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사 22. 파병국들의 남베트남 원조 급감과 남베트남의 더욱 심각한 막장화

작성자돌아온 월맹군|작성시간17.12.28|조회수2,996 목록 댓글 1

파리 협정은 문서상으로는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켰으나 실제로는 환상에 불과한 평화였다. 베트남에 미군이 있는 한 무력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한 북베트남이 미군 철수의 명분을 주는 문서에 불과한 것이 남베트남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전쟁과 달라진 것은 미군이 미군포로와 함께 남베트남에서 철수한 것 뿐이었다. 그런데도 키신저(Kissinger)와 레둑토(Le Duc Tho)에게 노벨 평화상이라는 것이 수여되었다.

 

이 협정으로 북베트남은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던 정치, 외교전의 목표였던 미군철수를 얻어냈으며 그들의 위장단체인 민족해방전선(NLF), 임시혁명정부(PRG)의 국제적인 인정을 받아냈고 그들의 군대는 남베트남 내에 주둔할 수 있게 되어 이제 그들이 속박받을 제약은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미국은 그렇게 진절머리 났던 베트남 전쟁에서 손을 뗄 수 있는 명분이 생겨 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었고, 전쟁포로도 송환되었으며 닉슨도 쉽게 대통령에 재선될 수 있었다.

소련은 북베트남을 발판으로 동남 아시아에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중국도 1972년 닉슨의 방문 이후 파리 협정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국제무대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오직 패배자는 남베트남뿐이었다. 그들이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지간에 또는 외부의 조종에 의했던 의하지 않았던지간에 그동안 그렇게 전쟁의 구호로 내걸었던 평화와 민족자결의 시대가 온 것이다.

미국과 북베트남의 비밀협상으로 협상의 내용이 베일에 가려졌었고 1972년 10월 18일 협정내용이 남베트남에 통보된 이후에도 불리한 협정내용 때문에 티우(Thieu) 대통령은 이 협정내용의 발표나 토론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비밀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도 그 내용을 남베트남 내 지하공작원에게까지 하달하여 문제점을 토의시키고 차후 대비책을 세우도록 하였다. 현상동결 휴전에 대비하여 임시혁명정부의 기를 사전에 대량 제작하여 휴전 발효와 동시에 베트콩 점령지역이라는 표시로 기를 게양토록 준비시켰다. 파리 협정의 당위성과 파리 협정은 베트남 국민의 자결권에 대한 위대한 역사적 승리임을 주민에 홍보할 수 있도록 요원들을 교육시켜 놓았다. 협정이 조인되자 북베트남은 지하방송을 통하여 회담은 베트남 국민의 위대한 승리라고 발표하였다. 1972년 10월에 민족해방전선(NLF) 중앙위는 캄보디아로부터 철의 삼각지로 이동하였다. 앞으로 구성될 민족화해 단결 협의회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북베트남이 이 기구가 구성되어 통일을 위한 서거를 실시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를 강요하는 고도의 정치선전을 전개하여 티우를 고립시킬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휴전협정이 발효되기 시작하자마자 시작된 것이 깃발전쟁이었다. 남베트남과 베트콩이 서로 자기 지배지역임을 표시하기 위하여 자기네 기를 게양하였다. 그래야 국제 관리감시위원회(ICCS)의 인정을 받아 각각 자기네 영역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베트콩들이 주민을 위협하고 도로를 차단하여 놓고 임시혁명정부 기를 게양하면 남베트남군이 공격하여 지역을 확보하였고 베트콩도 남베트남기가 게양된 지역을 공격하여 이를 확보하는 식의 지역 및 주민장악 쟁탈전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오직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곳은 북베트남 지역 뿐이었다.

국제 관리감시위원회의 구성 국가였던 캐나다는 대표단의 장교 3명이 북베트남군에 억류되었던 사건을 계기로 철수하고 이란으로 대치되었다. 협정 준수를 강요할 수 있는 강제수단이 없는 국제기구는 유명무실한 형식적인 기구에 불과한 것이다.

이 국제기구도 베트남의 평화를 위해서 어떤 구실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며 기여한 것이 있다면 폴란드와 헝가리 대표가 때로는 북베트남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준 것이었다.

국제 관리 감시위원회의 폴란드 대표단

 

국제 관리 감시위원회의 헝가리 대표단

 

협정에 따라 4자 공동 군사위원회의 공식적인 활동이 종료됨에 따라 이를 대신하여 협정 당사국인 남베트남과 임시혁명정부(PRG)의 장교로 구성된 군사 공동위원회가 설치되어 탄손누트(Tan Son Nhut)에 있는 미국의 캠프 데이비스(Camp Davis)에 위치하였고 실종자를 계속 확인할 필요성을 느낀 미국은 북베트남과 양국군 장교로 구성된 공동 군사반을 설치하였다. 이 기구의 활동명목으로 공산측 장교들은 사이공에서 공공연하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1973년 12월까지 1972년도 춘계공세 이전의 수준 이상으로 전력을 회복한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의 전초기지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는 총공세를 주장하는 북베트남 정치국의 강경파들이 공세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티우 대통령도 이에 강경하게 대응하여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초기지를 확보하도록 전 군에 훈령을 내려 특히 북베트남의 보급로를 감제하는 전초기지에는 밀고 밀리는 접전이 계속되었다.

