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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에디 첨니의 토라와 신약 6 [할례에 관한 바울의 관점과 그의 가르침]

작성자별과같이|작성시간16.12.22|조회수84 목록 댓글 0


  Eddie Chumney | Torah & The New Testament - Part 4-6


  

에디 첨니의 토라와 신약 6  

      할례에 관한 바울의 관점과 그의 가르침

 

 

샬롬! 저는 히브리뿌리 미니스트리의 에디쳠니입니다. 히브리 뿌리 강의를 시청하시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히브리뿌리에 근거한 기독교에 대해 공부를 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메시아이신 예슈아를 중심으로 모든 것들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편 407절에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라고 기록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히브리서 107절에 예수님을 인용하여 “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하셨느니라.” 라고 써있기 때문이죠. 예슈아 자신께서도 누가복음 2444절에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에서 말하는 예슈아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토라에서 말하는 예슈아를 알아야 하는데, 토라에서의 예슈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그의 초림 그리고 재림과도 연관되어집니다. 요한복음 546- 곧 모세의 토라와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한 말이 이것이라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슈아께서는 모세오경, 즉 토라가 자신에 대해 쓰여진 글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때문에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47절에서 예슈아께서는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의 토라도 따르지 아니하면서, 그의 토라와 토라의 원칙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찌 내말을 믿겠느냐고 하신 거죠. 그렇기 때문에 예슈아의 사역과, 가르침, 그리고 그의 비유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토라를 이해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 말은 즉, 사도행전 15장을 이해하기 위해선 바울의 글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토라 또한 이해해야만 하는 거죠. 왜냐면 바울이 설명하기를 토라에 낯선 자들, 배우지 않은 자들이 자멸한 것이 그들이 바울의 글들을 왜곡시켰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이것은 베드로 후서 315-16절에 나와 있습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 (토라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주로 어떤 방법으로 바울의 가르침이 왜곡되어졌을까요? 그들은 바울이 예슈아를 메시아로 믿는 자들에게 토라를 지키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라고 하는 사상을 주기 위해 그의 글들을 왜곡했습니다.

 

 

이번 세션에서 나눌 것은 할례에 관한 바울의 관점과 그의 가르침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할례에 대한 토라티칭을 하게 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슈아에 관해서 예슈아를 토라에서 봄으로써 우리는 예슈아께서 시내산에서 토라를 주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슈아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그의 백성을 구하시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예슈아께서 시내산에서 토라를 주셨다는것을 신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21절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히브리어로 구원이라는 뜻이죠.)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라고 쓰여 있고,

누가복음 211절엔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슈아께서는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그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십니다. 그가 구원자이고 죄로부터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야고보서 412장을 봅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는데요, 구원하실 오직 한분이 시내산에서 토라를 주신 분이라는 겁니다.

 

예슈아 자신께서도 요한복음 1415절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데에는 성경의 아주 초반에 나오는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라는 구절을 참고하고 연관을 지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십계명을 주신 장에서 보여지는데요, 출애굽기 206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시죠.

 

전통기독교에서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혹은 토라를 따르는 것,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해왔죠. 그런데 여기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나와 있습니다.

시편 10317-18절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의 시대 라고 하는 기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923-24절을 보면 은혜와 자비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속성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68절에서는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출애굽기 346-7절엔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라고 쓰여 있죠.

 

에베소서 28-9절은 우리가 주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고려해볼 때, 그렇다면 우리가 토라를 지켜야 하는 것이 파기되어졌습니까? 바울이 이 질문을 하고 바로 대답을 합니다.

