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인물 탐구

영화 감독 " 이장호"

작성자황장군467|작성시간09.03.16|조회수319 목록 댓글 0

영화감독 이장호

 

 



 

 

그가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팔 할은 아버지 덕이었다. 배우 지망생이었던 아버지는 꿈을 이루지 못했고, 음악 쪽으로 분야를 바꿨지만 예술가의 길은 쉽지 않았다. 결국 공무원의 길을 걸었던 아버지는 당시 영화 검열 관련 업무에 종사했다. “아버지의 못 이룬 꿈을 아들에게 투영하신 거죠. 그 흔적이 아직도 있어요. 쌍꺼풀 수술을 아버지 때문에 했으니까. (웃음) 결국 아버지의 꿈은 2대에 걸쳐 좌절되었지만, 영화에 출연하시는 꿈은 이루시게 됐어요. 제 영화엔 항상 단역으로 등장하셨으니까요. 그게 노후의 낙이셨죠.”


글을 깨우치기 전부터 아버지 무릎 위에 앉아서 수많은 영화들을 보며 자라긴 했지만, 그가 일찍이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가슴에 품은 건 아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밴드부 활동을 했고, 대학에서 선택한 전공은 건축미술이었다. 함께 살며 공부를 봐주던 고등학교 선배가 건축과를 갔고, 그 영향으로 이장호 감독은 건축가를 꿈꾸게 되었던 것. 하지만 스무 살의 이장호는 극도의 혼란기를 겪고 있었고, 강의실보다는 학교 앞 술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평소에 친분이 있던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 사무실에 아들을 데려갔다. 배우를 시킬 생각이었다. “신상옥 감독님이 내 얼굴을 보고 ‘너 영화배우 해라’ 이럴 줄 알았는데, ‘너 뭐 할 거냐’ 그러시는 거예요. 갑자기 수치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뭔지도 모르면서 ‘연출’을 하겠다고 한 거죠.” 그렇게 시작된 8년의 신필름 연출부 생활. 그의 스무 살 시절 일기를 묶은 책 <모두 주고 싶다>를 살짝 엿보면, 당시 이장호 감독의 심정은 이렇다. “눈을 크게 뜨고 속을 더욱 단단하게 하여 마음 굳혀 먹고 걸어가야겠다. 웬만한 증오와 멸시도 외면해야 할 것이다.”

 

 

 

그 어떤 기초도 없이 시작한 연출부 생활이었기에 그는 많은 훈련을 겪어야 했다. 게다가 신상옥 감독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연기는 배우들에게 자유롭게 맡기는 스타일이었기에, 어깨 너머로 연출을 배운다는 게 쉽진 않았다. 마흔 살이 넘어서도 조감독 하는 사람이 꽤 있던 시절. ‘연출부 제2 조수’ 이장호가 신필름의 도제 시스템에서 데뷔하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일단 저질렀다. 당대 최고의 신문 연재 소설이었던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 판권을 확보하기에 나선 것이다.

 

“내 위의 선배들이 먼저 데뷔해야 했는데, 난 운이 좋았던 게 최인호가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거든요. 비교적 쉽게 판권을 확보했어요. 그때 어느 일간지에 <별들의 고향> 판권 경쟁에 뛰어든 감독들에 대한 기사가 나왔는데, 당대의 난다 긴다 하는 감독들 이름이 쭉 나오고 맨 끝에 내 이름이 있었어요. 그걸 보니까 갑자기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때부터 현실감을 가지고 뛰어들었죠.” 


