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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시모음 88편/그도세상

작성자그도세상김용호|작성시간25.06.18|조회수474 목록 댓글 0

나희덕시모음 8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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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능주의자

나희덕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그렇다고 제가 나폴레옹처럼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불가능들로 넘쳐나지요
오죽하면 제가 가능주의자라는 말을 만들어냈겠습니까
무엇도 가능하지 않은 듯한 이 시대에 말입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산산조각난 꿈들을 어떻게 이어붙여야 하나요
부러진 척추를 끌고 어디까지 가야 하나요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합니다

큰 빛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며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긋남에 대해
말라가는 잉크로나마 써나가려 합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이빨과 발톱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찢긴 살과 혈관 속에 남아 있는
이 핏기를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떤 어둠에 기대어 가능한 일일까요
어떤 어둠의 빛에 눈멀어야 가능한 일일까요

세상에, 가능주의자라니, 대체 얼마나 가당찮은 꿈인가요

* 오시프 만델슈탐, 「시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2012, 조주관 옮김, 96쪽.

출처 : 시집 《가능주의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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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을에 아름다운 사람

나희덕

문득 누군가 그리울 때
아니면
혼자서 하염없이 길 위를 걸을 때
아무 것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아름다운
단풍잎 같은 사람 하나 만나고 싶어질 때
가을에는 정말
스쳐 가는 사람도 기다리고 싶어라

가까이 있어도 아득하기만 한
먼 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미워하던 것들도 그리워지는
가을엔 모든 것 다 사랑하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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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겨울 산에 가면

나희덕

겨울 산에 가면
밑둥만 남은 채 눈을 맞는 나무들이 있다
쌓인 눈을 손으로 헤쳐내면
드러난 나이테가 나를 보고 있다
들여다볼수록
비범하게 생긴 넓은 이마와
도타운 귀, 그 위로 오르는 외길이 보인다
그새 쌓인 눈을 다시 쓸어내리면
거무스레 습기에 지친 손등이 있고
신열에 들뜬 입술 위로
물처럼 맑아진 눈물이 흐른다
잘릴 때 쏟은 톱밥가루는 지금도
마른 껍질 속에 흩어져
해산한 여인의 땀으로 맺혀 빛나고,
그 옆으로는 아직 나이테도 생기지 않은
꺾으면 문드러질 만큼 어린것들이
뿌리박힌 곳에서 자라고 있다
도끼로 찍히고
베이고 눈 속에 묻히더라도
고요히 남아서 기다리고 계신 어머니,
눈을 맞으며 산에 들면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바라보는
나이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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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구두가 남겨졌다

나희덕

그는 가고
그가 남기고 간 또 하나의 육체
삶은 어차피 낡은 가죽 냄새 같은 게 나지 않던가
씹을 수도 없이 질긴 것
그러다가도 홀연 구두 한 컬레로 남는 것

그가 구두를 끌고 다닌 게 아니라
구두가 여기까지 그를 이끌고 온 게 아니었을까
구두가 멈춘 그 자리에서
그의 생도 문득 멈추었으니

얼마나 많이 걸었던지
납작해진 뒷굽 어느 한쪽은 유독 닳아
그의 몸 마지막엔 심하게 기우뚱거렸을 것이다
바닥에 가 닿는 소리
생이 끝나는 순간에야 듣고 소스라쳤을지도 모른다
짧다

구두 한 컬레 그 속에
그의 발이 연주하던 냄새 같은 게
그를 품고 있던 어둠 같은 게
온기처럼 한 웅큼 남겨져 있다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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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귀뚜라미

나희덕

높은 가치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바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 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 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끼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러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 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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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나희덕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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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희덕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 꽃과 분홍 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 꽃과 분홍 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서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 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저녁이 오는 소리 가만히 들었습니다.

흰 실과 검은 실을 더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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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곳이 멀지 않다

나희덕

사람 밖에서 살던 사람도
숨을 거둘 때는
비로소 사람 속으로 돌아온다

새도 죽을 때는
새 속으로 가서 뼈를 눕히리라

새들의 지저귐을 따라
아무리 마음을 뻗어보아도
마지막 날개를 접는 데까지 가지 못했다

어느 겨울 아침
상처도 없이 숲길에 떨어진
새 한 마리

넓은 후박나무 잎으로
나는 그 작은 성지를 덮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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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때엔 흙에서 흙 냄새나겠지

나희덕

가야지 어서 가야지
나의 누추함이
그대의 누추함이 되기 전에
담벼락 아래 까맣게 영그는 분꽃씨앗
떨어져 구르기 전에
꽃받침이 시들기 전에
무엇을 더 보탤 것도 없이
어두워져가는 그림자 끌고
어디 흙속에나 숨어야지
참 길게 울었던 매미처럼
빈 마음으로 가야지
그때엔 흙에서 흙냄새 나겠지
나도 다시 예뻐지겠지
몇겁의 세월이 흘러
그대 지나갈 과수원길에
털복숭아 한 개
그대 내 솜털에 눈부셔하겠지
손등이 자꾸만 따갑고 가려워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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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런 저녁이 있다

나희덕

저물 무렵
무심히 어른거리는 개천의 물무늬에
하늘 한구석 뒤엉킨
하루살이떼의 마지막 혼돈이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바라보려 한다.
뜨거웠던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며
바람이 푸른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며
둑방의 꽃들이

차마 입을 다무는 소리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들으려 한다
어둠이 빛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나무의 나이테를
내 속에도 둥글게 새겨 넣으며
가만 가만히 거기 서 있으려 한다
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어둠 하나
옹이로 박힐 때까지

예전의 그 길, 이제는 끊어져
무성해진 수풀더미 앞에 하냥 서 있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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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기억의 자리

나희덕

어렵게 멀어져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까봐
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
추억의 속도보다는 빨리 걸어야 한다.
이제 보여줄 수 있는 건
뒷모습뿐, 눈부신 것도
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
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의 어귀마다
여름꽃들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
수많은 내 몸들이 피었다 진다.
시든 꽃잎이 그만
피어나는 꽃잎 위로 떨어져내린다.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걷는다, 빨리, 기억의 자리마다
발이 멈추어선 줄도 모르고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온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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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기억한다 그러나

나희덕

기억한다
벼랑 위에서 풀을 뜯던 말의 목선을
그러나 알지 못한다
왜 그토록 머리를 깊이 숙여야 했는지
벼랑을 기어오르던 해풍이
왜 풀을 뜯고 있던 말의 갈기를 흔들었는지
서럭서럭 풀 뜯는 소리
그때마다 왜 바다는 시퍼렇게 일렁였는지
밧줄은 보이지 않았지만
왜 말이 묶여 있다고 생각했는지

기억한다. 말의 눈동자를
그러나 알지 못한다
말의 눈동자에 비친 풀이
왜 말의 입에서 짓이겨져야 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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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길 위에서

나희덕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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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길속의 길속의

나희덕

저 풀들은 홍해를 건너고 있는 것일까
갈라진 아스팔트 틈으로 풀들이 자라고 있다

길속의 길,
길이 갈라져 풀이 난 게 아니라

풀씨가 팽창하면서
홍해처럼 길이 갈라진 게 아니었을까

키 작은 풀꽃 아래 개미들이 부지런히 부지런히
개미의 길을 가고 있다

길 속의 길 속의 길 속의 길 속의
어린 시절 뒷창을 열면

푸성귀를 이고 지고 장터로 가던 아낙들,
장날이면 피어나던 그 푸른 길을

창턱에 올라앉아
바라보던 어린 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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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꽃바구니

나희덕

자, 받으세요, 꽃바구니를.
이월의 프리지아와
삼월의 수선화와 사월의 라일락과
오월의 장미와 유월의 백합과
칠월의 칼라와 팔월의 해바라기가
한 오아시스에 모여 있는 꽃바구니를.
이 모순에 찬 꽃들의 화음을.

너무도 작은 오아시스에
너무도 많은 꽃들의 허리가 꽂혀 있는
한 바구니의 신음을.

대지를 잃어버린 꽃들은 이제 같은 시간을 살지요.
서로 뿌리가 다른 같은 시간을.
향기롭게, 때로는 악취를 풍기면서
바구니에서 떨어져 내리는 꽃들이 있네요.

물에 젖은 오아시스를 거절하고
고요히 시들어가는 꽃들.
그들은 망각의 달콤함을 알고 있지요.
하지만 꽃바구니에는
생기로운 꽃들이 더 많아요.

