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뒤돌아 보기

[스크랩] 한국 기독교 지도자(2) - 김교신

작성자jtr28114|작성시간14.03.01|조회수38 목록 댓글 0




김교신(金敎臣, 1901년 4월 18일 ~ 1945년 4월 25일)은 일제 강점기에 무교회주의 기독교 사상을 전파한 종교인, 사상가, 출판인, 교육자이며 독립유공자이다.

김교신은 1901년 4월 18일함경남도 함흥에서 아버지 김염희와 어머니 양신의 사이에서 태어난다. 어렸을 때 한학을 공부하고 함흥보통학교를 거쳐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뒤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 영어 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다. 1922년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지리·박물과로 전과하였고, 1927년에 졸업하였다. 도쿄유학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에 반대하고 성서 중심의 무교회주의를 주창하던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조선성서연구회

귀국 후 당시 한국인 유학생으로서 이 강의에 참석했던 김교신을 비롯하여 송두용유석동,양인성정상훈함석헌 등은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여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기 위한 무교회주의 운동을 시작하였다. 김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는 교회라는 조직과 그 속에서 유지되어 온 형식이 아닌, 예수와 성서위에 세워진 조선을 위한 기독교 곧 선교사들의 사상적 지배[1]에서 벗어나 한국인의 에 따른 기독교 사상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기독교였다.

김교신은 양정고보경기고보송도고보 등에서 지리학박물학 교사로서 기숙학생 지도, "무레사네" 모임 등을 통한 민족정신 고취와 전인교육에 헌신하였다.[2] 유달영윤석중손기정, 구본술 등 많은 제자들이 김교신에게서 깊은 감화를 받았다. 타고난 체력이 천하장사와 같이 강건하였으며, 그의 곧은 성격과 날카로운 외모로 인해 "양칼"이라는 별명을 가졌었고, 수업이나 생활 속에서 자주 눈물을 흘릴 정도로 따뜻한 품성을 지녔었다.


김교신은 1927년 7월 월간 동인지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1942년까지 잡지 발행에도 진력하였다. 당시 김교신은 잡지교정으로 눈이 충혈되고 학교일과 잡지발행일을 같이 하느라 과로하여 병이 날 정도로 무척 열심히 일했으며, 혼자서 수금, 주필, 사무, 배달, 취재, 교정, 교열을 담당하였다.[3] 그러나 김교신은 서점에 배달하러 갈 때마다 “이것도 잡지냐, 팔리지도 않는 잡지를 왜 만드냐”[4]와 같은 모욕을 겪기도 했으며, 같은 기독교인들과의 갈등[5], 총독부 검열로 인한 잡지 발간의 지연 등, 늘 폐간되기 직전의 위기와 싸워야 했다. 결국 1942년이른바 성서조선의 권두문 "조와(弔蛙 얼어죽은 개구리를 애도한다라는 뜻)" 로 인한 필화사건이 발생하여 1년 여의 옥고를 치르고, 성서조선은 폐간 당하였다.

김교신은 성서조선의 "조와" 사건이 일어난 1942년 이전에도 이미 조선 총독부의 감시하에서 돼지(군국주의 국가들)[6], 북쪽 아이(나치독일의 침략을 당한 덴마크노르웨이네덜란드벨기에)와 서쪽 어른(폴란드)을 찢는 미친 셰퍼드(나치독일)[7], 미치기 시작한 불독(무솔리니 독재정권치하의 이탈리아)[8] 등으로 빗댄 우화를 통해 비판하고 있었다.

죽음과 광복 이후의 영향

이후 함흥 비료공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1945년 봄 발진티푸스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기독교 사상가 함석헌 선생을 만나고 함흥에 갔는데 마지막 만남이었다. 함흥의 비료공장에서 함석헌은 매우 성실하고 강직한 사람이었다. 김교신의 일기 등 그가 저술한 글은 해방 직후 부족했던 한국어 교육의 교본으로 사용될 정도로 뛰어났으며, 그 속에 담긴 김교신의 투철한 교육 철학과 교육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들은 후배 교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김교신의 기독교 사상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기를 읽는 것이다. 김교신은 성서조선에 〈일기〉를 연재했는데, 노평구의《김교신 전집》을 부키에서 책으로 만들 때에 3권의 단행본으로 만들어졌고, 익투스에서 김교신 선생의 일기를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기도 했다. 일기 내용 속에는, 지리·박물 수업을 위해 찾아간 광산에서 만난 가난한 청소년 노동자들에 대한 슬픔[9],애국심[10]사회주의자였던 친구 한림과의 깊은 우정[11],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격[12], 사회주의 유물론의 늪에 빠진 제자에 대해 애통해 하는 모습,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잘 된다는 믿음, 기독교 신앙은 예수의 복음을 고난으로써 따름이지 교회생활이나 살아서는 부귀영화 누리다가 죽어서 천당을 덤으로 얻으려는 값싼 기복신앙이 아님을 말하는 이야기, 동네 장로교회에 온 개신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말은 화려하나 내용은 없다고 날카롭게 지적하는 이야기 등이 적혀 있다.


