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라는 도시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담은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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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O 고린도(1)
- 요약편
바울 당시에 고린도 성읍의 인구는 자유인이 약 250,000명, 노예가 400,000명이었던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숫자상으로 고린도는 헬라의 중심 도시였다.
1. 상업 - 고린도는 고린도 지협의 바로 외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여행자들과 상인들의 교차로였다. 고린도에는 두 개의 항구가 있었다. (1)하나가 겐그레아로서, 사론 만(Saronic Gulf) 동편 7.2km 지점에 위치해 있었고, (2)또 하나는 레기움(Lechaiom)으로서, 고린도 만 서편 2.4km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상품들은 디올코스(Diolkos) 지협을 통해 운반되었는데, 작은 선박들은 짐을 가득히 실은 채 도로 위로 지협을 가로질러 운반되었으며(길 위에로 당겨져 옮겨졌음), 큰 선박들의 짐들은 이편에서 저편으로 수레에 실려 운송되었다. 이달랴(이탈리아)와 서바나(스페인)에서 오는 상품들은 고린도를 통과하여 서쪽으로 이송되었으며, 소아시아와 베니게(페니키아)와 애굽(이집트)에서 오는 상품들은 고린도를 통과하여 동쪽으로 이송되었다.
2. 문화 - 물론 고린도가 아덴(아테네)과 같은 학문적인 도시는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는 전형적인 헬라 문화의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고린도 시민들은 헬라 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지혜를 높이 평가했다.
3. 종교 - 고린도에는 적어도 12개의 신전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 신전들이 바울 당시에 모두 사용되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 신전들 중에서 가장 지독한 것 중 하나는,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신전이었는데, 이 여신의 숭배자들은 종교적인 매음행위를 자행하곤 하였다. 고린도에 있는 극장의 북편으로 약 400m 쯤에 치료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 신전이 서 있고, 주전 6세기에는 도시의 중앙에 아폴로 신전이 서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 도시에 하나의 회당을 세웠는데 글자가 새겨진 회당의 인방 돌이 옛 고린도의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4. 고린도 성의 부도덕성 - 당시 큰 상업 도시가 그러했듯이, 고린도 성읍도 개방적이고 무절제한 부도덕의 중심지였다. 더구나 아프로디테 여신의 숭배로 말미암아 매음행위가 종교의 미명하에 더욱 성행되고 있었다. 한때는 1,000명의 성별된 창녀들이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이처럼 고린도의 부도덕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인화 하다’라는 헬라어 동사는 ‘성적 부도덕을 행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배경에 비추어 볼 때, 고린도 교회에 많은 성적인 문제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하등에 이상할 것이 없다.
- 고린도운하
고린도지역이 중요한 이유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아시아로 항해할 때 가로질러 갈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린도에 와서 약 6km의 지협이 가로막고 있다. 고린도 사람들은 이 지협으로 작은 배를 끌어 올려 해협을 지나도록 함으로 무역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베스피안은 68년경 유대인 죄수 6,000명을 네로가 시작한 운하건설을 지원하려 보냈으나 실패하고 근대(1881-1893)에 와서야 완성되었다.
