만으로 완전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충만하게 되지만, 그리스도는 교회 없이는, 더 나아가 교회의 완전함 없이는 자신 또한 완전하지 않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교회가 올바르게 세워지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분이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라고 권면합니다. 이때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난다는 것은 고의적으로, 공개적으로 죄를 범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시험에 빠져 죄를 저지르게 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고의적으로, 공개적으로 죄를 범한 것은 거짓 교사들입니다. 반면 그들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바른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을 따르게 되었다면 고의적이고 공개적인 것보다는 자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죄를 범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보면, 편지의 어투가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는 강하게 말하는 반면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서는 좀 더 부드럽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이 연약하여 참된 복음에서 이탈하여 다른 복음을 따르든, 아니면 또 다른 죄가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라고 하는데, 이 부분이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누군가 범죄를 하게 되어 드러나게 되면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기보다는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듯 잘못되었다는 책망만 하게 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마치 자신은 그러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비난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옳은 것으로 잘못된 것을 책망한다 할지라도 성령의 열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의 본성은 사랑으로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을 바로 잡아 함께 가기보다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옳음으로 잘못을 비난하는 쪽으로 나아가길 좋아합니다. 이러한 본성 때문에 죄를 범한 자들에 대하여 책망조차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자라면 형제들이 죄를 범했을 때 그것이 죄임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책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을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사람을 바로 잡는 것이지, 책망을 위한 책망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를 바로 세워 함께 주의 뜻을 따르는 방향이어야지, 책망을 통해 낙심하게 되고 좌절하게 되는 그런 방향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온유한 심령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특히 신령한 너희라고 말하는데, 신령하다는 것은 성부의 영 그리고 성자의 영이신 성령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의 가르침 가운데 있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런 자들은 성령의 열매로서 온유한 심령을 가지는 게 마땅하지만,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일로 나타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때문에 형제를 세운다고 할 때 그것이 육체의 일인지, 아니면 성령의 열매로서 나타나는 것인지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온유한 심령 없이, 오히려 육체의 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갈라디아서 5장의 표현으로 하자면 서로가 물고 먹는(5:15), 그래서 서로가 노엽게 하고 서로가 투기하게 되는 일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5:26).

 

이런 점에서 바울은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까지 말합니다. 우리말 번역은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라고 되어 있어서 마치 먼저 바로잡고 그 후에 자신을 살피라는 순서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오히려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난다면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으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신을 살피는 일에 있어서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예외 없이 시험을 받아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형제 중 누군가 범죄한 일이 드러난다면 단지 죄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바로 잡고, 동시에 자신도 넘어질 수 있는 자라는 것을 알고 자신을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도 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되면 넘어진 형제들에 대하여 더욱 온유한 심령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신이 죄를 범하였을 때에는 용서와 회복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하고 그 죄가 드러났을 때 용서와 회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는데, 내가 그러하다면 저들도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다섯 번째 간구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6:12)라고 할 때 이 기도는 먼저 다른 사람의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용서를 받아야 하는 우리 자신의 죄를 생각하게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도 더욱 온유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부패성을 가진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는 엄격합니다. 그래서 온유한 심령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이,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난다면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면서도 자신을 살펴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온유한 마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지 않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부패성을 가진 자들임을 알고, 혹 형제 중 누군가 넘어진 사람이 있다면 정죄만을 위한 정죄가 아니라 그들을 세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일으켜 주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자신도 예외라고 생각하지 말고,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항상 조심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고전10:12).

 

그러면서 바울은 2절에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합니다. 1절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형제 중 누군가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을 온유한 심령으로 말하게 될 때 그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짐을 서로가 지라는 것은 1절의 권면대로 연약하여 넘어진 형제를 일으켜 세우라는 것이고, 나아가 자신도 넘어질까 더욱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짐을 서로가 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죄에 대하여 내버려두거나 눈 감아 버리는 것인데, 거기에는 갈라디아서 59절의 말씀처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결과만 있게 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는 것은 범죄한 일에 대하여 결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정죄를 위한 정죄로 있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온유한 심령으로 그들을 세우고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하는데,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말씀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복음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 부분으로 언급하자면 이것입니다. 요한복음 13 34절과 35입니다.“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5 12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왜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고 말씀하는가? 이런 말씀에 근거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짐을 우리와 같이 지신 것이 아니라, 그분 홀로 우리 대신하여 지셨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우리가 죄의 짐을 지고 영원한 사망에 이르러야 했지만, 우리의 연약함도 짊어지시고 우리의 모든 죄까지 짊어지심으로 그가 대신하여 죽으셨던 겁니다. 너희가 이러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너희 또한 형제들에 대하여 짐을 함께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연약함으로 죄를 지어 드러난 형제가 있다면 그를 바로 잡되 정죄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설 수 있도록 잡아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계명이요,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여기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법과 모세의 법 사이에는 대조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말하는데, 그리스도의 법과 모세의 법이 다르다는 의미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의 법의 바른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이 대조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갈라디아 지역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다시 말해 거짓 교사들 때문입니다(2:4).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지된 율법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무거운 짐을 지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법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는 것입니다(5:1). 그러면서도 육체의 기회를 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는 것입니다(5:13).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법과 모세의 법 사이에 대조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하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믿음과 율법(의 행위)을 대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것은 결국 너희가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짐을 서로 지라고 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은혜가 넘어진 자들에게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자칫 그들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지만 상대방이 그런 마음을 모르고 상처를 받게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특히 죄 문제는 더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 문제를 덮어 두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보자면, 직무유기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아무런 오해 없이 주의 선하심이 나타나도록 기도하면서 서로가 서로의 짐을 지면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 나가야 합니다.