김교신이 일본인 우찌무라 간조를 추종하였던 것에 대하여, 김린서 목사는 나라도 일본의 식민지가 된 판에 왜 영적으로도 일본의 식민지를 자처하느냐고 못마땅해 하였다




십자가의 도(道)

-- 성서조선 第 113 號 (1938年 6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고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라.”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라고 하면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대개 무슨 의미란 것을 짐작하리만치 널리 퍼진 말이다.

기독교 신자는 물론 누구라도 그 뜻을 알 것이며 또한 스스로 잘 안다고 자처하는 이가 상당히 많다.   더 나아가 그 의미를 알 뿐 아니라 그 사상과 내용을 동경하며 막연하나마 자기도 십자가의 도를 걷고자 하는 사람도 세간에 적지 않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가 과연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세베대의 아들들 같은 야심을 부리는 사람들도 또한 적지 않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잔이라도 받을 각오가 있다고 뽐낸다.


‘십자가의 도’라고 번역된 본문을 원어의 순서대로 배치하면 “그 말씀 그러나 그 십자가의”가 된다.   그런즉 ‘십자가의 도’라고 함은 골고다로 가는 도로라는 뜻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십자가에 관한 우리의 설명’, ‘우리의 십자가 주석’ 등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십자가’라는 단어는 바울이 특히 많이 사용한 말이며 그 뜻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업에서 당한 모든 고난의 모양’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온 생애를 따라가려는 사도 바울의 설명이다.   결코 용이한 일은 아니다.

그 철저하게 겸비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생애는 모든 통상적 인간 사상과는 정반대되는 일이다.   그 ‘십자가의 도’를 모든 사람들이 너나없이 사모한다, 믿는다 하는 것은 현대인들의 일대 착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어느 날인가 친구들끼리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고는 우리는 서로 놀랐다.

갑 : “오늘날 같은 혼란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한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각각 확고한 각오를 가져야 한다.   더군다나 주부라면 신앙 때문에 가장의 신상에 문제가 생긴다면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결심을 하고 굳세게 신앙의 길을 지켜나갈 준비가 있어야 한다.”

을 : “살림살이는 있는 힘껏 어떻게든 하겠지만 믿는 가정이 그렇게 참담하게 된다면 도리어 그리스도에게 욕되지나 않을까?   전도가 막히지나 않을까?”


이와 같은 생각은 ‘십자가의 도’와는 정확하게 180도 다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 신자의 사상과 관념을 대언한 고백이며 또 우리 각자의 신앙에 어느 틈엔가 자리를 잡은 신조가 되어 버렸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고 비통하지 않을 수 없다.


신앙생활을 하면 병약하던 자는 건장해지고, 없이 살던 자는 부유해지고, 실직했던 자는 취직이 되며, 지위가 낮던 자는 승진되어 신임이 두터워지며, 자녀가 없던 가정에는 옥동자가 생기며, 불화하던 식구는 화목해지는 법인 줄로 안다.   어떤 전도자는 이런 모든 조건을 전도의 미끼로 까지 이용하려 한다.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십자가의 도’일까?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려는 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마가복음 8:32~38)


또 ‘십자가의 도’를 다음과 같이 해설하셨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누가복음 12:49~53)



이처럼 명백한 ‘신도 모집 광고문’이 있었는데 우리들은 그 누군가에게 속아서 예수를 따르면서 평화롭고 단란한 가정 살림을 바라며, 각자의 십자가를 지지도 않으면서 십자가의 도를 걷고자 하는가?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말씀, 십자가를 지나가신 예수의 겸비 고난의 온 생애의 원리 그대로의 생활.   이것은 거듭 나지 않은 천연산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원할 수 없는 길이다.   희망해서는 안 되는 길이다.   비극을 전제로 한 길이다.   인간 본연의 생각과는 본질적으로 상반되는 길이다.


