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오전 예배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빌립보서 1:20-24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에게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고, 그 기대와 소망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만약에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없이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사람으로서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건강한 사람이라면 모두 다 나름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생각하고 연구하고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여러분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오늘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범된 삶을 산 바울이라는 사람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대해 생각해 보고 참된 기대와 소망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과 성격이 많이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신앙을 따라서 크리스천(Christian)과 넌 크리스천(non-Christian)으로 구분합니다. 신앙에는 중간 지대는 없으므로 우리는 크리스천과 넌 크리스천 구분 외에는 다른 것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그리스도인과 믿지 않는 비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삶의 성격과 인생의 결과도 다르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이 세상 사람들과는 최소한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기대와 소망을 모으고 모으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돈’과 ‘성’(sex)과 ‘권력’입니다. 지난 3일에 국회의원 보궐 선거와 교육감 선거 그리고 지방 자치제 선거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정치(政治)입니다.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필요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선거는 민주주의 꽃인 것도 분명합니다. 사람이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면 거기에는 반드시 정치가 필요합니다. 정치는 국가 권력을 얻어서 국가의 영토를 수호하고, 국민을 통치하고, 여러 권력이나 집단 사이에 생기는 이해관계의 대립 등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치는 필요합니다.
이번 선거에 나온 사람들은 선거 운동을 할 때 머슴이 되어 국민을 섬기고, 학생들을 위하고, 주민들을 섬기겠다고 하면서 한 표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이 원하는 위치에 오르게 되면 그 반대로 머슴이 아니라 주인 노릇을 합니다. 이 세상의 정치인들은 권력을 얻어서 그 권력으로 머슴이 아니라 주인 노릇하고, 자기 행복과 유익을 위하여 정치합니다. 우리는 선거 전 이들이 표를 구할 때 하는 말이 새빨간 거짓말인 것을 잘 알면서도 그중에서도 조금 더 나은 사람을 뽑자는 생각으로 투표합니다.
아담의 타락한 죄성을 가진 인간은 권력을 손에 쥐는 그 순간부터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권력을 쥐었을 때 이들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권력자들로부터 콩고물이라도 떨어지는 것을 주워 먹으려고 권력 주변에 모여듭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돈과 권력을 추구하고, 그것이 이 세상 사람들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치인뿐만이 아닙니다. 기업인도 마찬가지이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비영리 봉사단체들도 그 안에서 진급하고 장(長)이라는 위치를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 싸우고 다툽니다.
지금 제가 이 세상의 정치가 다 잘못이므로 정치하지 말라는 험오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정치에 참여하여야 하고 정계에 진출해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크리스천 정치인들이 그렇게도 많은 대도 정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크리스천 정치인들이 일단 당선되어 정치인이 되면 그때부터 아담의 타락한 인간성이 추구하는 돈과 성(sex)과 권력이 그들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인데도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고 중간에 자기의 정치생명을 위하여 타협하고 맙니다. 이것이 잘못인 것을 정치할 동안은 모르다가 정치생명이 끝났을 때 비로소 알게 되고 후회하는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들이 세상 사람들의 기대와 소망이라면 최소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소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제 말을 듣는 여러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대답처럼 최소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의 신분이 아담의 타락한 본성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의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빌립보서의 저자인 바울은 오늘 우리 설교 본문 20절과 21절에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ajpokaradokivan kai; ejlpivda)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보시면 “지금도 전과 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지금도 전과 같이”라는 말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거듭나 구원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부터 이방인 사도로 부름을 받은 때부터 지금 제1차로 투옥되어 로마 황제에게 재판받기를 기다리면서 이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이때까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항상’, ‘늘’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 설교 본문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거듭나 구원을 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때부터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수없이 많은 환난과 박해가 있었고, 지금 역시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서 로마 황제에게 재판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호송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이때까지 한 번도 변함없이 항상 그가 가진 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하며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돈과 섹스와 권력입니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다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첫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오늘 우리 설교 본문 20절 상반절에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부끄럽지”(aijscunqhvsomai)라는 말은 ‘보기 흉하게 하다’, ‘추하게 하다’, ‘불명예스럽게 하다’, ‘수치로 가득 채우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으니까 바울은 흉하고 추하게 살지 않았으며,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러운 삶을 살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서 로마 황제에게 재판받기 위하여 로마로 호송되어 와서 로마 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는 언제 재판받을 것인가를 알지 못한 채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물론 그냥 지낸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28장에서 볼 수 있듯이 바울은 제1차로 2년간 로마 옥에 갇혀 있었지만, 비교적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나갈 수는 없었지만,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거침없이 전했습니다(행 28:16-31). 하지만 여전히 재판을 기다려야 하는 죄수의 신분이었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왔기 때문에 이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 간에 자신은 거리낌 없이 재판 결과를 기다리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갈 때 ‘나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오늘 저에게 ‘평생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서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운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저의 대답은 ‘아닙니다. 저의 삶의 여정은 부끄러움과 수치로 가득 찼습니다. 그럼에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 살았습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저에게 소망이 있다면 제 동료 목사들이나 우리 교우들에게 ‘그래도 이 목사는 하나님을 사랑했어! 진리를 사랑했어!’라는 말을 듣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저의 매일매일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입니다.
