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설화 시 모음 1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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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을이 자꾸만 깊어가네
김설하
저마다 고운 빛깔로 익어 손짓하는 가을
떠날 때 떠나더라도 우리는
이토록 따숩게 손 잡을 때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
부드러운 가슴 열어 품어줄 것만 같은 구름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아
동공에 빼곡히 담고 또 담네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해도
아직은 떠나보낼 수 없는 인연들
갈꽃의 소담한 웃음
탐스럽게 익어 유혹하는 열매
눈길 머무는 곳마다 심장 뛰는 소리 들켜가며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어
가슴에 가을을 적고 또 적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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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놓지 못할 인연
김설하
추억으로 저장해두기에 당신은
너무 많이 가슴에 머물러 있는 사람
휴대전화에 저장된 이름 지우면
다시는 기억되지 않을 줄 알았다
사랑이라는 말이 소멸되지 않는 한
그리움은 영원히 존재하기에
지워버린 숫자가 가슴을 돌아다녔다
절대 잊힐 사람 아닌 거 알면서
절대 놓지 못할 인연인 거 알면서
가끔 멀리 있는 당신을 견디지 못하고
속이 좁아 이별을 이야기했다
사철 바뀌는 풍경 안에
영원이라는 말로 채워진 당신
또 다시 그리움 들창 하나 생겨나
하염없이 열어 놓고
휴대전화에 당신을 적는다
당신 곁에 오래도록 사랑하며 있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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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랑 아득히 멀어지는
김설하
문밖에
찔레순 오르는 강 섶과
진달래 만발한 능선을 숨겨두고
새벽 안개가 찾아와 서성입니다
원두를 털어 넣고 넉넉히 뽑는
외눈박이 불빛 선명한 새벽
블랙커피를 기다리며 나는
창밖 정적을 훔치는데
당신은 무엇에 시선 조율하는지
언제였던가
내 가슴에 핀 꽃잎 진 일
그대 마음속 공유의 시간 사그라진 일
화려했던 날이 야위도록 내버려뒀던 일
아직도 무엇이 남아 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안개 탓일 테죠
기억은 단순히 추억을 부르는 말 아닙니까
헤어지는 뒷모습이 아팠었던가
까닭 없이 그리워지는 것이 슬퍼졌는가
오늘따라 쌉쌀한 커피가 왜 이다지 좋은지
한 모금씩 나누어 마시던 날도 그랬었지만
지나간 것들은 그렇게 아득히 멀어지는
안개 날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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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늘은 내게 선물입니다
김설하
무거운 눈꺼풀 비비며 맞이하는
어둠이 벗겨지기 시작한 신 새벽
반복되는 일상의 창을 열어
낯익은 풍경을 만날 수 있는
오늘은 내게 선물입니다
습관처럼 투박한 머그잔에 커피를 만들고
희미한 갓등 올라탄 먼지 손끝에 묻히며
계절 꽃 목긴 화병에서 은은하게 웃으면
눈가 마음의 주름하나 생겨날지라도
오늘은 내게 선물입니다
생각이 통하는 책장을 넘기고
세상으로 통하는 조간신문을 들추며
파란 불 꽃 위에서 된장국 끓고
밥물 오르는 냄새 집안을 감돌면
채널 고정한 일기예보 쫑긋해지는
오늘은 내게 선물입니다
변함 없이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
언제라도 고민을 들어주는 친구
기쁨과 행복, 슬픔과 아픔 함께 나누며
부족함 채워 가는 소중한 하루
오늘은 내게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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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생의 오후에는
김설하
홍시 같은 해를 등지고
유구悠久의 꾸부정한 허리춤께
한발 앞서 긴 그림자 터벅이는 생의 오후
한 톨의 씨앗이 움트고
멀리 더 멀리 높이 더 높이 날아올라
젊음 지천으로 흩날리던 혈기 어이하고
허허로운 인생의 오후인가
연명에 급급하여 하루를 채찍 했거나
부와 명예에 목숨 걸지 않았고
그렇다하여 빈둥대지도 않았건만
하 많은 것들이 숱하게 아쉽더란 말이냐
아래로 흐를 줄만 아는 강물이여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아는 세월이여
골 깊은 주름일랑 메워보자 않으려니
고장 난 태엽시계처럼 잠시 쉬어 가면 좋으리
되돌릴 수만 있다면
세상 밖에서의 눈에 비쳤던
성냥갑 만한 안식처 그 찰나에 소름 돋던
아름다운 이 강산 굽이굽이
구름처럼 물처럼 흘러보면 좋으리
푸르던 나무가 가으내
그토록 신열 오른 이유를