 

동생의 대학 등록금 15만원을 계약금으로 주고 <별들의 고향>을 영화화할 수 있게 되었지만, 현장의 막막함은 컸다. 어느 인터뷰에서 “신상옥 감독이 없는 현장에서 영화를 진행한 조감독 같은 기분”이었다.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흔하지 않은 20대의 데뷔 감독. 하지만 <별들의 고향>은 기적을 일으켰고, 서울의 한 극장에서만 46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다. 요즘으로 치면 적어도 전국 700~800만 명 수준의 흥행이었다. “10만 명을 넘어 20만 명까지는 실감이 났어요. 원작 소설의 인기가 관객을 동원한다고 생각했죠. 30만 명에 육박하니까, 이장희의 영화음악이 좋아서 그런 거라고 봤고요. 30만 명을 넘어갈 때는 혹시 연출도 괜찮았던 것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40만 명이 넘어가니까, 회의에 빠지고 겁도 나더라고요. 사람의 힘이 아니라 영화 혼자 달려가는 것 같아서, 어떤 소외감 같은 게 있었어요. 나와 관계 없는 영화가 극장에 걸려 있었던 거죠.”

 

 

 

그 해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이장호 감독은 충무로의 촉망 받는 신인으로 떠올랐다. 두 번째 영화인 <어제 내린 비>(75)는 “나의 영화 만드는 능력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임했던 작품. 서울 관객 16만 명을 넘겼으니, 꽤 흥행한 셈이었다. 하지만 20대에 거둔 그의 성공은 “행운의 얼굴로 온 불운”이었다. 당시 군사 독재 정권은 ‘대마 관리법’이라는 이름으로 대중 예술인들에게 ‘활동 정지’라는 가혹한 처분을 내리고 있었고, 수사관 앞에서 “오래 전에 호기심으로 한 번 피워 보았다”고 말한 것이 빌미가 되어 이장호 감독은 4년 가까이 메가폰을 잡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그 기간을 이장호 감독은 “불운의 이름으로 온 행운의 시기”라고 말한다. 차도 팔고 집도 팔고 허름한 시영 아파트로 이사가야 했던 시절. 호구지책을 위해 충무로 한구석에 작은 술집을 열었고 온갖 잡일을 하며 살았던 고난기였다. “<별들의 고향>이 흥행하자, 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이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며 허상을 만들었던 거죠. 하지만 활동 정지가 되자, 나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사회 시스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제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시기인 셈이죠. 괴롭긴 했죠. 삭발하고 절에 들어갈 생각도 했으니까.”

 


전화위복, 호사다마, 새옹지마…. 이러한 고사성어를 직접 겪으며 실감했던 시기. 하지만 이러한 인생의 굴곡은 이후 그의 삶에서 꾸준히 드러나며, 그는 신념과 유혹 속에서 끊임없이 진동한다. 앞에서 언급했던 그의 일기 <모두 주고 싶다>를 다시 들추면 이런 구절이 눈에 뜨인다.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고집쟁이 독선가가 되어선 안 된다. 모든 것을 똑바로 이해하고 그들의 눈을 바로 잡아야 한다. 대중의 쾌락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그들의 눈을 점점 어둡게 하는 가짜 예술가들을 배격하고 돈에 중독된 사람을 몰아내야 한다. 출세를 위해 뛰는 사람을 몰아내고, 대중들이 고상한 눈을 갖도록 하자.” 그의 스무 살 시절 다짐은, 이후 그의 영화 경력에서 충실히 지켜지기도 했고, 때로는 위반되기도 한다.

 

 

 

1979년 12월에 활동 정지가 풀린 그는, 다음해 <바람 불어 좋은 날>(80)로 돌아온다. 이전에 만든 네 편의 영화와 비교하면 마치 다른 사람이 만든 것 같은 작품이었고, 1980년대 한국영화 리얼리즘의 신호탄이 된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 단초는 이미 1970년대에 있었다.  “1976년에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을 만들면서 뮤지컬 스타일을 시도하려 했는데, 영화의 배경이 산동네였죠. 막상 가 보니까 현실이 너무 비참하고 처참해서, 내 능력으로는 그런 상황을 음악적으로 표현할 수가 없더라고요. 결국은 다큐멘터리 같은 작품을 만들게 되었고, 그러면서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보았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화면의 감수성이 다시 살아났어요.”


