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늠의 추억 5...고교에 진학하다

작성자굿 나잇(춘천-남)|작성시간26.06.19|조회수13 목록 댓글 4

소먹이고 꼴베든 내게도 고교진학의 기회가
왔다,

당시 인기 절정이던
어떤 고등학교에서 3장의
입학지원서가 우리 학교에 배당되었다

2명이 지원하고
1명이 부족하여 난 일단 지원서를 내고
당신들을 설득키로 했다,
ㅡ당시엔 전교석차 5% 이내인 사람만 지원이 가능했다ㅡ

3명이 지원하였으나 1 차 ㆍ2차ㆍ3차
시험을 치르는 동안 나만 최종 합격하였다

부산해운대 언덕에 자리한
국립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

당시 박정희가 공업인력에 필요한 우수한 인재를 배출하기 위해 세운 '기계공업학교'의 시초 학교로 지정되어 '전액 국가지원'으로 운영되는 국립학교였다

자격증만 취득하면 장학금까지 주고
독일로 기술유학도 가능하며
(처음 학교 이름은 "한독 기술고등학교" 였다)
졸업하면 전원 취업도 보장된다 하니

나에게 딱 맞는 꿈의 학교였었다
그러하길래 당신들도 허락하실 수밖에...

장학금을 받기 위해 열심히 기능을 익혔다
일반 공부는 아예 안중에도 없이
기계가 책이요 생명이요 희망이었다

정밀기계가공 기능사 (밀링 부문)
2학년 2학기 때 취득하고 그 이후에는
돈 벌며 다녔다.(매달 8.000원 자격증 수당)

기계과 1반 1번... 9회 졸업앨범의 맨 앞에
내 사진이 있다

박정희가 죽고
공고의 기세도 차츰 꺽혀가고
내 머리도 점점 커져가 사회의 현실을 차츰 알아가면서
내한계를 느끼게 되어, 대학 진학에 대한 열망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3학년이 되고 당시의 분위기로
거의 모든 동기들이 취업실습을 떠났다

그땐 우리 학교가 최고의 상종가였다
박통도 지대한 관심으로 1년에 한두 번씩이나 방문했었고, 그해 세계 기능 올림픽대회가 우리 학교에서 열렸었다,

대학 진학은 일단 유보했다.
돈도 없고 실력도 없었으니
난 여러 곳의 취업제의를 거절하고 공채에 응시하였다

수원에 있는 삼성전자
운이 좋아서 차석 합격이라는 영예를 안았고
부품 설계실로 발령을 받았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공고를 졸업한 놈이 삼성전자 설계실에서 근무를 하다니

하지만 점차 우울해지고 있었다
학력에 따르는 사회적 차별을 점점 더 뚜렷이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점 점 더 대학 진학에 대한 열망이 강해져만 갔다.
입사 1년 6개월쯤 후 사표를 던졌다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고향에서 6개월쯤 독학하다가
부천에 있는 군수품 제조 공장에 취직했다
(비밀취급 인가증이 필요한 곳)

낮에는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고
밤에는 책과의 처절한 사투가 시작된 것이다

볼과 펜의 스펠링조차 헷갈렸던 공고 출신의 무식한 내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학생 실력도 안 되는 늠이 대학이라니

난방도 안 되는 허름한 쪽방에서
에나멜선으로 누울 자리만 칭칭 깔고
추위를 삭이며 독학으로 사투를 벌였다.

첫해엔 고배를 들었다...
그 이듬해 장학생을 목표로 지원한
건대 법정대였지만 턱걸이로 간신히 합격했다,

중학교도 못 갈 뻔했던 그촌늠이
수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다
비록 동년배 보담 3년이나 늦어져 버렸지만
 

 

해운대 언덕에 자리한 모교

기숙사, 지금은 용도가 변경된 듯

(기숙사)사감과 신사(간부)

"기술인은 조국근대화의 기수"
기능탑 앞에서ㆍ후배들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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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우정/여/남양주 | 작성시간 26.06.19 박수가 절로 쳐집니다.

    의지의 한국인의 표상이시네요.
  • 답댓글 작성자굿 나잇(춘천-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9 촌늠의 뚝심같은 것 ㅋ
  • 작성자몰운대 | 작성시간 26.06.19 9회 졸업생이라면,, 대략 1959년生,,, 쯤으로 생각 됩니다~,,ㅎㅎ,
  • 답댓글 작성자굿 나잇(춘천-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9 네 맞습니다
    원칙적으로 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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