로마서 331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의미는 끝났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율법 지키는 것을 끝내야 하는가라는 거죠. 그가 로마서 328-30절에서 설명하듯 유대인과 비유대인 둘 다 믿음으로 말미음아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것이 정당화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인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므로 토라를 준행하는 것을 끝내야 하나요? 바울은 하나님이 폐하는 것을 금하신다.(그럴 수 없느니라)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정의의 죄는 우리가 토라를 준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134절에서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토라를 범하나니) 죄는 불법 (토라를 범하는 것)이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로 구원받은 후에 율법을 굳게 세웁니까?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인한 은혜로 구원받은 후에는 죄악된 생활을 살지 말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1절에서 사도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라고 질문을 하죠. 그가 질문하는 바가 뭡니까? 우리가 죄를 계속 지어야 하는가? 우리가 주님이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고 계시니 계속해서 토라를 범해도 괜찮은가? 주를 사랑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금하시기에 우리가 이전 삶과 행하던 방식으로부터 죽은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겁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우리가 부활된 삶같이 메시야를 향해 살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죄에 대해 회개, 다시 말해 토라를 범했음을 자백하면, 우리는 부활된 삶처럼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토라를 범해왔음을, 즉 죄를 회개한다는 것은 여러분이 토라를 따르려고 애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토라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회개를 해야만 하는 것이죠. 회개 할 때 당신은 예슈아 앞에 나아오고 죄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슈아께서 나무에 달려 죽으실 때 그의 흘린 보혈로 인해 그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가 우리에게 그가 피흘림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우리의 구원자, 주로 삼는 것입니다. 그를 우리의 구원주로 삼은 후 우리는 그를 사랑하게 되죠. 그리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토라 (율법)을 세우는 겁니다. 더 이상 죄안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되죠.

 

바울은 우리가 예슈아를 메시야로 믿는 믿음을 표현함에 있어서 오해되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왜냐하면 우리가 토라를 배우지도 공부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토라에 근거해 주장하는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토라를 지키냐 마느냐에 관한 것 뿐 아니라 특별히 바울이 할례에 대해 가르친것에 관해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기독교인들이 예슈아를 메시야로 믿음을 표하는데 있어 토라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라고 가르치기 위해 합리화시키며 인용하는 다양한 구절들을 살펴보며 토라와 신약에 관한 시리즈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 세션에서는 할례에 관해 바울이 무엇을 가르쳤는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할례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이 토라가 할례에 대해 가르치는 부분에 있어서 토라와 일관되다는 것을 여러분들과 나누겠습니다. 그의 가르침이 토라와 일치되는 이유는 그가 모든 것을 예슈아만이 우리 믿음의 가장 중요한 이슈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할례에 대해 생각할 때, 대부분 한 가지 관점으로만 생각하는데, 바로 육체의 할례이죠. 첫째로 우리는 할례라는 단어의 의미와 이것이 어떻게 성경에서 적용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할례라는 단어가 사용되어진 방법 중에 하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것과 연관이 됩니다.

 

주가 아브라함에게 지시하신대로 창세기 1710-11절에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라고 쓰여 있죠. 그렇기 때문에 육체의 할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다는 표징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십시요. 왜냐면 바울이 할례를 이해하는 것을 토라와 예슈아와 관련 있는 것으로 여길 때 로마서 2장에서 인용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4장에서 할례는 다른 실체와 언약관계로 들어서는 것과 관련됩니다. 이것은 34장에서 야곱의 가족밖에 있는 자들이 레아의 딸 디나와의 혼인을 하고자 할 때, 그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들이 언약관계에 있다는걸 보여줘야 한다, 같은 신을 믿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7장에서는 할례가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계명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712절입니다.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토라는 단지 육체의 할례만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012절에서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질문하지요. 16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신명기 30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그리고 6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라고 쓰여졌죠. 그러면 마음에 할례를 받는 것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라는 것이죠.

