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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 (요 20:11-18)

작성자송다니엘|작성시간13.05.05|조회수71 목록 댓글 0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

 

 

20:11-18

요절: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게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6:9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제일 먼저 나타났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 나타나셨을까요? 당시의 유대 법에 따르면 여성은 증인으로서 제한된 자격만 가지고 있었습니다(고전 15: 이하 참조). , 그녀의 증거는 효과가 없습니다. 실제로 사도들까지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여인들의 증거를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탄생 시에도 목자들이 증인이었습니다. 목자도 여자처럼 법정에서 정식 증인이 되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일까요? 아무튼 하나님은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자들을 차별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구원은 순전히 은혜입니다. 목자들이 메시아 탄생의 증인이 , 마리아가 메시아 부활의 증인이 , 그리고 우리의 구원도 모두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은 상당히 비범한 여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를 통해 가지 중요한 것을 배울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이 무엇을 강조하려고 하는지를 따라가려고 합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입은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1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무덤에 찾아오지 않은 것은 이상하게 생각됩니다. 생각컨데 그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돌아가신 것을 목격하고 완전히 쓰러졌을 것입니다( 2:35a). 당시에는 그녀는 가장 처참한 운명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충분히 이해할 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육신의 가족이 아닙니다. 어머니 마리아와는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메시아였습니다. 그분에 대한 사랑과 신실함이 그녀의 슬픔과 좌절을 이기게 했습니다. 사랑과 신실함이 대상이 죽었음에도 계속 유지된다는 것은 신기한 일입니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 시체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린 후에 다시 무덤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미 베드로와 요한은 집으로 돌아가고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막달라 마리아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까요? 그가 마리아가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가 오면 소상하게 설명했다면, 마리아가 그를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냥 갔습니다. 아마 베드로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성격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 요한에게는 부활의 믿음이 이제 탄생했습니다. 믿음이 분명해지고 남에게 힘있게 증거할 정도가 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9절에서 그는 아직 예수님의 부활과 성경의 증거를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라고 고백은 하지만,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나의 인생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이에 필요한 시간이 걸립니다. 과정은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귀한 복음을 값싼 복음으로 만들고, 고백자가 일생 주님을 모르고서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위험을 초래하므로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제자는 바로 무덤을 떠났지만, 마리아는 끝까지 무덤을 떠나지 않은 것이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줍니다. 이것은 개인차라기 보다는 형제와 자매의 차이인 같습니다. 자매에게는 믿음에 있어서 형제들이 없는 것을 있는 고귀한 성품이 있는 듯합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와 예수님의 시체를 끝까지 지키려는 막달라 마리아가 이러한 것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무덤가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몸을 굽히고 무덤 안을 한번 쳐다보았습니다. 무덤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도 요한과 똑같이 행동을 취한 것입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모습은 너무나 인상적이라서 우리의 기억으로부터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시험 가운데에 있는 교회의 모습을 어느 정도 상징한다고 있습니다. 교회의 가장 시험은 예수님께서 교회에서 사라지신 보이는 것입니다. 교회는 확신이 가득 때도 있지만, 마리아의 경우와 같이 시련을 받아 힘없이 울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신자의 인생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루터는 이러한 신자의 시련을 가장 깊이 체험한 사람 중의 사람입니다. 종교개혁이 가톨릭 군대의 공격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와 같은 적이 번이 아니었고, 그의 가르침은 곡해되어서 종교개혁을 변질시킨 것도 두번이 아닙니다. 그가 너무 낙심하여 비탄에 잠겨 있을 , 아내 케테가 상복을 입고 그에게 나타나서, „지금 돌아가신 우리 하나님의 장례식을 드린다라는 표현을 해서, 루터가 상징적인 의미를 깨닫고 다시 믿음을 찾았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교회가 망한 같거나, 혹은 나의 믿음이 파탄한 같아, 아무리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려고 해도, 예수님을 아무리 붙들려고 해도, 예수님은 보이시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가운데로부터 사라지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구나 절망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마리아는 울면서도 무덤 안을 살펴보았습니다. 마리아가 취한 행동!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자는 절망 가운데서도 그분을 떠나지 않습니다. 절망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비록 넘어지고 쓰러질지라도 얼굴만은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내가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붙들고 계십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십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다면, 아무도 신앙생활을 없습니다.

