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우시모음 2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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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지 꽃
박성우
여자라는 꽃은 적어도 서른이 넘어야
제대로 된 꽃대를 밀어 올릴 수 있지
꽃무늬 미니스커트가
아까부터 꼬고 있던 길다란 다리를 풀더니
왼 무릎을 치켜들어 의자 위로 올린다
어디서 처음 보았더라
따먹을 만큼 따먹었을 법한 가지,
가지꽃이 깊게 젖은 보라꽃 꽃잎을 뒤로 젖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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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건망증
박성우
깜빡 나를 잊고 출근버스에 올랐다
어리둥절해진 몸은
차에서 내려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방문 밀치고 들어가 두리번두리번
챙겨가지 못한 나를 찾아보았다
화장실과 장롱 안까지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집안 그 어디에도 나는 없었다
몇장의 팬티와 옷가지가
가방 가득 들어 있는 걸로 봐서 나는
그새 어디인가로 황급히 도망친 게 분명했다
그렇게 쉬고 싶어하던 나에게
잠시 미안한 생각이 앞섰지만
몸은 지각 출근을 서둘러야 했다
점심엔 짜장면을 먹다 남겼고
오후엔 잠이 몰려와 자울자울 졸았다
퇴근할 무렵 비가 내렸다
내가 없는 몸은 우산을 찾지않았고
순대국밥집에 들러 소주를 들이켰다
서너 잔의 술에도 내가 없는 몸은
너무 가벼워서인지 너무 무거워서인지
자꾸 균형을 잃었다 금연하면
건강해지고 장수할 수 있을 것 같은 몸은
마구 담배를 피워댔다 유리창에 얼핏
비친 몸이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옆에 앉은 손님이 말을 건네왔지만
내가 없었으므로 몸을 대꾸하지 않았다
우산 없이 젖은 귀가를 하려 했을 때
어딘가로 뛰쳐나간 내가 막막하게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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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칩
박성우
봇물 드는 도랑에
갯버들이 간들간들 피어
외진 산골짝 흙집에 들었다
새까만 무쇠솥단지에
물을 서너 동이나 들붓고
저녁 아궁이에 군불 지폈다
정지문도 솥뚜꿍도
따로 닫지 않아, 허연 김이
그을음 낀 벽을 타고 흘렀다
대추나무 마당에는
돌확이 놓여 있어 경칩 밤
오는 비를 가늠하고 있었다
긴 잠에서 나온 개구락지들
덜 트인 목청을 빗물로 씻었다
황토방 식지 않은 아침
갈퀴손 갈큇발 쭉 뻗은
암수 개구락지 다섯 마리가
솥단지에 둥둥 떠 굳어 있었다
아직 알을 낳지 못한
암컷의 배가 퉁퉁 불어
대추나무 마당가에 무덤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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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추씨 같은 귀 울음소리 들리다
박성우
뒤척이는 밤, 돌아눕다가 우는 소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귓밥 구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고추씨 같은 귀 울음소리,
누군가 내 몸 안에서 울고 있었다
부질없는 일이야, 잘래잘래
고개 저을 때마다 고추씨 같은 귀 울음소리,
마르면서 젖어 가는 울음소리가 명명하게 들려왔다
고추는 매운 물을 죄 빼내어도 맵듯
마른 눈물로 얼룩진 그녀도 나도 맵게 우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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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남겨두고 싶은 순간
박성우
시외버스 시간표가 붙어있는
낡은 슈퍼마켓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오래된 살구나무를 두고 있는
작고 예쁜 우체국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유난 떨며 내세울 만한 게 아니어서
유별나게 더 좋은 소소한 풍경,
슈퍼마켓과 우체국을 끼고 있는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아 저기 초승달 옆에 개밥바라기!