 

예슈아께서는 마태복음 2236절에서 무엇이 가장 큰계명이냐고 질문 받았을 때 모든 계명이 다 동일한 비중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하셨죠. 신명기 64-5절은 우리가 알고 있는 쉐마 명령이지요. 신명기 306절에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라는 부분이 마음의 할례와 연관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가장 큰 계명을 지키기 위한 방법은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이라는 겁니다. 때문에 가장 높은 수준에 있는 명령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을 포함합니다. 마음의 할례는 여러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 오게 됩니다. 그분이 여러분의 정의 이십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이 그랬듯 바울이 로마서 41-3절에서 가르칠 때,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였다고 창세기 156절을 언급하고요, 이것이 그의 의로 여겨졌습니다. 그는 믿음의 아버지 입니다. 할례는 유대인을 지칭하는 용어이고, 무할례는 열방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갈라디아서 27절은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라고 말합니다. 할례자를 위한 복음이라 한 것은 유대인을 향한 복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31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라는 것은 할례와 관련됩니다. , 유대인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 언약은 시내산에서 그의 백성과 맺은 언약을 얘기합니다. 사도행전 112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에서 할례자들은 유대인들을 말하는 겁니다. 예레미야 925-26절을 보면, 우리가 육체의 할례를 받아도 마음이 할례 받지 못한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6절을 보면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라고 되어있죠.

 

 

육체적 할례는 언약의 징표입니다. 당신이 언약을 따라 행하겠다는 징표인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여러분이 육체의 할례를 받았으나 마음으로는 언약의 토라를 이행하지 않으면 그건 바로 모순인 것입니다. 육체의 할례를 행하는 목적은 당신이 언약관계에 있다는 표시인데 당신이 토라를 준행하기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711절은 이것이 언약의 증표 혹은 표시라고 말합니다. 무할례는 레위기서 1923절에서 금하는 어떤 것과 관련됩니다. 23절을 보면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라고 쓰여 졌죠. 여기서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다라는 의미는 금지된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무할례라는 단어는 비유대인과 관련되어있을 뿐 아니라 언약관계 안에 있지 않다는 것과도 관련되지요. 여러분이 언약관계 안에 있지만 그의 계명들을 지키려 하지 않는다면 호세아서 1장에서 보듯 북이스라엘 왕국의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는 불순종의 결과로 그들은 그의 백성이 아니며 자비를 베풀지 않겠다라는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 그들은 언약으로부터 끊어진 것입니다. 예레미야 38절에 그들과 이혼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무할례는 언약을 깨는 것과 관련되어집니다. 창세기 1714절에 나와 있듯 말입니다.

 

무할례는 책망 받는 것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왜냐면 만약 당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지 않다면 에베소서 212절에서 당신이 이스라엘 나라밖의 외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래서 에베소서 212절은 당신이 언약관계에서 끊어지면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할례는 비난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58-9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광야에 있었을 당시 광야에서 태어났던 자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 시기였던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주님의 명령이 주어지지요. 여호수아 5장에서 남자들이 할례받을 것을 지시하십니다. 58-9절입니다.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무할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지 않은 것, 책망가운데 있는 것과 연관되어집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비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고요, 비유대인은 무할례자를 지칭하지요. 당신이 토라를 따르지 않을 때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은 것으로 보여지는 겁니다. 성경은 이것을 돌과같은 마음이라고 부르지요. 스가랴서 711-12절은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의 할례를 받길 원하시는데, 돌과같이 굳은 마음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으로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러면 예레미야 3133절과 히브리서 810절에서 보듯 새 언약은 토라를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 우리마음에 새기는 것이죠. 왜냐하면 주는 그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길 원하시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고 인도하면 우리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향한 바른 마음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참된 마음의 할례는 마음이 변화되는 것으로 부터 뿐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고 지시하시도록 허용하는 것으로 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722절에서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말한 이유인 거죠. 잠시 후 다시 뵙겠습니다.

 

 

히브리뿌리 미니스트리의 에디쳠니입니다.

HRN로 채널을 맞춰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이 프로그램은 전 세계에 방영되며 날마다 확장되어가고 있습니다. 채널 고정해주신 것 감사드리고, 이 강의들을 가족친지들과 함께 나눈 것 또한 감사드립니다.