인생의 간이역 잠시 쉬어갈 수 있다면
오만의 둘레 겹겹 벗겨내고
섬유질 앙상한 겨울나무의 의미를 되새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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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해바라기 연가
김설하
저 홀로 깊은 것도 아닌데
사랑에 눈먼 마음의 병
뉘라서 갈불까 마는
들판을 훑고 지나온 바람
여린 입술 훔치고
알알이 맺힌 사연 풀어헤쳐도
고개도 들지 못할 그리 부끄럽더라
한 줄금 말간 햇살 은근한 애무
무시로 지나는 바람에도
굴하지 않았건만
눈 한번 맞추기 쉽지 않아서
저 홀로 커다랗게 부풀어올라
무심히 여무는 못 다한 사랑
샛노래진 얼굴 하마 숨겨도
새까맣게 타는 속 감출 길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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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리워할 때와 사랑할 때
김설하
그립다 말자해도 더 또렷해지는 것은
사랑하기 이전부터 인연이었던 사람
마주앉아 향좋은 차를 마시는 것보다
나란히 맞댄 어깨가 정겨운 사람
절대 잊을 수 없다는 말도 짐이 될까봐
무언의 결속 기다림 되어버린 사람
그리움 지독하여 아픈 날에는
가슴속 걸어 둔 그대의 풍경
성장하지 못한 영원이라는 화첩 펼쳐 놓고
못 다한 인연 눈물로 붓질하며
몇 날을 이렇게, 또 얼마를 그렇게
기다리다가 돌이 되어도 좋을 사람
언제나 그렇듯 사랑했다는 말보다
그리워할 수 있는 날 선명하여
사방을 둘러보아도 헤어짐은 낯설고
눈에 보이지 않아서 아프다는 사유
혼자 결리는 고통은 더욱 아니기에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밖에 없는 사람
지금 멀리 떨어져있어도
우리에게 지워지지 않는 지난 날
그리워할 수 있을 때 그리워하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자고
맞댄 어깨의 온기 일기 속에서 걸어 나와
초저녁달 같은 은은한 미소로 서 있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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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나 그대 있어 사는 것을
김설하
그대와 나 닿아 흘렀던 시간
추억이라 하기엔 너무 많은 사랑
이렇게 떠나자 쉽게 결정하지 말고
기다림 없는 고통 갖지 말고
차갑게 누운 달빛과 가시처럼 박힌 별빛
눈부시게 빛나는 날 기어이 돌아와
아픈 가슴 질러 두었던 빗장 거둘 때
그리움 없는 사랑이 있을까만
눈물로 이룬 강 하나의 이름으로 흘러
죽자하여 죽어지는 게 아닌 것처럼
잊자하여 지워지는 게 아닌 다음에야
매번 가두기에 급급했던 벼랑 끝
아스라이 무너지며 흐느끼던 바람
사랑하기 때문에 엇갈릴 수 없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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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누구나 살면서
김설하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지독한 사랑을 하고
한 번쯤 이별을 하고
한 번쯤은 죽음을 생각하고
그리고 한 번쯤은 그리움과 이별한다
감정이 증폭될 때마다 누르고 눌러
어찌할 줄 모르고 까매지는 눈망울
저물녘이면 가슴 밑까지 우울함이 메워
너른 세상 잠시 스치고 지나는
한줄기 바람이 차다
담담한 고요와 눈먼 물고기
젖은 날개 펴지 못하여 웅크리고 있을 물새
풀벌레 울다 지쳐 가랑대는 풀숲
하얀 꽃눈 바래가는 갈대의 흐느낌
세월은 좀먹고 햇볕이 창문을 두드린다
새벽 덜 깬 잠속에서 마신 커피가
그윽한 향기로 번져나도록
깍지 낀 손 한껏 올려 기지개를 켜며
목젖 보이게 긴 하품을 느리게 하고
여전히 안개가 산발한 강 쪽을 바라본다
누구나 살면서
아픔을 알고 성숙해지지만
누구나 살면서
이별보다 더 아픈 사랑을 알지 못한다
사랑이 가장 아픈 일임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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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눈물겹도록 사랑한 사람
김설하
아날로그 시계 칭얼대는 날이면
설핏 잠든 꿈속으로 날아와
눈물로 얼룩진 머리카락 쓰다듬는 너
그리움으로 쏟은 피눈물로
마른 가슴 홍수 지곤 했어
속고 또 속으며
기다리는 세월을 살면서
삼라만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건 마음이라고
외롭고 슬픈 줄 알면서 사랑하니까
옛 기억으로
숨어버릴 사람이었다면
기울인 술잔에 출렁거릴 저 눈물
부디 죽도록 사랑한다고
네 가슴속에 살 집 하나 지어줄래
우리에게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
날마다 보고픔으로 가슴 짓무르는
너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야 사랑해
날마다 그리움으로 목마른