휴전 이후 티우 대통령의 정책은 4대 불가론으로 요약될 수 있다. 영토 양보 불가, 정치적 양보 불가, 공산당 인정 불가, 대북 교역 불가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유세계에 남베트남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고 미국의 계속적인 원조와 유사시 미군의 항공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미군의 철수로 군사력의 균형이 기울어진 상황 하에서 군사적인 견지에서는 무모한 조치였다. 전국에 신장배치된 남베트남군에 비하여 적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전투력의 집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전에는 미군의 강력한 지상 및 항공화력 지원으로 버틸 수가 있었고 결정적인 장소에는 공중기동으로 신속하게 병력을 지원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그와 같은 부자의 전쟁방식으로 전투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부분, 부분의 전투에 얽매어 전투력과 시간을 소진하는 가운데 결정적인 시간은 자꾸 다가오고 있었다. 바둑에 비유한다면 이곳 저곳에서 상대방의 선수에 따라 후수만 두면서 생사에만 얽매이는 가운데 바둑 전체의 대세는 계속 한편으로 기울고 있는 판국과 같았다.

군사작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북베트남의 정치전이었다. 남베트남 정국을 뿌리채 흔들어 놓아야 하는 것이다. 민족화해 단결 협의회를 조속히 구성하여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하였다. 하노이 방송, 임시혁명정부 자유의 방송은 선전을 계속하였고 대학교, 고등학교의 세미나 주제도 ‘민족의 화해와 단결’이었다.

계엄령을 해제하고 야간통금을 없애고 진정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달라고 선동하였다. 끊임없이 유언비어가 만들어 졌고 티우의 독재와 부정이 계속 규탄되었다. 또한 부패한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미국을 공박하였다. 이제 북베트남의 국제외교전의 목표는 미국의 남베트남 원조중지였다. 남베트남 국민들에게는 모두 솔깃한 주장이었다.

1973년 12월 사이공 근처 나베(Nha Be)에 있는 거대한 유류 저장고가 폭파되어 그 검은 연기가 사이공 하늘을 뒤덮었다. 장차 남베트남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처럼 이 검은 연기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심정은 참담한 것이었다.

1973년 폭발하는 나베 저장소


파리 평화협정은 역사적인 승리였다고 선전하였던 북베트남의 전후 실정은 그렇게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처절한 8년 전쟁을 치른 1954년 보다는 나았다. 그때는 다시 미국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기약 없는 전쟁의 길 밖에 없었으나 이제는 미군의 개입만 없으면 통일을 할 수 있는 확실한 전망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8년간 미국의 북폭으로 영토는 황폐하여졌고 국민은 헐벗고 굶주렸다. 산업 활동도 거의 마비되었다. 민생, 군비 어디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논란이 일어났다.

당 정치국원들도 계속 군사적 총 공세를 준비하는데 주력해야 한다는 지압(Giap)을 중심으로 하는 강경파와 트룽 친(Troung Chin)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파로 나뉘어 격론을 벌였다. 당장은 온건론이 우세하였으나 당 제1서기 레 두안(Le Duan)은 균형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트룽 친

 

군인들을 치하하는 레 두안

 

지압의 집념은 끈질겼다. 1946년부터 1972년까지 26년 동안의 전쟁을 주도하면서 때로는 무모한 대공세까지도 서슴치 않고 밀어붙였던 지압은 이번에도 대공세를 취하기 위한 착실한 준비부터 시작하였다. 부상병을 치료하고 병력과 장비 및 물자를 보충하면서도 대공세를 취하는 필수적인 보급로를 확장하고 개선하는데 진력하였다. 1959년도부터 호치민 통로를 개설하기 시작한 선견지명과 같은 맥락이었다.

우선 보급로를 단축시키기 위해서 DMZ 바로 남방에 있는 동하(Dong Ha) 항을 이용함으로써 북베트남 내의 보급기지로부터 사이공 지역까지 25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전에는 75일이 소요되었고 거기에다 미 항공기의 끊임없는 공격까지 받았으나 이제는 아무도 방해할 자가 없었다. 야간에도 헤드라이트를 켜고 유유히 운행할 수 있게 되었다.

기존 호치민 통로도 로폭 8m의 복차도로로 확장하는 공사가 개시되었다. 도한 전천후 사용이 가능한 도로를 만들기 위하여 진흙과 석회를 혼합하여 노면을 단단하게 포장하는 공사도 착공되었다.

군 병력, 청년대 등 3만여 명의 추가병력이 투입되었고 수천 대의 차량이 동원되었다. 각 지역 보급을 위한 지선도로까지 포함하여 연 2만여 ㎞의 도로였다. 송유관 공사도 시작되었다. 동하로부터 중부 고원지대와 사이공 북방 캄보디아 국경 근처에 록닌(Loc Ninh)까지 장장 5,000㎞의 장거리 구간에 구축하는 공사였다.