 

수업에 다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는 토라와 신약 시리즈를 하고 있고요, 할례에 관한 이슈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번 세션에서는 할례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미 할례에 관한 성경적 정의들을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공부했죠.

 

토라는 본토인이든 이방인이든 난지 팔일 된 자에게 육체의 할례를 요구한다.

 

할례는 언약의 징표이다. 토라는 마음의 할례를 요구한다. (신명기1016)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신명기 306절 말씀.

 

무할례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언약관계 밖에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이방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지 않으므로 무할례자로 여겨진다.

 

무할례라는 단어는 어떤 금지된 것을 지칭한다. (레위기 1923)

 

무할례는 이스라엘 밖에 있는 외인으로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는 자들과 연관된다. (에베소서 212)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지 않은 것은 책망가운데 있는 것과 연관된다. (여호수아 58-9)

 

토라를 따르지 않는 자는 성경이 말하듯 돌과 같이 굳어진 마음으로 할례받지 않은 마음을 지칭한다. . (스가랴 711-12)

 

신명기 1016절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이 할례받을 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에, 새언약이란 마음에 새겨진 토라를 의미합니다 (예레미야 3133, 히브리서 810) 새 언약에서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요한복음 1613절은 성령이 진리의 성령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라고 쓰여졌고요. 에스겔 3626-27절은 우리에게 새언약, 새마음을 주신다고 하죠.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라고 말씀하시는데 새마음은 할례받은 마음인 것입니다. 할례받은 마음은 새 영과 함께 옵니다. 새언약에서 새 마음은 반대하는 영, 육의 영 대신 거룩한 영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지죠. 27절입니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우리가 예슈아를 우리 죄를 그의 흘린 피로 사하신 메시야로 받아들이고, 그의 권능있는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는 진실로 새언약에서 제시하시는 대로 오직 할례받은 마음만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영에 의해 토라를 따르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울이 가르친 것입니다. 로마서 722절에서 바울은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특별히 바울이 할례의 이슈에 관해 무얼 가르쳤는지 더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는 어떻게 비유대인이 이스라엘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며 그 앞에 의인으로 여겨지는가에 대한 토라논쟁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슈아를 믿는 신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논쟁입니다. 사도행전 155절에서는 바리새파의 구전 율법의 위치를 고수한 바리새파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비유대인이 언약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선 육체적 할례를 행해야만 한다라고 주장하죠. 바울과 바나바는 이런 주장에 반대해서 논쟁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할례와 토라를 따를 것을 반대하여 주장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는 이 구체적인 케이스에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논쟁하는 겁니다. 할례에 관해 바울의 고수하는 입장을 보면, 그는 로마서 41-3장에서 토라논거를 사용하고 있죠. 그는 아브라함을 인용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먼저 지시와 약속을 받고 , 124절에서 그가 순종하여 그 결과로써 창세기 156절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의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셨지요. 로마서 416절에서 바울은 이 논쟁사안의 예로써 아브라함이 우리 믿음의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로마서 49-10절에서는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라고 말하며 명확히 주장을 밝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브라함이 의롭게 여겨진 방법에 있어서 이것이 단지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느냐 비유대인도 해당되느냐라는 질문과 동시에 유대인과 비유대인 둘 다에게 해당한다고 대답을 하죠. 유대인과 비유대인 둘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할례받은 마음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10절은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언제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의롭게 여겨짐을 받고 그와 바로 서있었습니까? 그가 할례 받았을 때 인가요? 아니면 할례를 받기 전인가요? 창세기 15장에서 그는 아직 무할례시 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라고 말한 겁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할례의 징표, 믿음으로 인한 의로움의 인장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할례는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여겨짐을 받을 이유가 되지 못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속의 행동으로 인해 주 앞에 의롭게 여겨졌어요. 그리고서 육체의 할례는 이미 그의 순종을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의로운 위치에서 징표가 되었죠. 그래서 바울은 할례에 반대하여 가르치기보다는 토라가 할례에 관해 말하는 바를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가르친 겁니다.