 

공관복음을 보면, 이미 다른 여인들은 천사를 만나고 그곳을 떠난 것을 있습니다. 그녀는 혼자서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흰옷을 입은 천사 둘이서 예수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흰옷 자주 천사의 표시로 사용됩니다( 28: 3; 16:5; 24:4; 1:10; 19:14). 이것은 그들이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섬기다가 지상으로 신령한 존재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24:4에서는 그들이 찬란한 옷을 입었다고 표현합니다. 이들은 그녀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천사가 마리아의 우는 이유를 알고 싶어서 질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더이상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그녀가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시키는 같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우는 이유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말은 그녀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말과 거의 같습니다. ,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그녀의 머릿속에는 예수님의 시체에 대한 생각뿐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24:6-7 따르면 여인들도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알고 있었습니다. ,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시고 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기이한 것은, 그녀가 천사를 보고서도, 천사인 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다른 여인들은 천사를 보고 너무 놀랍고 두려워서 땅에 엎드렸습니다( 24:5). 천사의 광채도( 24:4) 그녀에게 지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천사들과 보통으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녀는 오로지 예수님의 시체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습니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지각을 정도가 것입니다. 이것은 그녀의 신실함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이러한 신실함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믿음은 확신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Person 대한 신뢰, 사랑, 신실함입니다. 확신은 마리아의 경우처럼 오히려 부정적인 역할을 있습니다. 확신은 본질을 보게 하는데 방해하며 오히려 호도하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확신은 이미 굳어진 것이므로 경직되기 쉬우며, 계시를 영접하는 데에 방해됩니다. 따라서 믿음의 기초는 결코 확신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Person으로 경험하며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알아나가는 가운데 나의 인격이 그분의 인격 속으로 스며들어 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확신이란 이러한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과정을 통해서 자라난 열매입니다. 확신은 강조하면, 열매가 아닌 자기 확신만 커지고 굳어져서 예수님의 인격과 신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두터운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덕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잘못된 확신이 즉시 깨어질 있었습니다.

한국 신자들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만 대부분의 교회가 그들을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로 이끌지 못하고 가짜 확신을 불어넣어 자기 교회에만 충성하는 로보트로 만들어 오늘날 교회는 비대해졌으나, 예수님의 인격을 조금이라도 갖춘 참다운 제자를 보기 어려운 곳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비극입니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주님을 찾고 있다 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십자가에 돌아가셨지만, 그분이 자신의 주님이라는 믿음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믿음 앞에서 천사의 광채도 빛을 잃었습니다. 교회사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하나님처럼 경배받고, 성인들까지 경배의 대상이 때는, 이미 예수님이 교회에서 현저하게 사라졌을 때입니다. 예수님께 사로잡힌 사람은 어떠한 광채에도 현혹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자에게는 인간이 정말로 하찮은 죄인으로 보입니다. 어떠한 인간도 숭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당과 같이 현혹하는 목사가 지배하는 교회에 가서는 됩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렇게 성장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14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아버지 너희 아버지, 하나님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단락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읽으면서 요한이 보도하는 방식이 매우 특이함을 느낍니다.

 

14. 마리아는 천사에게 말한 다음에 고개를 돌려서 예수님이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갑자기 고개를 돌렸을까요? 인기척이 났을까요? 그녀는 무덤 안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밖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를 통해 부활체는 겉으로만 본다면 보통 사람과 차이가 없는 같습니다. , 찬란한 광채를 낸다든가, 몸집이 커진다든가, 얼굴이 변하여 미남 미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변하는 것은 몸의 모양보다는 몸의 성질인 같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음에도 제자들이 이야기를 꾸몄다면, 이렇게 재미없게는 기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야기에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신화적인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상상하는 부활체는 훨씬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예수님 부활 거의 1500년이 지난 후에도 미켈란젤로는 그의 벽화 최후의 심판에서 그린 예수님은 영웅 헤라클레스의 몸집과 최고의 미남 아도니스의 얼굴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르네상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 모습은 일반적으로 매우 찬란합니다. 14세기가 지난 후에도 예수님을 신화적 존재로 묘사했다면, 만약 예수님 시대에서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꾸몄다면, 훨씬 신화적으로 기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묘사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이러한 기사를 신화라고 하는 신학자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요?

 

다시 마리아에게로 돌아갑시다. 그녀는 예수님을 보고서도 알아본 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녀의 생각은 돌아가신 예수님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15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은 천사들이 질문한 것과 똑같이 질문하시며, „누구를 찾느냐 덧붙이셨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마리아가 자신을 만나도록 준비를 시키기 위한 같습니다. 무엇을 찾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심으로써, 그녀를 위로하셨습니다. 나는 당신이 사람을 찾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누구인가?“하는 친근한 질문입니다.

마리아는 동산지기로 착각한 예수님께, 시체를 치웠으면 치운 장소를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시체를 다시 무덤에 옮겨놓겠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시체를 어찌하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다시 안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동굴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천사와 대화하느라고 밑에 놓인 예수님 시체를 쌌던 세마포를 보지 못했습니다. 무덤 내부가 어두워서 눈을 길들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세마포가 가지런히 정돈된 것을 보았다면, 동산 지기가 시체를 치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6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하고 불렀습니다. 말씀은 모든 상황을 순식간에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빛이 있으라( 1:2)“ 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과 같습니다. 말씀에 그간 마리아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했던 어두운 생각, 메시아의 시체에 향유를 붓고자 하는 처절한 마음, 미래에 대한 슬픈 생각들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단번에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것은 또한 제자들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들은 나중에 마리아의 전갈을 듣고, 또한 별도로 다른 여자들의 증거를 통해, 엠마오 제자들의 증거도 들었지만 그래도 믿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귀신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손과 발의 못자국을 보이셨지만 그래도 반신반의하자 구운 생선을 드시는 것을 보고 믿게 되었습니다( 24:36-43).