여러분, 바울처럼 항상, 매일매일 아무 일에든지, 즉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무엇을 보든지 우리 주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의 대적자들에게 비난당하지 않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내 인격과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찬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 이 세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우리 교회의 권세를 보면서 마음에 거룩한 두려움이 일어날 것입니다(행 2:43).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거룩한 두려움이 일어날 때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권세를 보면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하면서 마음에서 회개가 일어날 때 사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한 것처럼(행 2:14-42) 그런 역사(役事)가 내 인격과 삶을 통해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또 초대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어긋나는 거짓말을 하여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정죄하여 죽이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내셨습니다. 그때 교회 안에 성도들은 물론이거니와 세상 사람들도 교회를 두려워하게 되는 일어났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의 거룩한 모습을 보고 거룩한 두려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최선이란 자기의 힘과 지혜를 쥐어 짜내서 그것을 기초로 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과 지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기꺼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순종할 수 있습니까? 자기의 힘과 지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기꺼이 인정했기 때문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으로서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시고, 우리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면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선을 다해 맡겨주신 일을 감당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되었든지, 성도이지만 또 특별한 일을 맡은 직분자가 되었든지 간에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안에는 ‘목사’, ‘장로’, ‘집사’, ‘권사’라는 직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직분보다 가장 아름다운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성도’라는 말입니다. “성도”(聖徒)라는 말은 ‘거룩한 무리’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자기의 주님과 그리스도로 믿는 그 순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당하여서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됩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성도라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게 됩니다. 아무나 성도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성도라는 이름을 얻게 될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고, 영원한 천국을 사모할 수 있게 되고, 장차에는 의(義)의 재판을 통하여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영원한 천국에서 어린양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그 잔치가 주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영원히 살게 됩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성도라는 이름보다 더 아름다운 이름은 없습니다.
이 성도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가진 자들 가운데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구현체인 교회의 어떤 일을 구체적으로 맡아서 해야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직분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되지 않으면 목사도 될 수 없고 장로도 될 수 없고 집사도 될 수 없고 권사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직분자가 아니기 때문에 교회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 일은 직분자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말씀드린 것처럼 직분자들은 성도로서의 일을 감당하는 자들 가운데 특별한 일을 위하여 세움을 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일이 아닌 그 모든 일은 누가 해야 하느냐 하면 성도들이 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성도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교회는 거룩하게 세워져 갈 수 없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직분을 받아서 어떤 직무를 맡은 직분자들이 직분자로서 의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교회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전도서 9:10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 무엇이든지 해야 하는 일을 찾았다면 온 힘을 다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서 2:24은 인생의 행복은 먹고 마시며 일하면서 마음으로 기쁨을 누리는 것이며, 먹고 마시지 못하며 일하지 않으면 인생이 무기력하고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전도서 2:13은 인생이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기쁨과 행복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과 관계해서 먹고 마시며 일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참된 의미는 창조와 구원의 주(主)로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행하는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은 헛된 것에 불과합니다.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오늘 우리 설교 본문 20절 하반절과 22절에서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담대함”(parrhsiva)이란 ‘숨김없이 말함’, ‘솔직함’, ‘널리 알려짐’이라는 의미로서 ‘말의 거침 없음과 마음이 담대하고 용기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말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이제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받아야 하는 재판을 앞두고 있는 바울이 재판 자리에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이 세상 권세자 앞에서 하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신을 변호하는 말에 거침이 없고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재판을 받겠다는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말한 “담대함”은 강하게 자기를 주장하거나 큰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한 자기의 삶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을 변호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주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주님을 위하여 끝까지 참고 기다리겠다는 의미로 이 담대함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라는 말씀 가운데 “존귀하게 되어”(megaluvnw)라는 말은 ‘위대하게 만들다’, ‘증가시키다’, ‘확대시키다’, ‘찬양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이 본문에서는 미래 수동태로 되어 있어서 바울의 ‘간절한 생각과 소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구원을 받은 이후부터 제1차로 로마 옥에 갇혀서 이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지금까지 그리스도만을 높이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로서 살았습니다. 바울은 늘 자신은 감추고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도 그랬거니와 앞으로도 그렇게 살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바울처럼 내 생각과 내 행위로서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고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을 위대하게 하고 찬양하는 사람이 되고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도들이 서로 교제할 때나 교회로 모였을 때나 각 기관과 속회로 모였을 때 이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내 인격과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위대하게 만들고, 증가시키고 확대하고 찬양하는 사람이 되고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겸손한 자가 되고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늘 자신을 감추고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고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말을 불쑥하기보다는 내 마음의 말을 입술로 내뱉기 전에 한 번쯤은 내 마음에서 곱씹어 보고, 내 말이 다른 사람의 감정에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고 그다음에 말해야 합니다. 내 말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감싸주고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랑의 말을 해야 합니다. 내 행동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고 그다음에 행동으로 보여야 합니다. 이 모든 말과 행동이 바로 나는 낮아지고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것입니다. 나를 감추고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를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을 위하여 사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자기를 희생하고 남을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막 10:45). 