나는 너에게 그런 사람이잖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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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볕 좋은 창 밖을 바라보며
김설하
혓바닥 돌기가 고장났는지
음식이 목젖에서 물구나무선다
따뜻한 우유에 적신 스펀지케이크조차 모래알
간밤 구시렁대며 내리던 봄비처럼
들어주는 사람 없는 집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애꿎은 냉장고를 뒤적거린다
농익은 망고가 기다렸다는 듯
이따위로 살림살이하고 있으니 그 모양 그 꼴이라고
이미 지나간 시절은 돌이켜지지 않는 법
물 건너왔을 땐 숫처녀 가슴 같았을 터인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 껍질을 벗기려니
납작한 갈비뼈를 드러내며 늙은 아낙이 뭉크러진다
꼬르륵대는 배를 움켜쥐고 창밖을 내다보니
아롱아롱 아지랑이 오르는 봄이 기웃대고
오라는 곳 없어도 갈 곳 많던 날 있었지만
오라는 곳 많아도 만사가 귀찮아졌다는 것
어젯밤 내린 비로 말쑥해진
볕 좋은 창 밖을 멀뚱히 바라보노라니
게으른 하품만 오지게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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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보고 싶습니다
김설하
바람 무성하더니
가는 비가 내리며 저 길이 젖고 있습니다
창문이 덜컹이는군요
아린 손마디 꺾어 창문을 열며
부서질 것만 같은 가슴 저쪽
아무도 모르게 파 놓은 우물로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가 와락 들어옵니다
가는귀라도 먹었으면 좋을 저 소리
기진한 가슴에서 한숨이 새나와
빗물이 눕는 저 길에 그리움이 흐릅니다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비 오는 날에는
이렇게 바람 부는 날에는
손 내밀면 따스하게 안아줄 당신이
유난히 보고 싶습니다
기다림이라는 건
처연해지는 일이던가요
푸른 이끼 무성한 저안에서
메아리가 되지 못한 보고픔이 고입니다
목울음 눌러둔 이 아픔이
너무 오래 머물러 있지 않기를
나는 한잔 술에 눈물을 떨어트리고
두잔 술에 그리움을 담아 털어 넣습니다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도
술잔에 부어 마셨지만
입안을 맴돌다가 쏟아지고 맙니다
당신 많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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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봄이 오는 소리
김설하
지금 너 떠나간 자리
봄냄새 부풀어 올라
널 다시 만날 날 있을 때
웃으며 맞이할 수 있기를
눈물 보이지 않을게
아쉬움 감춘 엷은 미소로
떠나보낼게
네 기억 속에 날인 되었던
나를 너도 잊으렴
소롯한 들길
잔설위에 찍었던 우리 발자국
녹아 없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먼 날 다시 만날 수 없어도 좋아
온 산을 진달래 붉게 수놓아
화사한 봄빛으로 치장하면
실개천 흐르는 저 언덕위에
나 서 있을 테니
안녕이라는 말도
이제 슬프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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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사랑은 그렇게 가는 거야
김설하
한여름 뙤약볕에 시든 나팔꽃처럼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처음부터 몰랐던 것처럼 나의 사람은
만질 수 없어지는 거야
조금씩 관심이 멀어지고
조금씩 무감각해지고
조금씩 낯선 냄새가 나는
느낄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거야
너뿐이라던 거짓된 진실로
벽돌을 쌓듯 이별연습을 하고
기억에서 지우면 어차피 남남
사랑은 그렇게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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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사랑이 있는 가을 풍경
김설하
나는 가는 떨림으로 흔들리는 갈잎
당신은 내 가슴 출렁거리게 하여
손끝 세우고 그리움 써 내린 창가
시리도록 파란 하늘 사랑이 떠다닙니다
그대만을 담아둔 내 마음처럼
그대 마음에도 영원히 나만 담아두기를
우리 머무는 이 소중한 시간
우리 머무는 이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한잔의 커피에 갈바람 타서 마시고
갈대 우는소리 긴 여운 되어 귓속 채우면
살아 숨쉬는 매 순간이 사랑 빛으로 반짝여
꽃송이 되어 하늘을 날겠습니다
황홀하게 빛을 바꿔 가는 먼 산을 바라보고
순정 만화 주인공처럼 긴 머리카락 쓰다듬으며
창밖에 눈길 붙잡혀 한 폭의 풍경으로 걸리는
오래도록 위태롭게 기대어 있어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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