이 대공사는 1975년 3월 이전까지 거의 완공되었다. 17~18세 때부터 이 통로개설 작업에 참가했던 병사들이 이제는 30대의 장년이 되어 있었다.

1973년 2월 하순부터 정치국원 토 후우(To Huu)와 군 총참모장이며 1975년 공세를 현지에서 총지휘하였던 반 티엔 둥(Van Tien Dung) 대장이 남베트남 내에 있는 주요 부대를 순시하였다. 목적은 치하와 격려, 그리고 현상파악이었다. 남베트남 3, 4군단 지역의 정치, 군사작전을 총지휘하고 있는 북베트남 노동당 남부 지부(COSVN)에서도 현 국제정세와 베트콩의 전력약화로 3~5년 이내에는 새로운 대공세는 불가능하다고 보고하였다.

토 후우

 

반 티엔 둥

 

1973년 6월 닉슨과 브레즈네프의 정상회담이 끝난 후 8월과 9월에 레 두안과 팜반동(Pham Van Dong) 수상은 소련과 중국을 방문하여 원조를 구걸하였다. 그렇게 따뜻한 환대는 받지 못하였다. 경제원조의 사용을 감독하겠다고 나왔다.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래도 향후 2년간 15억 달러의 원조는 북베트남에 절대 필요하였다.

1973년 10월에 제21차 북베트남 노동당 중앙위원회 회의가 개최되었다. 강경파와 온건파 간에 격론이 벌어졌다. 아직은 휴전을 성사시키고 유사시 남베트남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한 닉슨 미 대통령이 건재하였고 중, 소의 지원도 시원찮아 온건론 즉 신중론이 우세하였다. 1979년 이전까지는 결정적 승리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났다. 보 구엔 지압은 유약한 온건론자들과 먼저 투쟁을 하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리한 군사적 상황을 조성하여 승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회의 결과만은 대남 무력통일에 총역량을 집중한다는 내용으로 발표되었다.

회의가 끝난 며칠 후인 11월 6일 지압은 남베트남 2군단 지역의 캄보디아 국경에 인접한 쾅둑(Quang Duc) 성내 남베트남군의 3개 전초기지를 사단규모의 부대로 집중 공격하여 이를 탈취하도록 하였다. 미국의 반응을 기다렸다. 반응은 엉뚱하게도 미 대통령이 의회의 동의 없이는 60일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제한하는 ‘전쟁수행에 관한 결의안’이 11월 7일 미 의회에서 가결(닉슨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이었음)된 것으로 나왔다. 강경파들은 쾌재를 불렀지만 아직은 분위기가 성숙되지는 못하였다.

이미 3만 명 이상의 훈련된 간부급 민간인들을 남베트남의 점령지에 보내 행정업무를 담당하게 하였고, 남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의 증편 및 보충용 병력으로 1973년 말까지 7만여 명의 전투 병력을 남하시켰다. 각종 대공화기, 장갑차 등 주요 전투장비는 획득되는 대로 남으로 보냈다.

1974년 3월초 지압은 전 군의 사단장급 이상의 지휘관과 주요참모들을 하노이에 소집하여 전군회의를 개최하였다. 남베트남의 경제를 마비시키고 남베트남군에게 혼란과 소극적인 수세를 강요하는 기습, 차단, 파괴, 전초기지 탈취 등의 공세를 남베트남 전역에서 지속적으로 실시하도록 지침을 하달하였다. 전면공세가 가능한 유리한 여건이 조속히 조성되어야 반대파들을 설득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 협정으로 휴전이 되었다고 하나 남베트남 국민들은 이제는 전쟁이 없는 평화가 온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오직 남베트남만이 패배자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지역과 주민장악 쟁탈전이 계속되어 곳곳에서 도로가 차단되며 각지의 송전선이 절단되는 등 전과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다.

사회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남베트남 경제를 지탱하던 달러가 없어졌다. 그렇게 풍성하게 지원되었던 물자도 끊어졌다. 미군이 철수하자 미군을 상대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이 실직되었다. 오일쇼크로 유가가 4배나 뛰었다. 어민들은 고기를 잡아봐도 배의 기름값도 안 되었고 미국이 준 경운기, 트랙터도 움직일 수 없었다. 물가가 65%나 뛰었다.