- 겐그레아 항구
고린도는 고린도 지협의 바로 외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여행자들과 상인들의 교차로였다. 고린도에는 두 개의 항구가 있었다. (1)하나가 겐그레아로서, 사론 만(Saronic Gulf) 동편 7.2km 지점에 위치해 있었고, (2)또 하나는 레기움(Lechaiom)으로서, 고린도 만 서편 2.4km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사역을 끝내고 에베소로 가기 위해 겐그레아에 갔다. 그곳에서 서원이 있어 머리를 잘랐다. 이 곳은 여사역자인 뵈뵈의 고향이기도 하다(롬 16:1).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 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행 18:18)
O 고린도(2)
그리스의 펠로포네스 해안에 위치한 고린도(북위 35도56분, 경도 22분 56분)는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났고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려고 18개월을 머물렀던 도시이다(행 18:1-18)
가. 지리적 배경
첫 번째 정착민들은 물이 풍족하고 주변지역에서 우뚝솟아 기름진 평야지대를 감독하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가 용이한 고린도의 아크로폴리스, 해변에서 203km 떨어진 바위산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번성한 고린도는 해안 평지에서 고린도의 아크로폴리스지역(Acrocorinth, 575m)까지 두 개의 계단식 평지에 형성되어 4km2정도의 넓이를 가진다. 이 도시는 고린도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오는 지협(地峽)에 의하여 동서로 경계지어진다. 10km의 성벽은 그 가장자리를 따라 지어져 최적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고린도 아크로폴리스에 의해 단단히 묶여져 있다. 건물이 지어진 지역은 결코 성벽을 넘어서지 않았고 여분의 공간은 위험 시기에 사람들에게 거주공간과 식량을 제공하였다.
고린도의 첫 번째 항구는 레기움으로 고린도 시와 그 항구인 레기움을 연결하는 긴 성벽은 전체길이가 2.5km이고 각 성벽이 1.2km로 평행으로 지어져있다. 인공적으로 바다를 두른 항구(double port)의 넓이는 460,000m2고 부두의 길이는 7km 이다. 지금은 항구의 아주 일부분이 발굴되어있다(Roux 1958: 103). 고린도의 두 번째 항구는 겐그레아이다. 고린도 동쪽으로 9km 떨어진 사론 만에 위치한다. 인공적인 이 항구는 30,000m2정도 되며 큰 건물들이 북쪽 방파제위에 우뚝 솟아있고 네 개 구역으로 된 저장 창고들은 남쪽의 인공 방파제 안쪽을 따라서 정렬되어있다. (Sacraton, Shaw, and Ibrahim 1978: 14, 41).
이 두 항구를 차지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펠로포네스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6km의 넓은 지협을 실질적으로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이 고린도를 고대 세계의 중요한 교차로로 만든 것이다(Strabo 8.6.20). 평지 가장자리의 경사지는 전통적으로 높은 생산성과 함께 부유함으로 유명하고 또한 동서와 남북 무역을 통한 세금 징수를 통하여 고린도의 금고는 항상 가득 찼었다.
호머의 시대부터 고린도와 함께 한 수식어는 ‘부유한’이었다. 오늘날 고린도는 고린도 운하의 서쪽 2.4km에 위치한 고린도만의 펠로포네스 해안의 작은 도시가 되었다. 현 유적지는 1858년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 현대도시의 남서쪽 5.6km에 위치한 ‘모든 그리스의 빛’이었던 고린도가 지금ㅊ 은 아가야 고린도지방의 가난한 도시가 되어버렸다.
나. 발굴역사
첫 번째 발굴은 독일 고고학 연구소에 의하여 이루어졌다(1886). 1896년 아테네의 고전 연구의 미국인 학교(American School of Classical Studies)가 그 장소에 대한 책임권을 따내 계속적인 발굴을 이끌었다. 서론적인 연구는 American Journal of Archeology 와 Hesperia에 나오고 최종보고는 ‘고린도’(1930-)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고 있다. 신석기시대부터의 전시대 유물이 나왔다. 고린도 외의 주요 발굴은 지협(1952-60과 다시 1967-1978)과 겐그레아(1963-68)에 대하여 행해졌다. 협곡에 대한 최종보고는 겝할드(Gebhard, 1973)와 브로닐(Broneer 1971; 1973)에 의해 출판되었고 스크란톤(Scranton)과 솨우(Shaw), 이브라힘(Ibrahim)은 겐그레아에 대하여 보고하였다(1978).
다. 고린도의 역사
고린도 역사는 길고 복잡하다 그러나 기본적인 구분은 주전 146년 말까지 온 그리스도시와 줄리아스 시이져(주전44년)에 의해 설립된 로마식민지 시대로 구분될 수 있다.
