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주일설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작성자Songdan|작성시간07.05.07|조회수96 목록 댓글 0

2:13-2:22

요절 2:22

포도주는 부대에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셨다. 그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선포하셨다. 즉 그는 우리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매우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셨다. 누구나 원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들이 아무 조건, 공적없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한번 반복하자면,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영광된 하나님 나라에 초청하고 계신 것이다.

 

정말입니까? 정말이다. 누구나 단지 원하기만 하면 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며, 죽어서도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스런 마음을, 온갖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하는 왕에 비유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기를 간절하게 원하시며, 오늘도 기다리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매우 은혜로운 구원계획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당시 이스라엘에서 매우 경건한 유대인들 이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자들 이었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자 매우 진지하게 노력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차차로 하나님은 자신들처럼 의로운 사람들만 구원해 주신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공짜구원은 상상도 못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보일만한 것도 없는 죄인들이, 즉 당시의 세리와 창기들이,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러분들은 이해할 수 있는가? 그들에겐 그런 하나님은 없다였다.

 

그래서 오늘 본문 13-17에서 본 바와 같이 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랍비라고 하는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었다. 오늘날은 율법이 없는 사회라 그러한 것이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러한 것이 사회적 통념과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명을 파괴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마시고 즐거워 하시는 것이었다. 즉 예수님은 마지못해서 가 계신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그들과 교제 하셨던 것이었다.

 

우리가 생각해도 에수님께서 조금 지나치신것 같지 않읍니까? 왜냐하면 성경에는 레위의 친구인 세리들이 이러한 식탁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해 먼저 회개했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들은 단지 죄인들을 받아 주시는 예수님께 관심을 갖고 온 것 뿐이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들에게 회개를 요구하시지 않고 무조건 환영하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식탁 공동체는 메시아의 향연과 같다. 이 메시아의 향연은 누구를 위해 있는가? 이 향연은 누구에게든지 열려있다. 누구도 좋다. 의인도 좋고 죄인도 좋다. 회개한 죄인도 좋고 회개를 하지않은 죄인도 좋다. 이 공동체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이 향연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누구들인가? 다시한번 생각해 보자. 그들은 악명높은 세리들이었다. 정결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들은 이방인과 관계하는 사람들이므로 부정한 사람들 이었다. 또한 세금을 무리하게 걷어서 착복하는 이기적이고 양심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매일 오락이나 즐기고 살았을 것이다. 그들은 하루의 일이 끝나면 창기에게 가서 술과 노래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죄인들에게 관심을 가져준 예수님께 일단 나아왔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교제를 가졌던 것이었다. 교제! 이것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메시아와 함께 교제를 나누는 것이 바로 믿음생활의 중추를 이루는 것이고, 이것이 메시아와 함께 향연을 나누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교제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비밀이 있다. 흠없고 순결한 어린양,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는 우리는 죄인 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향연에는 단한분 의인이신 예수님과 우리 죄인이 함께 기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한가지 비밀이 있다. 예수님과의 교제 자체가 회개라는 것이다. 회개하는 마음없이 우리는 예수님과 교제할 수가 있겠읍니까? 예수님께서 아무리 우리를 초청하셔도 우리가 우리의 죄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면 예수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 물론 몸으로는 나올 수 있지만 마음으로는 나오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죄보다 예수님을 조금만 더 사랑한다면 예수님께 나올 수 있게된다. 죄보다 예수님을 조금 더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회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또한 회개의 시작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교제하게 되면 예수님을 사랑하게되고 우리자신의 죄된 모습이 우리눈에 서서히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서히 우리의 죄를 미워하게 된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다.

 

우리는 사실 세리와 별로 다른 것이 없다. 우리는 모두 병자와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서서히 치료하신다. 우리의 병든 마음과 영혼은 결코 하루 아침에 치유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치료의 과정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키기 어려운 율법을 적용시키지 않으신다. 우리가 다시 죄를 짓는다고해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를 자기정죄로 부터 보호해 주신다. 예수님은 우리와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날이 갈수록 깊어지기를 원하신다.

 

어린 신자는 새술과 같다. 새술과 같은 신자를 지키기 어려운 율법과 같은 신축성 없는 헌 부대에 집어놓고 부대를 꼭 묶어두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읍니까? 부대가 터져서 술과 부대가 다 못쓰게 됩니다. 온갖 율법으로 묶어두면 새 신자는 질식하거나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

 

여러분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읍니까? 신자가 되었으면 적어도 이정도는 해야 되는데. 진정한 신자라면 적어도 주일성수는 해야되지 않겠는가? 십일조는 내야하지 않겠는가? 최소한 일년에 한끼 정도는 금식해야 하지 않겠는가? 술은 마실 수 있다 하더라도 담배만큼은 곤란하지 않겠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결코 신앙의 깊이의 척도가 되지 않는다. 경건의 척도가 아니다.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로 초대하십니다. 일단 들어오셔서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들에게 어떠한 요구를 하지 않으시고, 단지 교제를 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죄인 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기 때문에, 죄를 숨길 필요가 없읍니다. 죄 때문에 주저할 필요가 없읍니다. 죄를 사랑해도 좋읍니다. 일단 그분께 와서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바리새인에 대하여 생각을 좀 해보겠읍니다.

