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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Korean (가해)

20260617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강론

작성자그리움하나|작성시간26.06.17|조회수20 목록 댓글 0

(2 열왕 2,1.6-14, 마태 6,1-6.16-18): 침묵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오늘 복음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한 구절이 깊이 마음을 울리고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실로 그렇습니다. 남들 앞에서 주도권이나 결정권을 지니고 주목 받는 위치에 서거나, 수많은 이들에게 영향력을 주기 위하여 많은 일들에 발을 담글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향이 자신의 성격에서 비롯될 수도 있고, 혹은 그것을 사명으로 느끼고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여 그럴 수 있겠지요. 또 그 일 자체를 통해서 얻는 보람이나 기쁨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인 각 분야에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분명 끼치는 부분이 적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끔 그런 분별의 지혜를 청하게 됩니다. 수많은 일을 맡거나 혹은 한 가질 일에 몰두한다 하더라도 그 사이에는 결코 차이점이 없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는 까닭이지요. 그건,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목적의 순수성과 그 목적을 잃지 않도록 할 과정에 더해질 섬세함, 그리고 결과에 이를 때 하느님만이 그 중심에 서도록 할 흔들림 없는 정체성의 확인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전면에 드러나고 중심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목적을 잃을 때는 그 길을 동반하는 이에게 직, 간접의 영향이 미칩니다. 누구나가 자신의 삶을 완전하게 살지 못한다 느끼는 불안이 커질 때, 다시금 길을 묻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의지할 곳을 찾게 되지요. 그것도 잠시 지나가는 ‘혼류(混流), 곧 세상의 휩쓸리는 흐름’에 맡길 수는 없는 법이지요. 영원을 향해 굳건히 서 있어 믿음을 기댈 만한 곳을 찾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참 신앙에 다다르지 못한다고 배척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영하고 안아주어야 할 태도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의지처가 되어야 할 곳이 속적인 삶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게 흘러간다면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되고 말겠지요.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께 물드는 사람은, 자신의 곁에 다가온 한 사람에게도 온유한 사랑과 섬세한 배려를 통해 사랑을 전하고 동행의 기쁨을 누리려 합니다. 얕은 자기 열등감과 상처 입은 자존감에 파묻혀 상처를 주어 심지를 꺼뜨리고 날개를 꺾으면, 그 남겨진 모습은 상처 입은 사람만이 아니라, 사랑을 잃은 자기 자신마저 무너뜨리는 어리석음에 처하게 합니다.

마침내 하느님이 드러나야 할 곳에 자신이 중심을 차지하면, 겉으로는 스스로 만족할 것 같아도, 결국 공허감에 파묻혀 자기 성소가 확인해 주어야 할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소위 ‘껍데기’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자선을 숨겨두면서도 잃지 않는 성실함, 다른 이의 상실과 이 세상의 고통을 외면치 못하고 드러나지 않는 희생으로 가슴을 쥐어 짜듯 품어내는 간절한 기도와 가난한 삶으로 부르짖는 간절한 단식의 눈물은 반드시 하늘에 닿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됩시다.     

 

열왕기 하권 2장 6절, 9절에서, “주님께서 살아계시고 스승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저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스승님 영의 두 몫을 받게 해 주십시오.”하고 매달리던 엘리사의 간청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이 세상을 물들여 이 땅이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차도록 우리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어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비우고 또 비워 아낌없이 내어드려 주님께서 이루실 모든 일에 복된 도구로 쓰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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