따라서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주님처럼 우리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20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성도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 바울이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한 말은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께서 그를 거듭나게 하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을 때부터 로마 감옥에 제1차로 투옥되어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지금까지의 그의 인생 전체, 그의 삶 전체를 요약하는 말이고 그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바울의 이 고백은 그가 어떠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좌절하거나 주눅 들지 않고 믿음의 용기로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첫 번째 투옥되었을 때 2년을 감옥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구한 집에서 로마 군사가 지키는 그런 형태의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비교적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조금은 느슨한 감옥 생활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지 2년이 마쳐질 때쯤 로마 황제 가이사의 재판을 받고 무죄(無罪) 선고를 받고 석방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재판이 언제 열릴지를 알지 못하는 바울의 하루하루의 삶은 매우 불확실하였습니다. 재판을 통하여 무죄를 선고받고 자유의 몸이 될 것인지 아니면 죄를 지은 것은 없었지만 유죄 선고를 받고 사형을 당할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빌립보 교회에게 편지를 쓴 것이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빌립보서입니다. 이처럼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의 미래는 매우 불확실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늘 우리 설교 본문에서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그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바울은 로마 옥에서 석방된다면 자신의 전인격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의 직무를 계속할 것이지만(롬 12:1; 엡 5:28), 그렇지 않고 사형을 당하여 죽는다고 하더라도 확고한 신앙과 마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꺼이 순교의 제물이 되어 주님께 가겠다는 바울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는 바울의 고백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도의 직무를 자기의 안전과 평안과 위험에 집착하여 안전하고 평안할 때는 열심히 일하고, 위험에 처할 때는 하나님의 일을 방관하고 일하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고백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신을 통해 오직 주님만이 그리고 주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고 자기를 받아주시기를 원하는 바울의 성숙한 삶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바울에게 있는 이 죽음을 초월한 담대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바울의 삶 그 중심에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의 문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은 그의 삶의 중심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구원의 주이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삼 일째 되는 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의 참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육신의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질병이 오는 것과 그 질병이 주는 고통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질병의 고통이 점점 더 가해지고 짓눌러올 때 그래서 죽음이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있고 없고 혹은 믿음이 강하든 약하든지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신앙인은 그것을 믿음으로 감당합니다. 죽어도 다시 산다고 하는 부활 신앙이 있기에 육신은 죽여도 영혼을 죽일 수 없는 육신의 질병이 주는 고통을 믿음으로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사람과 환경과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믿음의 능력으로 고통을 견뎌 내는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만이 아니라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여러분, 이처럼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질병이 없고,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물질로 인하여 궁핍함을 당하지 않고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 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입니다. 자기의 중심에 누가 계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세상이냐 아니면 영원한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이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자기 삶의 아웃사이드(outside)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언제나 자기 삶의 중심(center of life)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라고 권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3:5에서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시선은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일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구현체인 교회의 일입니까? 명예와 돈과 여러분의 자녀들과 자녀들의 출세와 성공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구현체인 교회의 부흥과 성장과 번영입니까? 여기에서 분명하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한 가지는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세상이 아니라 내 명예와 돈과 자녀의 출세와 성공과 행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절대 진리입니다. 우리 성도가 끝까지 지켜내야 할 믿음의 내용입니다. 우리의 시건이 머무는 곳이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는 부활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로 자족하며 기쁨으로 지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명사 동사를 포함하여 모두 16번이나 사용되었고 넓게 말하면 19번이나 사용하였습니다. 로마 옥에 갇혀 있으므로 언제 재판을 받을지 그리고 재판을 받아서 살 수 있을지 순교를 당할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합니다. 존 칼빈(John Calvin)은 “성도라는 표징은 기쁨과 감사”라고 하였습니다(요 15:11). 참 성도는 어떠한 상황에 놓이고 이르더라도 어떤 환경에 처하고 이르더라도 기쁨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상황에서 이 환경에서 나에게 무슨 복을 주려고 하시는가를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주실 복을 기대하면서 잘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그때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면 얼굴에 수심 가득하고, 인상을 찌푸리고,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곱지 않고, 누가 조금만 모난 소리를 하면 버럭 화를 내고, 아니 실제로는 자기의 화를 풀어버리려고 누군가가 모난 소리를 하기를 기다리고 합니다. 하지만 참된 성도는 진짜 큰 어려움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 일로 인하여 잠시 두려움이 있고 놀람과 떨림과 불안도 있지만 곧바로 마음의 평정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우리를 소망 가운데 인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능히 이기게 만듭니다. 능히 승리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여러분,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쁨과 감사를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11-12에서 그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분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서 살아가는 근원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삶의 사이드(side)에 계셔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중심에 계셔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을 중심으로 여러분의 삶의 모든 영역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살의 중심으로 모시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여서 여러분이 있는 자리가 복의 자리가 축복의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救贖)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의 참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여러분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여러분의 삶의 중심에 모셔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과 소망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이 고통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즐거워하며 맡은 바 일을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소망으로 인하여 인내하며 믿음의 결실을 거두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2026. 6. 7 주일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