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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QT

주의 은총 안에 거하는

작성자사랑하는사랑을위하여|작성시간20.06.06|조회수217 목록 댓글 0


주의 은총 안에 거하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0,11)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기꺼이 버립니다. 성경은 목자와 양들의 관계에서 양을 동물로 보지 않고 '자녀'로 보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의 수가 많고 적음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한 마리의 양이라도 잃어버린다면 나머지 양들을 우리에 남겨 두고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 나섭니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수지가 맞지 않는 일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알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경제적 이익이나 논리가 아닙니다. 목자는 잃어 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밤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 다닙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양을 찾았을 때, 크게 기뻐하고 기뻐합니다. 이런 선한 목자를 가리켜 '참 목자'라고 합니다. 


생명이 풍성한 삶이란 오래 사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슬픔, 고통, 질병이 없는 삶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슬픔, 고통, 질병이 찾아올 수 있지만 세상이 알지 못하는 영생의 삶은 따로 있습니다. 풍성한 삶은 아름답고 의미 깊으며 매일 기적을 일으킵니다. 


'풍성하다'는 말의 영어 어원을 살펴보면, '파도를 일으키다'라는 뜻입니다. 파도는 끊임없이 출렁이며 바닷가로 밀려왔다가 사라지곤 합니다. 이처럼 풍성함이란 출렁이는 파도와 같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것입니다. '풍성하다'의 헬라어 어원을 살펴보면, '초과분'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풍성한 삶이란 100퍼센트 만족하고 초과분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고 천국으로 가는 큰 은혜를 받았는데, 영생을 초과분으로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초과분이 파도처럼 계속 출렁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풍성한 삶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삶에 초과분의 은혜가 넘칩니다. 예수님이 '너희에게 생명을 주겠고 그 생명을 풍성하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용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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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한 목자라".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구원자이신 지, 또 어떤 하나님이신 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어떤 면에서 매우 목가적이고도 낭만적인 비유를 드셨습니다. 자신을 선한 목자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선한'이라는 말은 어떤 면에서 '좋은'이라고 번역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볼 때 "좋은 목자"가 더 나은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선하다'고 하면 흔히  '악하다'는 말의  반대 의미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선하다'는 말에는 도덕적인 의미가 함축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자기를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삯을 받고 남의 양을 치는 삯군 목자와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삯군 목자가 악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삯군 목자는 돈을 보고 일하기 때문에  진정 양떼를 위하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양을 심하게 몰수도 있고, 또 이리나 짐승이 덤비면 양보다 자기 생명을 살리느라 도망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삯군 목자는 좋지 못한 목자요, 못된 목자이지, 악한 목자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 이유는 양들을 위해서 일하는 진실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신 말씀을 순서대로 놓고 왜 예수님이 자기를 선한 목자라고 하시는가에 대해 두 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양들을 자기 생명보다 사랑하시기에...

예수님이 왜 자기를 선한 목자라고 하십니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양들을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너무너무 마음에 와 닿는 말씀 아닙니까? 자기 생명보다 양을 더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는 선한 목자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그 얼굴 표정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양을 위해서 싸우는 목자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부터 18절까지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말씀을 네 번이나 반복하고 계십니다. 마치 자신이 작사 작곡한 어떤 노래를 부르시면서 마지막 후렴으로 "내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느니라." 하고 네 번 반복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장난으로 이런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이게 어떤 말씀인데 쉽게 함부로  떠들겠습니까? "내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하는 말속에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샘이 솟듯이 넘치기 때문에 주님이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가볍게 듣고 넘겨서는 안 됩니다. 마음으로 진지하게 받아야 합니다. '정말 주님이 자기 생명보다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가?'하고 주님의 사랑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손아귀에서 우리를 구원하

시기 위해서는 자기 생명을 바치지 아니하면 안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에서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그 저주를  대신 받아주지 아니하면 안되었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고 하늘에 속한 모든 복을 안겨  주시기 위해서는 자기 생