이 영화 이후 겪었던 4년의 휴지기 동안 이장호 감독은 ‘의식화’ 과정을 겪으며, 한국영화가 얼마나 거짓말을 해왔고 영화인들이 독재 정권에 얼마나 길들여졌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최일남의 소설 <우리들의 넝쿨>을 영화화한 <바람 불어 좋은 날>은 그러한 ‘각성’의 실천이었던 작품이었다. “1960년대 초까지 근근이 살아 있었던 한국영화의 리얼리즘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특히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자료 조사를 위해 다녔던 시간은 그를 더욱 의식화시켰고 치열하게 만들었다. “남대문 시장에 가면 새벽에 인력 시장이 형성되는데, 조감독이던 배창호와 함께 갔어요. 그때 어떤 청년이 이상한 말투로 “홀뽀이나 싸완있스~” 이러면서 접근하더라고요.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중국집 홀 보이나 회사 사환으로 일할 아이들이 있다는 얘기였죠. 그래서 따라가 봤더니 어느 건물 계단에 초등학교 5~6학년이나 됐을까 싶은 애들이 빽빽하게 앉아 있는 거예요. 그 광경에 소름이 쫙 끼치고 분노가 솟구쳤죠. 시장 바로 앞에 당시 경찰청이 있었는데, 그 앞에서 미성년자들이 팔려나가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공황 상태에 빠진 이장호 감독은 어디라도 화려한 데로 가고 싶었고, 그래서 시청 앞 호텔의 커피숍으로 갔다. 창 밖엔 시청 앞 분수대가 있었고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그때 대한민국은 크게 수술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배창호 감독에게 ‘난 영화보다는 정치를 해야겠다’고 말했죠.”

 

 

 

점점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그는 원래 <어둠의 자식들>(81)을 3부작으로 기획했다. 하지만 2편은 제목부터 사전 검열에 걸렸고, 각 분기마다 한국영화를 제작해야 외화 수입 쿼터를 받을 수 있었던 제작사는 감독을 압박해왔다. “3개월 안에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제목도 엉터리로, 시나리오도 엉터리로 써서 일단 검열에 통과했어요. <바보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 수 없었던 현실. 그는 모든 영화적 관습을 일부러 파괴하는 영화를 생각한다. “뭐든지 반대로 한 거죠. 일부러 연결도 튀게 만들고, 화면 속도도 고속이나 저속으로 하고, 대사도 없애고. 그런데 편집하시던 김희수 선생이, 엉뚱하긴 한데 독특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직접 영화에 출연해, ‘투신 자살하는 영화감독’ 장면을 집어넣었다. 영화감독이 자살하는 심정으로 만든 영화라는 메시지를 넣기 위해서였다.

 

“영화를 망치려고 했던 방법론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테크닉이 된 거죠. 난 농담처럼 ‘<바보 선언>은 전두환 독재 정권과 내가 함께 만든 영화’라고 그래요. 정권이 나에게 저항 의식을 자극하지 않았으면 만들지 못했을 영화였으니까.” <바보 선언>(84)은 당시 대학생들에게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서울 관객 10만 명을 넘겼고, 이장호 감독의 영원한 클래식이 되었다. 하지만 ‘시대와의 불화’와 4년 동안 메가폰을 빼앗겼던 경험은 이장호 감독의 노선을 크게 틀어놓는다.

 

“<바람 불어 좋은 날> 이후에 끊임없이 들어오던 연출 제의가 어느 날 뚝 끊긴 거예요.” 당시 영화계엔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직원이 돌아다니면서 정보 수집과 동향 파악을 했는데, ‘문제적 인물’은 ‘기피 대상’으로 만들 수 있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 “이장호 그 사람, 사상적으로 문제 있는 것 아니야?”라는 말이 제작자들 사이에서 나돌 법한 상황이었다.


 

 

 

결국 먹고 살기 위해 문화영화를 제작하던 당시, 강원도 횡계의 어느 식당에서 직속 후배인 배창호 감독의 대규모 스태프와 마주치게 된다. 당시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84)을 촬영 중이던 배창호 감독은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얼마나 내가 왜소하게 느껴지고 자존심이 상하던지….(웃음) 그러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러다가 영화 못 만들겠다 싶어서, ‘이장호 워크샵’이라는 걸 차렸죠.” 허가된 제작사만 영화를 만들 수 있던 시절. 그는 다른 영화사의 이름을 빌어서 제작하게 되었고, <무릎과 무릎 사이>(84) <어우동>(85)이 이어졌다. 제작이 자유화되자 ‘판영화사’를 차린 그는 <이장호의 외인구단>(86)으로 대흥행을 기록한다.