 

이 사안에 대한 바울이 가르친 것의 추가적인 이해로 바울은 시내산을 토라가 돌 같은 마음 혹은 할례받지 않은 마음에 새겨지는 것(마음의 할례)과 비교하고, 예루살렘 혹은 시온산을 할례받은 마음과 비교합니다. 그는 시내산을 돌같은 마음, 토라에 대한 불순종에 비교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토라의 글에 비교합니다. 돌 같은 마음을 육체에 대한 토라를 향한 불순종과 비교하고 있고, 시온산을 영적으로 할례 받은 것, , 마음의 할례를 받고 율법의 영, 그 영에 이끌려 토라를 따르는 것에 비교하고 있지요.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서 422-23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구절들에서도 바울은 토라를 예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것 안에 이삭이 언약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아들이지요. 바울은 영적인 비유를 주기위해 이러한 사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24절에 이것은 비유니라고 하죠. 이것은 비유입니다. 영적인 가르침이죠. 그들은 두개의 언약을 나타냅니다. 하나는 시내산에서 일어난 일로, 시내산에서 돌같이 굳어진 마음에 토라를 새겨주신 것을 나타냅니다. 다른 하나는 갱신된 언약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영으로 토라에 순종하는 할례받은 마음을 가진 육신인 우리 마음에 토라를 새겨 넣은 것입니다.

 

돌같은 마음, 시내산, 그리고 이스마엘은 속박을 낳습니다. 여러분이 토라에 순종하지 않고 죄악 된 형태의 삶을 살아간다면, 속박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갈이고 이스마엘인 것입니다.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입니다. 지금 있는 예루살렘의 조상은 바로 육체입니다. 물리적이죠. 지금 있는 예루살렘은 물리적입니다. 그래서 육은 하나님에 반대하는 적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죠. 이것이 바울이 설명한 것입니다. 로마서 87-8절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라고 쓰여 졌죠.

 