 

계속해서 3절을 보시면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함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중 누구도 아무 것도 아닌 자라는 사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누구도 예외 없이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무()와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내놓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하지만, 누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합니까? 오히려 그리스도의 법과 상관없는, 성령의 열매가 아닌 육체의 일 외에 무엇을 내놓고 있습니까? 그런데도 부패성을 가진 인간은 늘 자신이 뭔가 된 줄 압니다. 그래서 세계사뿐만 아니라 교회사에서조차 인간의 공로주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특히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한 것을 내놓으면 주의 은혜라고 말하면서도 거기서 자신의 공로를 내세울 정도입니다. 은혜라고 말하면 공로를 말할 수 없어야 하는데, 은혜를 말하면서도 공로를 말하더란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이런 자들을 경계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전체 맥락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의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다, 율법의 행위를 공로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와 구원을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으며, 선하다고 할 만한 것도 전혀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로마서 7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신자는 선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새로운 마음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패한 마음을 그대로 두시면 우리는 선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조차 가질 수 없습니다. 여기서 귀결되는 결론, 즉 둘째는 본문 3절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있음에도 된 줄로 생각하는 자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럼,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라는 존재가 이러하다는 것을 알 때 공로주의를 거절할 수 있으며, 여기서부터 우리는 더욱 온유한 심령으로 서로의 짐을 지면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함에 있어서 늘 문제가 생기느냐?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일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거기에는 인간의 공로주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데도 뭔가 된 줄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철저히 인간의 모든 공로주의를 배격해야 합니다. 인간에게 돌아갈 수 있는 공로는 단 1%도 없다는 것을 알고,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바울이 나의 나 됨을 말할 때 은혜라고 말하면서, 그 은혜에 감사해서 다른 사도들과 비교해 더 많은 수고와 노력을 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공로로 여기길 좋아합니다. 그래서 늘 내 수고, 내 노력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성경이 너희의 수고요, 너희의 노력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백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내 수고, 내 노력을 말할지라도 그것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고백이 있어야 하지만, 공로주의는 은혜를 말하면서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전적 부정이 없습니다. 여기에 모든 육체의 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사람에게 돌릴 수 있는 공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결국 거룩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여기에 노력과 수고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과 수고까지 우리 안에서 일으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은 늘 스스로 속이는 존재이기에 바울은 4절로 다시금 인간의 오만함을 경계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1절에서는 분명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라고 권면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온유한 심령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교만은 온유한 심령으로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여 다른 사람을 비판하면서 자신을 자랑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면서도 반드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동일한 의미에서 바울은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권합니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금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서로가 비교를 통해 자신을 높이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사람의 판단 기준에 따라 자신을 저울질하는 것도 금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람의 판단 기준에 따라 자신을 저울질하면서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은 전혀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권할 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나 사람의 기준에 따른 평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이 기준이요, 그런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법이 기준이 되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공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법에 비춰보면 우리는 아직도 완전에 비해 턱없이 수준이 낮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비교 대상이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법이 기준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의 법이고, 그 법 앞에서 늘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은 늘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세우는 데 있어 온유한 심령을 버릴 수 있는가? 없습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하면서,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한다고 말씀하는데,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1 31절의 의미와 같습니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그러니까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 있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자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은 자기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자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매튜 풀 주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위와 행실이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게 행하게 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은 합당하지만, 마치 자신의 능력이나 힘으로 그렇게 된 것처럼 자신의 행위와 행실을 자신의 공로로 여겨서 자랑하거나, 죄를 범한 다른 사람들의 불완전함과 비교해서 마치 자기는 그 사람들보다 우월하고 온전한 것처럼 여겨서 자랑하고 기뻐하는 것은 큰 착각이고 잘못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조금 더 단순하게 말합니다. “이것은 자랑이라기보다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는 말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사람은 자기를 칭찬하기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감동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경건한 성도들이 자랑하는 이유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들에게서 칭찬할 거리를 발견할 때 그 근거를 자기들의 공로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으로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5절에서 바울은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고 합니다. 각자는 자기의 일을 살피는 데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앞에서 바울은 범죄한 형제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으라고 했고(1), 또한 서로의 짐을 지라고도 권면했습니다(2).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을 살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범죄한 형제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으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살피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자신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각자는 자신의 짐을 져야 합니다. 늘 그리스도의 법을 기준으로 해서 우리 자신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형제의 범죄를 보면서 저 사람은 왜 저런 죄를 범했는가?”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동일한 죄에 넘어질 수 있는 사람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자기 인식이 온유한 심령의 기초가 되며, 거기에 그리스도의 법의 성취가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서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범죄한 형제를 정죄하기보다는 회복시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권면이 빌립보서 2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2:1-4) 특히 3절과 4절이 오늘 본문의 교훈과 맞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에서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분은 본래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위하여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오셨습니다. 반면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의 말씀처럼 아무 것도 없는 자와 같습니다. 모든 것을 가진 분이 모든 것을 버리시고 오셔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면, 본래 아무 것도 없는 자가 그분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어떻게 우리 자신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철저히 자기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 이러한 자랑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여야 합니다. 그런 자로서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히 다른 사람을 세워가야 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법의 성취가 있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