그래도 북베트남보다 물자는 풍성하였고 생활은 윤택하였다. 남베트남 군인들은 군복, 군화와 양말, 철모를 착용하였지만 베트콩들은 폐타이어를 잘라 손으로 만든 샌달을 신었고, 군복 같은 것은 없었다. 도시의 남베트남 여성들은 대개 몇 벌의 아오자이를 가지고 있었고 남자들은 양복도 있었지만, 하노이 시민들은 검은 옷, 카키색 바지가 고작이었다. 아오자이는 고급관리들의 딸이나 가지고 있었다. 남쪽 사람들은 고기도 많이 먹었으나 북쪽사람들의 부식은 소금이 고작이었고, TV, 냉장고 따위는 생각도 못할 처지였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문명의 이기는 인간의 생활을 풍성하게 만들고 편리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문명의 이기는 이에 상응하는 정신문화가 뒤따르지 않으면 인간의 정신을 나약하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 그 풍성과 편리함에 젖어들면 더욱 더 그것을 추구하게 되고 그것을 잃었을 때는 쉽게 좌절해 버린다. 누구나 이 풍성함을 추구하는 가운데 온갖 부조리가 생겨나고 추구한 것을 성취하지 못한 자는 불만과 원망이 쌓여 사회는 분열하게 되는 것이 개발도상국들의 통례이고 남베트남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프랑스의 분할통치 시에 더욱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남베트남 사회의 부정은 미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더욱 극치를 이루었다. 미국의 막대한 원조와 물자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남베트남 사람들은 가난에 눈을 뜨게 되었고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되든 나 혼자만 잘 살면 된다는 변질된 개인주의까지 사회에 풍미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로 많이 가지려는 투쟁이 전개된 것이다. 남베트남 사회의 부정부패는 모든 사회계층에 만연되어 그 사례를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으나 대표적인 몇 가지 사례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남베트남 항공사 사장 구엔 탄 트룽(Nguyen Tan Trung)은 티우(Thieu) 대통령의 친구였고 티우의 딸이 그의 며느리였다. 도쿄, 홍콩, 싱가포르 등지에서 꼬냑, 담배, 가전제품 등의 사치품을 가득 실은 남베트남 항공사 항공기가 비엔 호아(Bien Hoa)의 공군기지에 먼저 착륙하여 승객들이 창문으로 보고 있는 가운데 짐을 하역하고 탄손누트(Tan Son Nhut) 공항으로 날아갔다.

이와 같은 많은 물품을 구매하는데 소요되는 달러를 국내에서 모두 바꿀 수는 없었다. 홍콩에는 남베트남 피아스타를 다른 은행보다 좋은 조건으로 달러로 환전해 주는 은행이 있었다. 이 은행은 중국이 운영하였고 이 피아스타는 북베트남을 거쳐 남베트남 내 베트콩들에게 들어갔다. 그들은 암시장에서 군수물자를 구입하였고 기업을 인수하여 이익을 남겨 다시 베트콩 자금으로 쓸 수 있었다.

전장에서 소총부터 포병화기의 탄피, 파괴된 탱크, 항공기, 트럭 등의 고철은 굉장한 이권이다. 베트남 전쟁기간 동안 국제 철강가격은 계속 오름세에 있었다. 미국도 이 고철은 통제하여 본국으로 수송하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헬기가 이를 즉각 후송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남베트남군이 수집하는 고철은 군용차로 항구로 운반되어 공해상에서 거래되었다. 이 이권에는 리롱탄(Ly Long Than)이 개입되었다고 한다. 리롱탄은 사이공 실업계의 거물이며 그의 부인은 티우의 부인과 의자매였으며 남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려면 필히 알아야 할 인물로 통하였고, 남베트남이 패망한 후에는 미국 버지니아 주에 30만 달러짜리 저택을 구입하여 호화생활을 하였다.

구엔 반 티우의 아내

 

고위관리도 예외일 수 없다. 예를 들어 경제장관 팜킴곡(Pham Kim Ngoc)은 대만에 8백만 달러의 현금통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민담당 부서의 뇌물은 유명하여 1966년도에 10,000달러면 병역을 면제받고 해외유학을 갈 수 있었다. 어떤 분야이든 어떤 직위에 있든 뇌물을 주고받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경찰의 묵인 하에 약국이나 바, 기타 유흥업소에서 미군과 남베트남인에게 마약밀매가 공공연하게 성행하였다.

매관매직이 성행하였다. 가장 고가의 직책은 사이공 촐론(Cholon) 지구 경찰서장으로 1970년도에 1300만 피아스타, 미화로 13만 달러였다고 한다. 성장(省長) 중에 가장 고가는 메콩 델타 지역 캄보디아 국경에 인접한 차우 둑(Chau Duc) 성장으로 8만 달러였다고 한다. 당시 남베트남에는 소가 부족하여 캄보디아에서 들여오고 있었는데 그곳을 통과하는 소에 두당 얼마씩 상납받으면 두 달이면 본전을 뽑고 나머지 기간 동안 거두어들이는 것은 순이익이었다는 것이다.

생명을 걸고 전투를 하여야 하는 적과 장비와 물자를 거래하는 한심한 일도 일어났다. 1973년에 티우는 구엔 빈 기(Nguyen Vinh Nghi)를 중장으로 진급시켜 제4군단장에 보직시켰다. 제4군단 지역에서 베트콩에게 계속 밀리자 남베트남군 참모본부에서 원인을 조사한 결과 25,000정의 소총과 8,000대의 무전기가 기가 재직하는 동안 베트콩들과 거래된 사실이 드러났다.

