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의 정치학: 시몽동과 들뢰즈에 있어서 가속의 몇몇 양상들
쪽글 muse
‘가속’의 의미: 첫째, 이것은 최근의 역사에 있어서 일련의 정치적, 과학적, 특히 기
술적인 변형들을 의미하며, 그러한 변형들의 리듬(rhythm )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소 메시아적인 톤 안에서 ‘가속’은 ‘특이성’(Singularity)으로 명명된다.
I. 존재론적 패러다임으로서의 강도
*강도는 속도와 비선형적 가속으로 증식하는 어떤 양태를 생산한다. 시몽동은 이러한 증식의 형식을 변환(transduction)이라고 부른다. 시몽동은 개별체들(individuals) 보다 개체화(individuation)에서 시작한다. 왜냐하면 개별체는 결코 안정적(stable )이지 않고, 오히려 준안정적(metastable )인 것, 즉 어떤 끊임없는 개체화의 과정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몽동의 개체화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에 대한 전복을 시도한다. 시몽동이 이 질료형상론을 기각하는 이유는 그것이 존재와 생성의 조화에 실패함으로써 존재를 생성에 대립시키기 때문이다. 시몽동의 전략은, 주형(mould , 형상을 부여하는 것)과 변조(modulation ) 개념을 대립시키는 것이다 시몽동은 이 사례로 벽동-공정 과정을 들고 있다.
*질료형상적인 사고에서 이것은 주형에 따라 형상이 잡히고 부서지는 진흙으로 이해된다(즉, 주형은 형상으로 존재하고, 진흙은 질료로 존재한다). 변조적 사유에 따르면 이 벽돌-공정은 조정적인 것, 즉 상이한 요인들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야기되는 것이다. 요인들이란 주형의 벽, 진흙의 성분들, 노동자의 손, 진흙의 습도, 온도 등등이다.
*과포화용액의 결정화 :과포화 용액은 일정량의 용해 물질이 용매(solvent)가 제공할 수 있는 정상량을 넘어서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변환이란 시몽동의 개체화 개념에서 속도의 동의어다. 불균등성은 개체화의 조건이며, 물리적, 생명적, 심리적존재자들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결정화에 대응하는 생명체의 예는 망막상의 자기-교정을들 수 있다. 우리가 가지게 되는 최종적인 [시각] 이미지는 좌측과 우측 망막상 사이의 비평형성과 양립불가능성의 해결인 것이다. 들뢰즈는 강도 개념을 그의 『차이와 반복』에서 전개한다. 그는 시몽동의 개체화 개념을 재전유하고, 그것을 강도와 명쾌하게 연결시킴으로써 더 멀리까지 가져간다. “개체화는 강도가분화의 선을 따라 *들뢰즈에게, 개체화는 강도에 의해 생산되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은 과포화 용액을 닮았는데, 여기에는 둘을 이어주는 실마리가 있다. 시몽동과 비교해서 들뢰즈는 강도는 차이자체라고 본다.
*시몽동의 강도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질료형상론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나오는 반면,
들뢰즈의 목표는 칸트의 감각과 지성 개념에 대한 비판에 놓인다. 칸트에 반대하면서, 들뢰즈는 지각이 순수 직관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도, 지성의 범주에 의해 지배되는 것도 아니라,구조적 생성에 뒤따르는 감각적인 것의 강도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칸트는 시간은 물론 공간에 대해서도 어떤 논리적 외연을 거부하지만, 칸트의 실수는 그러는 동안에도 기하학적 외연을 유지한다는 것이고, 강도량을 이런저런 정도에서 주어진 연장성을 채우는 질료를 위해서만 인정한다는 점에 있다
*차이로서의 들뢰즈적 강도는 시몽동이 텐션(tension)이라고 부른 것과 비교될 수 있다. ‘자
연’과 ‘전개체적인 것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는 대신에, 들뢰즈는 강도를 잠세적(virtual)이고 잠재적(potential)인 것이라고 본다. 물질은 데카르트의 왁스나 스펀지의 예와 같이 공간에 관해 측정될 수 있는 외연적 질들로 환원될 수 없다. 외연적 질과는 반대로, 강도량(intensivequantity)은 그 존재의 특이성(singularity)을 가리키고, 다양한 단위들로 분해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31℃는 10+21이나 1×31이 아니라, 그 자체 단일한 정도이다. 같은 것이 속도와 가속도에도 적용된다. 이것들은 매번 본성의 변화 없이는 나누어질 수 없는 강도량들이다
*강도는 들뢰즈가 초월론적인 장으로부터 떠나, 내재성의 장으로, 재현의 논리로부터 강도의 논리로 들어가도록 해 준다. 이러한 변형은 초월론적 원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차이에 의해 규제된다. 즉 고전적 의미에서의 존재론이 라기 보다는 존재발생론(개체발생론, ontogenesis )이라고 명명될 수 있을 법한 것을 개괄했다.