500만년전의 도시의 기원과 그 연속되는 역사에 대하여는 살몬(J. P. Salmon)이 정리하였다(1984). 오랜 세월 고린도는 변화를 반대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변화를 희구하는 뛰어난 경영과 한편으로 예외적으로 다양하고 생산적인 경제 때문에 색다른 사회적, 정치적인 안정을 누려왔다. 고린도는 유명한 고린도인의 청동제품에 더하여 세라믹과 직물, 조선, 건축술이 유명하다. 동서 무역의 발전을 위하여 고린도와 사론만(Saronic gulfs)의 연결 운하는 주전 6세기 일찍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그 계획이 무효화되었을 때 페리안델(Periander 주전 625-585)은 가벼운 배가 한 쪽 바다에서 포장된 잘린 홈을 따라 달려서 다른 쪽 승강장으로 잡아당겨 옮겨지도록 하는 해협 포장도로(dilkos)를 만들었다. 해협의 서쪽에서 길이 460m되는 하나의 부두(dock)가 발굴되었다. 넓이는 3.4에서 6m로 다양하고 그 홈은 별도로 1.5m가 된다. 많은 횟수에 걸쳐 수선된 이 길은 적어도 주후 9세기까지 상품을 운송하는데 이용되었다. 이 편의시설은 상인들이 ‘말레를 지날 때는 네 집을 잊어 버리라“고 할만큼 위험하기로 이름난 말레 곶(Cape Maleae) 주위를 항해하는 것을 피하게 해 주었다.
이러한 성공은 상대적으로 그들의 위치가 요충지가 아니고 그들이 거주지가 산업적이 아닌 이들의 질투를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주전 5-4세기 아테네 작가들은 고린도를 상업화를 사랑하는 상징적인 도시로 언급하였다. 아리토파네스(Aristophanes)는 ‘간음하다’라는 동사를 가지고 ‘고린도인화 하다’라는 신조어(新造語)로 만들어내었다. 필레타에루스(Philetaerus)와 폴리오쿠스(Polichus)는 고린디안테스(Korinthiates), '매춘부와 노는 사람‘이라는 연극을 썼다. 플라톤은 매춘부를 의미하는 고린디아 코레(Korinthia Kore), '고린도 소녀’라는 용어를 썼다 (Rest. 404d). 그러나 이런 신조어들은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실제로 고린도는 그 동시대에 그렇게 나쁘지도 썩 좋지도 않은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 도시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드려진 도시도 아니었고 1000명의 성스러운 창녀들?에 관한 스트라보(Strabo)의 이야기는 완전히 날조된 이야기임을 보여준다(Conxelmann 1967).
와이즈만(1979: 450-62)은 146년 고린도의 멸망으로 이끄는 사건에 대하여 잘 요약하였다. 로마가 두 번째 마게도야 전쟁(주전 200-196)후 그리스의 도시들에게 자유를 주고 다양한 동맹 안에서 연합하는 것까지 허용하였을지라도 후에 이것은 로마에게 위협이 되었다. 고린도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 아가야 동맹을 깨고자한 로마의 시도에 대해 아가야 동맹은 주전 146년 스파르타를 징계하는 전쟁을 함으로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메텔루스(Metellus)가 세 아가야 군대를 패배시킨 후에 북쪽으로부터 해협으로 도달할 때 그는 사령관이라고 추정되는 루시우스 뭄미누스(Lucis Mummius) 집정관의 퇴각과 합세하였다. 아가야의 보루인 고린도는 노예들로부터 징집된 훈련되지 않은 14,000의 보병과 600명의 기병으로 로마의 23,000의 보병과 3,500의 기병 그리고 원군에 대항하여야 했다. 전쟁결과는 예상되는 대로였다.
도시의 전리품은 목격자 폴리비우스(Polybius)에 의하여 기록되었으나 발굴 결과에 의하면 주전 79-77년 사이에 고린도를 방문한 키케로(Cicero)에 의해 확인된 것같이 도시가 완전히 멸망하거나 사람들이 멸절되거나 하진 않았다(와이즈만 1979: 494-95). 고린도는 비록 완전히 부셔졌더라도 천연적인 상업 중심지였고 뭄미우스는 재해을 피해 피하였던 시민들을 데리고 돌아왔을 것이 확실하다.
