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꺼지지 않는 민족의 횃불,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를 따라(3) | |||||||||||||||||||||||||||||||||||||||||||||
| [연재]김재영의 '샘솟는 땅 정읍의 문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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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갑오동학혁명 기념탑 최초로 세워진 동학혁명기념탑으로 박정희 대통령(당시 최고회의 의장)때인 4296년(1963)에 세워진 것이다. 현재 황토현 정상에는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保國安民)이란 글자가 주탑 전면에 세로로 쓰여져 있다. 보국안민의 ‘보’는 원래 ‘지킬 보(保)’가 아닌 ‘도울 보(輔)’자였다. 의미상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뜻에는 변함이 없다. 당시 농민군이 내걸었던 구호가운데 척양척왜(斥洋斥倭)가 빠져 있고 뒷 명문에는 척양이 빠진 채 척왜만 들어가 있다.
ㅇ황토현 전적지(덕천면 하학리/사적 제295호) 황토현은 말 그대로 시뻘건 황토흙이 주변에 널려 있는 지역이다. 그런데 현장에 가보면 이곳이 과연 고개라는 이름이 붙을 수 있는 곳인가 고개가 갸웃해진다. 해발 35.5m의 낮은 구릉지대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제 이곳은 국민적 관광지로,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아이들의 현장체험학습장소로 그리고 신혼부부들의 사진촬영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각광을 받는 것은 좋은데 한낮에 두꺼비 속이 다 보일 때 까지 술을 마시고서는 가다(go), 서다(stop)를 반복하는 아자씨들이 많이 계신다는데에 문제가 있다. 하긴 독립기념관 잔디밭에서도 용감무쌍하게 판을 벌이는 사람도 있는데 황토현쯤이야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으로는 제발 이런 볼썽사나운 모습만큼은 없어져야 한다. 황토현 정상에 있는 기념탑은 지역주민의 숙원사업으로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당시 5.16 군사정변의 주역이자 유신독재의 상징인 박정희(朴正熙) 때 건립되었고, 황토현 기념관은 군부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全斗煥)이 4316년(1983) 현충사 규모로 확장․성역화하라고 지시했으나 지형상의 어려움으로 그 규모가 축소된 채 4320년(1987) 오늘의 모습으로 완공되기에 이르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민주화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이곳이 독재자인 이들 두 전직 대통령 때 탑이 세워지고 기념관이 완공된 것이다. 그 모순만큼이나 관주도로 추진된 이 사업은 곳곳에서 크고 작은 문제가 발견되어 지금도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그런데 보통 사우는 외삼문과 내삼문 그리고 동상이나 사당이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으나 이곳은 왼쪽으로 약간 비껴선 곳에 사당이 위치하고 있어 전통적인 양식을 크게 이탈하고 있다. 그것은 동상을 먼저 세우다 보니 사당이 한쪽으로 비껴 서게 된 것이다. 또한 기념관을 들어서자마자 눈에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전봉준 장군이 공주 우금치(牛禁峙) 전투에서 패한 뒤 내려 오던 도중 장성 백양사 쪽(長城郡 北下面 加麟里 巖壁)에서 물을 마시다 바위에 새겼다고 하는 남천감로(南泉甘露)라는 탁본 글씨이다. 그러나 현재 전봉준 장군이 남긴 글씨체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전봉준의 글씨체로 단정짓는 것이 무리일 뿐만 아니라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마당에 쫒기는 몸으로 한가하게 그런 글씨를 새길 수 있는 여유가 있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여기에다 액자 밑에 쓰인 설명 내용 중 현 주소 가린리를 가인리(加仁里)로 오기까지 해 놓았다. 뿐만 아니라 혁명을 일으킨 장본인을 동상에는 선생으로 표기해 놓았고 손에는 책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어 이것도 마땅치 않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선생이라 한 것은 한때 조소 마을에서 훈장 노릇을 했다는 것을 근거로 한 모양이다.