II. 들뢰즈의 '가속': 강도에서 변조로
*‘가속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강도의 패러다임을 자본주의와 기술적 과정의 운행의 이해에 사용하기 위해 어떻게 배치할 수 있게 하는가’의 문제
*강도와 가속은 개체화 안에서 상호관련된다. 시몽동이 강도를 어떤 발생적 과정(개체화)의 관건적인 요소로 파악하는데 반해, 들뢰즈는 강도를 차이에 따른 존재의 명칭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시몽동은 가속과 과정을 다루는 데 좀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그에게 그것들이 개체화에 관한 존재론적 질문에 긴박된 채 남아 있고, 이에 따라 사회적이고 집합적인 범역 안에서 개체화의 단계들로 현상하기 때문이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강도를 질적 지속의 근원으로 파악하는데 이를 통해 그는 펠릭스 가타리와 더불어 작업하면서, 흐름과 욕망(즉 강도의 특수한 변형들)을 함축하는 역사적 전개라는 개념에 도달하게 된다.
*주류 좌파 전략의 급진적 비판을 의도하는 것으로서, 산업 자본주의의 동력학을 겨냥하는 비판적 신중함보다는, 정치학의 가속주의적 실행이 고무되어져야 하고, 이를통해 자본주의의 탈영토화 경향이 자본주의 자체를 탈구시킬 수단들을 제공하게 될 것 이라고주장한다.
*들뢰즈는 19세기에 통치성의 사회로부터 훈육 사회로의 이동에 관한 푸코의 기술을 취하여, 우리가 이제 통제 사회에 도달했다는 이론들을 전개한다. 들뢰즈는 푸코의 이론에 어떤 ‘돌연변이 변형’(mutation)을 부가하는바, 그것은 이 새로운 사회적 권력의 단계가 새로운 작동형태로의 전환으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사회는 더 이상 닫힌 공간을 통해 작동하지 않으며, 거기서 권력은 노골적이지도 직접적이지도 않게 (푸코가 죄수들에 관한 그의 저작에서 철저하게 분석했던 통제의 형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인들 위에 제약을 부과한다.
*포스트-포디즘적 자본주의는 실존의 새로운 체제로서, 욕망하는 기계가 ‘보편적 변조’라는 공상과학적인 악몽으로 전환해 버린, 정확히 그러한 생산물들로 보이는 한에서, 그것의 기술적 생산물들과 멀리 떨어져서 이해될 수 없게 되었다. 바로 여기서, 정치 사상가로서의 들뢰즈는 형이상학자로서의 들뢰즈와 맞선다.
III. 또 다른 '가속': 내적 공명으로서의 강도
*시몽동의 저작에서 가속에 관한 질문은 그가 진보(progress )라는 개념을 통해 단언적으로
드러나지만 감속(deceleration)과 관련된 직접적 진술은 발견되지 않는다. 시몽동은 전혀 혁명적이지 않지만, 그의 기계학(mechanology)은, 노동자와 기술적 생산장치 간의 관계를 소외로이해함으로써, 그 소외에 대한 저항의 수단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이것은 소외에 대한전통적인 맑스주의적 정의, 즉 노동자와 그 또는 그녀의 노동생산물 간의 소외라는 정의와 역전된 관점을 보인다).
*시몽동에게 소외란 단순히 노동자의 소외일 뿐 아니라, 기술적 대상 자체의 소외이기도 하다(이를테면, 노예처럼 다루어짐으로써).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On the Mode of Existence of Technical Objects )는 바로 이 질문으로 시작되는바,여기서 자본은 단순히 소외의 증폭 요인(amplifying factor )으로 묘사된다. 반면 산업 사회의근본적인 소외는 기술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 놓여 있다. 시몽동은 오직 인간-기술 관계의 적합한 이해에 의해서만 우리는 노동자와 소외를 구성하는 생산수단 간의 간격에 다리를 놓을수 있다고 논증한다.
*강도에 관한 질문이 시몽동의 기계학에서 분명한 장소를 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강도의 문제가 전 저작에 걸쳐 내재해 있는 들뢰즈와는 달리 시몽동은 가끔식 그의 기술적 대상들에 관한 이론과 그의 형이상학이 충분히 통합되지 않은 채 불화한다. 우리가 다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바는 시몽동이 기술적 대상들의‘구체화’(기술적 대상들 안에 있는 인과적 기제가 점점 더 물질화되어 구체적 실체(concrete)가 되는 과정)라고 명명하는 것의 가속이 필연적으로 진보를 이끌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그와 같은 가속은 인간을 더 나쁜 소외의 과정으로 이끌 뿐이다. *시몽동은 기계에 의한 인간 영혼의 오염이라는 기술적 소외의 고전적인 인간주의적 비판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대신 에 그는 인간성과 기술 간에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기를 바란다. 인간 진보의 확정적인 종말을 전제하기 보다, 시몽동은 인간의 진보를 인류와 대상적
개체화 간의 내적 공명에 의해 특성화되는 순환주기들에 따라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우리는 ‘내적 공명’이라는 말을 강도와 관련하여, 준안정적(metastable)으로 되기 이전, 다
시 말해, 어떤 새로운 순환주기가 시작되기 전, 개체화의 변형 과정을 특성화하는 강도로 이
해할 수 있다. 시몽동은 여기서 세 가지 순환주기를 정의하는데, 이른바 ‘인간-언어’, ‘인간-
종교’, 그리고 ‘인간-기술’이 그것이다.