로마 식민지로서의 설립은 많은 고전 작가들이 줄리아스 시이져에 의한 공이라고 하며 아피안(Appian)은 카르타고의 약탈 후 102년째 주전 44년이라고 정확한 연대를 말하였다. 비문들은 그 새 도시의 이름을 Colonia Laus Julia Corinthiensis라고 보여준다. 그 도시가 로마에대한 위협 없이 1세기 넘게 평화를 되찾았기에 로마 시이져의 관심은 더 이상 군사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다. 고린도의 경제적인 잠재성은 로마에도 잘 알려졌고 이것이 해협을 통과하는 운하를 만들려고까지 한 계획을 가졌음을 알려준다.
***새로운 이주민의 대부분이 자유가 된 노예들이라는 스트라보의 주장은 그들을 ‘아포로이’-기회 부족으로 어떤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 닫혀짐 느끼는 이들을 말할 때 쓰는 형용사-라고 부른 아피안(Appian)의 견해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로마인들이 아니라 그리스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일 것이다. 새로운 식민지에서 그들은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다. 멀리 이제 의미 없는 전 주인과 연결을 했을 것이고 그들의 자녀들은 자유를 누렸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아래 바울은 분열을 일삼는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 말한다 1)“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6)라고 말한다 2) 많은 믿는이가 아직 종의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 ”고전 7:20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3) 출신이 안좋을수록 출신을 더욱따지기에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됨을 더욱 강조해야했다 ”고후 11:5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 6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유대인, 그리스인, 로마인, 종, 자유인, 상인, 농업인등 다양한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왔고 이들의 기독교를 보는 시각 또한 다양하여 많은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 고전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 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집단행정에 있어서는 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기술, 재정, 행정 집단이 있었다. 그들의 기업과 공업은 비록 그들이 무덤을 약탈하는 것부터 시작하였을 찌라도 그들이 발명한 청동 그릇과 적갈색(테라코타) 부조를 가지고 로마에 수익성 있는 상점을 빨리 만들어 번영 꾀하였다. 전에 것에 대한 많은 수요는 약삭빠른 식민지 사람들에게 청동기 생산을 재개하도록 자극하였고 다른 전통적인 공업들은 곧 재개되었다.
식민지가 안정된 기반을 다졌을 때 그리스와 지중해 동쪽의 주요 지방 기업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주요 상업적인 상황하에 새로운 수도로 되고자하는 고취들은 더 많은 부를 산출하였고 설립된 지 50년도 안되어 고린도의 많은 시민들은 무시하지 못할 의미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 확실한 증거는 주전 7년에서 주후 3년사이 첫 번째 재개된 지협(地峽) 경기들(Isthmian Games)의 위원장으로 추정되는 L. Castricus Regulus를 기념하는 비문에서 알 수 있다. 그는 한 세기동안 중지되었던 그 경기를 다시 재개하였고 고린도 모든 시민들에게 잔치를 배설하였다. 상업적인 발전은 금융의 편익을 요구하였고 주후 1세기 중반에는 고린도가 중요한 금융 중심지가 되었다.
고린도 교회는 부유하면서도 꽤나 인색하였던 듯하다 “ 고후 11:9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 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 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마게도냐 교회들이 가난한 가운데서 연보를 풍성히 한 것을 알리면서 부유한 고리도는 그 체면에 맞는 보다 많은 헌금을 할 것을 요구한다. “고후 9:4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도시 확장은 그 도시가 얼마나 번영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초기 식민지 정착자들은 옛 도시의 중심을 고대 경주장이 아직도 넓은 공간을 제공하고 있는 성전의 남쪽으로 옮겼다. 그 것은 공공 집회장소(forum)로 되었다. 남쪽 스토아, 글라우스의 우물, 피레네 샘(Peirene Fountain)같은 많은 고대 요소들은 통합되었고 새로운 구조물들이 급속히 등장하였다. 10개의 기념 건물들이 아우구스투스의 치세가 끝나기 전에 세워졌고 6개의 건물이 그의 승계자 티베리우스의 긴 치세동안 더하여졌다. 폐허가 된 성벽은 여전히 남아있었으나 단지 돌을 떠내는 채석장으로 사용되었다.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된 시기에 성을 수선한다는 것은 완전히 비능률적인 투자로 보여졌다.