하루가 한 생애인 듯이 꽃들 속에 숨어
나도 잠시 피어나고 싶군요.
수줍게 꽃잎을 열듯 다시 웃어 보고도 싶군요.
자, 받으세요, 꽃바구니를

이월의 프리지아와 삼월의
수선화와 사월의 라일락과
오월의 장미와 유월의 백합과
칠월의 칼라와 팔월의 해바라기가
한 오아시스에 모여 있는 꽃바구니를
이 불가능한 동거의 침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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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나를 열어주세요

나희덕

옆구리에 열쇠구멍이 있을 거예요.
찾아보세요. 예, 거기에
열쇠를 꽂아주세요.
아니면 태엽이라도 감아주세요.
여기 계속 서 있는 건
아무래도 너무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몇 걸음이라도 걸어야 살 것 같아요.
열쇠를 찾을 수 없다고요?
당신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있잖아요.
손가락만큼 좋은 열쇠는 드물죠.
때로는 붓이 되기도 하고 칼이 되기도 하는 손,
지문의 소용돌이를
열쇠구멍의 어둠에 가만히 대보세요.
예, 드디어 열렸군요.
이제 구멍 밖으로 걸어갈 수 있겠네요.
태엽을 넉넉히 감아주세요.
염려하지 마세요, 곧 돌아올 테니까.
내 구두에는 스프링이 달려 있어
통, 통, 튀어 올랐다가도 이내 가라앉고 말지요.
혹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눈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줄 아세요.
당신의 인형이라는 것도 잊은 채
땅에 코를 박고 허둥거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다시 일으켜 줄 어떤 손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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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나뭇가지가 오래 흔들릴 때

나희덕

세상이 나를 잊었는가 싶을 때
날아오는 제비 한 마리 있습니다
이젠 잊혀져도 그만이다 싶을 때
갑자기 날아온 새는
내 마음 한 물결 일으켜놓고 갑니다
그러면 다시 세상 속에 살고 싶어져
모서리가 닳도록 읽고 또 읽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게 되지요
제비는 내 안에 깃을 접지 않고
이내 더 멀고 아득한 곳으로 날아가지만
새가 차고 날아간 나뭇가지가 오래 흔들릴 때
그 여운 속에서 나는 듣습니다
당신에게도 쉽게 해 지는 날 없었다는 것을
그런 날 불렀을 노랫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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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낯선 편지

나희덕

오래된 짐 꾸러미에서 나온
네 빛 바랜 편지를
나는 도무지 해독할 수가 없다

건포도처럼 박힌 낯선 기호들,
사랑이 발명한 두 사람만의 언어를
어둠 속에서도 소리내어 읽곤 했던 날이 있었다

그러나 어두운 저편에서
네가 부싯돌을 켜대고 있다 해도
나는 이제 그 깜박임을 알아볼 수 없다

마른 포도나무 가지처럼
내게는 더 이상 너의 피가 돌지 않고
온몸이 눈이거나
온몸이 귀가되어도 읽을 수 없다

오래된 짐 꾸러미 속으로
네 편지를 다시 집어넣는 순간
나는 듣고 말았다
검은 포도 알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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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내 것이 아닌 그 땅 위에

나희덕

주춧돌을 어디에 놓을까
여기쯤에 집을 앉히는 게 좋겠군
지붕은 무엇으로 얹을까
벽은 아이보리색이 무난하겠지
저 회화나무가 잘 보이게
남쪽으로 커다란 창을 내야겠어
동백숲으로 이어진 뒤뜰에는 쪽문을 내야지
그 옆엔 자그마한 연못을 팔 거야
곡괭이를 어디 두었더라
돌담에는 마삭줄이나 능소화를 올려야지
앞마당에는 무슨 꽃들을 심을까
대문에서 현관까지 자갈을 깔면 어떨까
저 은행나무 그늘에는
나무 의자를 하나 놓아야지
식탁은 둥글고 큼지막한 게 좋겠어

오늘도 집을 짓는다
내 것이 아닌 그 땅 위에, 허공에

생각은 돌담을 넘어
집터 주위를 다람쥐처럼 드나든다
집을 이렇게 앉혀보고 저렇게 앉혀보고
벽돌을 수없이 쌓았다 허물며
마음으로는 백 번도 넘게 그 집에 살아보았다

그러나 내 것이 아닌 그 땅에는
이미 다른 풀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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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나희덕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출처 :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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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너무 많이

나희덕

그때 나를 내리친 것이 빗자루방망이였을까 손바닥이었을까
손바닥이었을까 손바닥에 묻어나던 절망이었을까.
나는 방구석에 쓰레받기처럼 처박혀 울고 있었다.
창 밖은 어두워져갔고 불을 켤 생각도 없이 우리는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침침한 방의 침묵은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느껴져 하마터면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을 뻔했다.
그러나 마른번개처럼 머리 위로 지나간 숱한 손바닥에서 어머니를 보았다면,
마음이 마음을 어루만지는 소리를 들었다면,
나는 그때 너무 자라버린 것일까.
이제 누구도 때려주지 않는 나이가 되어 밤길에 서서 스스로 뺨을 쳐볼 때가 있다.
내 안의 어머니를 너무 많이 맞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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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나희덕

사랑에도 속도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솔잎혹파리가 숲을 휩쓰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한 순간인 듯 한 계절인 듯
마음이 병들고도 남는 게 있다면
먹힌 마음을 스스로 달고 서 있어야 할
길고 긴 시간일 것입니다.
수시로 병들지 않는다 하던
靑靑의 숲마저
예민해진 잎살을 마디마디 세우고
스치이는 바람결에도
빛 그림자를 흔들어댈 것입니다
멀리서 보면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단풍이 든 것만 같아
그 미친 빛마저 곱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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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눈 밟는 소리

나희덕

그날 새벽 꿈에서 들었다
누군가 사각사각 눈 밟는 소리를?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었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가 얼마간 곁에 머물렀다?

먼 길 떠나기 전
그녀가 다녀간 것이었구나,
다음날 아침 부음을 듣고서야 알았다?

접시의 물이 증발하듯
가쁜 호흡을 내려놓는 순간
마침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녀의 식은 심장 위에 흰 꽃을 올려놓았다?

더이상 지상의 양식을 삼킬 수 없게 된
더이상 지상의 공기를 마실 수 없게 된?

그녀는 죽은 뒤에도
내 속에서 한없이 죽어간다

흰 눈 위에서
텅 빈 눈동자 속에서
아무 말도 건넬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나는 무엇을 보려 했던 것일까?

어느 눈길에서 서성이고 있는지
내 오른쪽 귀를 떠난 눈 밟는 소리는 아직
왼쪽 귀로 돌아오지 않았다

누가 죽음을 고요한 묵음이라 말하는가?

그녀는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눈 밟는 소리 들린다

겨울새가 잠시 앉았다 날아간 자리

그녀의 발이 시려워서 어쩌나
나는 발을 구르고
눈 밟는 소리 멀어져간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사각사각……

출처 : 시집 《시와 물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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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나희덕

어느 부끄러운 영혼이
절간 옆 톱밥더미를 쪼고 있다.
마치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정답다.
왜 하필이면 까마귀냐고
묻지는 않기로 한다.
새도 짐승도 될 수 없어
퍼드득 낮은 날개의 길을 내며
종종걸음 치는 한 生의 지나감이여
톱밥가루는 생목의 슬픔으로 젖어 있고
그것을 울며 가는 나여
짙은 그늘 속
떠나지 않는 너를 들여다보며
나는 이 생의 나와 화해한다.
그리고 산을 내려가면서
불쌍히 여길 무엇이 남아 있는 듯
까욱까욱 울음소리를 한번 내보기도 한다.
☆★☆★☆★☆★☆★☆★☆★☆★☆★☆★☆★☆★
《25》
땅끝

나희덕

산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렸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넸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쫓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
《26》
뜨거운 돌

나희덕

움켜쥐고 살아온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놓고 펴 보는 날 있네

지나온 강물처럼 손금을 들여다 보는
그런 날 있네

그러면 내 스무살 때 쥐어진 돌 하나

어디로도 굴러가지 못하고
아직 그 안에 남아 있는 걸 보네

가투 장소가 적힌 쪽지를 처음 받아들던 날
그건 종이가 아니라 뜨거운 돌이었네

누구에게도 그 돌 끝내 던지지 못했네

한번도 뜨겁게 끌어안지 못한 이십대
火傷(화상)마저 늙어가기 시작한 삼십대

던지지 못한 그 돌
오래된 질문처럼 내 손에 박혀 있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세상과 손잡고 살았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글을 쓰기도 했네