보라, 유태인들이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기다린 역사는 참으로 유구했다.   그들은 기대했다.   메시아는 반드시 수도 예루살렘 왕궁의 보좌에서 영광이 황홀한 가운데 오실 것을.

그러나 메시아가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객사의 구유에 떨어졌을 때부터 인간의 도와 십자가의 도는 하늘과 땅으로 대립되었다.

예수가 택한 제자와 친구, 예수가 용납한 세리와 음녀, 예수가 힐책한 종교가와 학자 등등으로부터 하나님의 독생자는 신분에 상응한 대접도 받지 못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 참담한 시체를 걸기까지 아아, 어느 것 하나 우리의 예상대로, 기대대로 되었던 것이 있었는가.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도!   아, 과연 알고 따르려는가.





<성서조선의 뜻> (원제 '聖書朝鮮의 解')

성서조선 75호(1935.4)

성서와 조선
옛사람들도 책 속에 온갖 보화가 스스로 있다 하여 좋은 논밭보다도 책이 고귀한 까닭을 설파하였다. 책이 귀한 것일진대 책 중의 책인 성서가 가장 고귀한 책이다. 이는 우리의 편견이 아니라 성서 자신이 증명하는 바이고 세계 역사가 보증하는 바이다.

인도의 쉼라(Shimla)는 피서지 중에서 최고이고 이태리의 리비에라(Riviera) 지방은 피한지 중의 낙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계절 언제나, 백년이라도, 일하며 먹고 살아 가기에야 조선보다 더 좋은 곳이 지구 위에 다시 있으랴? 비록 백두산이 없었다 하고 금강산이 생기지 않았다 하여도, 그래도 조선은 다시 없는 조선이라고 생각하니 이는 물론 우리의 주관이다. 세상에 제일 좋은 것은 성서와 조선. 그러므로 성서와 조선.

성서를 조선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것은 한두 가지에 그치지 않는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 주고싶으나 사람의 힘에는 스스로 한계가 있다. 어떤 이는 음악을 조선에 주며, 어떤 이는 문학을 주며, 어떤 이는 예술을 주어 조선에 꽃을 피우며, 옷을 입히며, 관을 씌울 것이나, 오직 우리는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뼈대를 세우며 그 혈액을 만들고자 한다. 

같은 기독교라도 어떤 이는 기도생활로 기쁨에 이를 것을 주창하며, 어떤 이는 영적 체험의 신비한 세계를 역설하며, 어떤 이는 신학 지식의 조직적 체계를 애지중지하나, 우리는 오직 성서를 배워 성서를 조선에 주고자 한다. 더 좋은 것을 조선에 주려는 이는 주라. 우리는 다만 성서를 주고자 작은 힘을 다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
과학 지식적 바탕 위에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려는 과학조선의 운동도 시대에 적절하며,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한 농민으로 하여금 덴마크식 ‘농업조선’을 중흥하려는 의도도 시대의 요구에 맞는 바이다. 또한 신도시를 중심으로 ‘상공업조선’이나, 시대의 거센 물결인 ‘공산조선’ 등등이 다 그 진심과 성실에서 나온 것일진대 해로울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풀의 꽃과 같고 아침 이슬과 같아서, 오늘 있었으나 내일에는 그 자취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모래 위의 성’이라, 비바람을 맞으면 심히 부서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밖으로 보이는 외형의 조선의 밑바닥에 영구한 기반을 넣어야 할 것이니 그 지하의 기초 공사가 곧 성서적 진리를 이 백성으로 하여금 소유하게 하는 일이다. 넓고 깊게 조선을 연구하여, 영원한 새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워라. 그러므로 조선을 성서 위에.

‘성서와 조선’ --- ‘성서를 조선에’ --- ‘조선을 성서 위에’. 이것이 우리의 “성서조선”이다.

혹시 만국성서연구회 또는 대영성서공회 등과 “성서조선”과의 관계를 문의하는 이가 있으나 이런 것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 “성서조선”은 오직 그 주필(主筆)의 모든 책임으로 경영하는 것이며, 조선을 성서화(聖書化) 하기에 찬동하는 소수의 우인들이 협력할 뿐이다. 무슨 교파나 단체나 외국의 돈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대구평신도교회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