남쪽 스토아(시민들이 편안하게 모여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기둥과 지붕으로 이루어진 긴 복도형식이 일반적이다)에는 달리기할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발을 올려 놓은 출발 표시가 있다. 이 때문에 이 말씀은 고린도가 주최한 지협경기들과 연계하여 고린도인에게 자연스럽게 교훈되었을 것이다. “고전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많은 거물이 세워진 때를 같이하여 바울은 건축에 관계된 말씀을 자주 사용한다 “고전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바울이 알았던 고린도는 로마의 베스피안 황제 때인 주후 77년에 지진에 의해 손상된 고린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제국의 도움에 의해 도시가 재건되었는데 이것에 감사하여 그 도시는 Colinia Julia Flavia Augusta Corinthiensis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주후 2세기 초기에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하드리안에 의한 세금면제는 주후 2세기 중반에 건축 붐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은 Pausanias의 ‘그리스 묘사(Descripgion of Greece)'에 잘 묘사되었다.
고린도에서 가장 매력적인 주거의 지역이며 휴양지는 고린도 아크로폴리스의 낮은 경사지위에 있는 Craneum의 부근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 곳은 견유학파의 디오게네스(Diogenes)가 그의 통안에 살았고 알렉산더가 그에게 오는 햇빛을 막았을 때 한 쪽으로 조금 움직여 주기를 요구했던 곳이라 한다.
***휴양시설 대해서는 위의 버금가는 지역은 북쪽 성벽 안쪽에 있는 아스클레피온(Asclepieion- 치료의 신)과 Lerna 복합건물이다.
후기에 지어진 식당들은 고린도전서 8장 10절-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않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에 나오는 배경을 제공한 반면에 후에는 좋은 수영장들이 많이 지어졌다.
아스클레피온 신전에는 그 신이 자신의 아픈 부위를 고쳐주는 것과 관련하여 많은 지체 조각품들이 실제 몸을 대신하여 드려졌다 (예: 손, 발, 눈, 유방, 머리 등) 이는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배겨을 제공한다
“고전 12: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 . .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아가야가 주전 27년 상원의 지역으로 편성되었을 때 고린도는 이 지역 수도가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나 어떤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주후 15년 티베리우스는 아가야와 마케도니아를 모에시아의 제국 지역으로 편성하나 아가야는 주후 44년 글라디우스에 의하여 원로원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로마는 6월1일부터 다음해 5월 30일까지 1년 임기직의 총독을 보냈다. 최고로 유명한 총독은 갈리오(Lucius Iunius Gallio)이다;
이는 그의 개인적인 특징이나 업적 때문이 아니라 사도행전 18장 12절에 그 이름을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울의 연대추정을 하는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임기를 마치기 전, 51년 여름에 바울이 고린도에서 그를 만났기 때문이다.
시정(市政)은 로마 공화정의 축소판이었다. 12종족으로 나눠져 있는 시민 선거인들은 4년직의 행정관을 뽑았고 퇴임자는 시의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이들 회의는 자유인에게 개방되었다. 상원의 행정장관들은 duoviri iure dicundo였고 58명의 년대(年代)가 알려졌다. 법률상의 의무들에 덧붙여 그들은 도시의 최고 행정장관이 된다. 매 5년마다 선출된 이들은 duoviri quinquennales로 알려지고 인구조사를 하고 도시 의회의 새 구성원으로 불리며 부가적인 임무들을 수행한다.