집에 거의 다 닿았을 때쯤에야
초저녁 버스정류장에
쇼핑백을 두고 왔다는 걸 알았다
돌아가 볼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으나, 나는 곧 체념했다
우연히 통화가 된 형에게
혹시 모르니, 그 정류장에 좀
들러 달라 부탁한 건, 다음날 오후였다
놀랍게도 형은 쇼핑백을 들고 왔다
버스정류장 의자에 있었다는 쇼핑백,
쇼핑백에 들어있던 물건도 그대로였다
오래 남겨두고 싶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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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단풍
박성우
맑은 계곡으로 단풍이 진다
온몸에 수천 개의 입술을 숨기고도
사내 하나 유혹하지 못했을까
하루종일 거울 앞에 앉아
빨간 립스틱을 지우는 길손다방 늙은 여자
볼 밑으로 투명한 물이 흐른다
부르다 만 슬픈 노래를 마저 부르려는 듯 그 여자
반쯤 지워진 입술을 부르르 비튼다
세상이 서둘러 단풍들게 한 그 여자
지우다 만 입술을 깊은 계곡으로 떨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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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도원경桃源境
박성우
뻘에 다녀온 며느리가 밥상을 내온다
아무리 부채질을 해도 가시지 않던 더위
막 끓여낸 조갯국 냄새가 시원하게 식혀낸다
툇마루로 나앉은 노인이 숟가락을 든다
남은 밥과 숭늉을 국그릇에 담은 노인이
주춤주춤 마루를 내려선다 그 그릇을 들고
신발의 반도 안되는 보폭으로 걸음을 뗀다
화단에 닿은 노인이 손자에게 밥을 먹이듯
밥 한 숟갈씩 떠서 나무들에게 먹인다
느릿느릿 빨간 함지 쪽으로 향하던 노인이
파란 바가지 찰랑이게 물을 떠다가
식사 끝낸 나무들에게 기울여준다
손으로 땅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주는 노인,
부축하고 온 지팡이가 다시 앞장을 선다
어슬렁어슬렁 기어온
고양이 한마리가 나무 밑동으로 스며든다
툇마루로 돌아와 앉은 노인이 예끼, 웃는다
군산시 옥도면 대장도리 1-5번지에는
무릉도원에 닿아 있는 아흔의 노인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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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돌을 헐어 돌을
박성우
십여 년 동안 쌓은 돌탑을 헐어낸다
마당 귀퉁이에 달팽이처럼 둥글게
감아두었던 돌을 빙 돌아가며 풀어내
계곡 쪽, 집 가장자리로 길게 당겨간다
허물어낸 돌을 길게 늘어트려
축대 겸 돌담으로 다시 차곡차곡 높인다
골짝 물소리는 쉬이 돌돌 넘어오고
골짝 물은 어지간하면 못 넘어오게
큰돌은 양 바깥으로 괴어 올리고
자잘한 돌은 안쪽에 촘촘 채워 넣는다
혹여 큰 비 칠 때 내려올지 모를 큰물이
부득불, 우리 집에 들렀다 가야겠다고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려 하면
그러지 말고 자네 갈 길 가시게나,
등 토닥여 돌려보낼 만큼 돌을 얹는다
어쩐지 허전하고 서운키는 하더라도
정 없이 아주 매정해 보이지는 않게
돌탑 허물어, 큰 돌은 불끈 안아 나르고
자잘한 돌은 대야에 담아 옮겨 쟁인다
이 돌들은 대체로 돌밭을 일굴 적에
하나둘 캐낸 것들인데 여기에는
땀이 아닌 오기로 나를 갈아엎을 때
작심하고 빼낸 돌덩이 몇도 섞여 있다
무거운 생각들은 계곡 아래로 굴리고
가뿐한 생각들은 계곡 위로 올리면서
흥얼흥얼 끙끙 돌을 헐어 돌을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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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바닥
박성우
괜찮아, 바닥을 보여줘도 괜찮아
나도 그대에게 바닥을 보여줄게, 악수
우린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위로하고 위로 받았던가
그대의 바닥과 나의 바닥, 손바닥
괜찮아, 처음엔 다 서툴고 떨려
처음이 아니어서 능숙해도 괜찮아
그대와 나는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핥았던가
아, 달콤한 바닥이여, 혓바닥
괜찮아, 냄새가 나면 좀 어때
그대 바닥을 내밀어 봐,
냄새나는 바닥을 내가 닦아줄게
그대와 내가 마주앉아 씻어주던 바닥, 발바닥
그래, 우리 몸엔 세 개의 바닥이 있지
손바닥과 혓바닥과 발바닥,
이 세 바닥을 죄 보여주고 감쌀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겠지,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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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반나잘 혹은 한나잘
박성우
내 어머니 집에 가면
새실 한약방에서 얻은 달력이 있지
그림은 없고 음력까지 크게 적힌 달력이 있지
그 달력에는
'반나잘' 혹은 '한나잘'이라고
삐뚤삐뚤 힘주어 기록되어 있지