구엔 빈 기 중장

 

제3군단 예하 5사단, 25사단에서는 쌀, 장비가 부정 유출되어 조사 후 사단장이 해임되었다. 조사과정에서 유령군인, 꽃군인이라는, 지금까지 은닉되었던 사례가 드러났다. 유령군인이란 가공인물을 날조하여 병력에 포함시키거나 병적만 올려놓고 본인은 부대를 떠나 자기집에 있는 군인을 말하며, 꽃군인이란 고급장교의 사택에서 일을 보거나, 부업장소에서 일하거나, 군 예술대 등의 일을 하는 군인을 말한다.

부정과 부패는 남베트남인들의 생활방식이 됐을 뿐만 아니라 생존수단이 되어 버렸다. 이와 같은 사회현상은 불평과 불만, 상호불신을 초래하게 되고 빈부의 차와 연계되어 베트콩들의 선전이 그럴듯하게 먹혀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유언비어가 계속 난무하였다. “티우 정권은 붕괴되고 두옹 반 민(Duong Van Minh) 장군이나 다른 중도파가 나와 협상을 할 것이다.”, “키신저(Kissinger)와 레둑토(Le Duc Tho)가 퀴논(Qui Nonh) 남부를 기점으로 남베트남 분할에 합의하였다.”, “키(Ky)나 민 장군이 쿠데타를 한다”는 유언비어에 남베트남 사람들은 전전긍긍하였다.

엄청난 미군의 화력지원, 물량지원, 50만 명 이상의 미군이 참전하였어도 승리하지 못한 전쟁을 이제는 남베트남 혼자서 해내야 하였다. 대동단결이 필요한 때였다. 거국내각을 구성하여 전 국민의 힘을 결집해야 할 시기인 것이다. 필요성이 논의도 됐었다. 그러나 교섭을 맡은 인사는 요구조건이 있었다. 특정직위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 것이면 진작 이루어졌을 것이다.

카톨릭 신부 트란 후 탄(Tran Huu Thanh)은 동료신부들과 1974년 9월 “부정추방 국민운동”을 제창하고 7개항에 걸친 티우(Thieu) 대통령의 부정고발장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전국이 들끓었다. 연일 데모가 계속되었다. 북베트남에서는 총공세 논의가 한창이어서 조기공세를 주장하는 강경파에게는 남베트남의 내부혼란이 더없는 호재였다.

트란 후 탄 신부. 남베트남 패망 후 북베트남에 의해 투옥된다.

 

1974년 10월 하순에 티우 대통령은 부정의 혐의가 있는 4명의 각료를 경질하고, 제4군단장 구엔 빈 기를 해임, 구엔 코아 남(Nguyen Khoa Nam) 중장으로 교체하였다. 또한 400여 명의 영관급 장교의 보직해임을 단행하였다.

구엔 코아 남 중장. 남베트남 패망시 4군단장으로 자결한다.

 

1974년 12월 말 푸옥 롱(Phuoc Long) 성 전투가 한창이고 북베트남에서는 최초 공세 지역과 공세 시기가 한창 논의될 때 탄 신부는 티우 대통령이 파리 협상의 대가로 7억 달러를 미국으로부터 받았다고 고발 제2탄을 내놓았다.

1975년 2월 3일 탄 신부는 고발 제3탄을 내놓았다. 군사적 상황이 점점 더 긴박해지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티우도 가만있지 않았다. 탄 신부는 종교적 이유와 대내외 여론으로 어쩔 수 없었고 이를 보도한 5개 일간지를 정간시키고 18명의 언론인들을 체포하였다. 전국이 또 한번 들끓었다. 이미 총공세를 위한 북베트남군의 부대이동은 개시되었고 북베트남군 반 티엔 둥(Van Tien Dung) 총참모장은 공세를 현지에서 지휘하기 위하여 하노이를 떠나고 있었다


 

티우 대통령은 푸옥 롱 성 전투실패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 두 쿠옥 동(Du Quoc Dong) 중장의 후임으로 제3군단장에 구엔 반 토안(Nguyen Van Toan) 중장을 임명하였다. 토안 중장은 티우가 신임하는 측근으로 제2군단장으로 있다가 1974년 12월에 부패장군이라는 여론의 압력으로 팜반푸(Pham Van Phu) 소장에게 인계하고 기갑사령관으로 있었다. 미국의 판단도 토안 중장은 남베트남군에서는 보기 드문 우수한 야전사령관이라는 것이었다.

두 쿠옥 동 중장. 공수부대 출신으로 남베트남의 숱한 쿠데타에 주역으로 참여했다.

 

구엔 반 토안 중장

 

팜 반 푸 소장. 남베트남 패망시 2군단장으로 자결한다.

 

이 같은 혼란의 와중에서 북베트남의 대공세가 있기 전 4개월여 동안에 4명의 군단장 중에서 3명이 교체되고 수백 명의 영관급 장교의 인사이동까지 겹쳐 남베트남군은 진통을 겪어야 했다.