명을 내 놓지 아니하면 안 되는 입장에 서 있던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자기 생명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해 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자나 곰하고 싸우다가 잘못해서  목숨을 잃게 되는 그런 목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강도와 싸우다가 힘이 모자라서 마음에도 없는 죽음을 당하는 그런 목자도 아닙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생명을 버릴 권세도 버리지  않을 권세도 있지만 양들을 위해서 스스로 그 목숨을 내 놓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가슴속에 뭔가 뭉클하게 전해지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은 자의적인 사랑이지 의무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입니다. 주님은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만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를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하십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자기보다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양들을 너무 잘 아시기에...


예수님이 자기를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너무 잘 아시는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또 27절을 보십시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여기서 '안다'는 말은 양이 몇 마리인가 하는 것을 아는 그런 정도의 지식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양이 남의 양이냐 내 양이냐를 안다 거나 나이가 몇 살이나  되었는지 혹은 새끼를 배었는지 안 배었는지를 아는 그런 정도의 지식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삯군 목자도 다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안다'고 할 때,  그 말은 양들의 처지에서 양들을 생각해 준다는 뜻입니다. 목자가 양들의 처지에  서서 양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동정해 준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양을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양에게 마음이 있다면 양의 마음을 알아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처지를 얼마나 깊이 알고 계실까요? 14-1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매우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가 설명을 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지나치게 과장하시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알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예수님은 우리를 아시는 것을 하나님이 예수님을 아시는 것에다 비기고 계십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과 예수님은 원 스피릿(one spirit)이십니다.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생각은 예수님의 생각이요 예수님의 모든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 두분 사이에는  어떤 간격도 어떤 틈바구니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시는 것은 예수님도 다 아시고, 예수님이 아시는 것은 하나님도 다 아십니다. 완벽한 상호 지식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적인 논리로는 절대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놀라운 상호지식을 우리에게 적용하실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그 정도로 압니까? 천만 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마치 하나님이 자기를 아는 것처럼 세밀하고 정확하게, 우리의 깊은 데까지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나를 알아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 줄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참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가끔 우리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고독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나와 너 사이를 갈라놓고 높은 벽을 쌓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알아주고 이해해줄 만한 어떤 여지도 남겨 두지 않습니다. 숨쉴 틈이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가운데 너와 나 사이의 관계는 날로 더 삭막해 지고 나는 말 그대로 외톨이가 되어 빈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자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왜 자기를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나의 속사정을 너무나 속속들이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처지를 이해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디에 약한지, 왜 불안해하는지, 왜  자주 넘어지는지, 왜 울고 있는지, 왜 기가 죽어 있는지  주님은 다 아십니다. 그는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알아주십니다. 그는 나를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에  나를 알아주십니다.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나를 아십니다. 히2:18 말씀대로 그  자신이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해 보셨기 때문에 나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처지가 어떠하든 간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선한 목자입니다. 나를 아신다고 합니다. 아신다는 말은 도와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자녀가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면 아빠들은  이런 말을 곧잘 합니다. "알았어." 그래도 무슨 말을 또 하면  "알았다니까."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도와주겠다는 말입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아신다는 말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도와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절망이 아닙니다. 슬퍼하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을 보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은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렇습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 이것만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나를 알아주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자기  생명보다도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선한 목자, 나의 깊은  속사정까지 다 알고 동정해  주시는 선한 목자, 그분은 이 세상에 한 분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헬라어 원문이나 영어 성경을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할  때 정관사를 붙입니다.  "I am 'the' good shepherd." 나를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하실 뿐 아니라 진실로 나를 알아주시는 분은 이 세상에서 예수 외에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 그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 예수님 의지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비록 고통이나  슬픔 중에 있다 할지라도 슬픔 중에 있다 할지라도 불안 중에 낙심 중에 있다 할지라도 이렇게 찬송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옥한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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