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시대의 젊은 열정 - 한국천주교 창설주역 이 벽

작성자대야.정|작성시간08.10.03|조회수32 목록 댓글 0

[제25회] 닫힌 시대의 젊은 열정
            한국천주교 창설주역 이 벽



▣방송 : 2007. 12. 22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윤한용 PD
글,구성 : 지현주 작가
 

자발적으로 발생한 한국 천주교!
단 한명의 외국 선교사가 들어오지 않았던 조선 땅.
이 땅에 천주교가 시작 될 수 있었던 것은
광암 이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벽은 사악한 천주교를
가장 먼저 시작한 우두머리로
천주교인들의 시조이다.”
[벽위편 中]

“(이벽은) 열의와 열성과 능력으로써
이 왕국에 천주교의 문을
열어 놓았던 사람이다.”
[다블뤼 조선 순교자 비망기 中]


세계 유일의 자발적 발생. 한국 천주교!

18세기 조선.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일무이한 일이 발생한다. 단 한명의 외국인 선교사도 들어오지 않은 조선 땅. 그 땅에 천주교가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
당시 조선은, 성리학적 질서 아래 모든 사회가 통제된 닫힌 사회. 그러나 젊은이들은 성리학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했다. 때마침 그런 그들에게 서구학문과 사상이 들어오는데....
당시 중국을 통해 들어오던 서학을 받아들인 젊은 선비들. 그리고 그 선비들 중 하나였던 광암 이벽은 스스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이 땅에 천주교의 역사를 싹틔운다.

 


"광암(曠庵) 이벽. 그는 누구인가? "

10세 남짓한 어린 시절부터 홀로 공부했던 이벽. 그의 천재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심지어 다산 정약용마저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중용강의보]를 쓸 수 없었다고 말한다.

“만일 광암이 살아 있다면 그의 학식과 덕에 나아감이
어찌 내게 비할 수가 있으랴.” (중용강의보 中庸講義補)


그러나 뜻한 바가 있었던 이벽은 과거의 뜻을 일찍 접는다. 이벽이 추구한 것은 조선사회의 근본적인 변혁. 때문에 이벽은 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유학 외에 다양한 학문을 공부한다. 그 과정에서 서구의 학문을 공부하던 그는, 스스로 천주교 교리를 깨우친다.
그리고 이벽은 마침내 천주교를 종교로서 받아들이는데....

 

이벽. 한국천주교사의 주역이 되다!

경기도 광주군 앵지산 자락의 천진암. 1779년 겨울, 이곳에서는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이 모여 유교를 공부하는 강학이 열렸다. 강학이 한창 진행 중인 새벽. 이벽은 눈 덮힌 산을 넘어, 선비들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벽은 정약용, 정약전 권철신과 같은 당대 선비들에게 천주교라는 사상을 전한다.
조선 최초로 영세를 받는 이승훈. 북경 에 사신으로 파견되기 전, 이벽은 이승 훈을 찾는다. 이벽은 그에게 복음을 전 하고 북경에서 서양 선교사를 만나 세 례 받을 것을 권한다. 

이승훈을 통해 북경에서 전해져 오는 천주교 서적들. 이 책들로 말미암아 조 선에서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꽃피우기 시작한다. 이와 같이, 이벽은 한국천주 교사에 빠질 수 없는 역할을 해낸다.

 


효(孝)인가, 신앙인가?
              두 가지 갈래 길에 서다!

임금과 아버지를 중심으로 사회체제를 구현했던 유교. 반면, 천주교는 천주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종교였다. 유교 중심의 조선사회에서, 천주교는 커다란 위협일 수 밖에 없었다.
을사추조적발사건 이후 나라에서는 서학을 금지시켰고, 유교 윤리에 충실했던 문중들 역시 서학을 금지시킨다. 이벽의 이씨 문중 또한 서학을 금지한다. 그러나 문중의 협박에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이벽. 보다 못한 이벽의 아버지는 이벽이 천주교와 결연하지 않으면 자결하겠다고 하는데....
효와 신앙. 아버지의 목숨과 종교적 믿음. 갈림길에 선 이벽. 그가 내린 결론은 무엇일까?


이벽 그는 순교자인가? 배교자인가?

서른둘의 나이로 병사했다고 전해지는 이벽. 그간 천주교에서는 이벽을 배교자로 보는 시각이 팽배했다. 그가 배교자로 지목된 이유는 단 하나. 아버지의 자결 앞에서 신앙을 양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그의 죽음을 순교로 보는 의견이 부각되고 있다.

“배교시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명백한 배교는 거부했다.”
[다블뤼 조선순교자 비망기 中]

이벽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또한 그의 집안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계속되는 박해가 있었다. 결국 그는 집안의 박해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순교자’이다.

 

“조선에서 처음 천주교회의 역사를 위하여
천주께서 쓰신 도구는
이벽이라는 사람이다.”
[다블뤼 조선 순교자 비망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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