이러는 가운데 귀중한 시간은 허송되었다. 대통령도, 관리도, 사회도, 군대도 모두 부패하였다는 체념 속에서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여기에다 미국의 원조는 격감되어 장비, 탄약, 유류는 줄어들고 북베트남군의 공세는 점점 더 가열되어 병사들의 사기는 저하되고 전 국민은 불안에 떨면서 패배의식이 전염병처럼 번져 나갔다.



파리 회담의 진행 동안 그리고 조인 후에도 닉슨 대통령은 남베트남 지원을 계속 약속하였다. 협정내용을 가지고 티우(Thieu) 대통령이 반대하자 닉슨은 “협정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은 북베트남이 침략을 재개할 때의 대응조치이며 이 같은 사태가 발생 시는 강력히 그리고 신속히 대응”할 것을 다짐하였다.

1973년 1월 중순 닉슨은 애그뉴(Agnew) 미 부통령을 남베트남에 보내어 티우를 설득하도록 하였고 친서에서도 ‘협정 후에도 원조를 계속할 것과 북베트남이 협정을 위반할 경우 전력으로 대응할 것을 보장’하였다. 협정이 조인된 후에 티우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도록 초청하였다.

1973년 4월 2일 티우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하여 샌클레멘트(San Clemente)의 서부 백악관에서 닉슨 대통령과 회담하였다. 미국의 계속지원이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점점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중동전쟁으로 인한 석유파동으로 미 국내에도 인플레와 실업률이 높아갔다. 문제는 미 의회의 태도였다. 잘못된 지역에서 잘못된 전쟁을 치른 남베트남에는 이제 관심이 없었다. 때마침 터진 워터게이트 사건은 닉슨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부패한 독재정권인 티우 정부를 지원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가 빗발쳤다. 티우 대통령도 카오 반 비엔(Cao Van Vien) 참모총장을 1974년 4월에 미국에 보내어 지원을 호소하였으나 미 의회는 1975년 회계연도 분으로 7억 달러의 군사원조만을 승인하였다.

카오 반 비엔 참모총장

 

※ 휴전 후 미국의 대베트남 군사원조액 단위 : 억 달러

회계년도

1973

1974

1975

요청액

29.24

11.85

14.5

의회 승인액

25.62

9.07

7.0

감소량

-3.62

-2.78

-7.5


 

이 7억 달러 내에는 4,600만 달러의 주베트남 미 국방무관실의 운영비가 포함되어 있어 실제는 6.54억 달러인 셈이다. 미 국방부가 요청한 액수의 절반도 안 되는 군사원조는 남베트남군의 전쟁수행 능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긴축조치가 취해졌다. 탄약은 1972년도 북베트남군 춘계공세시를 기준으로 가용 보급률은 대략 1/4수준으로 저하되었다. 그래도 추가군사원조가 없으면 재고량은 1975년 6월이면 다 소모될 전망이었다. 유류도 1973년도 소모량을 기준으로 30%를 감소시켰으나 이것도 1975년 5월까지의 저장량 밖에 없었다.

각종 장비의 가동률은 70~90% 선이었으나 부품부족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저하되었다. 장비증강은 불가능하였고, 민병대(PF)의 PRC-10 구형 무전기도 PRC-25로 교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사용해야 했다.

PRC-10

 

PRC-25

 

공군도 200대 이상의 항공기를 가동시킬 수 없었고, 이미 구매 발주한 36대의 F-5E 전투기는 취소되었다. 미국에서 교육중인 조종사, 정비요원 등을 귀국시키고 1,000여 명의 공군병력을 육군으로 전환하였다. 비행시간의 감축으로 1973년도와 비교하여 화력지원이 50%, 정찰임무가 58%, 헬기수송도 70%로 감소되었다. 공수능력의 감소로 신속한 병력증원, 탄약 및 물자 재보급, 의무후송 등이 미군이 있을 때와 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자 지금까지 ‘부자의 전쟁방식’에 젖어있던 남베트남군에게 심리적 충격을 주었다. 해군활동도 평균 50%로 감소되었다.

그러나 남베트남군의 근본문제는 탄약, 유류의 재고량이나 장비의 가동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데에 있었다. 부자도 아니면서 어느 날 부자가 와서 그 도움으로 부자의 생활방식으로 살다가 어느 날 부자가 떠나가자 가난한 자의 생활방식으로는 못 살겠다는 마음자세인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1974년 8월 8일 닉슨이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남베트남에게는 대충격이었고 북베트남으로서는 희소식이었다. 1972년도 크리스마스 폭격과 같은 과감한 공격을 감행했던 장본인이 사라진 것이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포드도 취임 후 티우에게 친서를 보내어 의회의 제동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으나 이들을 설득시켜 곧 추가원조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겠으며 현재의 중요한 시기에 키신저(Kissinger) 국무장관과 마틴(Martin) 주베트남 대사도 유임시켜 현 미국의 남베트남 지원정책을 계속하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워터게이트 사건

