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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훈련자료

영성에의 길 part 1 - 능력의 길

작성자숲속의호수|작성시간19.06.21|조회수150 목록 댓글 0


영성에의 길(Finding My Way Home)

- Henri J. M. Nouwen, ivp. 숲속의호수.

1. 능력의 길 연약함의 신학”, 신앙에 입각한 영적인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

비행기나 산에 올라 풍경을 내려다 보듯, 때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인간의 상황을 좀더 정확하게 바라보도록 할 뿐 아니라 중요한 질문들을 제기하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의 삶과 세상을 이렇듯 멀리서 바라보기를 원한다. 단순히 비행기나 우주선을 이용한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신앙에 입각한 영적인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자 한다. 위로부터, 하나님의 눈으로...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이것이 바로 신학이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실재를 바라보는 것이니...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다양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나아가 살아갈 방법들을 분별하도록 도와준다. 능력의 길은 실로 연약함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의 깨어짐, 유한함, 상처, 연약함의 경험들을 바라보기를 원한다. 그러한 시각이 이 땅을 여행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을 제공하기를 소망하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방식대로 그것을 바라보도록 하자.

권력 억압하고 파괴하는 권력

하나님은 틀림없이 우리 세상을 보시며 울고 계시리라. 권력을 향한 강한 욕망이 인간의 영혼을 함정에 빠뜨리고 부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뉴스나 혹은 주변에서 감사대신 원한이, 용서대신 복수가, 치유대신 상처가, 긍휼대신 경쟁이, 협력대신 폭력이, 사랑대신 끝없는 두려움이 있음을 본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의 손에 거머쥐고 그것을 다른 사람 앞에서 자랑함으로써 자초한 고통과 번민을 아시기 때문에 울고 계신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우리 주변와 내부를 들여다볼 때, 권력에 대한 욕망이 팽배해져 있음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주목이나 인정, 보상을 받고 있는지에 온통 신경을 쓰고 있으며, 주위 사람들보다 좀더 나은지, 좀더 강한지, 좀더 빠른지에 대해 늘 확인하고자 한다. 또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들을 성공과 영향력, 명성을 향한 경주의 라이벌로 인식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불안한 나머지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통제할 수 있다면 어떤 형태의 권력이라도 붙잡으려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이러한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자 한다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나 다툼, 갈등과 분쟁 등과 별반 다를 바가 없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자신의 안전이 위협을 받으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우선 이용할 수 있는 막대기나 총을 움켜쥔다. 다른 수 천 명의 사람들의 생존을 지키지 못하게 되더라도 우리의 생존이 중요한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움켜쥐는 막대기와 총은 나보다 영향력이 많은 친구나 돈, 학위,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사소한 재능, 특별한 지식이나 숨겨진 기억 등으로, 통제하는데 필요하다면 주저없이 움켜쥐고서 스스로도 인식하기도 전에 친구들을 밀쳐내 버리고 만다. 그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울고 계신다. 우리가 자아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권력을 사용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우리의 삶은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서로에게서 분리되고, 우리의 삶은 악마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적, 정치적 권력보다 더 나쁜 것이 바로 종교적 권력이다. 기도하고 찬양드리며 하나님을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많은 이들 역시 권력에 오염되어 있으며, 이에 하나님께서 우시며 분노하신다(29:13). 가장 교활하고 분열을 일으키며 상처를 주는 권력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사용되는 권력이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은 사랑의 표현을 기대했을 때 권력이 사용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경제적, 정치적 불확실성이 두드러진 이 시대에 가장 큰 유혹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신앙을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권력행사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인간의 명령으로 대체하도록 한다. 복음을 선포하는데 권력이 사용될 때 좋은 소식은 금세 나쁜 소식으로 바뀌고 마는데, 이것이 하나님을 화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당신의 슬픔이나 분노보다 훨씬 커서(30:5),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비 가운데 하나님 자신의 무력함을 통하여 악의 권력을 없애기로 선택하셨다.