문장은 자꾸 걸려 넘어졌지만
그 뜨거움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던 밤 있었네

만일 그 돌을 던졌다면, 누군가에게, 그랬다면
삶이 좀더 가벼울 수 있었을까

오히려 그 뜨거움이 온기가 되어
나를 품어 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하네

오래된 질문처럼 남아 있는 돌 하나
대답도 할 수 없는데 그 돌 식어 가네

단 한 번도 흘러 넘치지 못한 화산의 용암처럼
식어 가는 돌 아직 내 손에 있네
☆★☆★☆★☆★☆★☆★☆★☆★☆★☆★☆★☆★
《27》
마른 물고기처럼

나희덕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비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 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인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 얼음 속에서 잡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꺾이고 그 빛나던 눈도 비늘도 다 시들어버렸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은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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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마음 그 풀밭에

나희덕

누군가 손대지 않음으로써 일구어놓았나

스스로 무성해진 풀밭
두려움도 없이 나는 풀을 벤다
낫이 움직이면서 마음에 자란 풀을 먹어치운다
풀을 베어낸 자리마다 흙이 상처처럼
검붉다, 부질없이 부질없이
옮겨 심을 무엇이 더 남아 있다는 것일까
드러난 흙이
뿌리를 삼키기 위해 입을 벌리듯
나의 탐식은 풀밭 위를 달린다

풀은 왜 늙으면서 질겨지는가
가벼워지는가

두려움도 없이 풀을 벤다
마음, 그 풀밭에 불을 놓는다
풀뿌리는 끝내 타지 않는다

출처 :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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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나희덕

말들이 돌아오고 있다
물방울을 흩뿌리며 모래알을 일으키며
바다 저편에서 세계 저편에서

흰 갈기와 검은 발굽이
시간의 등을 후려치는 채찍처럼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나는 물거품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 해변에 이르러서야
히히히히힝, 내 안에서 말 한 마리 풀려나온다

말의 눈동자,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파도 속으로 사라진다

가라, 가서 돌아오지 마라
이 비좁은 몸으로는

지금은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수만의 말들이 돌아와 한 마리 말이 디어 사라지는 시간
흰 물거품으로 허공에 흩어지는 시간

출처 :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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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몰 약처럼 비는 내리고

나희덕

뿌리뽑힌 줄도 모르고 나는
몇 줌 흙 을 아직 움켜쥐고 있었구나
자꾸만 목이 말라와
화사한 꽃까지 한 무더기 피웠구나
그것이 스스로를 위한 적화인줄도 모르고
오늘밤 무슨 몰 약처럼 밤비가 내려
시들어 가는 몸을 씻어 내리니
달게 와 닿는 빗방울마다
너무 많은 소리들이 숨쉬고있다
내 눈에서 흘러내린 붉은 진물이
낮은 흙 속에 스며들었으니
한 삼일은 눈을 뜨고있을 수 잇겠다

저기 웅크린 채 비를 맞는 까치는
무거워지는 날개만큼 말이 없는데
그가 다시 가벼워진 깃을 털고 날아갈 무렵이면
나도 꾸벅거리며 걸어갈 수 있겠다
고맙다 비야 고맙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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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못 위의 잠

나희덕

저 지붕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 봅니다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 온 제비,
거리에선 아직 흙바람이 몰려 오나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 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하나,

그 위의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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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門이 열리고

나희덕

한 개의 門이 열려
며칠째 눈발이 천지를 메우더니
천 개의 門이 닫히고
발들은 모두 묶이고 말았네
마른 풀대도
시린 발목을 눈에 묻고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네
소리들도 갇혔네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
가장자리는 얼어가지만
흐르는 물만이 門을 닫지 않아
나는 물소리 앞에 쪼그려 앉았네
천 개의 門이 닫히고
당신에게로 흐르는 水門만이 남았네
눈송이를 낚으려 하나
물에 닿는 순간 사라져버리네
젖은 눈 속에 젖은 눈,
그 열린 門으로 나도 따라 들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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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묻다

나희덕

묻어도
너무 많이 묻었어요
여기는 죽음의 무진장이에요
캐도 캐도 시체들의 잔해가 자꾸 나와요

얼굴이 반 이상 잘려나간 시체도 있어요
엄마는 아들을 몰라봤지만
어쩐지 그 청년에게 마음이 끌렸다고 해요

40년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은 자식이 있어요
내가 죽기 전에는 묻어주고 가야 할 턴디,
눈 못 감는 엄마가 여기 있어요

시체들을 실은 비행기는 바다로 갔지요
군인들은 시체를 철로 된 레일 토막에 묶은 뒤
천으로 싸서 바다에 던졌어요
바닷바람에 떠오르거나 밀려오지 않도록

잠수부는 말합니다
시체가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아요
어떤 힘이 영혼을 꽉 붙잡고 있는 것일까요

그러나 바다는 기억하고 있어요
철이 붉게 녹슬고 따개비로 덮인 뒤에도
작은 단추 하나가 썩지 않고 남아서 말해주기도 합니다
살육은 어떻게 은폐되는지
결국은 드러나는지

그 단추는 누구의 옷섶에서 빛나던 것일까요

제발,
더는, 묻지 마세요

묻어도
너무 많이 묻었어요
여기는 죽음의 무진장이에요
답할 수 없는 질문의 무진장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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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물구나무 종에게

나희덕

미안해요, 물구나무종이 되기에는
몸이 너무 무거워졌어요

머리에 피가 쏠리는 걸 견디기 어렵고
팔목은 발목보다 훨씬 취약해요
두 팔을 땅에 대고 한 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어요

직립보행의 나날이 너무 길었나봐요

물구나무 종, 당신은
손으로 걸어다니는 새로운 인류

땅을 향해 머리를 두고
나무들 사이에서 오래오래 물구나무 서 있는 사람

손바닥에서 뻗어 나온 실뿌리들이
땅 속으로 뻗어갈 때
당신의 발끝에선 연록색 잎이 돋아날 것만 같아요

그러나 땅도 안전하진 않지요
당신은 기계들이 파놓은 구멍들을 곧 만날 거에요
검은 먼지와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구멍들을
몇 층으로 교차하는 지하의 터널들을

굉음을 삼키는 굉음
냄새를 삼키는 냄새
어둠을 삼키는 어둠
비명을 삼키는 비명

물구나무종이 되려 하던 저는
갑자기 당신 걱정을 하기 시작했어요
물 위의 나무처럼 깊고 고요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당신을 찾아 나가려 했어요

나뭇가지들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당신의 두 발을

* 염지혜, 〈물구나무종(handstanderus) 선언〉

출처 : 계간 《포지션》 (202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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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물의 국경선

나희덕

세계의 물이
점점 빨리 돌고 있다

담수가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열대와 아열대의 물이 마르고 있다

남반구의 물이
북반구를 향해 속수무책 빨려 들어가고

마지막 빗방울을 본 것이 언제였을까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북쪽으로 북쪽으로 물을 찾아 이동하는 난민들

국경에 줄을 서서
고무호스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만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국경은 얼음처럼 단단하다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고
마른 돌멩이들만
울퉁불퉁한 기념비처럼 쌓여 있다
아주 멀리서 빙하가 속수무책 무너져내리고

세계의 물이
더 빨리 돌기 시작하고
담수 한계선이 북상하고 있다

물풀 한계선처럼
수목 한계선처럼

지도 위에는 매일 새로운 물의 국경선이 그어진다

출처 : 시 계간 《상징학 연구소》 (202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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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바람은 왜 등뒤에서 불어오는가

나희덕

바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이 멀 것만 같아
몸을 더 낮게 웅크리고 엎드려 있었다.
떠내려가기 직전의 나무 뿌리처럼
모래 한 알을 붙잡고
오직 바람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그럴수록 바람은 더 세차게 등을 떠밀었다.