* 산업 이전의 기간에는 도구를 다루면서 일하는 인간이 어떤 연합된 환경(associated milieu)을 창조할 수 있었고, 그들 스스로 기술적 개체들로 기능했다. 하지만 산업시대에 들어서, 인간은 산업 기술적 개체에 의해중심으로부터 배제되었고(이것은 인간이 생산의 중심적 역할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기술적개체’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Simondon [1958] 2012: 100–). 인간은 다만 버튼을 누르고 일괄생산 라인을 가동하는 것과 같은 과제를 떠맡게 되었다. 이러한 탈중심화에 대한 비평은오래된 휴머니즘의 노스텔지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기술’ 관계가 산업화에 의해노예-노예 관계로 변형된다는 우려에서 생겨난다. 즉 여기서 [인간이든 기술이든] 하나는 다른하나의 노예인 것이다. *베르나르 스티글러는 매우 적절하게도 이러한 지적인 상실 과정을 ‘프롤레타리아화’라고 부른다(Stiegler 201033)). 프롤레타리아화란 우리가 가난해진다거나 노동계급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또는 그녀가 더 이상 스스로를 지식이나 기술을 사용함으로써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탈-기술화된다는 의미이다.
* ‘좌파-가속주의자들’이 ‘가속주의자 선언’(Accelerationist Manifesto)에서 자 본-노동 관계의 적절한 분석을 해낸 반면, 강도와 관련된 분석은 광범위한 미개척지로 남겨져 있으며, 더 연구되어야 한다.
*시몽동은 소외 문제의 해결 방법으로 ‘자동화’를 거부했다. 시몽동에게 자동화는 ‘완전성의
가장 낮은 단계’일 뿐으로서, 인간-기술 체계에서 ‘내적 공명’을 창조할 수 없으며, 기계를 노예처럼 다루는 또 다른 방식이다(Simondon [1958] 2012: 127).
IV. 변조, 도래할 강도의 정치
*기술적 가속은 변조의 단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며, 새로운 질서 또는 새로운 형상화를 생산하기 위해 인간성을 전복하는 어떤 폭발을 만들어내는 것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의 과제는 변조에 반대하는 것도, 우리가 분석해 왔던 강도의 존재론적 패러
다임을 비판하는 것도 아니라, 우리 자신을 이 패러다임 안에 위치시키고 상이한 변조의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기어트 로빙크와 같은 몇몇 인터넷 행동주의자들에 의해 지지 받는 대안을 발전시키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강도를 핵심적인 고려사항으로 넣는 기술들을 발전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스티글러(2010)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20세기는 소비주의의 세기였으며, 상징들, 기호들, 이미지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마케팅에서 심리적 욕동들을 다양화함으로써 비개체화의 경향을 창조하였다. 하지만이러한 경향은 21세기에 들어서는, 스마트 기기, 상황-인지(context-awareness) 기술들, 나노기술, 인공 지능, 소셜 네트워크 등등의 도입을 통해 지속되고 있다. 이제 이러한 것은 누군가가 마켓팅 전략을 짤 때 상식이 되었으며, 이 기술들은 구글, 아마존 그리고 페이스북이 도입했으며, 획득한 것이었다.
스티글러의 의미에서 비개체화는 해소될 수 없는 문제인데, 왜냐하면 강도가 공명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부정, 일종의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가기 때문이다. 뮈리
엘 콩브(Muriel Combes)는 이것을 ‘비개체화’의 두 양상들로 재공식화한다. 하나는 ‘불안의
파국적 비개체화’(catastrophic disindividuation of anxiety)로서 모든 경헝의 파괴와 해체
로 이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개체화를 위한 조건인 ‘횡단개체적 비개체
화’(transindividual disindividuation)이다
V. 결론
《가디안》에 게재된 최근의 기사, ‘자본주의의 종말이 시작되었다’에서 저널리스트 폴 마손(Paul Mason)은 정보 기술이 자본주의에 종말을 야기해 왔으며 우리는 포스트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주장했다(Mason 201542)). 마손의 분석은 시몽동의 분석과 공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의 종말을 필연적으로 이끌지는 않고, 그것을 새롭게 시작하도록하는 가속의 위험성을 조명하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대탈출을 제안하는 척 하지 않는다. 이 논문은 가속주의 정치학을 형이상학,
정치학 그리고 기술 간의 관계들 안에 위치시킴으로써 그 정치학 안으로 또 다른 길을 만들어내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