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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훈련자료

구원과 윤리 2장 - 중생과 윤리

작성자숲속의호수|작성시간20.02.14|조회수47 목록 댓글 0

2장 중생과 윤리 야고보가 말한 행위는 어떤 것이며, 또한 구원을 얻지 못하는 신앙에 대립되는 구원의 신앙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구원은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과 윤리는 결코 별개가 아닌,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윤리관의 변화와 그에 따르는 행동의 결과를 내지 않는 신앙은, 비록 그것이 기독교의 옷을 입고 있다 할지라도, 구원의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이는 단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있는 종교성의 발휘로써의 믿음에 불과할 뿐이다. 헛된 믿음의 중요한 특징은 도덕적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형태의 신앙을 가지고서 자기가 구원을 받았겠거니 하면서 평생을 살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자기의 신앙이 과연 구원의 신앙인지를 깊이 돌이켜 보며 반성할 필요가 있다.

1. 구원의 서순(ordo salutis)

구원의 신앙을 바로 알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순서와 방법으로 구원하시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흔히들 자기에게 전달된 복음에 대하여서 믿는다는 반응을 보이면 그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첫째는 우리가 앞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믿음 자체가 구원의 믿음이 아니라 종교적인 반응일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의 믿음이라는 행위가 자칫 구원을 가져오는 공로인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이 죄인의 구주시라는 것을 설명한 후, 그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만약 이 말을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믿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구원을 주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그에게는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비록 사람이 타락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하지만 바울사도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었다’(3:1013)고 한다. 따라서 복음이 어떤 사람에게 전파되었을 때 그가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사도는 사람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전적인 은혜 때문이며, 그 은혜로 인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2:89). 그러므로 사람이 복음에 대하여 믿음이라는 반응을 보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그에게 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다른 측면에서 복음을 거부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때 그는 복음에 대하여 무기능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는 복음이 전달될지라도 그것을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태에 있는 것으로, 성경은 이를 가리켜 영적으로 죽은 상태라고 말한다. 구원의 길과 복음의 소리에 대하여 듣고 믿을 수 있는 기능이 없다보니 아무리 복음을 전달할지라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들을 때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며 받아들이기도 하는데, 16장에 나오는 루디아가 대표적인 경우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 빌립보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두아디라 성의 자주장사 루디아가 복음을 듣고 영접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실 때 일어나는 표준적인 경우를 잘 보여주는데, 먼저 바울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고, 그것을 듣는 루디아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시자, 그가 믿게 되었다. 그리고는 믿음의 행동을 가시적으로 취하는데, 그는 전도자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수발을 들었다. 루디아는 구원을 받자마자 하나님 나라의 일에 자기도 힘을 보태기 위해 전도자를 강권하여자기 집으로 모셨던 것이다. 분명 루디아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으며,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된 것으로, 이때 죄와 허물로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무지하였던 사람의 눈이 뜨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으로 하여금 복음을 듣고서 그것을 믿고 나아오게 하는 일을 가리켜 중생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3:3)고 말씀하셨다.

이를 정리하면, 복음이 전파되어서 그 부르심을 들은(외소, external calling)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복음에 대하여 구원의 응답을 보일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면(내소, internal calling), 그는 복음을 받고 믿으며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원의 순서에서 밝혀지듯이, 우리는 믿음과 함께 드러나는 또 하나의 결과가 바로 회개임을 알 수 있다. 이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얻게 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배경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 전파를 결코 게을리할 수 없는데, 결국 하나님의 구원 활동은 외소, 즉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사실은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이다. 바로 이 중생, 즉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속에서 발휘하신 능력의 결과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과 복음을 믿게 되는 이것이 바로 구원의 믿음이다. 역으로 헛된 믿음이란 중생의 결과로써 사람이 발휘하는 믿음이 아니라, 보편적인 종교성이나 어떤 심리적인 열정의 발휘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것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도덕적인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 중생에 수반되는 변화

생명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을 정작 설명하기는 쉽지가 않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명의 결과를 통해, 즉 생명력의 발휘로써의 현상들을 통하여 그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중생도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일으키신 신성한 능력의 결과를 통해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법적인 측면과 또한 구원이 일으키는 생명의 변화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어느 한편만 따로 있을 수는 없다.