너를 날려버릴 거야
너를 날려버릴 거야
저 금 밖으로, 흙 밖으로

바람은 왜 등 뒤에서 불어오는가
수천의 입과 수천의 눈과 수천의
팔을 가진 바람은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누군가의 마른 종아리를 간신히 붙잡았다.
그 순간 눈을 떴다

내가 잡은 것은 뗏목이었다.
아니, 내가 흘러내리는 뗏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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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벽과 바닥

나희덕

빛을 머금은 창이
바닥에 직사각의 빛을 드리운다

창을 빨아들이기 위해
바닥의 남은 몸은 온통 그늘이다

직사각의 빛 속에
누군가 삼각팬티를 널어놓는다

꽃병에 꽂힌 꽃처럼
삼각팬티는 피어나기가 무섭게 말라간다

명암에 따라 색이 변하는 꽃,
삼각팬티는 천천히 빛에서 그늘로 간다
그늘 속에서도 말라간다

결국 방은 어두워지고
그림자놀이를 하던 벽과 바닥은
등을 맞대고 있다,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꽃병은 사라지고 꽃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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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나희덕

모질고 모질어라
아직 생명을 달지 못한 별들
어두운 무한천공을 한없이 떠돌다가
가슴에 한 점 내리박히는 일
그리하여 생명의 입김을 가지게 되는 일
가슴에 곰팡이로나 피어나는 일
그 눈부심을 어찌 볼까
눈물 없이 그 앞을 질러 어떻게 달아날까
밤하늘 아래 얼마나 숨죽여 지나왔는데
얻어온 별빛 하나 어디에 둘까
어느 집 나무 아래 묻어놓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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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분홍신을 신고

나희덕

음악에 몸을 맡기자
두 발이 미끄러져 시간을 벗어나기 시작했어요
내 안에서 풀려나온 실은
술술술술 문지방을 넘어 밖으로 흘러갔지요
춤추는 발이
빵집을 지나 세탁소를 지나 공원을 지나 동사무소를 지나
당신의 식탁과 침대를 지나 무덤을 지나 풀밭을 지나
돌아오지 않아요 어쩌면 좋아요
세상은 나에게 계속 춤추라고 외쳤죠
꼬리 잘린 고양이처럼 다리를 잘린다 해도
음악에 온전히 몸을 맡길 수 있다니,
그것도 나에게 꼭 맞는 분홍신을 신고 말이에요
내 핏속에서 들리는 노랫소리,
둑을 넘어가는 물소리, 당신에게도 들리나요?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아무 데도 가지 않아요
이곳은 아무리 춤을 춰도 해가 지지 않아요
물이 둑을 넘어 흘러내리듯
내 속의 실타래가 한없이 풀려나와요
실들이 뒤엉키고 길들이 뒤엉키고
이 도시가 나를 잡으려고 도끼를 들고 달려와도
이제 춤을 멈출 수가 없어요
오래 전 내 발에 신겨진, 그러나 잠들어 있던
분홍신 때문에
그 잠이 너무도 길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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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붉은 거미줄

나희덕

핏속에 거미들이 산다

핏속에서 일하고
핏속에서 잠들고
핏속에서 사랑하고
핏속에서 먹고
핏속에서 죽고
핏속에서 부활하는 거미들에게

피는 무궁무진한 슬픔의 창고

물과 피를 거미줄로 바꾸는
이 직조의 달인들은
어떤 혈관에든 숨어들어 실을 뽑고 천을 짠다

그러나 너무 밝은 피나
너무 어두운 피는 좋은 재료가 되지 못한다

거미들이 실을 뽑아내기 직전
아주 작고 단단하게 몸을 긴장시킬 때
나는 거미들을 느낀다
그리고 내 몸에서 피가 조금 빠져나갔다는 걸 알아차린다

내 피로 뽑아낸 붉은 거미줄은
누군가에게
거처가 되기도 하고 덫이 되기도 했으리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거미들은 희미한 진동을 따라 움직인다
피의 만다라에 마악 도착한 어떤 날개를 향해

날개가 파닥거리는 동안
빈혈의 시간은 잠시 수런거리다 고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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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비 오는 날에

나희덕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 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 비 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
《42》
빈 의자

나희덕

나는 침묵의 곁을 지나치곤 했다.
노인은 늘 길가 낡은 의자에 앉아
안경 너머로 무언가 응시하고 있었는데
한편으론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이따금 새들이 내려와
침묵의 모서리를 쪼다가 날아갈 뿐이었다
움직이는 걸 한번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몸 절반에는 아직 피가 돌고 있을 것이다.
축 늘어뜨린 왼손보다
무릎을 짚고 있는 오른손이 그걸 말해준다.
손위에 번져 가는 검버섯을 지켜보듯이
그대로 검버섯으로 세상 구석에 피어난 듯이
자리를 지키며 앉아 있다는 일만이
그가 살아 있다는 필사적인 증거였다.
어느 날 그 침묵이 텅 비워진 자리,
세월이 그의 몸을 빠져나간 후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빈 의자에는
작은 새들조차 날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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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나희덕

이를테면, 고드름 달고
빳빳하게 벌서고 있는 겨울 빨래라든가
달무리 진 밤하늘에 희미한 별들,
그것이 어느 세월에 마를 것이냐고
또 언제나 반짝일 수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겠습니다.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고,
희미하지만 끝내 꺼지지 않는 게
세상엔 얼마나 많으냐고 말입니다.
상처를 터뜨리면서 단단해지는 손등이며
얼어붙은 나무껍질이며
거기에 마음 끝을 부비고 살면
좋겠다고, 아니면 겨울 빨래에
작은 고기 한 마리로 깃들여 살다가
그것이 마르는 날
나는 아주 없어져도 좋겠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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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뿌리로부터

나희덕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 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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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사라진 것들

나희덕

하나씩 사라졌다

정수기가 사라졌다
전기 콘센트가 사라졌다
벽에 걸린 티브이가 사라졌다
보이지 않게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방역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무엇이든

자정 넘으면
쉼터도 문을 닫고
방문자 센터도 폐쇄되고
공공 화장실도 잠겨 있고
급식소도 당분간 열지 않는다

역에서 살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천막을 칠 수 있는 곳을 찾아냈다
날이 추워지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겠지
여자들은 천막도 칠 수 없다
한밤중에 누가 덮칠지 알 수 없기에
그나마 여자 화장실이 안전하다
똥 묻은 휴지가 넘쳐나고 오줌 섞인 물이
바닥에 흥건해도 어쩔 수없지만

길에서 자는 사람들이 실제로
바이러스의 숙주가 된 적은 많지 않다
도시의 섬처럼 각자 떠다니니까

그런데도 왜 하나씩 사라지는 것일까

우리를 사라지게 하려고?
멸종 저항운동이라도 벌여야 할까?

그들이 사라지게 하고 싶은 것은
정수기나 전기 콘센트나 티브이가 아니라
거기 줄을 대고 있는 존재들,
가장 확실한 시각적 방역을 위해 사라져야 할 존재들

사라지는 것들은
어느새 사라진 것들이 되었다

출처 : 《문학사상》 (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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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사라진 손바닥

나희덕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창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페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이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손이라도 집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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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사랑

나희덕

피 흘리지 않았는데
뒤돌아보니
하얀 눈 위로
상처 입은 짐승의
발자욱이
나를 따라온다

저 발자욱
내 속으로
절뚝거리며 들어와
한 마리 짐승을 키우리

눈 녹으면
그제야
몸 눕힐 양지를
찾아 떠나리

출처 :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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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산 속에서

나희덕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 속에서 밤을 맞아 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주는지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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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산딸기 익을 무렵

나희덕

아기를 들쳐 업은 한 여자의
흙 묻은 발꿈치를 따라 걷다가
나는 보았네
숨어서 익어가는 산딸기를
숨어서 도란거리는 지붕들을
입맞출 수도 없이 낮은 곳에 피어나
잎새 뒤에 숲 뒤에 숨은
작은 마을을

등에 업힌 아기가 울고
그 울음에 산딸기 좀더 익으면
땅거미가 내려와 붉은 열매를 감추는 저녁

흙 묻은 발꿈치를 따라 걷다가
나는 들었네
산딸기에게 불러주는 자장가를
무사하라 무사하라 부르는 그 노래를
녹슬어가는 함석 지붕 아래서
나는 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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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산호와 버섯
―호주의 시인 사만다 포크너에게

나희덕

산호와 버섯의 공통점을 아니?
포자로 번식한다는 거야.

유성생식으로 아이들을 낳은 우리도
이제는 조금 산호와 버섯에 가까워지고 있지.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뼈를 지닌 동시에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영혼을 지니고 있으니까.
깊은 바닷 속을 상상하면서도
축축한 나무 그늘에 숨는 걸 좋아하니까.

시라는 이름의 산호 또는 버섯,
그 포자들이 자라는 시의 그늘에서 우리는 만났지.
그리고 서로의 영혼을 금세 알아보았지.

그녀는 나의 시에 자라는 버섯에 대해 묻고
나는 그녀의 시에 자라는 산호초에 대해 물었지.

세상 끝의 버섯에 대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저편에 대해
숲에서 버섯을 캐고 있는 가난한 손들에 대해
값비싼 송이버섯을 따라 움직이는 자본의 흐름에 대해
하얗게 죽어 가는 산호초의 안부에 대해
몇 달 동안 계속된 산불에 대해
불이 나야 번식을 하는 유칼립투스 나무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는 아주 멀리 가기도 했지.

