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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아우슈비츠 수용소[Auschwitz Memorial Museum]

작성자bdmin|작성시간26.06.16|조회수12 목록 댓글 2


<아우슈비츠 수용소>
[Auschwitz Memorial Museum]

■오시비엥침 가는 길

내가 전역하면서 제일 먼저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러시아 모스코바를 비롯한 동유럽의 과거 공산권 사회주의 국가와 2차 세계 대전이 종식되기전 독일 히틀러가 유태인을 학살한 장소로 이름난 아우슈비츠 수용소이다.

그것은 20세기 최대의 비극으로 각인된 역사의 흔적으로서 현장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위관 장교시절 공산권 전문요원 양성을 위한 자유아카데미 2년과정(77.3-79.2)을 통하여 공산 체제와 변화를 연구할 기회가 있었다.

구 소련과 동구지역 공산권을 위시한 중국,베트남,캄보디아,북한등 지역권에 대한 연구 과정에서 항상 상상만으로 생각해 왔지만, 불과 10여년전 부터 공산권이 급진적으로 붕괴되고 변화의 조짐이 확산되고 있는 시점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궁금하였다.

군 재임 기간이기에 더우기 찾아 보기가 매우 어려웠으나 30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자유스러운 평상인으로 돌아와 과거 공부하면서 궁금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동구 공산권의 발자취를 찾아 가는 일은 매우 뜻있고 보람된 일이였다.

러시아 국영항공 에어로 프로프트 10시간의 비행으로 시베리아 상공을 지나 모스코바 공항을 경유하여 항가리 부다페스트와 체코, 슬로바키아,폴란드,오스트리아 빈등을 여행하게 되었다.그중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폴란드의 크라카우에서 동북쪽으로 약53km 떨어진 오시비엥침 역을 지나서 수용소 현장인 폴란드 국립 오시비엥침 박물관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일제 치하에 우리민족이 겪었던 침략적인 살상행위와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보면서 또한 6.25전쟁을 통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그것은 인간이 어느정도까지 잔인 할 수 있는가를 확연히 보여 주는 것으로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며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하지만 반대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잔혹할 수 있다는 사실도 일깨워 주었다.

동물의 세계가 약육강식의 생존법칙에 의거 생존하는 것처럼 나라 잃은 힘 없는 백성은 강자에 의해 무참히 짓밟혀 진다는 사실도 적나나하게 보여 주는 현장이기도 하다.


■유태인 학살을 위한 수용소

독일의 히틀러에 의해 건립된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인하여 경제적인 혼란시기에 나치당을 결성하고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과 제3제국을 건설하겠다는 미명하에 정권을 장악. 1933년 독일 수상이 되고 총통제 하에 나치군대를 만들어 1938년 오스트리아, 39년 체코, 폴랜드를 점령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아리안민족의 천년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따라서 주변나라 정치범 수용을 위해서 1940년 4월 오시비엥침역 부근에 폴란드 정치범 수용소를 건설하고 45년 7월까지 이곳 아우슈비츠에서만 약150만명의 유대인,항가리, 폴란드, 체코, 러시아 거주 유대인들이 처참하게 죽어 갔다는 기록이 유력하게 남아 있다.

왜 아우스비치 수용소가 폴란드 지역에 건설한가에 대한 의문은 폴란드 지역에 1200만명의 인구중에 유대인이 약300만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폴란드 군부대 건물을 수용하고 ,크라카우 지역 주변이 여러 국가들로부터 교통 접근이 편리하고 철도의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우슈비츠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독일에 의해 점령되었던 나라의 국민에게 5년 동안이나 공포감을 안겨 주었으며 정치범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 국적을 얻은 유태인, 집시, 러시아 포로들을 이곳에 수용하게 되었다.


■수용소는 살인 만행 공장

수용소 설립은 1940년 4월에 내려졌고 수용소장에는 당시 잔인하기로 소문난 “루돌프 훼쓰”가 임명되어 나치비밀 경찰에 의해 폴란드의 정치범 죄명으로 체포한 728명이 호송되었고, 수용소는 14개동의 단층건물과 6개동의 2층 건물을 지어 수감자 노동력에 의해 단층 건물을 2층 건물로 증축하고 8개동을 신축하여 25개동의 수용소를 건설하였다.1942년 한해 28,000명이 동시에 수감한 적이 있었지만 평균13000-16000명 정도가 수감되어 있었다.

수감자가 늘어남에 따라 수용소 크기도 확대되고 거대한 살인 공장으로 변해 갔다. 더 많은 수감자를 수용하기 위하여,1941년 당시 제1수용소에서 3km 떨어진 브제진카에 대규모 제2 수용소를 건설하고, 1942년에는 가까운 모노비체라는 마을의 염색공장이 있었던 자리에 제3의 수용소를 세우고 여기에는 약 40여개 막사 규모의 수용소가 세워져 수감자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죽음으로 내 몰기도 하였다.

