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믿음 안에 살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십니다.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나는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라서 주님에 의해서 살게 되면 우리는 의를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그리스도로 꽉 채우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리스도를 사랑하면할수록 우리는 그 주님을 통해서 놀라운 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율법주의로 돌아가게 되면 우리는 이런 복음적 삶의 능력을 부인하게 됩니다. 율법주의와 타협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 2:21) 하나님은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께 내 죄를 짊어지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 다시 그리스도를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 내 마음 속에 거하십니다. (이동원 목사) 사람들의 습관을 한 번 고치는 데 무척 힘이 듭니다. 습관은 사람을 규정합니다. 인간은 습관으로 자신을 구성합니다. 악은 악의 습관으로 선은 선의 습관으로 정의는 정의의 습관으로 불의는 불의의 습관으로 한 인간을 규정합니다.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금방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습관을 바꾸는 데는 생각의 교정이 있고난 후에도 수많은 시간의 몸부림 후에 겨우 조금의 진척이 있을 뿐입니다. 습관은 인격이요, 습관은 자신의 존재 모습입니다. 내가 어떤 양식으로 존재 하느냐는 나의 습관이 어떤 것이냐로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습관이 먼저 바뀌어야 삶이 변화됩니다. 갈 2:20은 율법과 복음에 관한 내용입니다. 복음적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로와진다는 선언입니다. '율법을 향하여 죽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라'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지배로 옮겼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있어서 율법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죽음을 선포해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새로운 탄생을 준비해야 할 것은 또 무엇입니까? 먼저 과거의 나에 대해 죽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내가 아닌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반복적인 죽음을 통해서 순도 높은 신앙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게 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31) 죽음의 선언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습관은 과거의 습관을 죽이지 않고서는 형성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찌 진통 없이 될 일입니까? 과거의 내가 죽는 것은 진통을 가져옵니다. 도전이요, 각성입니다. 해산하는 수고가 있습니다. 각질을 깨는 아픔이 있습니다. 껍질을 뚫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근본적으로 아픔입니다. 십자가에 못을 밖는 아픔입니다. 손의 습관이 된 것은 손에 못을 밖음으로 과거의 세속적 습관을 장사지낼 수 있습니다. 발로 행하던 길(行)의 습관은 발에 못을 밖음으로서 과거의 어두움의 길을 장사지낼 수 있습니다. 생각으로 악에의 관습에 젖어들던 것은 머리에 가시관을 씌워 찌르며 피를 흘림으로 악에의 지향을 장사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달려서 죽었습니다. 처형되었습니다.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청산했습니다. 존재가 소멸 되었습니다. 이제 나의 과거는 없습니다. 살아있다면 그것은 이제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나의 나머지 삶은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나의 의지, 나의 계획, 나의 주권, 다 포기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 헌신된, 그리스도에 의해 사용되는, 그리스도의 소유물입니다. 순도 높은 신앙은 과거의 율법의 나에 대해 죽음을 선언하고, 자신을 처형하고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벗고 입는 행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벗음과 입음을 반복함으로 순도 높은 신앙은 이뤄집니다. 끊임 없이 벗고 입는 생활입니다. 무엇에 대해 벋고 입는 것입니까?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벋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벋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3:9-10)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벋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4:22-24) 어두움을 벋어야 합니다. 옛사람과 옛 행동을 벋어야 합니다. 옛날 습관을 벋어야 합니다. 빛을 입어야 합니다.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입어야 합니다. 과거의 나의 습관, 행태, 가치관에 대한 혁명입니다. 이거야 말 로 구조조정입니다. 구조가 바뀌어야 합니다. 체제가 바뀌어야 합니다. 이것은 정권교체입니다. 완전하고 실질적인 정권 교체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행동양식입니다. 일평생 치뤄야할 싸움입니다. 이 몸부림은 우리의 사는 날 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 싸움을 소홀히 하는 영적 승자는 없습니다. 이 전투를 게을리 하고 믿음의 순도와 실천의 순도를 높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20절) '그런즉'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세속적 습관과 부정한 습관을 십자가에 못밖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 수 없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어두움의 모습을 십자가에 못밖은 자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의 어두운 습관을 못박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자신은 없어지고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믿음의 순도는 높아집니다. 무엇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킬 수 있습니까?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심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즉'의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어떻게 순도 높은 신앙인 가능합니까? 욕망과 이기심과 어두움의 그림자를 제함으로 가능합니다. 그것은 결국 십자가에 나의 존재를 못밖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은 새로운 나의 탄생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능력의 탄생입니다. 그리스도가 대신 사는 삶입니다. 나는 없고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서 사는 삶을 상상해 보세요. 그의 지성, 그의 능력, 그의 판단력, 그의 통찰력, 그의 자산이 다 나의 것이 됩니다. 충분히 선하게 활용됩니다. 그의 겸손, 그의 인내, 그의 인격이 내 속에 살아납니다. 이것은 능력있는 삶입니다. 헌신된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드리고 대신 그리스도가 나의 삶을 주장하고 그가 나를 통해 사십니다. 그런 까닭에 헌신된 그리스도인은 종종 능력의 사람으로 불려집니다. 무기력과 불안과 패배를 뛰어 넘습니다. 뒤틀린 나의 심성을 혁파합니다. 그러기에 궁극적으로 멋있는 삶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분, 나를 위해 몸을 던지신 분, 그 분과 함께, 그분을 향하여, 그분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가능한 생활입니다. 나를 위해 몸을 던진 분에 대한 은혜, 감격으로 삽니다. 빚진자로 삽니다. 울며 웃으며 감격하며 삽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탄생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새로운 사람은 그 어떤 환경이든 천국으로 만듭니다. "내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새로 탄생한 그리스도의 사람은 편안한 환경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강한 믿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새로운 탄생의 선언을 분명히 할 수 있어야 믿음의 사람입니다. 죽음의 선언 뿐 아니라 새로운 탄생의 선언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믿음은 고백하고 긍정하고 시인하고 증거함으로서 확고해 집니다. (이동규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