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윤리
- 황영철, 대장간, 숲속의호수^^
제1장 구원과 윤리
1. 문제제기 … 목회자 세습 문제, 재정 사용의 불투명, 성적 스캔들, 교회내의 갈등과 분열 등등
지금 우리 교회는 사회에 대하여 윤리적 지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자기들의 윤리적 삶을 위한 빛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며, 또한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지금의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아니거나, 혹은 아무 쓸데없어 밖에 버리워 밟히는 상태에 있는 것이니, 창피하고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종종 산상수훈의 이 말씀을 “너희는 빛과 소금이 되려고 노력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하지만 분명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과 소금인 ‘너희’를 향하여 하신 말씀(선포)임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께서 빛과 소금으로 삼아 세상에 두신 사람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으로,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너희가 없으면 안된다고 그 사명을 강조하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냉정하게 생각하면 교회가 버리워 밟히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다.
물론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전파되고 사람들이 구원의 은혜를 받아 사회 속에서 교회를 이루기 시작하면, 그것과 동시에 교회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사실이다. 수가 그리 많지 않고 사회적인 영향력이 크지 않더라도, 교회는 탄생과 함께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에 대하여 누가는 “세상이 믿는 자들의 무리를 두려워했다”(행2:43, 5:11 등)고 하는데, 이는 성령의 권능의 발휘와 그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윤리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작금의 한국교회의 행태를 볼 때,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버리워 밟히는 소금’이 아니라는 핑계를 과연 무엇으로 댈 수 있겠는가?
2. 구원과 행위
이에 대한 원인을 여러 사회적인 측면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결국 하나님 말씀을 오해하거나 부족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들 “사람은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라는 말을 “구원과 행위는 무관하다”는 뜻으로 오해하고 있다. ‘오직 믿음’은 종교개혁의 위대한 외침으로 큰 영향력을 끼친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은 루터가 새롭게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던 내용을 재발견한 것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고 이해하기 시작하자, 그 말씀이 능력을 발휘하여서 인류역사에 큰 획을 긋게 된 것이 바로 종교개혁이었다.
그런데 만약 루터가 살아서 오늘날 다시 종교개혁을 일으킨다면, 그의 슬로건은 아마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라는 야고보의 말을 인용하지 않겠는가? 물론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경시하기도 하였지만, 사실상 이 두 표어는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진리를 서로 다른 면에서 진술한 것일 뿐이다. 야고보의 말씀도 결코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3. 구원 얻지 못하는 믿음
1) 야고보의 경고(약2:14~26) … 구원과 행위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이해?
본문에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우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회개를 하곤 한다. 하지만 거기서 그쳐선 안되며, 우리는 좀더 주의해서 이 말씀을 살펴야 한다. 먼저 야고보서는 특정한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1:1) 쓰여졌는데, 이는 구원받은 모든 이들에게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본문의 서두에서 야고보는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 라는 질문을 던지고서, 구체적인 네 가지 예를 들어 이를 논증한 다음, 마지막에 결론으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는 말로 끝을 맺음으로 독자로 하여금 어떠한 반론을 제기할 수 없도록 하고 있으니, 가히 무서운 논증이 아닐 수 없다.
① 헐벗고 굶주린 형제에 대하여 말만 그럴 듯하게 하는 행위(15~17) : 많은 이들이 이 구절을 신자가 이웃에 대하여 선을 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의 근거로 인용한다(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하지만 문맥을 고려할 때 이 구절은 단순히 남을 돕는 선을 행하며 착하게 살라는 말씀이 아닌, 행함이 없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예화로 기록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 실제적인 필요를 공급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따뜻하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아무리해도 그에게 배부르거나 따뜻해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그 말은 아무런 결과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결국 하나마나한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행함이 없는 믿음도 이와 꼭 같아서, 어떤 사람이 입으로 아무리 신앙을 고백하고 기독교적인 말들을 길게 늘어놓는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 말에 해당하는 행함이 그에게 없다면 믿는다고 하는 그의 모든 말들은 구원이라는 결과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행함이 없이 입만 가지고 하는 신앙고백은 비록 그 고백자의 종교적인 감정은 만족시킬지 모르지만, 실제로 구원의 결과는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자들을 향하여 입술로 신앙만 고백하면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섣불리 단정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신앙고백 vs. 그렇지 못한 신앙 고백
② 귀신들의 믿음(19~20) : 이 이야기는 눅8:26~32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여기서 야고보는 하나님 앞에서 귀신이 취하는 태도, 즉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그 앞에서 무서워 떠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것을 행함이 없는 믿음의 또 다른 예로 들고 있다.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 사실 누가는 이에 앞서 4장에서도 비슷한 사건을 기록하였는데 예수님은 귀신이라도 그 앞에서 믿고 떨 수밖에 없는 권세자임을 보여준다. 특별히 우리는 여기서 귀신이 예수님에 대하여 가진 지식과 그 신앙고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때는 아직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오기도 전이었는데, 이 귀신은 예수님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을 뿐 아니라, 그 예수님이 앞으로 자기들을 심판하여 괴롭게 하실 분이시라는 것도 알았고, 나아가 아직 그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지식인가?...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예수님께 간구하여서, 그분의 명령을 받고 돼지떼에게로 들어간 것이다. 귀신이 가지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그들이 취한 태도는 분명 주목할 만한 것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태도에도 불구하고 귀신들은 구원을 얻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를 야고보가 밝히고 있다. 이것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공허한 형태의 믿음으로, 행함이 없는 사람의 믿음에 비견할 만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사람을 가리켜 믿음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분명히 그에게 믿음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행함이 수반되지 않은 믿음이고 또한 구원이라는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사람들도 이러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데, 어떤 이들은 종교적인 활동과 신앙의 고백을 하지만 이 귀신들처럼 구원이 없을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 또한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히6:4~6). 즉 종교적인 모든 현상을 다 드러내고 거기에 참여할지라도 타락하여 새롭게 되고 회개케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믿고 구원을 얻었다가 도중에 타락해서 구원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이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처음부터 구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重生의 여부
③ 아브라함의 믿음(21~23) : 바울의 로마서 4장과의 관계.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를 의로 여기셨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의 믿음이 참된 것이라는 증거가 바로 이삭을 제단에 드린 행위라는 것이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이삭을 드리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그의 믿음은 공허한 믿음이 되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을 야고보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2)” 고 말한다. 이는 바울의 가르침과 전혀 상충되지 아니하며, 단지 바울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를 방지한 것뿐이다.