현재 아우슈비츠는 2차대전 종전 무렵에 파괴하려고 하였으나 엄청난 규모를 단시일내 파괴하기가 매우 어려움에 따라 이들 특별히 보존하고 후세를 위한 박물관으로 남겨 놓았다.

주요건물은 수용자 블록 막사와 화장터,가스실,총살의 벽,수감자 수송용 철도,수감동,감시탑,고압전류가 통했던
2층, 3층의 철조망,정문등 잔혹했던 나치 범죄가 고스란히 증거로 후세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유대인, 독일인, 이스라엘 및 주변국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를 위한 역사적 교훈으로 남겨 두었다.

아우슈비츠수용소 정문에는 독일어로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로워 진다.) 는 기만적인 문구가 그대로 쓰여져 있다. 이 문을 통하여 매일 강제수용소에 끌려나간 수감자들이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고 들어와서 겪는 고초와 수감생활은 공포와 전율의 상태 였다.

특히 수감자들이 강제 노동을 위해 나가고 들어올 때 마다 수감자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행진곡을 연주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형언 할 수 없는 감정을 대형사진 그대로 남겨 놓았다.

■잔악 행위의 본거지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나치가 만든 최대 수용소로서 수용되었던 많은 수감자들을 온갖 감금과 굶주림, 중노동, 의학실험 대상,사형집행 등 어떻게 하면 인간을 그처럼 잔인하게 죽일 수 있는가를 실제 실험해 본 현장인 것이다.

1993년 “쉰들러리스트”영화가 21세기 첨단 영상매체 시대에 유일하게 흑백영화로 제작한 스티븐 스필버그감독의 제작 의도에서도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한 영화이었기 때문에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42년 1월 유태인에 대한 대량 학살이 시작되었는데 최초의 사형선고를 받은 유태인은 살레지아(폴란드 남서부)지방과 총독관구에서 호송되어온 사람이었으나, 봄이 되자 슬로바키아,프랑스,벨기에,네델란드의 유태인들이 대량 유입되었고, 가을에는 독일, 노르웨이, 폴란드북부, 리투아니아 그 외 독일 점령국에서도 유태인이 연행되어 이곳으로 투옥 시켰다.

독일 나치가 구소련군이 포로로 수용되었는데 약 5개월 안에 목숨을 잃게 되었고 대부분 가스에 의해 집단 학살되거나 총살,몽둥이 그리고 굶어 쇠약하게 만들어 뼈만 남긴 앙상한 인체로 죽어 나갔다.

이들은 밀폐된 화물열차에서 움직일 수 없이 한꺼번에 밀어 넣어진 상태로 식료품은 고사하고 식수조차 지원되지 않은 상태로 긴 고행 끝에 오시비엥침 역에 도착하여 끌려와 수용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그리고 나치 친위대의 의사들에 의해 노동할 수 있는 사람과 일 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은 가스실로 보내는 모습도로 당시 사진을 당시 나치대원들이 촬영한 기록으로 확인 할 수 있다.

■음산한 가스실

지하 탈의실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샤워를 한다는 나치대원의 말에 속아서 계단으로 내려가고 옷을 모두 벗고 샤워실로 보이는 방까지 끌려 들어기면 천정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는 샤워기가 달려있다.

또한 지하실에 200여명이 들어가면 문을 밖에서 닫아 나치 위생병이 천장의 구멍을 통해 지하실로 사이클론-비(Cyklon-B)가스를 투입하면 방안에 있는 사람은 불과15-20분 사이에 질식해 죽는 것이다.

그후 금이빨을 뽑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반지 목걸이를 빼낸 사체는 1층 화장터로 끌고가 태우기도 하고 시체가 너무 많아 밖으로 운반하여 쌓아 놓은 후 불로 태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사이클론 비 독약은 테게슈사가 생산 42년부터 43년까지 2만kg의 사이클론 비가 사용되었는데 훼쓰의 증언에 의하면 약1500명을 죽이는데 6-7kg의 독가스가 필요하다고 했으며 종전 직후 수용소 창고에는 사이클론 비의 빈통이 산더미 처럼 남아 있었고 그중엔 내용물이 들어있는 통도 그대로 전시 되어 있었다.

■수감자의 잔해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소련군에 의해 개방될 당시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머리카락이 발견되고 이것은 독일 본국에 있는 공장으로 보내기 위해 모아 놓은 것으로 확인 되었다. 특히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원단으로 매트리스와 천을 제조한 전시물에서 전율을 느끼게 한다.

뿐만아니라 사체에서 뽑아낸 금 잇빨등을 녹혀 막대모양으로 만들어 독일 중앙 위생국으로 보내졌고 화장시킨 사체의 재는 비료로 사용되고 태운 기름으로 비누를 제조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독일군들이 이곳 수용소에 끌려온 사람들이 가지고 온 물건들을 철저하게 구분하여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 분류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쌓여 있었다.

