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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십자가의 의미 - 승리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큰 소리‘를 지르시고 죽으셨다고 하는데, 요한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었다“(요19:30)는 말로, 임무가 완료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십자가가 ’승리‘라는 깊은 의미를 내포한다. 목숨을 건 투쟁 끝에 예수님은 승리자로 나타나셨다. 요한은 이미 우리를 위해 발자국을 남겨놓았는데, 12장에서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는 이미지를 만날 수 있다. 투쟁이 일어나고 이 세상 임금, 곧 인간을 지배하는 악의 세력은 거꾸러지고 추방당한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요14:30-31) 라고 말씀하셨다. 투쟁이 임박하였으나 이 세상 임금은 처음부터 실패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전투의 증인이 되라고 요청하신다. 아울러 주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하셨다.
이러한 요한복음의 말씀들은 ’십자가가 승리‘라고 한다. 승리가 이미 예수님의 ’삶에서‘ 쟁취되었다. 그분은 이기셨다. 주님은 매 순간 거리낌 없는 사랑과 헌신, 순종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고 세상의 필요에 부응하셨다. 성금요일에 일어난 마지막 투쟁의 결과 역시 이미 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순종의 일환으로 받아들이신 것은 수난을 하나님의 행동으로 바꾸시는 그분의 방식을 잘 보여준다. 즉, 자신의 수동적이고 다른 이의 손에 맡겨지는 듯한 경험을 하나님께서 세상 속으로 물밀듯이 들어오시도록 하는 능동적인 행동으로 바꾸신 것이다.
희생자가 승리자로 바뀌다 : 십자가는 삶에 독특한 방식으로 인을 찍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삶은 폭력이나 조작, 지배와는 거리가 먼,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려고 오신 인자의 삶이며, 연약한 인간 안에서 살과 피가 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삶에 나타난 ’그분의 생명과 사랑 앞에 서면‘ 죽음조차도 초라해진다. 그런 까닭에 마지막 책인 계시록으로 가면 하나님과 어린 양을 함께 향하고 그 이름을 부르는 승리의 노래를 다수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과 희생제물, 그들은 함께 승리를 거두셨기에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죽임 당하는 무력한 피조물인 어린 양은 이기고 승리의 정복자가 되셨으며,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적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해 죽음과 악에 사로잡힌 자들을 풀어주고 다시 데려오시는 분이 어린 양이다. 어린 양이 이기셨고 우주적인 승리를 거두셨다(계5:9). 어린 양은 정복하셨고 우리를 자유의 몸이 되게 하셨다(13). 희생자가 승리자로 바뀐 것이다.
골로새서 2장에도 몇몇 동일한 언어가 나타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는 풀려났고 적은 묶여있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2:13-15).
지음받은 인간의 적들은 묶이고 창피를 당한다. 전쟁 포로들처럼 그들은 승리를 거둔 사령관의 전차바퀴에 묶여 끌려다닌다. 무력화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세력의 영향력을 폐기하고 던져버리신 것을 말한다. 마치 옷을 훌훌 벗어버리듯 그리스도는 우리를 비인간화하는 저 세력의 무거운 영향력을 하나씩 털어내신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듯, 그분의 죽음으로 취소된 거래장부 또한 못 박혔고, 그렇게 우리의 모든 빚을 청산하셨다. 우리가 두려움과 죄 가운데 지고 있던 모든 빚 위에 빨간 줄이 그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이 펼쳐진 것이다.
신약성경에는 승리의 언어가 매우 생생하게 사용되며, 때론 역설처럼 짓궂게 들리기도 한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의 승리를 노래하는 일에 익숙하면서도, 마치 어린 양이 슈퍼 히어로로 등장하는 모습에서는 익살스러운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1장에서 보았듯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수난을 행동으로 바꾸면서 예수님은 완전한 상실의 위험을 사전에 받아들이심으로써 신적인 자유의 깊이와 범위를 드러내셨다. 그리고 2장에서 보았듯 예수님의 본체와 사역 그리고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장애물이 사라졌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끼어들려는 모든 세력은 휩쓸려간 것이다. 따라서 혹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밀고 나가려는 어떤 힘이나 영향력, 흐름, 삶의 패턴 즉, ’난 하나님이 무얼 원하시는지 알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식의 행동은 의구심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대신 우리는 예수님의 삶의 방식, 예수님의 자유 곧 율법보다 크고 우리를 삼위일체의 핵심으로 끌어당기는 은혜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세상 나라는 우리 하나님과 그분이 기름 부으신 자의 나라가 된다(계11:15).
이 말씀은 신약성경의 여러 시점에서 부활사건과 연결이 되는데, 부활은 승리의 해피엔딩일 뿐 아니라 십자가에 대한 언어이기도 하다. 올라가신 그분은 또한 내려가셨다. 구세주는 버림받은 세상의 밑바닥까지 내려오셔서 온갖 현실을 몸소 하나님께로 가져가신다. 골로새서처럼 정복자의 행진에서 다수의 포로들과 인류의 적들, 곧 악마의 세력들을 이끄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계시록에서도 승리는 십자가에서, 그리고 사실상 삶에서 이미 결정되었다고 한다. 삶과 죽음, 부활은 같은 종류이다.