나는 그 먼 바다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그녀는 이 땅의 흙 냄새를 맡아본 적 없지만

그녀의 고향 토레스 아일랜드,
섬 집에 누워 그 푸른 하늘을 잠시 엿본 것 같네.
부족들의 다정한 얼굴에 둘러싸여
짧은 단잠을 자고 일어난 것 같기도 하네.
수영을 못하는 내가 그녀를 따라
바닷속 깊이 내려가 산호초를 본 것도 같네.

내일은 그녀와 헤어지는 날
나지막이 나는 말하려네 야오, 다음에 만나

* Yawo : 토레스 아일랜드 원주민이 헤어질 때
하는 인사말로, ‘안녕’이라는 뜻.

출처 : 《아토포스Atopos》 (202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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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살아 있어야 할 이유

나희덕

가슴의 피를 조금씩 식게 하고
차가운 손으로 제 가슴을 문질러
온갖 열망과 푸른 고집들 가라앉히며
단 한 순간 타오르다 사라지는 이여
스스로 떠난다는 것이
저리도 눈부시고 환한 일이라고
땅에 뒹굴면서도 말하는 이여
한번은 제 슬픔의 무게에 물들고
붉은 석양에 다시 물들며
저물어가는 그대, 그러나 나는
저물고 싶지를 않습니다
모든 것이 떨어져내리는 시절이라 하지만
푸르죽죽한 빛으로 오그라들면서
이렇게 떨면서라도
내 안의 물기 내어줄 수 없습니다
눅눅한 유월의 독기를 견디며 피어나던
그 여름 때늦은 진달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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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상현(上弦)

나희덕

차오르는 몸이 무거웠던지
새벽녘 능선 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

신도 이렇게 들키는 때가 있으니!

때로 그녀도 발에 흙을 묻힌다는 것을
외딴 산모퉁이를 돌며 나는 훔쳐보았던 것인데
어느새 눈치를 챘는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구름 사이 사라졌다가
다시 저만치 가고 있다.
그녀가 앉았던 궁둥이 흔적이
저 능선 위에는 아직 남아 있을 것이어서
능선 근처 나무들은 환한 상처를 지녔을 것이다.
뜨거운 숯불에 입술을 씻었던 이사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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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새는 날아가고

나희덕

새가 심장을 물고 날아갔어
창 밖은 고요해
그래도 나는 식탁에 앉아 있어
접시릉 앞에 두고
거기 놓인 사과를 베어 물었지
사과는 조금 전까지 붉게 두근거렸어
사과는 접시의 심장이었을까
사과 씨는 사과의 심장이었을까
둘레를 가진 것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담겼다 비워지지
심장을 잃어버린 것들의 박동을
너는 들어본 적 있니?
둘레로 퍼지는 침묵의 빛,
사과를 잃어버리고도
접시가 아직 깨지지 않은 것처럼
나는 식탁에 앉아 있어
식탁과 접시는 말없이 둥글고
창밖은 고요해
괄호처럼 입을 벌리는 빈 접시,
새는 날아가고
나는 다른 심장들을 훔치고
둘레를 가진 것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렇게 만났다 헤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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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새떼

나희덕

철새들이 줄을 맞추어 날아가는 것
길을 잃지 않으려 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한몸이어서입니다
티끌 속에 섞여 한계절 펄럭이다 보면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어느새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걷고 있는
저 두 사람
그 말없음의 거리가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새떼가 날아간 하늘 끝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 그 온기에 젖어
나는 두리번거리다 돌아갑니다

몸마다 새겨진 어떤 거리와 속도
새들은 지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 혹시 길을 잃었다 해도
한 시절이 그들의 가슴 위로 날아갔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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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새로운 배후

나희덕

새로운 배후가 생겼다
그들은 전화선 속에서 숨죽여 듣고 있다가
이따금 지직거린다, 부주의하게도

그는 엿들으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어쩌면 그는 아주 선량한 얼굴을 지녔을지 모른다
절제된 표정과 어투를 지닌 공무원처럼
경험이 풍부한 외교관처럼
이삿짐센터 직원이나 택배 기사처럼
무심한 얼굴로 초인종을 눌렀는지도 모른다

문 뒤에 서 있는 투명인간들
주차장 입구에서 현관문 앞에서 복도의 계단에서
우연히 마주친 듯 지나는 낯선 얼굴들

개 한 마리가
마악 내려놓은 쓰레기봉투를 킁킁거리다 사라진다

그러나 배후는 배후답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어느 날 귓바퀴를 타고 들어와
잠복 중인 발소리

새로운 배후가 생긴 뒤로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귀가 운다
피 흘린다
풀벌레들이 낮밤을 가리지 않고 운다
한겨울에도 운다
끈질기게 끈질기게 고막을 파고든다

쉬잇, 그들이 복도를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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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序時

나희덕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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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聖 느티나무

나희덕

속이 검게 타버린 고목이지만
창녕 덕산리 고묵나무는 올봄도 잎을 내었다

찬가지 끝으로 잎을 밀어올리며 그는
한그루 용수처럼
제 아궁이에서 잎사귀를 꺼낸다
번개가 가슴을 쪼개고 지나간 흔적을 안고도
저럻게 눈부신 잎을 피워내다니,
시커먼 아궁이 하나 들여 놓고
그는 오래오래 제살을 달여 내놓는다
낮의 새와 밤의 새가 다녀가고
다람쥐 일가가 세들어 사는,
구름 몇 점 별 몇 개 뛰어들기도 하는,
바람도 가만히 숨을 모으는 그 검은 아궁이에는
모든 빛이 모여 불타고 모든 빛이 나온다
까마귀 깃들었다 날아간 자리에
검은 울음 몇가지 뻗어 있기도 한다
발이 묶인체 날아오르는 새처럼
덕산리 느티나무는 푸른 날개를 마악 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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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섶섬이 보이는 방
― 이중섭의 방에 와서

나희덕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질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질을 그릇 삼아 상을 차리는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 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질에 세 든 소라게처럼

* 화가 이중섭과 그의 아내가 서로를 부르던 애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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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세상 끝의 버섯

나희덕

포자 터지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어?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아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희미한 폭죽처럼
버섯의 포자들이 화분 위로 터지고 있었지

밤의 정원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더군

비가 내린 다음 날이면
숲에서도 버섯들이 왕성하게 돋아날 거야

바위와 이끼와 뿌리와 균사가 그물처럼 얽혀 있는 숲

버섯은 그늘을 좋아해
버섯은 죽은 나무들을 먹고 자라

나무를 씹을 수는 있지만 소화하지 못하는 흰개미,
소화를 도와주는 균류, 그들의
정원에는 꽃 대신 버섯들이 치마를 활짝 펼치고 있겠지

나는 땅 속의 세계를 상상하면서
축축하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갔어
더 깊은 숲으로, 더 멀고 먼 숲으로

모로코나 한국이나 부탄, 그 먼 곳에서
송이버섯이 나는 부르고 있어

포자 터지는 소리가 폭죽처럼 들리는 숲으로
세상 끝의 버섯을 향해

* 애나 칭(Tsing A. L),
「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2015


출처 : 계간 《포지션》 (202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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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소나무의 옆구리

나희덕

어떤 창에 찔린 것일까
붉게 드러난 옆구리에는
송진이 피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단지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기어가던 개미 한 마리
그 투명하고 끈적한 피에 갇혀버린 것은
함께 굳어가기 시작한 것은

놀라서 버둥거리다가 움직임을 멈춘 개미,
그날 이후 나는
소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제 목숨보다도 단단한 돌을 품기 시작한
그의 옆구리를 보려고

개미가 하루하루 불멸에 가까워지는 동안
소나무는 시들어간다
불멸과 소멸의 자웅동체가
제 몸에 자라고 있는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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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소만

나희덕

이만하면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은
꼭 그런 때가 초록에게는 있다

조금 빈 것도 같게
조금 넘을 것도 같게

초록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나면
내 마음의 그늘도
꼭 이만하게는 드리워지는 때

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때
소만(小滿) 지나
넘치는 것은 어둠뿐이라는 듯
이제 무성해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나무는 그늘로만 이야기하고
그 어둔 말 아래 맥문동이 보랏빛 꽃을 피우고

소만(小滿) 지나면 들리는 소리
초록이 물비린내 풍기며 중얼거리는 소리
누가 내 발등을 덮어다오
이 부끄러운 발등을 좀 덮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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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속리산에서

