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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그리다~

고요

작성자미켈란창|작성시간26.06.12|조회수9 목록 댓글 0

고요

             도종환

바람이 멈추었다
고요로 가야겠다
고요는 내가 얼마나 외로운 영혼인지 알게 한다
고요는 침착한 두 눈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보게 하고
육신이야말로 얼마나 가엾은 것인지 알게 한다
고요는 내 안에 오래 녹지 않은 얼음덩이와
그늘진 곳을 보여준다
내가 버리지 못한 채 끌어안고 있는 오래된 상자를 열어 보여준다
그 안에 감추어둔 비겁하고 창피하고 나약한
수천 페이지의 문장들을 
다 읽을 수 없다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허약하며 자주 바닥이 드러나는 사람인지
고요는 이미 다 안다
내 안에는 타오르는 불길과
오래 흘러온 강물이 있다
고요는 그 불꽃을 따스하게 바꾸고
수많은 것을 만지고 온 두 손을 씻어준다
촛불 있는 곳으로 가까이 오게 하고
아직도 내 안에
퇴색하지 않고 반짝이는 것과
푸른 이파리처럼
출렁이는 것이 있다고도 일러준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고
가야 할 길이 있다고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물 한 잔을 건넨다
다시 아침 해가 뜨고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생은 계속된다고 조그맣게 속삭인다
다시 별빛을 바라보고
자신을 용서하고
용서하지 못한 것들은 
신께 판단을 넘기고
고요의 끝에 왜
두 손을 모으게 되는지
물어보게 한다
바람이 멈추었다
고요로 가야겠다

- 고요로 가야겠다, 2025. 열림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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