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르네상스를 그리다. 단원 김홍도

작성자후니정팬|작성시간08.08.24|조회수61 목록 댓글 0

[제17회]

조선의 르네상스를 그리다.
- 단원 김홍도 -



▣방송 : 2007. 10. 13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이완희PD
▣글,구성 : 박소희 작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불세출의 화가,
단원 김홍도

 

풍자와 해학이 뛰어난 김홍도의 풍속화는
조선후기, 시대와 민중의 삶을 반영하는 창이다.
그런 김홍도가 그렸다는 의문의 한 작품,
바로 용주사의 후불탱화!

 

김홍도가 살았던 18세기 조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서양의 음영법과 원근법이 담겨있다!
김홍도는 어떻게 서양화법을 알고 그린 것일까?
그리고 그는 왜 불화를 그렸을까?

 

새로운 화풍으로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김홍도.
수많은 논쟁을 낳은 그의 행적과 뒷이야기를
한국사 傳이 추적한다!


 

불세출의 천재화가, 단원 김홍도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 김홍도는 29살의 젊은 나이에 임금의 어진을 그려 도화서 화원으로서는 최고 영예인 ‘어용화사’가 된 불세출의 천재화가이다. 스승인 강세황은 김홍도의 그림에 대해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 났다며 ‘무소불능의 신필’이라 극찬했다. 김홍도와 그의 그림에 대한 기록들은 김홍도의 천재성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일찍이 회칠을 한 벽에 해상군선을 그리게 했는데, 궁중의 일꾼으로 하여금 진한 먹을 두어 됫박 받들게 하고… 비바람 몰아치듯 붓을 휘둘러 두어 시간 만에 그림을 다 그려 놓았다. <조희룡, 호산외사>

여염의 일상풍속을 그렸는데 부녀자와 어린아이도 한번 보면 모두 턱이 빠지게 웃으니 고금의 화가 중에 없었던 일이다. <서유구, 임원경제지>

세속이 김홍도의 뛰어난 기량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요새 다른 사람들이 미치지 못함을 탄식하였다. 이에 그림을 구하는 자가 날마다 무리를 지으니 비단이 더미를 이루고 찾아오는 사람이 문을 가득 메워 잠자고 먹을 시간도 없을 지경이었다.
<강세황, 단원기>

 

▶김홍도는 정조의 스파이였나?

일본의 천재화가 샤라쿠가 조선의 김홍도다?

1794년 5월, 일본 에도(지금의 동경)에 홀연히 나타나 10개월 남짓 140여점의 그림을 그리고 사라져 버린 화가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토슈사이 샤라쿠(東洲齋寫樂). 샤라쿠는 일본이 자랑하는 천재화가이지만, 그가 어디서 출생해 누구에게 그림을 배우고 어떻게 죽었는지 지금까지 밝혀진 것이 없다. 그런데 샤라쿠가 바로 조선의 김홍도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샤라쿠가 일본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10개월간 김홍도가 조선에서 행적을 감춘다는 것이다. 정조가 신뢰했던 김홍도는 연풍현감으로 재직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토슈사이 샤라쿠라는 이름으로 활약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는 김홍도가 1789년에 지도를 그리기 위해 일본에 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말 김홍도는 정조의 밀명 하에 일본을 정탐한 스파이였을까? 한국사 傳이 논란에 빠진 김홍도의 행적을 추적했다!

 

▶김홍도는 탐관오리였다?

김홍도, 충청북도 연풍면의 현감이 되다

조선시대 중인 신분인 화원. 속된 말로 ‘환쟁이’라고 불리는 화원들은 초상화나 궁중의 중요 행사를 그리는 일 외에도 임금이 보는 책에 밑줄을 긋거나 임금과 왕비 옷의 문양을 디자인하는 등 그림에 관련된 총체적인 일을 했다. 김홍도는 왕실 전속인 도화서의 화원으로, 뛰어난 그림실력을 인정받아 임금의 어진을 그리는 등 이름을 높이게 된다. 드디어 김홍도는 사실상 중인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 직책인 종 6품 현감에 제수된다. 그러나 부임 3년째 되는 해, 당시 충청 위유사(慰諭使)인 홍대협이 김 홍도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다. 현감으로서 백성을 수탈하고 직무에 충실하지 않다는 것! 결국 현감직에서 파직당하고 문초를 받게 된 김홍도… 그러나 정조는 단 열흘만에 김홍도를 사면시켜 준다.

과연 김홍도는 탐관오리였을까? 정조는 왜 김홍도를 사면해 주었을까?


<김홍도가 연풍현감 시절 그린 그림>  

 

▶용주사 후불탱화에 숨겨진 비밀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 용주사의 불화를 그리다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용주사. 이곳 대웅보전 법당에는 특별한 후불탱화 한 점이 있다.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불 등이 그려진 조선 후기 작품 「삼세여래체탱」. 이 그림은 평면적이고 도식적인 당시 불화와 달리 독특한 입체감을 드러낸다. 특히 18세기경의 작품으로는 유례가 드물게 원근법과 음영법을 사용에 얼굴 전체를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그런데 바로 이 불화를 그린 사람이 단원 김홍도다!

「삼세여래체탱」에 그려진 손이나 옷 선의 처리 등의 필치를 비교해 볼 때 김홍도의 화풍과 일 치한다는 것이다. 풍속화의 대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김홍도. 그런 그가 백성과 양반의 익살스 런 모습이 담긴 풍속화가 아닌 불화를 어떻게 그리게 됐을까? 그리고 김홍도는 조선 역사 상 전무후무한 서양식 음영화법을 어떻게 알고 후불탱화를 그렸을까? 용주사 후불탱화에 얽힌 비밀을 한국사 傳이 전격 취재했다.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김홍도의 말년

김홍도의 말년 작품 ‘추성부도’와 ‘염불서승도’


<김홍도의 말년 그림 ‘추성부도’와 ‘염불서승도’ >

 조선시대 천재화가 김홍도. 그러나 그의 말년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궁핍했다. 1800년, 김홍도가 56세 되던 해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많은 개혁가들이 힘을 잃었고 그 속에 김홍도도 있었다. 김홍도는 초야에 묻혀 말년을 보낸다. 김홍도가 말년에 그린 그림들은 세속과 담을 쌓은 듯 초탈한 심정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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