****그 상원 행정장관(duoviri)은 두 조영관(造營官 aediles)에 의하여 도움을 받는다. 그들은 도시사업 관리자 역할을 담당하고 상업과 재정 소송에 대한 업무를 맡는다.
주후 1세기 중반 것으로 보이는 극장 동쪽 포장구역의 비문에 에라스투스라는 이름의 조영관이 언급되었다. 그리고 에라스투스는 바울이 편지를 썼을 때 저급 공무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롬 16:23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 .). 만약 그렇다면 그의 기독교 개종은 그의 출세에 큰 장해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고린도가 수여하는 가장 큰 영예는 포세이돈의 성전이 있는 지협에서 매 2년 봄마다 열리는 지협(地峽) 경기의 의장(長)이었다. 범 헬라권에서 두 번째로 큰 이 경기는 주전 146년 시키욘(Sicyon)으로 넘어갔으나 새로운 식민지는 시작부터 고린도의 전통적인 권리임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큰 경제적인 이익이 거대한 군중들로부터 흘러들어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린도가 agonothetes라는 지협경기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사무소가 생길 만큼 고린도가 부유해 졌을 때 이루어졌다.
***바울은 주후 51년 이 경기에 참여하였는지 모른다; 고린도에 보낸 편지(고전 9:24-27)에 경기의 이미지만을 가지고 그 장면을 묘사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지협경기의 승리자가 시들은 셀러리(celery)로 된 관을 받는 사실은 바울로 하여금 영원한 면류관을 받은 구원을 생각하도록 자극하였을 것이다.
“고전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공무원들과 수혜자들의 공급하는 정보들에 대해 사무적인 글들이 많이 발견되었고 켄트는 하드리안 시대(117-38)의 104 비문을 정리하였는데 그 중 101개는 라틴어로 단지 3개만이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그 후에는 39개가 그리스어로 17개가 라틴어였다. 라틴어가 사무용어로 많이 사용되었을 찌라도 그 것은 사무용어일 뿐 교역과 상업용어는 헬라어였고 인구가 팽창할수록 구어(口語)는 헬라어가 되었다. 그러나 사무적 용어로서의 장려는 주후 2세기까지는 계속된다.
고린도의 종교적이고 종족적인 다양성은 유물들에 의하여 잘 그려져 있다. 제국의 의식은 광장(forum)바로 옆 성전에서 이행되었을 뿐아니라 지협 경기들과 관계되어있다. 가이사랴에서도 행해진 4년마다 열리는 경주는 아우구스투스에 의하여 열리게되었는데 티베리우스 치하에는 제국적인 경기도 등장하였다. 많은 성소들이 그리스의 신들인 아폴로 아테나, 아프로디테, 아스클레피오스, 데메텔, 코레, 팔라이몬, 시시푸스에게 제사를 드렸다. 이집트의 영향으로 인해 이시스와 사라피스를 숭배하기도 하였다.