 

이것은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는가를 나타냅니다. 여기에 형제들이 흉내 없는 마리아의 위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이렇게 마리아!“라고 자신의 이름을 부른 예수님의 음성이 단번에 그녀를 절망과 슬픔에서 완전히 구출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신비한 이야기로 가득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성차별한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마리아는 랍오니하면서 예수님께 달려가서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존경의 표시로 발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발을 잡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그러셨을까요? 다른 여인들에게는 발을 붙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까( 28:9)?

 

이유는 예수님의 승천과 관계된 사명에 있는 듯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경배하려는 마리아에게 승천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마리아는 이제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이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우실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숙원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1:6). 얼마나 떨리는 순간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자신이 하나님께로 올라가실 것을 가르치시고, 제자들에게 사실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생각을 빨리 바꾸고 감정을 승화하여, 그리스도의 사역을 바라보고 마음을 그쪽으로 돌리고, 감히 사도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는 메신저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습니다. 지상에서 왕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는 것이 부활의 목표이며 이로써 구속사역은 종결됩니다. 이렇게 마리아는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서도 제자들보다 먼저 알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전갈을 들은 제자들은 그녀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것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 그들은 얼마나 부끄러워했을까요?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출신, 성별, 나이 직업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배웁니다.

 

예수님의 앞에서 적어도 10분간은 대성통곡하고 울어야 속이 풀리는 한국인에게는 마리아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너무나 사무적으로 느껴지지 않습니까? 저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마리아!“라는 극도로 짧은 한마디에 모든 것이 들어있는 같습니다. 한마디가 마리아를 충분히 위로하고, 낙심과 절망의 모든 감정을 풀어주었고, 예수님의 깊은 메시아적 사랑이 충분히 표현되었다고 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부활 기사에 감정이 상당히 절제된 것을 봅니다. 사실은 성경 전체가 그렇습니다. 과장된 표현, 감정, 장황한 서술 등이 절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사실을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을 아는 데에 집중해야 합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경배와 섬김, 사랑, 기쁨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진리 앞에서 우리의 감정을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진리로 확인되기 전까지는 경솔하게 아멘!“해서는 됩니다.

 

너는 형제들에게 가서: 요한복음서에 처음으로 제자들을 형제라고 하신 것이 나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모두 예수님의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12:48-50).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형제라고 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무슨 이유가 잇습니까?

 

첫째로, 의식적으로 메시아의 수난 시편인 22편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22편은 1-21a절까지 메시아의 고난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시편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21b 고난받던 메시아가 구원을 받았다는 내용이고, 22절은 구원의 소식을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시편의 형제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시어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분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 시편을 적극 인용하심으로써 하나님 말씀이 자신에게 성취되었음을 거듭 가르치셨습니다.

 

둘째로, 이것은 회복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이 과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100% 기뻐했을까요? 그럴 같지 않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들이 수차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고 기뻐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마음에 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맹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절대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베드로를 대표로 예수님을 부인한 자들입니다. 이러한 죄의식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편치 않았으며, 슬픔 가운데서 헤어나지 못하고 의심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오히려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마리아의 전갈을 통해 예수께서 자신들을 다시 제자로 받아주신 것을 깨닫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의 소식 조차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용서받지 못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믿을 없으며, 믿는다고 할지라도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용서는 하나님 역사의 출발점입니다. 제자들은 비록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을 거부했지만 메시지는 마음에 남았을 것입니다. 그날 저녁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가 떠나신 후에도 용서라는 말은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용서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한두 번의 가르침으로는 인간 마음에 깊이 새겨진 상처가 치료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해변에서 나타나셔서 베드로를 완전히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은 용서와 회복에도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버리고 떠난 제자들에게 여러 나타나시고, 말씀으로 용서하시고, 꾸짖기도 하시고, 또한 함께 식사도 하시는 가운데에 제자들 마음은 서서히 회복되었습니다.

 

이처럼 죄인은 결코 하나님께 먼저 나갈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셔야 합니다. 죄인은 먼저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회심이 뒤따릅니다. 회심이 없다면, 그는 아직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듣지 못한 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듣고 우리 마음에 그분을 모시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18 마리아는 즉시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부활 소식을 전하고 예수님의 분부를 전달했습니다. 이렇게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완전히 삶이 바뀐 표본이 되었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변화가 와도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어디에서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주신 사랑에서 것입니다. 그녀는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좇으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한없이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사랑의 사람으로 변하게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마리아와 같은 변하지 않는 사랑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우리의 모범이 됩니다.

 

우리는 또한 간접적으로 용서를 배웠습니다. 아직 자신의 죄를 모르고 있거나,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 죄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용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변화될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용서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는, 이미 예수님께서 이미 그의 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도 죄를 회개하여 사함 받는 자가 되고, 또한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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