나희덕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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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숲에 관한 기억

나희덕

너는 어떻게 내게 왔던가?
오기는 왔던가?
마른 흙을 일으키는 빗방울처럼?
빗물 고인 웅덩이처럼?
젖은 나비 날개처럼?
숲을 향해 너와 나란히 걸었던가?
꽃 그늘에서 입을 맞추었던가?
우리의 열기로 숲은 좀더 붉어졌던가?
그때 너는 들었는지?
수천 마리 벌들이 일제히 날개 터는 소리를?
그 황홀한 소음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사랑은 소음이라고?
네가 웃으며 그렇게 말했던가?
그 숲이 있기는 있었던가?
그런데 웅웅 거리던 벌들은 다 어디로 갔지?
꽃들은, 너는, 어디에 있지?
나는 아직 나에게 돌아오지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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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시와 물질

나희덕

로알드 호프만은 화학자이자 시인이었다

그의 규칙을 적용한 물질에는
몇 가지 폭발물과 독극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도 생각해보지 못한 물질들이었다

그 책임을 묻는 질문에 호프만은 대답했다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물질은 없습니다
게다가 나는 그 물질들의 특허권을 갖고 있지 않고
그 결과로 돈을 벌지도 못했어요
어떤 물질이 위험하다고
그것을 발견한 책임을 과학자 개인이 져야 할까요?

우리의 발견은
물질들의 새로운 연관성을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우리의 발견은
수십만 명의 과학자가 함께 맞추며 찾아가는
거대한 퍼즐 속의 일부일 뿐입니다

심지어 시도 사람을 해칠 수 있어요*

슈테판 클라인과 로알드 호프만의 대화를 읽다가
이 문장에 오래 멈춰 있다

헤모글로빈 분자에서 아름다움을 읽어낸 호프만에게
시란 어떤 것이었을까

시와 물질,
또는 시라는 물질에 대해 생각한다

한 편의 시가
폭발물도 독극물도 되지 못하는 세상에서
수많은 시가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는 이 세상에서

*슈테판 클라인,『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2014)

출처 : 시집 《시와 물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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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시월

나희덕

산에 와 생각합니다
바위가 산문을 여는 여기
언젠가 당신이 왔던건 아닐까 하고,

머루 한 가지 꺾어
물 위로 무심히 띄워보내며
붉게 물드는 계곡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고,

잎을 깨치고 내려오는 저 햇살
당신 어깨에도 내렸으리라고,

산기슭에 걸터앉아 피웠을 담배연기
저 떠도는 구름이 되었으리라고,

새삼 골짜기에 싸여 생각하는 것은
내가 벗하여 살 이름

머루나 다래, 물든 잎사귀와 물,
산문을 열고 제 몸을 여는 바위,
도토리, 청설모, 쑥부쟁이 뿐이어서
당신이름 뿐이어서

단풍 곁에 서 있다가 나도 따라 붉어져
물 위로 흘러내리면
나 여기 다녀간 줄 당신은 아실까

잎과 잎처럼 흐르다 만나질 수 있을까
이승이 아니라도 그럴 수는 있을까
☆★☆★☆★☆★☆★☆★☆★☆★☆★☆★☆★☆★
《66》
실려 가는 나무

나희덕

풀어헤친 머리가 땅에 닿을락 말락 한다
또 다른 生에 이식되기 위해
실려 가는 나무, 트럭이 흔들릴 때마다
입술을 달싹여 무슨 말을 하는 것 같다
언어의 도끼가 조금은 들어간 얼굴이다
오래 서 있었던 몸에서는
자꾸만 신음소리 같은 게 흘러나오고
기억의 부스러기들이 땅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걸 받아 적으며 따라가다가
출근길을 놓치고 낯선 길가에 부려진 나는
나무를 심는 인부의 뒷모습을 보았을 뿐,
나도 모르게 그 나무를 따라간 것은
덜컹덜컹 어디론가 실려가면서
언어의 도끼에 다쳐본 일이 있기 때문일까
어떤 둔탁한 날이 스쳐간 자국,
입술을 달싹이던 그 말들을 다시 읽을 수 없다
☆★☆★☆★☆★☆★☆★☆★☆★☆★☆★☆★☆★
《67》
심장 속의 두 방

나희덕

나를 좀 지워주렴.

거리를 향해 창을 열고
안개를 방안으로 불러들였다
안개는 창을 넘는 순간 증발해버렸다

나를 좀 지워주렴.

짙은 안개를 들이키고도
사물들은 여전히 건조한 눈을 비비고 있었다

나를 좀 채워주렴.

바다를 향해 열린 창으로
안개가 밀물처럼 스며들었다
안개는 창을 넘는 순간 몸 속으로 흘러들었다

나를 좀 채워주렴.

의자가 젖고 거울이 젖고
사물들은 어느새 안개의 일부가 되었다

심장 속에 나란히 붙은 두 방은
서로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두 방을 오가는 것은
소리 없이 출렁거리는 안개뿐
☆★☆★☆★☆★☆★☆★☆★☆★☆★☆★☆★☆★
《68》
심장을 켜는 사람

나희덕

심장의 노래를 들어보실래요?
이 가방에는 두근거리는 심장들이 들어 있어요
건기의 심장과 우기의 심장
아침의 심장과 저녁의 심장
두근거리는 것들은 다 노래가 되지요
오늘도 강가에 앉아
심장을 퍼즐처럼 맞추고 있답니다
동맥과 동맥을 연결하면
피가 돌 듯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지요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
심장을 다해 부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통증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지만
심장이 펄떡일 때마다 달아나는 음들,
웅크린 조약돌들의 깨어남,
몸을 휘돌아나가는 피와 강물,
걸음을 멈추는 구두들,
짤랑거리며 떨어지는 동전들,
사람들 사이로 천천히 지나가는 자전거 바퀴,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와 기적소리,
다리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동안
얼굴은 점점 희미해지고
허공에는 어스름이 검은 소금처럼 녹아내리고
이제 심장들을 담아 돌아가야겠어요
오늘의 심장이 다 마르기 전에
☆★☆★☆★☆★☆★☆★☆★☆★☆★☆★☆★☆★
《69》
야생 사과

나희덕

어떤 영혼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붉은 절벽에서 스며나온 듯한 그들과

목소리는 바람결 같았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과 풀을 뜯고 있는 말,
모든 그림자가 유난히 길고 선명한 저녁이었다

그들은 붉은 절벽으로 돌아가며
곁에 선 나무에서 야생사과를 따주었다

새가 쪼아먹은 자리마다
까만 개미들이 오글거리며 단물을 빨고 있었다

나는 개미들을 훑어내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달고 시고 쓰디쓴 야생사과를

그들이 사라진 수평선,
내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바람 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누군가 건네준 야생사과를 베어 물었을 뿐인데
☆★☆★☆★☆★☆★☆★☆★☆★☆★☆★☆★☆★
《70》
어느 봄날

나희덕

청소부 김씨
길을 쓸다가
간밤 떨어져 내린 꽃잎 쓸다가
우두커니 서 있다
빗자루 세워두고, 빗자루처럼,
제 몸에 화르르 꽃 물 드는 줄도 모르고
불타는 영산홍에 취해서 취해서
그가 쓸어낼 수 있는 건
바람보다도 적다
☆★☆★☆★☆★☆★☆★☆★☆★☆★☆★☆★☆★
《71》
어두워진다는 것

나희덕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게
누워 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 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 가는 것
멀리서 수원은 사시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고
나무껍질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5시 45분에서 기억은 멈추어 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가지 않는 것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출처 :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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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어둠이 아직

나희덕

얼마나 다행인가
눈에 보이는 별들이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암흑 물질이
별들을 온통 둘러싸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어둠을 뜯어보지 못했다는 것은
별은 어둠의 문을 여는 손잡이
별은 어둠의 망토에 달린 단추
별은 어둠의 거미줄에 맺힌 밤이슬
별은 어둠의 상자에 새겨진 문양
별은 어둠의 웅덩이에 떠 있는 이파리
별은 어둠의 노래를 들려주는 입술
별들이 반짝이는 동안에도
눈꺼풀이 깜박이는 동안에도
어둠의 지느러미는 우리 곁을 스쳐 가지만
우리는 어둠을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못하지
뜨거운 어둠은 빠르게
차가운 어둠은 느리게 흘러간다지만
우리는 어둠의 온도와 속도도 느낄 수 없지
알 수 없기에 두렵고 달콤한 어둠,
아, 얼마나 다행인가
어둠이 아직 어둠으로 남겨져 있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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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나희덕

누구를 기다리고 있나요?
우리 아이요.
이 차가운 바람 속에 언제까지 계시려고요?
주검이라도 기다려야지요.
이제는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을 텐데요.
그래도 여길 떠날 수는 없어요.
제발, 아이 장례만이라도 치르고 싶어요.