빨강글씨라도 좀 쉬지 그려요
아직까정은 날품 팔만 헝게 쓰잘데기없는 소리 허덜 말어라
칠순 바라보는 어머니 집에 가면
반나절과 한나절의 일당보다도
더 무기력한 내가 벽에 걸릴 때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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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봄 가지를 꺾다
박성우
상처가 뿌리를 내린다
화단에 꺾꽂이를 한다
눈시울 적시는 아픔
이 악물고 견뎌내야
넉넉하게 세상 바라보는
수천 개의 눈을 뜰 수 있다
봄이 나를 꺾꽂이한다
그런 이유로 올 봄엔
꽃을 피울 수 없다 하여도 내가
햇살을 간지러워하는 건
상처가 아물어가기 때문일까
막무가내로 꺾이는 상처,
없는 사람은 꽃눈을 가질 수 없다
상처가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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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소금벌레
박성우
소금을 파먹고 사는 벌레가 있다
머리에 흰 털 수북한 벌레 한 마리가
염전 위를 기어간다 몸을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하면서
연신 소금물을 일렁인다
소금이 모자랄 때
제 눈물을 말려 먹는다는 소금벌레,
소금물에 고분고분 숨을 죽인 채
짧은 다리 분주하게 움직여
흩어진 소금을 쉬지 않고 끌어 모은다
땀샘 밖으로 솟아오른 땀방울이
하얀 소금꽃 터뜨리며 마른다
소금밭이 아닌 길을 걸은 적 없다 일생 동안
소금만 갉아먹다 생을 마감한 소금벌레
땡볕에 몸이 녹아내리는 줄도 모르고
흥얼흥얼, 고무래로 소금을 긁어모으는
비금도 태산 염전의 늙은 소금벌레 여자
짠물에 절여진 세월이 쪼글쪼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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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쇼핑백 출근
박성우
입다물고 살든
입 벌리고 살든
속 비우고 살든
속 챙기며 살든
언제 끈 떨어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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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어디까지 왔니
박성우
여물게 산다고 살았는데
어느 세월에 다 흘려 보내셨는지
가늘고 무른 것들만 어머니 곁에 남아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나는
들숨에 한 번
날숨에 또 한 번
숨소리에 맞춰 숫자를 센다
중간중간 몇 번의 들숨이
내 곁에 남았 있나 그런
슬픈 생각까지 하나 둘
말 없이 세어 본다
그 옛날
들일하고 돌아오던 길
들컹이는 수레에 실려 당신에게
쫑알쫑알 묻던 것처럼 오늘은
어디까지 왔니
어디까지 왔니
아이처럼 묻고 싶다
아직까지 멀었다는
그 귀한 말을 몇 번이나
듣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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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어머니
박성우
끈적끈적한 햇살이
어머니 등에 다닥다닥 붙어
물엿인 듯 땀을 고아내고 있었어요
막둥이인 내가 다니는 대학의
청소부인 어머니는 일요일이었던 그날
미륵산에 놀러 가신다며 도시락을 싸셨는데
웬일인지 인문대 앞 덩굴장미 화단에 접혀 있었어요
가시에 찔린 애벌레처럼 꿈틀꿈틀
엉덩이 들썩이며 잡풀을 뽑고 있었어요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어머니,
지탱시키려는 듯
호미는 중심을 분주히 옮기고 있었어요
날카로운 호밋날이
코옥콕 내 정수리를 파먹었어요
어머니 미륵산에서 하루죙일 뭐허고 놀았습디요
뭐허고 놀긴 이놈아, 수박이랑 깨먹고 오지게 놀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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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유년의 거울
박성우
아무도 없는 방에 남겨지던 날이었다
유년의 나는 벽에 걸린 거울을 떼어 들고는
방바닥을 천장 쪽으로 기울여보기도 하고
천장을 방바닥 쪽으로 기울여보기도 하면서 놀았다
들고 있던 거울을 점점 아래로 기울이다 보면
아래에 있어야 할 두 발이 들려지는 것 같았고
위에 있어야 할 머리가 아래로 쏠리는 것 같았는데,
그것은 무서우면서도 제법 재미있는 일이었다
방바닥을 좀 더 들어 올려볼까,
거울을 훌쩍 기울여 들고 있다 보면
나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아래쪽으로
끝없이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니 나는 기꺼이 거울을 들어 올리고 앉아,
머리를 흔들어대고 두 발을 바둥거려대면서
수십 수백 수천 킬로미터 아래로
끝없이 떨어져 내려갔다
뒷마당을 거꾸로 하면 장독대가 쏟아지겠지?