이 말의 뜻은 육신에 있지 않은 자들,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하나님의 영에 의해 토라를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갈라디아서 426절입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무엇이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합니까? 그것은 영에 의한 예루살렘입니다. 바울은 돌같은 마음, 시내산을 육체, 토라에 대한 불순종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조적으로 바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언약관계, 그의 약속을 믿는것, 그의 영에 이끌리는 것을 할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돌같은 마음을 무할례라고 부르고 있죠. 그는 이것을 비유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토라 드라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물리적인 것을 취해서 문자 그대로 일어난 사건에 영적인 적용을 하고 있는것이죠.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이 구절들은 기독교인들이 우리는 토라를 따르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사용되어지는 구절들입니다. 하지만 여기엔 바울이 말하는 요점에 대해 오해가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메시아이신 예슈아에 대한 믿음을 표현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어요. 로마서 331에서 이미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그는 어떻게 여러분이 토라를 따라야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신명기 306절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도록 마음의 할례를 베푸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슈아께서는 요한복음 1415절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죠. 할례받은 마음으로 여러분은 주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이제 바울은 성경의 할례에서의 마음을 설명합니다. 빌립보서 33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라고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육체를 신뢰하면 무할례파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722절에서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라고 말하듯 그가 그랬기 때문에, 만약 여러분이 영에 의해 토라를 따르고 육체를 따르지 않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신명기 1016절에서 주 하나님이 토라에서 요구하는 마음이 할례받은 할례파인것이지요. 골로새서 211절입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예슈아를 구주로 영접함을 통해서 됩니다. 당신이 죄를 회개하는 것은 죄짓는 것을 회개하는 것인데 죄짓는 것은 범법하는 죄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죄를 회개하는 것은 토라를 따르지 않는 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정의는 토라를 따르기로 작정한 것을 의미하죠. 그런데 먼저는 예슈아의 흘리신 보혈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용서를 받고나서 예슈아께서 주시는 할례, 즉 마음의 할례에 참여하는 겁니다. 회개를 하기 때문에 육신의 죄를 멀리하게 되고, 육체는 무할례인 것이므로 손으로 행하여진 할례를 받은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영에 의해 행해지는 마음의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가르친 것이며 바로 토라가 가르친 것입니다. 신명기 1012절 주 너의 하나님이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바울이 로마서 2장에서 가르친 것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2장에서 바울은 언약의 표징인 육신의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마음의 할례를 받고 온 맘으로 토라를 따라 행하는 비유대인과 언약의 표징인 육신의 할례를 받았으나 마음을 다해 토라를 준행하지 않는 유대인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 육신의 할례는 받았으나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육신의 할례는 진정한 가치가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할례는 마음으로 토라를 추구하는 것의 표징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마음으로 토라를 추구하나 당신이 육신에 속해있다고 선언한다면 이것은 모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비유대인이 육신의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마음을 다해 토라를 따른다면 이것이 토라가 요구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로마서 213-15절에서 하나님 앞에서는 토라를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토라를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토라를 행하는 자를 옹호합니다. 14토라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토라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토라가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이방인이 토라를 따라 행한다면 말이죠. 15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묘사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만약 비유대인이 마음으로 토라를 따른다면 그는 토라를 행하는 것이고 그런 자가 명분이 있는 자입니다. 그와 반대로 육신의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 마음으로 토라를 따르지 않고 예슈아가 메시아이신 것을 모른다면 로마서 217에서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23절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네가 토라를 행하는 자로 여긴다는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죠.

 

하지만 당신이 외형상으로는 토라를 따른다고 여기고 육신으로는 할례를 받았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 223절에서 토라를 범하고 있고 따르고 있지 않는다면, 토라를 범하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리고 25절에서는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왜 토라를 행하면 육신의 할례가 유익합니까? 왜냐하면 창세기 1711절에서 육신의 할례가 언약의 표징이라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다는걸 표시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약관계 안에서는 토라를 행해야 하지요. 그리고 로마서 225절은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 (육신의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무할례가 되는 이유는 당신이 외관상 육신의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언약을 따르는 것을 나타내는데, 언약을 따르지 않으므로 당신 삶 가운데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러면 육신의 할례를 반대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어떻게 할례를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해 올바른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하고요,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새언약을 통해 마음의 할례를 받지요. 왜냐하면 새언약은 토라를 마음에 새기는 것이라고 예레미야 3133절에서 말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죄를 사하는 예슈아의 흘리신 보혈을 통해 성령이 내재하셔서 하나님의 영에 의해 그의 토라를 따르게 됩니다. 우리의 육이 아닌 그의 영에 따라 토라를 준행하게 되죠.

 

계속해서 로마서 226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육체의 할례를 받지 않은 무할례자 비유대인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여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육체의 무할례를 할례, 즉 마음의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라고 설명합니다.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무할례자가 토라를 따라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육신의 할례를 받았으나 토라를 따르지 않는 자를 판단한다라는 겁니다. 토라를 따르는 자들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 토라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심판한다라는 거죠.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여기서 바울은 유대인이라는 단어에 대한 언어유희를 하는 건데요, 유대인이란 뜻인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마음으로 할례받는 자입니다. 토라를 따르는 자,

 

예슈아의 흘린 보혈로 죄사함을 받은 자, 주가 주신 새언약의 일원인 자,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예슈아를 따르는 자 인거죠.

 

29절은 말합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을 나왔을 때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은 육신의 할례를 받지 않았었죠. 그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을 때 여호수아 58-9절은 그들이 육신의 할례를 받을 것을 명령합니다.