**유대인 사회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는 후에(아마 주후 4-5세기)에 나타나고 불충분하다; 단지 한 대리석 아치(홍예)굽에 lulab와 etrog에 의해 분리된 세 촛대(메노라)가 새겨져 있고 상인방으로 재 사용된 처마를 장식하는 돌에 [sina]goge hebr[aion] (ΣΥΝΑΓΟΓΕ ΗΕΒΡΑΙΟΝ 회당 유대인)이 쓰여져 있을 뿐이다.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유대인들의 유적이 완전히 전무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필로는 고린도에 크고 활발한 유대인 사회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유대인들은 아마도 주전 146년 시기온(Sicyon)으로 도망했을 것이다(마카비전서 15:23). 그렇다면 그들은 새로운 식민지의 거주민 중에 합세하였을 것이다. 고린도가 주후 19년 티베리우스에 의한 로마로부터 유대인 축출로 인해 이익을 보았는지는 의문점으로 남는다. 사도행전 18장 2절 글라디우스의 칙령(주후 41년)에 의해 유대인들이 고린도에 왔다는 누가의 힌트는 상당히 회의적으로 취급된다(Murphy O'Connor 1983a: 130-40). 유대인 사회는 주후 67년 이후로 급속히 성장한다; 요셉푸스에 따르면 베스피안은 유대인 죄수 6,000명을 네로가 시작한 운하건설을 위하여 보낸다. 그들 대부분은 비록 많은 양의 일을 이루었을 찌라도 운하건설이 결국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하였기에 결국 자유인이 되었을 것이다. 다른 유대인들은 유대인 제 2차 반란 때(132-35)에 왔다. 고린도의 유대인들은 고린도 시민과 동등하지는 않아도 politeuma라 불리는 시민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사도행전 18: 4절에 “안식일마다 바울이 (고린도)회당에서 강론항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고 한 점을 보아 많은 유대인과 회당이 이미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대 작가들은 식민지인 고린도의 도덕성을 주전 4세기 아테네의 작가들이 헐뜯은 말을 그대로 수용하려한다. 만약 우리가 크리소스톰이 단지 아덴의 상황이 더 악하다고 지적한 언급과 뱀파이어의 올가미에 있는 소년의 단순한 이야기 같은 논쟁이 되는 증거들을 배제한다면 남는 것은 연극을 위해 그려볼 만한 아풀리우스(Apuleius)의 당나귀와 성교하는 음탕한 여인 이야기만 남는다. 사실 이 이야기는 그리스 소설도 아니었고 고린도가 그렇게 음란에 특별한 문제를 가진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스트라보는 ‘모든 사람은 고린도로 항해하지 않는다’라는 속담을 성적인 문제와 연결을 시켰지만 호라스(Horace)는 그 진정한 뜻은 처녀성을 잃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급격히 커지는 도시의 흉악한 경쟁에 자신의 내의를 잃어버릴 위험을 말한다고 명백히 설명하였다.
*****바울이 살기에 쉽지 않은 도시를 그의 주요 선교센터를 삼음에 있어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대한 약점을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신뢰를 주장한다(고후 7장). 사실 고린도는 여러 위험들을 능가하는 이익들을 제공한다. 편리한 교통, 엄청난 수의 방문객들은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 복음을 개종하여 복음을 전파할 가능성가지고 있었다. 아테네는 비교적 교통이 뜸한 지역임에 반하여 고린도는 열려있었으며 그곳 사람들은 따지기를 좋아했다; 바울당시 기독교 사회와 바울간의 관계가 충분히 말해 주듯 그들은 새로운 것에 대해 쉽게 받아들이려하지 않았고 수동적이지도 않았다.
* 유적과 관련된 성경의 교훈 *
- 청동거울 : 고전 13장 “ 지금은 너희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 . .”
- 아고라 (장터) : 성역과 대조적으로 속세에 해당하는 장소이다. 일반인들이 생활하는 교역과 모임 장소로 상점, 공방 주택등이 있었고 대분분의 토론들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행 17:16 “... 또 장터(아고라)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고린도는 이 장터 주변에 7개 이상의 신전이 위치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고기와 많은 물건들이 우상에게 드려지고 판매되었다. 그러기에 고기등 음식은 먹는에게 꺼리끼는 것이었고 이것에 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전 10: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행 17:6 고전 10:25-28
- 신전 : 바울은 너무 많은 신전 때문에 우상에 대한 문제 우상(고전 8장, 10장)과 관계된 음란(고전 5장)과 성만찬이 우상의 전(殿)에서 먹고 마심의 자리같이 되는(고전11:21) 같은 악영향을 고린도서에서 많이 다룬다. 고전 5, 8, 10 고전 11:21
- 심판석 :
1) 바울이 유대인의 모함에 의해 심판을 받았던 장소이고(행 18:11-17)
2) 고린도교회에 관한 송사는 세사에 맡기지 말라고 한다 (고전 6: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행 18:11-17 고전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