 

제럴드 포드

 

헨리 키신저

 

그래험 마틴 주베트남 미 대사

 

캄보디아에서 크메르 루즈군이 연말부터 공세를 취하고 1975년 1월 6일에 푸옥 롱(Phuoc Long) 성이 북베트남군에게 함락당하자 키신저는 1월 7일 위기조치반을 소집하여 인도차이나 사태를 논의하였다. 아직 전면공세는 아니라고 판단하였으나 명백한 휴전위반에 대응하기 위하여 남베트남에 3억 달러, 캄보디아에 2억 달러의 추가 군사원조를 의회에 요청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미 의회는 베트남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민주당 의원들은 부패한 독재정권의 지원을 반대하고 나섰고 남베트남의 탄(Thanh) 신부를 지원하고 있었다. 내년도 선거를 위해서도 포드 대통령의 입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지금까지 종횡무진 비밀 외교협상을 주도한 키신저에 대한 반감까지 겹쳐서 이를 견제하고 의회의 입장을 강화시켜야 하였다.

의회가 승인하지 않자 미 행정부는 “우리는 티우의 독재정권을 지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55,000여 명의 미군이 생명을 바쳐서 수호한 남베트남을 이제 와서 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 설득하면서 의원들이 남베트남을 직접 방문하여 현지의 실정을 본 후에 판단하도록 권유하였다.

1975년 1월 하순부터 3월 초 사이에 상당수의 미 상, 하 양원 의원들이 조별로 남베트남을 다녀갔다. 각자 원하는 대로 순시하였다. 맥클러스키(McClosky) 하원의원은 최전방 1군단 지역을 헬기로 다녀왔다. 모든 곳이 평온하였고 위험하지도 않았다. 그가 보기에는 남베트남 사정이 그렇게 악화되지 않았다. 이미 북베트남은 미 의원들이 방문하는 동안 일체의 전투행위는 중지하도록 지시한 바 있었다.

추가원조 3억 달러는 남베트남, 북베트남 양측의 최대 관심사인 것이다. 남베트남은 필요했고 북베트남은 이를 저지해야 했다. 북베트남이 가진 미끼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2,700여 명의 실종자에 대한 생사여부와 그들의 유해 송환이었다. 담당 북베트남 관리의 명의로 에드워드 케네디 미 상원의원에게 개인서신도 보냈다. 미국이 추가원조를 하지 않는다면 실종자에 대한 추가정보가 있다고 하였다.

남베트남은 미 의원들의 영향력을 감안하여 정중하고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좋은 여건은 아니었다. 5개 일간지를 정간시키고, 공산주의자라는 명목으로 18명의 언론인을 체포하여 전 세계 언론들이 이를 대서특필한 바 있었다. 바틀렛(Bartlett) 상원의원과 맥클러스키 하원의원은 이 체포된 언론인들을 면담하자고 하였다. 할 수 없이 경찰국장이 수행하여 면담하였다. 그들은 자기네들이 공산주의자였다고 시인하였다. 경찰국장 없이 면담을 하고 싶다고 주장하였다. 논란 끝에 경찰국장이 나가자 그들은 고문을 많이 받아 그렇게 되었다고 번복하였다. 미 의원들은 티우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말하였다. 티우는 공산주의자들은 당연히 그렇게 대답하였을 것이라고 응수하였다.

미 대사관은 통역요원이나 안내를 제공할 필요가 없었다. 많은 의원들이 통역관은 반정부 인사나 정치범으로 구속되었던 인사들 중에서 선정하였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났다. 티우 대통령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일부 의원들의 행동은 거만하였고, 건방진 질문도 던졌고, 마치 지배자처럼 행세하였다. 후에 마틴 대사는 티우 대통령에게 정중히 사과하였다.

미 언론들은 탄손누트(Tan Son Nhut)에 있는 군사 공동위원회와 공동 군사반을 방문하였다. 임시혁명정부(PRG)와 북베트남군 장교들은 이들에게 미국은 더 이상 남베트남인들의 자결권을 침해하지 말라고 일방적으로 선전하였고 실종자에 대한 문의는 전혀 답변이 없었다. 방문동안 펜윅(Fenwick) 여성 하원의원의 핸드백에 든 400달러가 없어졌다. 아마 이들을 맞은 북베트남 장교들 중 누군가가 이 돈을 해방(?)시켰을 것이다.

이들이 돌아간 후에도 추가원조 승인 소식은 없었다. 일부 의원들은 미 행정부가 또 다시 잘못된 장소에서 구제수단을 강구하고 있다고 이를 견제하려 하였다. 남베트남과 캄보디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련, 중국과 협상하라고도 하였다.