 

광야는 이방나라 (열방)에 있는 것을 나타내고요, 세상의 열방과 비교할 때, 이스라엘 땅은 거룩함이 더 높은 수준에 있습니다. 메시아 왕국의 시대는 메시아시대 이전 시대에 비해 더 높은 차원의 거룩한 시대이지요. 거룩함의 정도가 더 높으면, 요구되어지는 것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아기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어른에게 더 큰 기대치가 있는 것과 같은 거죠. 영적으로도 같은 방식입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하나님의 영을 따라 영적지식이 늘어날수록, 그는 당신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시죠.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열방에 있는 그의 백성으로부터 메시야가 통치하고 다스리실 메시아의 시대에 그가 지금 요구하시는 것보다 더 많이 요구하실 겁니다.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서 23절에서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라고 가르친 것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 구절에서 핵심어는 강요라는 단어입니다. 왜냐면 당시 포로 시대에 살고 있었고, 디도는 이스라엘 땅 밖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할례를 받도록 강요받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에스겔 44장의 메시아의 시대에는 거룩함의 수준이 높은 시대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시지요. 에스겔448-9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들이 주 앞에 오려면 마음과 육체의 할례를 받을 것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주를 경배할 것이고 주의 다스릴 보좌가 있는 메시야의 성전으로 올 것입니다. 에스겔서 437절이지요.

 

이번 세션에서는 바울의 할례에 대한 입장과 어떻게 그가 할례를 교훈함에 있어서 토라를 가르쳤는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슈아의 이름으로 샬롬하시길!

 

      

<위의 동영상은 싸이트에 올라온 에디첨니 박사의 "토라와 신약 4-6"으로,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주제인데, 원어로만 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내용을 공유할 수 없기에, 번역이 필요함을 느끼고 감동을 받으신 분이 번역을 하고, 몇 분이 검증을 거쳐서 자료를 올립니다. 번역 상 미흡한 부분이 있으면 용서하시고, 더 바람직한 번역이 필요하시면, 보다 더 바른 번역을 올려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요약] 

-토라는 메시아이신 예슈아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토라를 따르지 않는 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자입니다.

-전통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토라,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토라를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마음의 할례가 없는 육체의 할례는 무익합니다.

-할례파 유대인일지라도 마음의 할례가 없고, 비할례파 이방인이 마음의 할례가 있으면

  이들이 할례파 유대인들을 주장하게 됩니다.

-마음의 할례를 말하면서 토라를 따르지 않는 것은 돌같이 굳은 마음입니다.

 

-토라는 마음의 할례와 육체의 할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할례의 모델은 아브라함으로, 마음의 할례 후에 언약의 증표인 육체의 할례를 요구합니다.

-육체의 할례는 마음으로 토라를 추구하는 것의 표징입니다.

-바울은 육신의 할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할례를 어떻게 이해할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광야시대를 걷고 있기에 할례의 요구에 대해서 자유 합니다.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행했지만, 디도에게는 할례를 억지로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서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듯이, 앞으로 도래할 메시아왕국에는 더 높은

  차원의 거룩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마음의 할례육체의 할례를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에디 첨니 박사의 토라와 신약 4-6”의 내용으로 볼 때, ‘토라는 일점일획도 폐하지 않았다라고 보는 것이 확실합니다. 에디 첨니는 메시아의 시대에는 거룩함의 수준이 높은 시대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시지요. 에스겔448-9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들이 주 앞에 오려면 마음과 육체의 할례를 받을 것을 요구하실 것입니다.”라는 말씀과 같이, 육체의 할례는 물론이고, 동물희생제사(http://cafe.daum.net/torahschool/V346/17)까지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토라는 일점인획도 폐하지 않았습니다.

-개혁의 때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토라는 일점일획도 폐하지 않습니다.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율법의 작은 것 하나라고 행하며 가르치는 자가 되어 천국에서 큰 자라 일컬음을 받는 자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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