④ 라합의 믿음(25) : 라합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결국 이스라엘의 첩자들을 접대하여 무사히 빠져나가게 도와준 행동에서 표현되었고, 그 믿음의 표현을 통해 라합은 그 성이 멸망당하는 속에서 구원을 얻었다. 만약 라합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있노라고 말하면서도 첩자들을 보호하는 믿음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그도 여리고 사람들과 함께 멸망당하는 운명에 처했을 것이다.
2) 예수님의 경고(마7:21~27) : 산상수훈의 마지막에 나오는 이야기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적어도 기독교를 자기의 종교로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중에 일부는 천국에 들어가고 일부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 판단 기준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했느냐, 행하지 않았느냐” 라는 것이다(22). 이어 23절에서 주님은 구원을 얻지 못하는 어떤 경우를 말씀하시는데,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더욱 비극적인 것은 자신들의 구원에 대해 평생동안 전혀 의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서 있는 자리는 최후의 심판자리로 주님 앞에서 자기의 진심을 말하는 것인데, 정녕 자신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였고, 그 증거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 것 등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단호히 부인하시며 그 비참한 운명의 원인을 설명이라도 하시듯,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행하는 자)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행하지 않는 자)을 대비하는 비유를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와 행치 아니하는 자, 이것이 관건이다.
3) 사도 바울의 경고 : 사도바울은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고후13:5∼6)고 하며, 또한 스스로도 ‘남에게 전파한 후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하기도’(고전9:27) 하였다. 물론 그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8:35) 라고 하면서 구원의 확실성을 환희에 차서 외친 사람이었다. 결국 구원의 확신은 처음부터 자기의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터 위에서, 즉 자기의 구원의 사실을 자만하는 태도로 확신해서는 안된다는 지식이 수반된 확신이었던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살펴본 바, 믿음에 따른 행위가 전혀 없어도 예수를 믿노라고 고백만 하면 구원이 보장된다는 생각을 단호히 부정함을 알 수 있다. 이는 구원받았다고 자기 혼자서 떠드는 것이지, 실제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구원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자신의 구원을 돌아보는 반성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도록 한다. 바른 신앙에는 확신과 기쁨은 물론, 두려워하는 마음이 항상 함께 있다. 바울사도는 롬3:11~18에서 사람의 죄악에 대해 철저히 묘사하는데, 마지막에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이것이 가장 큰 죄악이며, 나아가 타락한 사람의 마음의 어리석음을 실증한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이다. 그밖에도 고후7:1, 빌2:12, 벧전1:17, 계14:6~7;15:3~4;19:5 등의 말씀을 참고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 안에 두려움이 포함되어서 하나님을 함부로 생각하지 않는 심정이 깔린 사랑이어야 하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그 속에 사랑과 자애를 깊이 느끼면서도 자기의 죄악으로 인해 갖는 경외심인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두려워함에 대한 강조가 없는 것이 세상에 대한 교회의 증거를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소이며, 이는 결국 헛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거짓 평안과 신념을 심어줌으로써 회개의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4. 야고보의 경고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형태의 믿음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이다. 믿는다는 고백의 말만 하면 구원을 받은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
②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바울의 권면을 상기시킨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받았다고 함부로 주장하지 말고, 거기에 합당한 삶으로 자기의 믿음을 온전케 하여야 한다.
③ 교회 내에는 언제나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가 비슷한 신앙고백의 옷을 입고 공존하고 있다. cf) 마13장의 알곡과 가라지, 그물의 비유 등
④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는 것으로 오해해선 안되며,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그로 말미암는 관계를 바로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