전봉준은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위대한 영도자로서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개 훈장으로 생을 마감했더라면 오늘날 그 이름이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부조된 농민군의 모습은 죽창을 들긴 했지만 소풍을 나가는 한가로운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는 것도 문제가 된다. 굶기를 밥먹듯이 했을 이들 농민들이 적어도 굶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을 당시 농민들의 얼굴 표정이 어찌 그리도 오동통하게 살이 찔 수 있을까. 그 얼굴 모습 어디에서 농민군에 가담하여 봉건 왕조에 대항하려 하는 팽팽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부조에 있는 농민군의 모습과 기념관 안에 그려진 농민들의 모습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현장에 가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일이다. 뿐만이 아니다. 제민당내에 있는 대형 초상화에는 전봉준 장군을 근엄한 유학자 풍에 조선시대 양반 복장으로 그려놓고 있어 이 또한 문제가 되고 있다. 그뿐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봉준에게 효수형이 집행되었다 하여 보기에도 섬뜩한 목이 잘린 사진 하나가 기념관 안 우측을 돌아 밖으로 나오다 보면 처참하게 죽은 모습으로 걸려 있었다. 그러나 효수형은 이미 4227년(1894)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었으며 골격으로 보아서 서양인 선교사에 가깝다는 것이 일반의 지적이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교수형 바로 뒤 다시 목을 잘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압송되어 가는 사진 모습의 전봉준과 너무 다른 얼굴이어서 기념관내에 전시된 물품 중 가장 많은 지적을 받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와서야 전봉준은 4228년(1895) 3월 29일 손화중, 최경선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30일 새벽 2시 교형(絞形)으로 집행된 사실이 당시 일본신문 시사신보에 의해 밝혀져 년전에 사진을 철거하는 해프닝을 빚었다(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240쪽 재인용).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전봉준 장군의 압송장면 사진을 유심히 살펴본다면 그 모습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전봉준 장군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관병들의 간담이 서늘할 정도의 상대방을 압도하는 그 매서운 눈매는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 한가지로 황토현 답사의 의미는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아무튼 이런 문제를 소홀히 넘기지 않고 당당히 지적하고 넘어갈 만큼 방문객들의 역사의식은 대단하다. 이 곳 황토현은 농민군이 전라감영군(全羅監營軍)에 맞서 싸워 승리로 이끈 전적지이다. 농민군과 전라감영군이 일전을 치른 과정이 오지영이 쓴 [동학사]와 장봉선이 4265년(1932)에 쓴 [정읍군지]의 부록인 전봉준실기에 전하고 있다. 그러나 오지영의 [동학사]는 최영년(崔永年)이 쓴 [동도문변/東徒問辨]과 함께 감영군이 먼저 공격한 것으로 되어 있고, [전봉준 실기]는 정석모(鄭石模)가 쓴 [갑오약력/甲午略歷]과 함께 농민군이 먼저 공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몇 가지 주장을 종합해 보면 감영군이 농민군을 먼저 공격한 것으로 보이며 전봉준은 감영군의 기습을 미리 예상하고 사전에 치밀한 작전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농민군은 황토재 남쪽 사시봉(死屍峰/현 기념관 건너편 철탑세운 봉우리)에 주둔한 뒤 감영군의 기습에 대비하여 병력을 주위 요처에 잠복해 놓고 본진에는 병력이 없는 대신 허수아비를 만들어 흰 포목으로 위장해 놓았다. 밤이 깊자 감영군은 농민군을 오합지졸로 판단하고 기습했으나 오히려 전후좌우에 매복해 있는 농민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도망치고 말았다. 당시 농민군이 감영군을 맞아 싸워 이긴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농민군은 승리했다. 그만큼 전봉준 장군의 전술과 전략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ㅇ전봉준(4188-4228) 장군 단소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 전봉준 고택에서 약 500미터 떨어져 있는 소나무 숲에 위치하고 있다. 이 비는 갑오년에 천안전씨 문중에서 세운 것이다. 비문 앞면에는 태극문양과 갑오 민주 창의 통수 천안전공 봉준지단(甲午民主倡義統首天安全公琫準之壇)이라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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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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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토현기념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