연이은 흥행을 기록했지만 이장호 감독은 이 시절을 반성한다. “연출료만 받다가 직접 제작을 하면서 돈 맛을 보게 된 거죠. 돈이 내 의식보다 앞섰던 시기예요. 돈과 타협했고. <바람 불어 좋은 날> 이후 쌓였던 내공이 다 허물어지면서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있는 힘도 사라졌어요. 게다가 그때 크게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죠.” 이장호 감독 스스로 하강기라고 표현하는 1980년대 후반기지만, 이 시기 그의 보석 같은 작품이 있다면 바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87)이다. “<바보 선언>이 사생아 같은 작품이면서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표현했다면,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내 기질과 정체성이 잘 드러나는 영화였죠.” 이제하의 원작은 그의 직관을 자극했고, 그는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번 돈을 투자해 영화를 만든다. 흥행과 무관하게 만든 모노크롬 톤의 영화. “돈벌이에 미쳐 영화를 만들었던 것에 대한 반성”이었던 이 영화는 작가적 양심을 스스로 위로했던 작품이기도 했다.


그는 조금은 가혹할 정도로 자신의 ‘안 좋았던 시절’을 평가한다. 특히 1990년대의 두 작품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1990년대는 이미 유행을 따르는 나이가 아니었죠. <명자 아끼꼬 쏘냐>(92)는 이미 젊은 관객들의 관심 밖에 있던 소재였어요. <천재 선언>(95)은, 기초가 부서진 상태에서 집을 지으려 했던 작품이었고요. <바보 선언>에 절실한 저항의 에너지가 있었다면, <천재 선언>은 강력한 동기가 없이 <바보 선언>을 추억하는 영화였어요.”

 

 

 

지방 흥행업자나 토착자본 대신 기업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진출하던 1990년대. 이장호 감독은 자신이 배후에서 후배들을 키워 나갔어야 했는데 앞에 나섰던 것이, 세월의 흐름을 영악하게 잡지 못했던 것이, 방황과 갈등의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 삶의 목표를 분명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소득이었다. “난 항상 그랬어요. 항상 위기가 그 다음 것을 만들어주는 기회가 되고, 그것이 함정이 되어 기반이 무너지지만 새로운 것을 구축하고.” 그렇다면 지금은, 그의 인생이 다시 조심스레 상승곡선을 그리는 시기인 것 같다. 2009년에 오페라 한 편과 뮤지컬 한 편이 ‘이장호 연출’로 무대 위에 오르고, 대학 정년 퇴직을 맞이하는 내년에 새 영화를 기획하고 있다.

 


“2010년은 내가 다시 데뷔하는, 후반기 인생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장호 감독. 그는 신앙을 통해 깨달은 ‘이타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올드보이>(03)의 황조윤 작가가 쓰고 있는 시나리오가 있어요. 역사 판타지인데, 일단 재미있고 젊은 사람들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이야기죠. 그리고 내가 쓴 시나리오도 한 편 있어요. 일종의 자전적인 이야기인데…. 내가 만들기는 쑥스럽고, 기회가 된다면 젊은 감독이 소품으로 연출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그의 일기인 <모두 주고 싶다>을 다시 한 번 들추어 본다. 1965년 12월31일, 스무 살의 마지막 일기 마지막 줄엔 이런 구절이 있다. “그 모든 것을 다 주고라도 내 인생을 꼭 일으켜 세우고 싶다.” 스무 살의 끝에서 했던 다짐이, 60대 중반 노감독의 삶과 공명한다는 것이 새삼 경이롭다. 아울러 그의 스무 번째 영화가 어떤 모습으로 관객과 만날지도 자못 궁금해진다.

 

  

<한국인> 관련글 이어보기ㅣ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 등에 출연한 안성기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