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 맹인은 눈을 뜨고 눈뜬 자는 맹인이 된다(35-41)
요절: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맹인으로 태어났다가 예수님의 치료를 받고 눈을 뜨게 된 그 소년은 바리새인 랍비들에 의해 쫓겨났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신실한 그의 믿음에 세상이 준 대가였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십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선지자가 아니라 메시아로 찾아오셔서 모든 사람이 버린 불쌍한 그 소년의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는 이 감동적인 사건을 통해 육신의 눈을 뜬 그가 또한 어떻게 영적 눈을 뜨게 되는지 그 과정을 연구하고자 합니다.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그 사람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으셨을까요? 어쨌든 바리새인 랍비들과 그 소년의 대화를 주위의 여러 사람이 들었을 것이고, 이들이 소문을 퍼트린 것 같습니다. 그의 굴하지 않는 참된 증언, 분명한 성경적 가르침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떠나서도 대단히 용기있는 행위였으므로 여러 사람 사이에서 회자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려운 시련을 이긴 그의 용기와 믿음을 아시고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믿음은 이러한 시련과 박해를 통해 분명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찾으셨습니다. 이제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를 만나자 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시고 단지 의미심장한 한 가지의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우리는 이 질문이 무슨 의미인지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먼저, 인자란 다니엘서 7:13-14에 나오는, 말세에 이스라엘로 오실 „사람의 아들“, 그리스어로는 „호 휘오스 투 안트로푸“인데, 우리는 한자를 빌려서 사용하므로 인자(人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당시에 인자가 곧 오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맹인으로 태어난 그 소년도 어릴 때에 회당에서 배워 그 정도는 알고 있었으며, 그도 인자를 기다리고 있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는 질문은 „그 인자께서 오셔서 너희 가운데에 계신다. 너는 그분을 믿느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36절의 그의 대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주여, 그분이 어디에 계십니까? 당연히 믿어야지요! 제가 당신을 신뢰하므로 당신이 알려주시면 그분을 믿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선지자라는 것을 믿었으므로, 그분이 누가 인자인지를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신뢰가 참으로 돋보입니다. 사람은 무조건 신뢰해서는 안 되지만, 신뢰가 없이는 믿음이 시작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이와 비슷한 사람을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야곱 우물의 사마리아 여인이었습니다(4:26; 28절 이하). 이 순간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자동으로 은혜에 감사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38병자는 큰 은혜를 받고서도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 말씀은 그 소년의 중요한 질문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에 대한 대답입니다. 이 대화는 간단하게 보이지만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갈망하는 인간의 진지한 질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자이신 인자가 어디에 계시냐는 질문에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바로 그 인자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저는 누구든지 정말로 진지하게 구원을 찾는 자는 언젠가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에 대한 갈망에 반드시 대답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그 갈망을 심어주시고, 그가 열심히 찾을 때 그것에 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한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관계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 여인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하셔서 그에게 갈망을 깨워주시고 또한 구원을 주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러한 갈망이 없다면, 갈망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며, 진정으로 메시아를 알고자 갈망해야만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유대인이 메시아를 보고서도 영접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갈망하던 메시아는 그들의 요구를 채워주는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와 사랑이 충만한 그리스도를 갈망해야 합니다. 한 인간을 마음에 두시고 이렇게 도우셔서 그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38절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그 소년의 응답입니다: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주여 내가 믿나이다“는 그리스어에서 두 단어입니다. 정말로 간단하지만, 이 말에는 꼭 필요한 모든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자기 주로 영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가 절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몸을 땅에 대고 완전히 엎드려서 경배하는 행위입니다. 자기 믿음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매우 아름답고 감동적인 신앙고백을 봅니다. 이 신앙고백은 짧은 시간에 여러 경로를 거쳐 완성되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그에게 하나의 „인간“이었습니다(11). 그다음에 그는 그분 안에서 „선지자“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17). 그다음에 그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한 것을 의심했습니다(25). 그리고 조금 있다가 그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31)! 결국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심을 깨달았으며(33), 이로써 그는 진리와 매우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단 7:13에서 예고된 천상의 인자이심을 마음으로 믿고서 „그에게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즉, 이제 그에게는 예수님이, 성경에서 눈먼 자의 눈을 열어주시며 하나님의 위엄을 가지신, 곧 오신다고 예고한 메시아십니다.