뒷산을 거꾸로 하면 토끼와 고라니가 쏟아지겠지?
강물을 거꾸로 하면 붕어며 메기가 쏟아져 나올 텐데
물고기를 주워 담다가 물벼락을 맞으면 어떡하지?
때 아닌 걱정을 해대기도 하면서 언제까지고 떨어졌다
그나저나 나, 얼마나 더 떨어져야 하는 거지?
어른어른 현기증이 일면, 얼른 나는
들어 올리고 있던 거울을 내려놓고 긴 숨을 내쉬었다
출처 : 시 전문 계간 《딩아돌하》 (202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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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찜통
박성우
내가 조교로 있는 대학의 청소부인 어머니는
청소를 하시다가 사고로
오른발 아킬레스건이 끊어지셨다
넘실대는 요강 들고 옆집 할머니 오신다
화기 뺄 땐 오줌을 끓여
사나흘 푹 담그는 것이 제일이란다
이틀 전에 깁스를 푸신 어머니,
할머니께 보리차 한 통 내미신다
호박넝쿨 밑으로 절뚝절뚝 걸어가신다
요강이 없는 어머니
주름치마 걷어올리고 양은 찜통에 오줌 누신다
찜통목 짚고 있는 양팔을 배려하기라고 하듯
한숨 같은 오줌발이 금시 그친다
야외용 가스렌지로 오줌을 끓인다
찜통에서 나온 훈기가 말복 더위와 엉킨다
마당 가득 고인 지린내
집밖으로 나가면 욕먹으므로
바람은 애써 불지 않는다
오줌이 미지근해지기를 기다린 어머니
발을 찜통에 담그신다 지린내가 싫은 별들
저만치 비켜 뜬다
찜통더위는 언제쯤이나 꺾일런지
찜통에 오줌 싸는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는 홀어머니
소일거리 삼아 물을 들이키신다
막둥아, 맥주 한잔 헐텨?
다음주까정 핵교 청소일 못 나가면 모가지라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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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카드 키드
박성우
카드가 사준 정장을 입고
카드가 사준 구두를 신은 출근길은 벅차다
어쩌다 카드가 사주는 저녁은 근사하고
카드가 큰맘 먹고 들여준 침대는 푹신하다
카드가 현금서비스 해준 축의금을 들고 다녀오는
직장 동료의 결혼식은 처연하게 찬란하다
입사 삼년차 카드 키드,
야근에 지쳐 귀가하는 밤은
카드가 카드론으로 얻어준 원룸이 있어 아늑하다
카드 키드가 되기 위한 지난날은 아름다웠다
스펙에 내준 대학생활은 교양 없이 품위 있었고
자기소개서 속으로 들어간 스펙은 뻔뻔하게 자랑스러웠다
서류전형에서 번번이 떨어지던 입사시험,
처음으로 면접 통보를 받던 날은
팬파이프 같은 빛이 눈앞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카드가 사주는 패스트푸드는 먹을 만하고
카드가 지켜주는 직장생활은 아직 견딜 만하다
정기적금을 해약해 카드에게 이체하고 남은 돈,
지방에 사는 양친께 부쳐드리던 손은 대견하다
월급날 받은 급여는 어김없이 카드에게 옮겨간다
'언제 취직할 거니'를 지나 '언제 결혼할 거니'까지
기적적으로 와 있는 카드 키드, 카드는
희망 복근을 키워보는 건 어떠냐며 헬스클럽을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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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콩나물 가족
박성우
아빠는 회사에서 물먹었고요
엄마는 홈쇼핑에서 물먹었데요
누나는 시험에서 물먹었다나요
하나같이 기분이 엉망이라면서요
말시키지 말고 숙제나 하래요
근데요 저는요
맨날맨날 물먹어도요
씩씩하고 용감하게 쑥쑥 잘 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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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해바라기
박성우
담 아래 심은 해바라기 피었다
참 모질게도 딱,
등 돌려 옆집 마당보고 피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말동무 하듯 잔소리하러 오는
혼자 사는 옆집 할아버지 웬일인지 조용해졌다
모종하고 거름내고 지주 세워주고는
이제나 저제나 꽃 피기만 기다린 터에
야속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여
해바라기가 내려다보는 옆집 담을 넘겨다보았다
처음 보는 할머니와
나란히 마루에 걸터앉은
옆집 억지쟁이 할아버지가
할머니 손등에 슬몃슬몃 손 포개면서,
우리 집 해바라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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