이러한 생각은 십자가를 떠올릴 때 특히 중요하다. 사도신경에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사이에 아무 일도 없지만, 실제 복음서는 많은 일들을 언급하고 있다. 모든 복음서의 내용은 십자가가 단순히 생을 마감하신 사건 정도가 아니라 그분이 평생 추구하셨던 것의 완성임을 보여준다. 자신을 하나님과 이웃에게 전적으로 바친 이 삶을 죽음이 가두어둘 수 없다. 따라서 삶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십자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승리는 십자가에서 결정되었는데, 하지만 이미 삶에서 결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부활 역시 어떤 사후적인 생각의 정리가 아니라, 언제나 진실이었던 것을 드러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부활은 줄곧 역사해온 사랑의 온전함, 불멸성을 내보인 것이다. 부활은 어떠한 옵션이나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 그 본질적인 실체가 필연적으로 터져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부활의 완전한 빛 가운데서 이것이 전적으로 누구에 관한 것인지를 파악할 때 비로소 우리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이 목격한 것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동정녀 마리아의 자궁에서 시작된 생명은 갈릴리 사역에서 꽃을 피우고 십자가에서 끝나며 부활에서 다시 발산된다. 그것은 하나의 이야기이다.
승리자 그리스도의 십자가 : 십자가의 승리는 초기 그리스도인을 크게 매료시키고 영향을 주었다. 십자가의 못 박힘에 대한 그림들을 보면 승리를 거두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미지가 대다수일 뿐, 거기에 인간으로서 당한 고통은 그리 강조되지 않았다. 이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서 진행되었던 일들을 부활의 관점에서 보고 그렸기 때문이다. 대략 10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에 대한 사실적 표현들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을 초기 성도들이 예수님의 고난을 회피하거나 마주하지 않으려고 한 결과라고 볼 수는 없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을 승리자요 자유자로 묘사한 일은 단순히 비유 정도가 아닌, 고정관념을 박살내버리는 실로 파격적인 행위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언어가 나타나는 곳은 그림이나 조각뿐만 아니라 오래된 찬송가에서도 볼 수 있다. 갈리아의 주교인 베난티우스는 로마 병사들이 부르는 행진가에 맞춰 찬송을 지었는데, ”임금님 높은 깃발 앞장서 가니, 십자가 깊은 신비 빛을 발하네.“ 라고 하였다. 그는 왕권으로서 십자가를 노래하면서 이것이 로마 군단의 깃발을 대신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스도는 이방인이 아닌, 인류의 적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그리스도의 군대인 우리를 이끌어 앞으로 나아가게 하신다. 또한 이후 <십자가의 꿈>이란 시에서는 그리스도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저 젊은 챔피언‘이 자신의 말 위에 올라타는 영웅처럼 십자가에 올라가시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이러한 이미지는 중세시대에 이르기까지 유익한 열매를 맺는데, 이는 4세기에 시작되는 승리전통에 의해 영양분을 공급받기도 하였다. 이 전통은 그리스도께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기에(벧전3:19) ’지옥의 정복‘이라고 불린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에 대해 더 알고싶어 하였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죽은 자들 가운데로 내려가셔서 그분이 오시기 전 오랜 인류 역사 속에서 인간성이 감금되거나 좌절되고 거부당한 자들을 찾아 나섰다고 상상하였다. 옥에 갇힌 영혼들은 악마에게 속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치 적진에 대한 공격이 성공하여서 인질들이 풀려나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이 좁고 기다란 삼각기를 들고 계시는 작품을 만나기도 하는데, 이것은 주님이 거두신 승리의 상징이다. 주님은 정복자의 깃발인 삼각기를 죽음의 왕국에 꽂으시기 위해 가져가신다. 적의 심장부를 급습하는 이 일은 부활에 관하여 동방정교회가 표현하는 지배적인 이미지이기도 하다. 동방정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부활절의 주요 성화(icon)는 부활절 아침의 그림이 아닌, 성토요일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형상으로 인해 쓰러진 지옥의 문들과 그 위에 반듯이 서 계시는 그리스도, 그리고 뒤로 집으로 데려다주기를 기다리는 사탄에게서 풀려나는 인질들...
승리 없는 상징, 제사 없는 승리에 대한 논의는 충분하지 않다. 기독교 신학은 보다 유동적이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바뀌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한 무리의 의미를 유심히 살피다보면 그것은 다른 의미를 이루어 녹아든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은 악순환의 맞은편에서 계속 돌고 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십자가는 상징이지만, 차이를 가져오므로 결코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십자가는 제사이지만,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서 이행하시는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제사이다. 십자가는 승리이지만, 세상에서는 패배로밖에 기억되지 않는 승리이다. 십자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지 않는다. 그 의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살아있는 과정으로서 이미지 하나, 범주 하나가 거듭해서 우리를 또 다른 것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우리는 찬송가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최고의 찬송가는 일련의 이미지로 시작한다. 그들 다수는 그림의 작은 부분 하나를 처리한 후, 상상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그것을 소화하도록 하기 때문에 대단하다. 풍성한 성경 이야기와 이미지, 암시 등을 놀랍도록 단순한 가사로 표현한 찬송들은 제사와 대속, 십자가의 승리 등에 관하여 많은 것들을 가르쳐 준다. 해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숙고할 때면 우리는 그 사랑의 초월성과 자유로 돌아간다. 우리에게는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이미지와 친근하게 부를 찬송이 필요하다. 여러 찬송들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정말로 해야할 고백은 단음절의 간단하지만 무게 있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그러고서 우리가 할 말을 다 했을 때, 우리가 부르는 찬송의 가사들은 날마다 생각하고 살아가는 그 길의 깊이를 더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감동을 받아 찬양 가운데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세계를 섬기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알려지지 않은 사랑에 살과 피를 덧입히는 일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