그 소년에 대한 보도는 이것으로 그치며, 그는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우리는 그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아마도 그가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에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120명의 제자 중의 하나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출발점인 9:3으로 돌아가서 그가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말씀을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 그리스도로부터 사랑받는 자에게는 어떠한 불행도 하나님의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라는 가르침을 우리는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이 사실을 잊으므로 불행이 닥칠 때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고통만 준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생각을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그 소년처럼 무서운 위협을 극복하고서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쫓겨나기까지 하면서도 진실한 고백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39-41절에서는 장면이 바뀝니다. 예수님이 이제 다른 곳에서 가르치시는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이 그 말씀을 들은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다시 예수님께 몰려들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것 같습니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이 말씀은, 바로 앞에서 그 소년을 치료하심으로써 그가 보게 되고, 바리새인이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정죄하는 사건을 정리하여 분명한 영적 교훈을 이끌어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맹인으로 태어난 자와 같이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하“시고, 바리새인과 같이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십니다. 눈을 뜨게 되어 예수님을 보게 된 „보지 못하는 자“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보지 못하는 자“는 바로 자기가 죄인이요, 버림받은 자요, 애통하고 슬퍼하는 자요,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자로서, 자기가 구원이 필요한 자라는 것을 깨닫는 자입니다. 이러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보지 못하게 되어 다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자들만 구원하십니다! 이것은 너무나 깊은 진리이므로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정말로 큰 죄인이며, 무지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사소한 일에도 넘어져서 깨어지며, 쉽게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간절하게 하나님 은혜에 매달려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은 주위에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사야서에서 메시아가 오시면 „눈먼 자들을 밝히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로 겸손하여 자기가 눈먼 자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고, 죽을 때까지 눈먼 자의 심정으로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자기 안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좋은 것이 하나도 없고, 세상도 생명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양식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긍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를 „보는 자“로 착각해서 예수님 말씀을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눈이 닫힙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맹인으로 살면서도 활개치고 다닙니다. 자기가 안다고 큰소리치며 또한 많은 사람을 가르칩니다. 그는 맹인을 이끄는 맹인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심판입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3:17에서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곳에서는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다고 하실까요? 우리는 당시 상황에 맞추어 이 의미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큰 긍휼과 권능으로 그 소년을 치료하시고, 또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은 놀라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적을 통한 계시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오히려 죄인으로 몰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조심스러워서 예수님께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스스로 맹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심판하시지 않았지만, 이들이 스스로 심판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큰 은혜가 드러났을 때, 말씀이 능력으로 선포될 때에, 하나님이 계시될 때에 회개하고 은혜에 들어오지 않는 자는 마음이 강퍅해져서 스스로 그분과 거리를 둡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는 곳에서는 와서 생수를 마시듯이 마시는 사람이 있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멀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39절의 의미입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이들은 스스로 심판받은 자의 모임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도 맹인인가?“ 이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서 이들은 배우려고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으로부터 책잡을 것을 찾고자 그곳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방금 대단히 무서운 말씀을 듣고 불안해졌습니다. 이들은 이것이 구원과 멸망을 의미한다는 예수님의 뼈있는 말씀을 이해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당신은 우리가 맹인이라는 말씀입니까?“라고 불안한 마음으로 반문한 것입니다.
이들이 여기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이 자기를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롬 2:19)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바리새인이라는 어려움을 감내하고 사는 이유는 자기가 백성의 선생이요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라는 의식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라는 예수님 말씀이 자기들을 향한다는 것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맹인의 길을 인도“하고 심지어 이들의 눈을 뜨게 해주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은 없습니다. 바리새인이 이렇게 좋은 의도로 사람과 하나님을 섬기려고 했지만, 실제로는 이와 전혀 반대되는 일을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눈을 뜨게 된 맹인을 오히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맹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답하십니다: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예수님“의 이 마지막 말씀은 대단히 진지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이라는 말은 문맥을 고려할 때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만약 너희가 맹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더라면“, 흑은 „만약 너희가 진지하게 빛을 찾는다면,“ „만약 너희가 잃어버린 자라는 것을 깨닫고 구원을 구한다면,“ …
이러한 의미에서 „맹인“은 자기가 죄인이며, 은혜가 필요한 자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간절히 구해야 하는 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어 아버지의 이름으로 영적인 빛을 선물로 주셔서 그의 죄를 지실 것입니다: „죄가 없으려니와.“ 즉 죄 사함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맹인이라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죄 사함을 간구하여 은혜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비록 이들이 모든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면서도 정작 자기들이 맹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자기 안에 죄를 발견하지도 못합니다. 이들은 자신에 대해서는 „우리는 본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약 병에 걸려 죽게 된 사람이 자기를 치료해줄 의사를 거부한다면 얼마나 큰 비극일까요! „너희가 죄가 …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를 영혼의 의사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한국을 방문해서 수많은 신자를 만났으나, 이상하게도 죄 문제에 깊은 인식을 가진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자기가 의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을 아주 잘못 이해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겸손한 독일 신자들과 확연한 대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경건한 사람일지도 그는 항상 죄 사함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말면, 항상 겸손합니다.
오늘 우리는 맹인이 눈을 뜨고, 눈을 뜬 자는 맹인이 된다는 말씀을 제목으로 본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과 죄 사함이 필요한 자임을 깨닫고 항상 죄 사함을 간구하는 자가 눈을 뜨게 된 맹인입니다. 눈을 떴다는 말은 영적 의미로서, 자기 죄를 깨닫고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의미입니다. 중생한 사람일지라도 항상 눈이 떠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생활을 게을리하면 눈이 닫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가서 눈을 새롭게 떠야 합니다. 나는 눈을 뜬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장닙입니다.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가 그러한 의미입니다. 우리는 항상 죄 사함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님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