미 의원들의 남베트남 방문은 남베트남인들에게 크나큰 실망을 주었고, 구구한 억측과 유언비어를 낳게 했다. 특히 티우 대통령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안겨 주었다. 더 이상 미국의 추가원조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들의 마지막 일행이 떠난 지 열흘도 안 되어, 중부 고원지대에서 북베트남군의 총공세가 개시되자, 미국의 추가원조 없이 현 전선을 지탱할 수 없다고 판단한 티우 대통령은 남베트남군을 재배치하기 위한 중부 고원지대의 철수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남베트남군 참모총장 카오 반 비엔 대장은 말하였다.

남베트남은 휴전 후부터 일본, 프랑스 등의 국가에 사절을 보내어 원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각국 지도자들은 검토하겠다는 외교용어뿐이고 대시 남베트남의 내정개혁 필요성만 역설하였다.

키신저는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중동 평화협상을 위해 분주하게 중동 각국을 순방 중에 있었다. 미국이 가장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지역이다. 그가 당면해야 하는 애로는 이집트나 이스라엘이 상호양보를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이를 보장한다고 하나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현재 태도로 보아서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베트남군의 총공세가 시작된 후 키신저가 사우디 아라비아의 파이잘(Faisal) 왕에게 남베트남 지원의 의사를 넌지시 타진하자, 파이잘 왕은 미국 대신 사우디 아라비아가 남베트남에 거액의 원조를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뜻밖의 장소에서 해결사를 만난 셈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파이잘 왕은 사흘 후에 조카에 의하여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것은 파이잘 왕의 개인의사로서 그가 죽은 후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잘 왕



휴전 이후 남베트남군은 ‘표범무늬’ 형태의 현 전선을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를 확보하면서 각 지역별로 방어능력을 향상시키고 유사시 적이 병력을 집중하여 공격을 시도할 때 융통성있게 대처할 수 있도록 지역별 예비대와 중앙예비대를 증강시키는데 노력을 집중하였다.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다 지키려는 것이었다.

각 성(省)은 민병대(PF)와 지방군(RF)으로 지역을 방어하고 24개의 지방군 대대와 1개 포대(4문)를 차출하여 연대규모의 지역기동부대를 만들어 각 군단장이 이를 통제함으로써 정규사단의 지역책임을 감소시켜 융통성을 더욱 증가시키려고 하였다.

1975년 초까지 남베트남군은 4개 보병여단, 1개 해병여단, 1개 공수여단, 2개 기갑대대 등의 전투부대를 창설하여 중앙예비 전력을 증강시키도록 하였다.

1973년 후반 남베트남의 대륙붕에서 석유가 발견되었다고 낙관적인 분위기가 고조되어 110만의 병력을 100만으로 감축하였다가 1974년 말부터 다시 110만 명으로 증가하도록 환원되었다. 문제는 매월 총병력의 1.5~2%에 달하는 탈영병이었다. 일년 간 탈영한 병력은 전 병력의 1/4이 되는 것이다. 어떤 탈영병은 장기간 숨어 지내다가 개명하거나 신분을 위장하여 재입대하기도 하였다. 신병충원은 병역기피자가 많아 계획대로 보충되지 못하였다. 보병대대는 인가 약 800명에 500명의 병력 수준이면 양호한 편이었다.

남베트남군은 북베트남의 대공세가 있을 경우에는 미 해,공군의 항공지원이 있을 것으로 전제하여 미 국방무관실(당시 국방무관은 호머 스미스(Homer Smith) 육군소장)과 합동으로 지원요청 절차를 마련하고, B-52 전략폭격기의 표적들을 항상 최신의 것으로 유지하였다.

호머 스미스 육군소장

 

남베트남군의 편성에는 해, 공군 사령부가 별도로 편성되어 있으나, 육군사령부는 편성되지 않아 1970년 7월부터 참모본부가 명목상 4개 군단을 지휘하는 육군 사령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면서 해, 공군 사령부도 감독할 권한을 가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티우(Thieu) 대통령이 4개 군단을 직접 지휘하고 참모총장은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는 정도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대통령의 결심사항에 대하여 세부 실시사항을 계획하고 감독하였다.

남베트남군 병력은 11개 보병사단, 해병사단, 공수사단 등의 정규군 470,000명, 지방군, 민병대 527,000명, 해군 40,000명, 공군 63,000명 등 총 110만여 명이었다.

주요장비로는 전차 600여 대, 장갑차 1,200여 대, 헬기 500여 대, 항공기 1,270대, 각종함정 1,500여척 등이다.

1975년 당시 세계 제4위의 공군력을 자랑하던 남베트남의 주력기 F-5A

 

북베트남군은 정규군 47만 명, 기타 53만여 명 등 총 100만여 명, 전차, 장갑차 600여 대, 항공기 342대, 각종함정 39척 등으로 추정되었다.

외형적인 전투력은 남베트남군이 북베트남군보다 우세하다. 병력면에서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으나 장비 면에서는 남베트남군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어느 군대의 강약점은 평시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전쟁에서는 적나라하게 적에 의해서 노출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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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레바남 | 작성시간 17.12.29 남베트남 같은 유사국가는 뭘해도 막장일수밖에 없는 현실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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