먼저 구원의 법적인 측면이란, 구원의 결과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가지게 되는 법적인 위치와 관계된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의 상태를 종합적으로 잘 표현한 엡2:13 말씀을 요약하면, 우선 그는 죽은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 그가 하는 일은 세상의 풍속을 따라가는 것인데, 이것은 공중의 권세잡은 자, 즉 마귀를 따르는 일이며,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바울사도는 죄사함을 받지 못한 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를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2:5).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점점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망각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지옥에 대한 가르침이 갈수록 애매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원받지 못한 죄인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죄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크고 두려운가를 잘 보여준다. 이는 주님께서 여러번 반복하여 가르치신 중요한 교훈으로, 불신의 상태에 대하여 생각할 때 지옥을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함께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그 영원한 형벌의 처소를 묘사하실 때 지옥 꺼지지 않는 불...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9:43; 48-49)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비유로 해석할 근거가 없는데,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형벌의 장소인 지옥을 이와 같은 언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사실 아무리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한가지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죽으면 끝난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이 인간이 가진 최후의 소망 중 하나일 수 있다. 죽음 앞에서는 죄의식도, 슬픔도, 고통도, 미움도, 사랑도 힘을 못쓰며, 제아무리 큰 고통이라도 죽음 앞에서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옥의 두려움은 그러한 죽음조차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곳은 영원한 형벌과 비참, 피할 수 없는 고통만이 따를 뿐이다. 우리는 지옥에 대한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가장 깊이 느낄 수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옥이란 하나님의 본성과 너무나 잘 부합되는 곳이다. 만약 하나님의 의가 구부러질 수 있는 의라면, 하나님의 의가 완전한 의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의가 영원한 의가 아니라면 지옥이 그렇게도 철저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형벌의 처소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바 하나님의 공의가 어떠하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지옥에 대한 묵상은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데, 거기서 우리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희생의 신비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을 때, 이미 십자가 위에서 당할 일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계셨다(그 아버지의 마음/심정을 헤아려 보라). 여기서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지만 우리에겐 은혜일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를 접하게 되는데, 십자가의 흥정이란 천한 것을 얻기 위해 귀한 것을 내어주는 것이며, 원수를 얻기 위하여 사랑하는 자를 내어주는 것이었다. 그 흥정을 가능하게 만들고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지옥의 모든 형벌을 다 받으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순히 한 사람이 나무에 달려서 당하는 정도의 고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구원 얻는 그 무수한 사람들이 받아야 할 지옥의 모든 형벌과 고통의 총합이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예수님의 부르짖음에서 짐작할 수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15:34; 27:46)

우리는 여기서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다. 하지만 자기 아들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행위에는 사랑이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히 인간이 다 알 수 없는 신비가 있다.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을 얻을 길이 없는 의문 앞에 서게 되는데, “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지만, 도대체 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셨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단지 그것을 알고 말할 수 없이 감사할 따름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구원의 법적이고 객관적인 면을 살펴보았는데, 이는 구원받을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위치와 영원한 운명이 변한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정죄를 받아 영원한 형벌에 떨어질 운명이었는데, 구원을 받음으로 완전히 변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영원히 복된 상태를 약속받는 위치로 변하였다. 이것을 우리는 칭의(稱義)’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다.

이제 구원에 수반되는 또 다른 면, 즉 생명이 변화되는 면에 대해 살펴보자. 한편으로 이 부분이 소홀히 다뤄지는데, 새 생명의 발휘에 대한 가르침의 부족이 신자의 증거를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죄인이 구원받을 때 일어나는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변화를 표시하기 위해 주님은 重生-거듭남이란 개념을 사용하셨다. 바울사도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2:1)고 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구원의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요한은 이 생명을 얻는 것에 대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1:12)고 한다. 바울이 말하는 죽은 상태는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는 상태이고, 역으로 산 상태는 하나님께로서 난 상태이다. 예수님께서 바람의 예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것이 만들어내는 변화라는 결과를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중생이란 하나님에게서 나며,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는 것으로, 죽은 상태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정확하게 개념화하기는 어렵지만, 생명의 발휘라는 구체적인 결과를 경험함으로 알 수 있다.

따라서 중생은 상이한 생명의 발휘를 위한 출발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런 면에서 분명히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다. 즉 그 생명이 없이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어떤 성격의 일들이 그 생명이 주어짐으로써 가능케 되는 것이다. 요한은 구원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이름을 영생이라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먼저 아들 예수님께 주셨고, 다시 그 그리스도를 구원얻은 자에게 있게 하심으로 신자에게 영생을 주신 것이다(요일5:1112). 결국 신자가 가진 새 생명은 예수님께서 가지신 것과 동질의 생명이다. 그리하여 이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중생에 대한 설명을 배경으로 놓고 다시 야고보의 말에 귀기울여 보면 다음과 같다. “자기에게 믿음이 있노라고 말하는 자는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중생으로 인하여 아들의 생명이 그에게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에게서 아들의 생명이 발휘된 결과로써 합당한 행위(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 만약 그 생명의 결과인 행위가 없다면 그에게 생명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자는 진정 자기에게 생명이 있는지를 반성해 보아야 한다. 만약 행위가 없다면 섣불리 자기에게 생명이 있다고 생각지 말라. 사람에게 합당한 행위가 있을 때, 비로소 그에게 생명이 있다는 사실이 확증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행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온전케 된다는 야고보의 가르침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모순되지 않음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며, 나아가 믿음의 법적이고 객관적인 측면과 생명의 변화를 일으키는 주관적인 측면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개개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윤리적인 원칙에 따라 살고,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이루며 세상에서 구원의 능력을 증거하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말씀이 바르고 풍성하게 증거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 진리의 말씀을 바로 알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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