 

바리새인은 인류가 낳은 최고의 종교적 엘리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그런데 그들은 바로 그러한 삶으로 인해 복음의 적이 되었다. 즉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섬김을 받지 않는 분이다.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섬기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들의 실패 원인을 잘 연구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기원전 2세기에 이스라엘은 이방인 안티오쿠스왕치하에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을 헬라화 하기위해 그의 정책에 반대하는 바리새인들을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목숨이 끊어 지지않을 만큼 매우 소량의 양식과 물만 주었다. 그런데 그들은 식사때에 주는 한 모금의 물을 나누어 먼저 정결예식을 하는데에 소비하였다.

 

그들의 진지함과 열심은 우리가 경탄할 만한 것이었다. 그들은 바리새인이 되기 위해 어려서 부터 구별되게 키워졌고 구약의 많은 부분을 외어야만 했다. 일주일에 두번씩이나 금식을 했다. 나와 같이 먹기를 즐기고 잠을 즐기는 사람은 바리새인이 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예수님을 배척했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한가지 중요한 이유는 그들은 낡은 가죽 부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낡은 가죽 부대!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하나님 말씀은 죄인을 구원하는 능력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지 우리의 경건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를 항상 새롭게 만들어가는 능력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떠한 틀 속에 집어 넣어서 틀에 맞는 사람을 만들기를 원치 않느다. 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 교제하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변화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구약, 혹은 율법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이고, 예수님이 가져다 주신 복음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어 매일 교회에가서 예배를 드리고, 재산의 절반을 드려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말씀에 따라 변해나가는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 실때 우리는 매일 교회에가서 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당에서 살 수도 있다. 전 재산을 바칠 수도 있다. 그렇다고해서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 한푼도 안 바친 사람보다 더 의로운 것이 아니다. 똑같은 죄인이고 똑같은 의인이다. 이 세상에는 성자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존경하는 성 프란치스코도 십자가상에서 처형되기 바로 직전에 예수님을 영접한 흉악한 살인자 보다 더 의롭다고 할 수가 없다.

 

바리세인들의 문제는 자기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의인이란 데에 있었다.

 

여러분의 이마에 일생동안 붙어있는 딱지가 있다. 아무도 이 딱지를 지울 수가 없다. 죽음만이 이 딱지를 우리와 분리시킬 수 있다. 이 딱지는 무었인가? 바로 죄인이라는 딱지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딱지가 죄인의 딱지와 같은 장소에 겹쳐서 붙어있다. 그 딱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바로 의인이라는 딱지이다. 그래서 신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유명한 표현이 탄생되었다: „simul iustus et peccator“ „동시에 의인이자 죄인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리 잘해도 죄인이고 아무리 못해도 의인이다.

, 그러면 우리는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읍니까? 이래저래 죄인이라면 죄를 짓고 살아야 하겠읍니까? 물론 아니겠지요. 우리가 죄를 짖는다면 예수님과의 관계에 손상이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시각각 죄와 싸우는 영웅적인 전사가 되어야 하겠읍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누가 그러한 삶을 살 수가 있겠읍니까? 죄를 지어도 안되고, 죄에 대항해서 제대로 싸울 수가 없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대답은 제자라는 말에 있다. 율법을 주신 예수님과 우리 사이가 제자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신자라기 보다는 제자이다. 제자는 선생을 따르는 자다. 수많은 종교적 규칙을 따르는 종교인도 아니고, 고행인도 아니다. 단지 선생을 졸졸 따라다니는 자다.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규칙을 주신 분을 따른다.

 

그래서 제자들은 선생의 마음을 잘 안다. 종교적 규칙에 마음이 매여있는 자들은 규범의 근원인 선생을 보지 못한다. 즉 율법에 매인 사람은 율법을 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때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되어 율법을 사랑하게 되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율법만 바라보면, 우리가 율법을 잘 지킬때에는 의인이라는 생각이 들고, 연약해져서 율법을 어길 때에는 죄인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의와 자기불의의 양극단에서 왔다갔다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예수님은 과연 누구일까? 예수님을 더욱 더 알기를 원하시면 복음서를 여러번 읽어보기 바란다. 우리의 성경공부에도 여러분을 진심으로 초대한다. 신자의 가장 큰 목표는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진다. 바로 이 예수님을 알아야 당신이 변화된다. 그리고 율법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게되고, 율법을 사랑하게되고, 율법을 마음으로 지키게 된다. 예수님을 3년간 따라다닌 사도 요한의 증언을 들어보자:

 

말씀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독생자영광이요 은혜진리가 충만하더라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즉 영원히 계셨던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사도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그의 하나님 아들로서의 영광을 보았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였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된다. 그럴때야 비로서 우리가 변화될 수가 있다.

 

마무리를 하겠읍니다.

 

예수님은 우리들 죄인을 있는 그대로 그의 향연에 초대하셨읍니다. 우리는 무조건 그에게 가야 합니다. 우리의 때묻은 의복을 입은 그대로. 먼저 그를 만나보아야 그에게 관심을 갖게되고, 그를 사귀게 되고 점차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를 사랑하게 되면서 우리는 우리의 때묻은 의복을 점차로 벗어버리게 됩니다.

 

그의 사랑과 말씀은 우리에게 늘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신앙 생활을 오래했어도 항상 새신자와 같다. 신앙생활에는 자동화란 말이 없읍니다. 우리는 늘 새로와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새술은 새부대에의 의미 입니다. 새술, 그것은 운동력있고 사람에게 늘 감동을 주는, 어떨 때에는 폭발적이기도 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헌 부대에 담길 수가 있겠읍니까? 그것은 곧 폭발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은 새 부대에서만 담길 수 있읍니다. 즉 우리가 늘 우리의 마음을 점검하여 은혜의 말씀을 담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즉 새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항상 동행해서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겠읍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