무력함 성육신과 십자가의 신학

세상을 지배하고 땅을 파괴하는 악마적인 권력에 대하여 하나님은 스스로 무력함을 선택하셨다. 철저히 연약한 모습으로 인간역사 속에 들어오기로 하셨는데,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성육신 - 어린 양의 연약함). 권력의 환상을 폭로하기 위해, 세상을 지배하는 어둠의 왕을 물리치기 위해, 분열된 인류에게 새로운 하나됨을 가져다주기 위해 무력한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신적인 자비는 완전하고 순전한 무력함을 통해 드러났다. 우리는 전능하고 능력 많으신 하나님께기도하지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신 그분은 모든 힘과 권세가 없는 상태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연약함으로 점철된 인생을 사셨던 그 나사렛 사람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의 연약함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친밀함과는 거리가 멀다. 일반적으로 권력을 가진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우러러보거나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력은 정반대여서, 우리가 그분을 두려워하거나 거리를 두거나 부러워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친밀하게 오시기를 원하신다.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아이처럼 친밀한 가운데 안주할 수 있도록...(131). 그래서 하나님은 작은 아기가 되셨다. 무력한 사람이 되어 전적으로 의존하며,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자라 우리 가운데 사시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인간에게 의존하는 자가 되셨다. 우리 품에서 얼르고 있는 아기를 어찌 두려워하고 우러러보며 부러워하겠는가? 이것이 성육신의 신비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연약함으로 권력의 장벽을 극복하시기 위해 우리와 동일한 모습으로 인간이 되셨다.

이 예수님의 이야기는 말구유의 무력함에서 시작하여 십자가의 무력함으로 끝이 났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손과 발이 못박힌 채 벌거벗은 모습으로 매달리셨다. 납이 달린 채찍에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로, 친구들의 거부와 적들의 모욕으로 마음이 상한 채로, 번민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정신으로, 버림받은 상태의 암흑에 휩싸인 영혼으로, 그야말로 완전히 연약하고 무력한 상태로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를 긍휼의 품안으로 되돌리시기 위해, 그리고 한없는 자비 속에서 분노가 녹아 없어졌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선택하신 방법이다. 그것은 무력한 탄생이요, 무력한 죽음일 뿐 아니라 무력한 인생이었다.

예수님은 무력함 가운데서 복을 받으셨는데, 이것은 사역을 시작하실 때 제시하신 자화상에 잘 나타난다. 산상수훈의 팔복이야말로 예수님의 자화상으로, 그가 바로 가난한 자, 애통한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핍박을 받는 자였다. 이것은 무력한 하나님의 초상인데, 이는 또한 병든 자, 죄수, 난민, 고독한 자, 성적 학대의 희생자,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접하게 되는 자화상이기도 하다. 진정 하나님의 무력함과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한 부분이 되신 인류의 무력함이 사랑의 집으로 가는 문이 되었다.

능력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무력한 하나님에 대한 증인으로 살아가면서 사랑과 평화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는가?”

이 세상은 분리하고 파괴하는 사단의 권세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다. 하나님은 무력한 예수님을 통해 이 권세들을 무장해제 시키셨다. 하지만 우리는 연약함의 신학이 갖는 위험한 함정에 접하게 되는데, 만약 이것이 유약한 자들을 위한 신학(?)이 된다면 자칫 무능력, 굴복, 자학, 패배에 대한 변명과 핑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비판한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연약함의 신학은 가난한 이들을 계속 가난에 머무르게 하며, 기성 종교 집단의 지도자들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들로 하여금 비굴한 굴종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얽어매는 기회를 주었다고 말이다. 이처럼 극도로 위험해질 수 있는 무력함, 연약함, 작음의 영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진정 연약함의 신학은 사회와 교회의 힘있는 자들이 우리를 조종하도록 허용하는 세속적인 연약함이 아니라, 인류의 상처를 치유하고 이 땅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진정한 통로가 되도록 우리를 열어주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의뢰하는 것으로, 연약함을 바라보라고 도전한다. 이 신학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능력을 주장한다. 실로 이것은 권력 싸움에 얽매여 있는 인류를 보고 우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며, 종교적인 사람들도 권력을 탐욕스럽게 사용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보여준다. 또한 하나님이 어떻게 완전히 무력한 모습으로 역사 속에 들어오시어 세상과 교회의 권력 싸움을 폭로하시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연약함의 신학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셔서 고개를 들고 자신있게 이 땅을 걸을 수 있도록 하셨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득찬 분으로, 그가 가는 곳은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죄를 용서할 능력, 질병을 치유할 능력, 생명을 주실 능력 등 모든 능력이 있음을 주장하셨다. 그가 하신 마지막 말씀 또한 이런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28:1820). 능력이 주장되었고, 또 능력이 주어졌다. 하나님은 연약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권능을 주시고, 예수님이 가지셨던 능력을 주고자 하신다.

