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산보*
1960년대의 이야기다.
토요일 학교 수업이 끝나면 동네 꼬마들은 하나둘씩 공터에 모여들었다. 연길이, 제호, 준권이, 선동이, 후동이 그리고 나. 얼굴만 봐도 신이 나서 웃음이 절로 나오는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내일 떠날 모험 계획을 세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각자 집에서 먹다 남은 찬밥을 보자기에 싸 오기로 하고,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하며 놀지 의논했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 계획이었지만 그때는 세상을 정복하러 가는 원정대라도 된 듯 가슴이 뛰었다.
약속을 단단히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벌써 마음은 다음 날 아침에 가 있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고 밤은 왜 그리 길던지 잠도 쉽게 오지 않았다.
드디어 일요일.
7월의 태양은 아침부터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동네 어귀에 모인 일곱 명의 꼬마들은 찬밥 보따리를 손에 들고 산보 아닌 산보를 떠났다.
조잘조잘 떠들며 동인천역까지 걸어갔다. 역전 울타리 근처에 숨어 기차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기차가 역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쏜살같이 뛰어가 객차에 올라탔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무임승차였지만 그때는 그것마저도 신나는 모험이었다.
숨을 죽인 채 주안역까지 갔다가 기차가 멈추자마자 뛰어내려 논길로 달아났다. 한참을 달리다 뒤를 돌아보니 역무원 아저씨가 쫓아오기는커녕 웃으며 손을 흔들고 계셨다.
"이놈들아! 천천히 가거라. 다친다!"
그 한마디에 우리 모두 깔깔 웃으며 더 힘차게 달렸다.
주안에서 제물포까지 이어지는 시골길은 우리에게 거대한 놀이터였다. 길가에는 먹을거리가 지천이었다. 무밭에 들어가 무를 뽑아 먹으면 달큰하면서도 매운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너무 많이 먹으면 배가 아프다는 것도 알면서 손이 멈추지 않았다.
가다가 중국인 아저씨가 가꾸는 당근밭을 만나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무처럼 쉽게 뽑히지도 않는 당근을 낑낑거리며 캐고 있는데 망을 보던 연길이가 다급하게 외쳤다.
"주인이다!"
그리고는 곧바로,
"토끼자! 토껴!"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리는 사방으로 달아났다. 죽을힘을 다해 뛰는데 뒤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준권이가 미처 도망치지 못해 주인아저씨에게 붙잡힌 것이다.
안타까워해야 할 텐데, 철없는 우리는 오히려 한숨을 돌리며 품속에 숨긴 당근을 꺼내 놓고 누가 더 큰 것을 뽑았는지 비교하며 맛있게 먹었다. 그때 먹던 당근 맛은 지금 아무리 비싼 음식을 먹어도 다시 느낄 수 없는 맛이다.
개구리를 잡아 뒷다리를 구워 먹고, 고추밭에서 풋고추를 따고, 오이밭에서 오이를 몇 개 얻어(?) 와 찬밥과 함께 먹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던 그 순간만큼은 임금님의 수라상도 부럽지 않았다.
실컷 먹고 놀다 보면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즐거움은 사라지고 집 걱정이 밀려왔다. 다리는 무겁고 갈 길은 멀었다. 그때쯤이면 어머니 얼굴도 떠오른다. 어머니가 해주신 저녁밥 냄새가 코끝에 맴도는 것 같았다.
일곱 명의 꼬마들은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집으로 향했다. 멀게만 느껴지는 집이 그날따라 더욱 그리웠다.
동인천역을 지나 화수동 구름다리 언덕에 올라섰을 때였다.
저 멀리 만석동 우리 동네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우리는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집이다!"
방금 전까지 지친 다리는 어디로 갔는지, 일곱 명의 꼬마들은 앞다투어 언덕을 내려가며 집을 향해 달렸다.
세월은 많이 흘렀다.
그 시절 친구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연길이도, 제호도, 준권이도, 선동이도, 후동이도 이제는 머리가 희끗해졌을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가끔 눈을 감으면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찬밥 보따리를 들고 들판을 뛰어다니던 일곱 꼬마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세상 누구보다 부자였던 시절.
그것이 내가 평생 잊지 못할 어린 시절의 산보다.
2026년 6월 자연카페에서~
shin taekg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