사고 197일 만에 황지현 돌아옴.
14번의 수색 끝에 발견함.
4층 여자화장실.
18번째 생일.
255번째 장례식.

한 민간 잠수사는 손목에 자해를 했다

?문득문득 견딜 수가 없어요.
손목에 벌레가 스멀거리는 느낌이 들어서.

구조를 도왔던 트럭 운전사는 자살을 시도했다

눈, 눈동자가, 자꾸만 떠올라요.
배에 남아 있던 유리창 너머 눈동자가.

친구를 남겨둔 채 구조된 아이는 울면서 말했다

내가 죽을 때까지…… 허제강 생일이 내 생일이에요.

무엇을 잃었습니까?
모든 걸 잃었어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아요.
아이를 기다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나요?
울기만 했어요.

그러나 사람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밥을 먹고 출근을 했다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출처 : 시집 《가능주의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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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언덕

나희덕

언덕은
내려오고 있다

늙은 고양이
어슬렁거리며
언덕을 내려올 때
언덕도 몇 발짝 따라 내려오고

마른 흙 위에
나비 앉았다 날아가면
언덕도 몇 줌 따라 날아가고

개나리가 언덕 아래
몸을 부리고 있는 동안
언덕은 또 얼마나 많이 내려와 있는지
중턱의 소나무 몇 그루가 간신히 붙잡고 있다
언덕을 내려오는
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언덕이 조금씩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어느 날 아침
사람들은 말하겠지
언덕은 대체 어디로 갔지?
나무들은, 꽃잎들은, 고양이는, 나비는?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다들 어디로 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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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언덕이 요구하는 시간

나희덕

그 도시는 언덕길이 유난히 많았지요
언덕길을 오르내리다 지치면
바닷가 벤치에 앉아 갈매기들에게 빵을 뜯어주었어요
갈매기들과 비둘기들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바람이 땀을 식혀주기를 기다렸지요
광장의 간디 동상이 지팡이를 짚고 어딘가를 향해 걸어갈 때
그를 따르는 백성이 되어 걷고 또 걸었어요
금지된 소금을 만들러 가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가다가 잘 생긴 거지를 발견하고 그를 따라 걸었어요
따뜻한 저녁이라도 한 끼 사고 싶었지요
하지만 거지들은 걸어 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더군요
언덕이 나오자 모퉁이에 주저앉아 버리더군요
할 수 없이 언덕의 요구에 따라 혼자 걷기 시작했어요
언덕은 계속 걷고 싶게 만들어요
언덕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걷다 보면 구불구불한 내장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어요
도시 전체가 계속 출렁거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오르막길보다는 내리막길을 조심해야 돼요
너무 속도를 내다가는 바다에 풍덩 빠져버릴 수도 있어요
어느새 가로등이 켜지고
언덕을 향한 내 등뒤로 그림자가 길어져요
언덕이 오래된 성당처럼 가파르고 순결하게 느껴질 때
낯선 도시에서의 며칠이
내가 끌고 온 긴 그림자라는 생각이 들 때
문득 뒤를 돌아보고 싶을 때
그 도시의 어스름은 이렇게 속삭였지요

언덕이 요구하는 것은
발끝을 위로 향하고 걸으라는 것과
숨 가쁜 순간을 몇 번이고 넘기라는 것, 그리고
남기고 온 발자국을 돌아보지 말라는 것
☆★☆★☆★☆★☆★☆★☆★☆★☆★☆★☆★☆★
《76》
엘리베이터

나희덕

더 들어가요. 같이 좀 탑시다.
병원 엘리베이터 타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육중한 몸집을 들이밀며 한 아주머니가 타고나자
엘리베이터 안은 빽빽한 모판이 되어 버렸다
11층, 9층, 7층, 5층…… 문이 열릴 때마다 조금씩 헐거워지는 모판,
갑자기 짝수층 엘리베이터에서 울음소리 들려온다
누구일까, 어젯밤 중환자실 앞에서 울던 그 가족일까,
모판 위의 삶을 실은 홀수 층 엘리베이터와
칠성판 위의 죽음을 실은 짝수 층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 만난다, 울며 떨어지지 않으려는 가족들과
짝수층 엘리베이터에 실린 죽음을
홀수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흰 헝겊으로 들씌워진 한 사람만
짝수층 엘리베이터에 남고, 문이 닫히고,
잠시 후 B1에 불이 들어온다, 그새
홀수층 엘리베이터 안에는 다시 사람들이 채워진다.
더 들어가요, 같이 좀 탑시다…… 아우성이 채워지고, 문이 닫히고,
빽빽해진 모판은 비워지기 위해 올라가기 시작한다
1층, 3층, 5층, 7층, 9층, 11층……
삶과 죽음을 오르내리는 사다리는 잠시도 쉬지 않는다

엘리베이터는 나른다, 병든 입으로 들어갈 밥과 국을
엘리베이터는 나른다, 더 이상 밥과 국을 삼키지 못하는 육체를
엘리베이터는 나른다, 병든 손을 잡으려는 수많은 손들을
엘리베이터는 나른다, 더 이상 병든 손조차 잡을 수 없는 손들을

출처 : 시집 《사라진 손바닥》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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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여 라는 말

나희덕

잊혀진 것들은 모두 여가 되었다
망각의 물결 속으로 잠겼다
스르르 다시 드러나는 바위, 사람들은
그것을 섬이라고도 할 수 없어 여,라 불렀다
울여, 새여, 대천어멈여, 시린여, 검은여……
이 이름들에는 여를 오래 휘돌며 지나간
파도의 울음 같은 게 스며 있다
물에 영영 잠겨버렸을지도 모를 기억을
햇볕에 널어 말리는 동안
사람들은 그 얼굴에 이름을 붙여주려 하지만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바위,
썰물 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그 바위를 향해서도 여,라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 여가 드러난 것은
썰물 때가 되어서만은 아니다
며칠 전부터 물에 잠긴 여 주변을 낮게 맴돌며
날개를 퍼덕이던 새들 때문이다
그 젖은 날개에서 여,라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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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여행은 끝나고

나희덕

여행에서 돌아오자
미루어 둔 불행이 일제히 들이닥쳤다
벽장문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잡동사니들처럼

예외적인 날들은 끝났다고,
그것 보라고,
이게 바로 도망칠 수 없는 네 몫의 삶이라고,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앰뷸런스에 아버지를 태우고
응급실 가는 새벽,
비에 젖은 도로 위에는 점멸등이 깜박거리고
브론테 자매가 살았던 목사관에서처럼
음울한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폭풍의 언덕에서는
불우한 가족사가 그녀의 고장을 먹여 살리고 있었지만
여기서는 나의 가족사가 깃발처럼 나부꼈다

남동생은 고속도로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점점 여위어 가는 어머니의 얼굴,
아버지가 몇 해째
응급실과 중환자실과 입원실과 집을 오가는 동안
폭풍은 우리를 막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더, 더, 막다른 곳으로

꿈에서 깨어난 듯 고통스러웠지만
그 고통을 음미할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신의 벽장 속에는
뜯지 않은 불행이 얼마나 더 남아 있는지

여행은 끝나고, 이제
쓰디쓴 풀과 거친 빵을 삼켜야 하는 시간
물을 긷고 또 길어야 하는 시간

구멍 뚫린 독에
끝없이 물을 부어야 했던 다나이드처럼

출처 : 계간《문예바다》(2021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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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와온에서

나희덕

산이 가랑이 사이로 해를 밀어넣을 때,
어두워진 바다가 잦아들면서
지는 해를 품을 때,
종일 달구어진 검은 뻘흙이
해를 깊이 안아 허방처럼 빛나는 순간을 가질 때,

해는 하나이면서 셋, 셋이면서 하나

도솔가를 부르던 월명노인아,
여기에 해가 셋이나 떴으니 노래를 불러다오
뻘 속에 든 해를 조금만 더 머물게 해다오

저녁마다 일몰을 보고 살아온
와온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떨기꽃을 꺾어 바치지 않아도
세 개의 해가 곧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에
찬란한 해도 하루에 한 번은
짠물과 뻘흙에 담근다는 것을 알기에