나치군대의 패망을 앞두고 범죄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 창고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몇만 켤레의 구두, 신발,브러쉬 종류와 피복, 가방, 안경등이 수북하게 산더미처럼 모아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트렁크 가방 표면에는 나중에 돌려 받을 수 있다는 명분으로 소유자의 이름과 주소, 생년월일까지 적혀 있으며 심지어 신체 장애자의 수족을 모아 놓은 전시실에는 많은 것을 느끼게 하고 어린 아이들의 옷과 신발,우유병,인형가방 등에서 잔인성을 더욱 노골화 하였다.

또한 수용소에 끌려온 사람들은 왼쪽 가슴에 죄수번호를 달고 찍은 정면 사진과 옆면 그리고 모자를 쓴 모습까지 남겨 놓았다.

수감자들의 가장 힘들어던 중에 하나는 수감자 수를 확인하기 위한 점호인데 초기 40년 7월 6일 무려 19시간이나 걸려 점호했다는 기록이 되어 있었다.

줄무늬 죄수복은 천이 얇아서 혹독한 추위로부터 수감자를 보호 할 수 없었고 세탁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전염병으로 티프스나 옴병,페스트가 전파되기도 했다.

주거상황은 언제나 비참했으며 콘크리트 바닥 지푸라기위에서 잠을 자고 메트레스는 폐품에다 구멍난 모포등으로 생명이 겨우 부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의 벽, 점호광장, 지하감옥, 화장터

죽음의 벽은 제10블럭과 제11블럭 사이의 공간을 양쪽의 높은 벽으로 막혀 있고 죽음의 벽 앞에는 나치대원들이 수감자들을 수시로 총살시키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소리의 공포를 느끼게 하며 제11블럭은 격리된 형무소로서 임시 재판의 판결을 앞둔 대기의 방으로서 사형선고를 받은 수감자들을 총살하기 전에 복도의 중간 지점에 있는 탈의실에서 옷을 벗게 하고 나체로 된 상태에서 죽음의 벽으로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는 당시 그러한 상황의 사진이 말없는 역사의 진실을 설명하고 있었고, 특별히 지하 감방에는 4명이 서 있을 만한 밀폐된 공간이 있어 가두면 앉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유일하게 외부로 통하는 구멍이라고는 옆벽체 사방10cm 정도의 크기로 빛도 들어 올 수 없는 공간에서 한명도 숨쉬기 어려운 곳에 그대로 서 있는 상태에서 외부로 유일하게 난 구멍인데 밖에서 막아 버리는 죽음의 공포가 존재하는 지하 감방이었다.

점호광장에서는 이동교수대가 집단으로 처형하게 만들어 졌다.1943년 7월19일 3명의 탈주자를 돕고 수용소 주변의 지역민과 내통한 사실을 의심받는 12명의 폴란드인 들이 목메어 단 교수대가 그 당시 현장사진과 함께 전시해 놓았다.

화장터는 막사 블록을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 밖에 있었다. 입구의 첫 번째 다소 큰 방은 초기에 시체 안치소 였으나 후에 가스실로 개조되었고 뒤쪽 방에는 2대의 화장터가 복원되었는데 1대의 가마는 파손된 채 흔적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으나 보통 350구의 시체가 화장되어진 모습이 설치 보관 하고 있었다.

그리고 브제진카에 설립된 제2수용소는 52만평에 300동 이상의 건물이 남아 있으며 후퇴시 나치대원들의 범죄 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폭파한 화장터와 가스실이 타버리거나 파손된 건물과 벽돌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고 화장터의 굴뚝이 수감자를 수송하기 위한 철도길이 정문 입구에 그대로 남아 있어 수용소의 규모를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체코 프라하의 호텔에 왔을 때 엊저께 본 독일 나치의 만행과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실상에 대한 동영상 장면이 방영되고 블도저로 커다란 웅덩이에 시체를 밀어 넣는 모습이 말없는 아우슈비츠 현장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아우슈비츠가 주는 교훈

인간이 인간 답게 삶을 영위할 때 인간이 얼마나 행복한 것임을 느끼게 한다. 전쟁도 혁명도 없는 평화로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강력한 지도자의 독재나 욕심으로 인간 독선이 난무하고 잘못된 판단과 오류에 의해 개개인이 인간성이 말살되고 인간의 의지가 송두리째 앗아간다면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이 없다.

저마다 타고난 인간으로서의 고귀한 삶과 생명의 존엄성이 인정되는 국가와 사회의 자유는 공기의 고마움과 같은 존재이다. 나라 없이 살아가는 백성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를 다시 한번 느끼면서 국가의 존립과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지켜 나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 동안 경험했던 많은 외침에서 국난을 극복하고 역사를 면면이 이어온 것처럼 남북한 간에도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의한 평화적 남북통일을 이룩하고 분단과 이산으로 헤어진 고통의 아품을 해소해 나가는 일이야 말로 우리 민족이 선택해야 할 유일한 길임을 다시한번 일깨워야 할 것이다.

출처: 月刊“統一路”(2000년 9월호, 安保問題硏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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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bdmin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6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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