연약함의 신학은 하나님이 권능을 부어주시는 신학이다. 그것은 유약한 이들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신의 빛을 밝히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하게 하는 사랑의 능력을 주창하는 자들을 위한 신학이다. 우리는 가난하고, 슬퍼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깨끗하며, 평화를 이루며, 적대적인 세상에 의해 핍박받는 자들이다. 그러나 유약하거나 학대받아도 가만히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것이며, 이 땅은 우리의 기업이다. 우리는 위로를 받으며 배부를 것이고, 자비를 덧입고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며... 하나님을 볼 것이다. 이것이 능력, 진정한 능력, 위로부터 오는 능력이다.

힘을 통한 능력에서 무력함을 통한 능력으로 옮겨가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서 조금의 권력이라도 움켜잡으려 하는 지속적인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권력들은 우리로 작은 꼭두각시처럼 죽을 때까지 줄에 매달려 흔들리며 살아가도록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권력이 없는 가난한 이들을 향해 다가가며 무력함으로 세례를 받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의 마음으로 빠져들어 간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지셨던 것과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자유롭게 이 세상에 다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머리를 들고 우리 인생의 십자가 아래 자신있게 서서 어둠과 눈물의 골짜기를 걸어갈 수 있다.

우리 공동체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감히 위험을 무릅쓰며 새로운 주도권을 쥐고 나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이 능력이다. 우리로 하여금 주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대할 때, 비둘기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롭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능력이다. 우리로 재정적인 자원을 가진 사람들과 물질을 나누는 것에 관해 주저없이 올바로 이야기하고, 사람들을 철저한 섬김으로 부르며, 인류를 섬기는데 장기간 헌신하라고 도전하며,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선포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능력이다.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두려움 없는 성도(saint)로 빚는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결론 쥐고 있는 벽돌을 내려놓으며 우리의 손을 비울 때..

분열시키는 권력으로부터 연합시키는 능력으로, 파괴적인 권력으로부터 치유하는 능력으로, 마비시키는 권력으로부터 권능을 부여하는 능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위로부터 보게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첫째는 우리 주변과 이 세상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훈련이다. 어둠의 권세가 더욱 잔인한 모습으로 끔찍한 음모를 꾸밀수록 가난한 자들의 고통과 울음소리는 커질 터인데, 이런 고통스러운 광경에서 도망쳐서는 안된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난한 자들을 진정으로 돌볼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주시리라 신뢰하는 훈련이다. 우리는 필요로 하는 만큼 재정적, 정서적, 육체적 도움을 받게 될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험을 감행할 때에 미처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많은 문들이 우리를 향해 열릴 것이다.

세 번째로 고통 때문이 아니라 기쁨으로 인해 놀라는 훈련이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서 아름다운 작은 꽃과 고통의 심연에서 신선한 물이 샘처럼 솟아나는 치유의 능력으로 인해 놀라워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초점을 맞춘 눈과,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공급받을 수 있다고 신뢰하는 마음과, 항상 기쁨으로 인해 놀라워하는 영혼을 소유할 때 우리는 진정한 능력을 행하는 자가 되어, 기적을 행하고 증거하면서 이 어둠의 골짜기를 걸어갈 것이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것이 되어 우리 안에서 넘쳐날 것이다.





첨부파일 15영성에의길(Finding My Way Home) p1-능력의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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