쪼개져도 둥근 수레바퀴,
짜디짠 내 눈동자에도 들어와 있다
마침내 수레가 삐걱거리며 굴러가기 시작한다

와온 사람들아
저 해를 오늘은 내가 훔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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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유리창 너머

나희덕

나는 누군가의 창문을 찍을 뿐이다
그리 대단한 성과는 아니다, 그는 말했다*

그의 사진 속에는
흰 눈을 맞고 서 있는 우체부가 있고
빨간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여자가 있고
신호등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눈처럼 녹기 쉽고
유리처럼 부서지기 쉬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사진 속에서
피사체는 왜 어둡고 흐릿한지
눈 내리는 거리는 얼마나 자욱한지
빗방울이 맺힌 유리창은 어떻게 어룽거리는지

들릴 듯 안 들릴 듯하고
보일 듯 안 보일 듯하고

표면과 심연을 구별하기 어렵고
명료한 것이 갑자기 흐려지거나 불투명해지기도 하는

렌즈 또는 유리창 너머의 세계

그의 사진 속에서 유리는
때로 액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리라는 물질 덕분에
그는 세계를 낯설게 보는 법을 배웠다
피사체를 안전하게 보존하는 법을

그러니 남의 집 창문이나 찍으며 한 생애를 보낸다 해도
후회하거나 주눅 들 필요는 없다

평생 뉴욕 이스트 10번가 작은 아파트에 살았던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존경했다
또한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살아가는 즐거움을 알고 있었다

모든 일은 유리창 너머에서 일어나고 지나갔을 뿐

누군가의 왼쪽 귀를 살살 간지럽히는 게
사진의 목적이라는 그의 말처럼


출처 : 격월간 《현대시학》(2024년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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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이 도시의 트럭들

나희덕

돼지들은 이미 삶을 반납했다
움직일 공간이 없으면 생각도 사라지는지
분홍빛 살이 푸대 자루처럼 포개져 있다

트럭에 실려 가는 돼지들은
당신에게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키는가

짝짓기 직전 개들의 표정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들의 눈망울에서
당신은 어떤 비애를 읽어내는가
아니, 그 표정들은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이 도시의 트럭들은
너무 많이 싣고 너무 멀리간 다

엿가락처럼 휜 철근들과
케이지를 가득 채운 닭들과
위태롭게 쌓여 있는 양배추들과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원목들을 싣고
트럭들은 무엇을 실었는지도 잊은 채 달린다

커브를 돌 때마다
휘청, 죽음 쪽으로 쏟아지려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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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이따금 봄이 찾아와

나희덕

내 말이 네게로 흐르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공중에서 얼어 붙는다
허공에 닿자 굳어버리는 거미줄처럼

침묵의 소문만이 무성할 뿐
말의 얼음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따금 봄이 찾아와
새로 햇빛을 받은 말들이
따뜻한 물 속에 녹기 시작한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지랑이처럼
물 오른 말이 다른 말을 부르고 있다

부디,
이 소란스러움을 용서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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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입술들은 말한다

나희덕

입술들은 말한다

자신의 이름과 고향과 사랑하는 이에 대해
절망과 분노와 슬픔과 죽음에 대해
오늘 저녁 먹은 음식과
산책길에 만난 노을빛에 대해
기후위기와 정부의 부동산대책에 대해
생일과 장례, 술과 음악, 책과 영화, 개와 고양이에 대해
마을을 휩쓸고 간 장마비에 대해 파도소리에 대해

얼굴도 없이 몸뚱이도 없이
격자무늬 벽에 처박힌 채 입술들은 말한다

거미처럼 분비액을 뽑아내는
저 입술들은 대체 어디서 모여든 것일까

각기 다른 언어로
각기 다른 목소리로
각기 다른 리듬으로

목소리들은 서로 삼키고 뱉고 다시 삼키고 뱉고 삼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소음의 벽을 향해
중얼거린다

들리지 않는 노래를 너무 많이 들었나봐
귀가 먹먹해
먼 들판에 풀벌레소리 자욱해
못이 박힌 노래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나봐

귀는 매일 투명한 피를 흘리고 닦아내고 다시 흘리고
격자무늬 벽 속에서 입술들은 말한다

오늘도 잠 못 드는 이유에 대해
왜 자신이 이야기를 멈출 수 없는지에 대해
복용해온 약에 대해
또는 피 흘리는 말, 다른 입술들에 대해

출처 : 《시와 반시》(2020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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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잉여의 시간

나희덕

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
너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

오후 네 시의 빛이
무너진 집터에 한살림 차리고 있듯
빛이 남아돌고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앗이 남아돌고
여기저기 돋아나는 풀이 남아돈다

벽 대신 벽이 있던 자리에
천장 대신 천장이 있던 자리에
바닥 대신 바닥이 있던 자리에
지붕 대신 지붕이 있던 자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의 살림살이가 늘어간다

잉여의 시간 속으로
예고 없이 흘러드는 기억의 강물 또한 남아돈다

기억으로도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음을
가뭇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물새 둥지가 말해준다

너무도 많은 내가 강물 위로 떠오르고
두고 온 집이 떠오르고
너의 시간 속에 있던 내가 떠오르는데
이 남아도는 나를 어찌해야 할까
더 이상 너의 시간 속에 살지 않게 된 나를

마흔일곱, 오후 네 시,
주문하지 않았으나 오늘 내게로 배달된 이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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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장미는 얼마나 멀리서 왔는지

나희덕

방금 배달된 장미 한 다발

장미는 얼마나 멀리서 왔는지
설마 이 꽃들이 케냐에서부터 온 것은 아니겠지

장미 한 다발은
기나긴 탄소 발자국을 남겼다, 주로 고속도로에

장미를 자르고 다듬던 손목들을 떠나
냉동트럭에 실려 오는 동안
피우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누르다
도매상가에 도착해서야 서둘러 피어나는 꽃들

도시의 사람들은
장미 향기에 섞인 휘발유 냄새를 눈치채지 못한다

한 송이 장미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봄부터 소쩍새가 아니라
칠에서 십삼 리터의 물이 필요하단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휘발유가 필요하겠지

스무 송이의 자연,
조각난 향기,
피어나기가 무섭게 말라 가는 꽃잎들,

퇴비더미가 아니라 소각장에 던져질 장미 한 다발

오늘은 보이지 않는 탄소 발자국을 따라가 보자
한 다발의 장미가 피고 질 때까지

출처 : 계간 시 전문지 《포지션》 (202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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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저 물방울들은

나희덕

그가 사라지자
사방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수도꼭지를 아무리 힘껏 잠가도
물때 낀 낡은 씽크대 위로
똑, 똑, 똑, 똑, 똑 ……
쉴 새 없이 떨어져내리는 물방울들

삶의 누수를 알리는 신호음에
마른 나무뿌리를 대듯 귀를 기울인다

문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발자국 소리 같기도 하고
때로 새가 지저귀는 소리 같기도 한

아, 저 물방울들은
나랑 살아주러 온 모양이다

물방울 속에서 한 아이가 울고
물방울 속에서 수국이 피고
물방울 속에서 빨간 금붕어가 죽고
물방울 속에서 그릇이 깨지고
물방울 속에서 싸락눈이 내리고
물방울 속에서 사과가 익고
물방울 속에서 노랫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물관을 타고 올라와
빈 방의 침묵을 적시는 물방울들은
글썽이는 눈망울로 요람 속의 나를 흔들어준다
내 심장도 물방울을 닮아
역류하는 슬픔도 잊은 채 잠이 들곤 한다

똑, 똑, 똑, 똑, 똑, 똑 ……
빈혈의 시간 속으로 흘러드는 낯선 핏방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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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정신적인 귀

나희덕

어디에 두고 왔을까
두 귀

돋보기가 빛을 모으듯
소리를 끌어모아 어루만지던 귀

소리의 혈맥을 더듬어
그 통점과 경락을 찾아내던 귀

허공의 거미줄을 따라
미세한 움직임에도 흔들리던 귀

어느 순간 먹먹해졌다
귓바퀴는 멈추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피아노에 갇힌 건반처럼
정신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난청과 실어증의 나날,
바람이 헛되이 녹슨 현들 울리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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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젖지 않는 마음
편지 3

나희덕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가의 풀들이나 스치며 걷다 보면
발끝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멩이 몇 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로지 젖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 그늘 아래 부려두고 계신가요
여기에 밤새 비 내려
내 마음 시린 줄도 모르고 비에 젖었습니다.
젖는 마음과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다만 두 손 비비며 중얼거리는 말
그 무엇으로도 돌아오지 말기를
거기에 별빛으로나 그대 총총 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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