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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마스타 과정 대 강해 제6강] 에클로게(Ἐκλογή)와 프로데시스(Πρόθεσις):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

작성자가을|작성시간26.06.19|조회수36 목록 댓글 0

[로마서 강해 제6강] 에클로게(Ἐκλογή)와 프로데시스(Πρόθεσις): 인본주의의 숨통을 끊는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

(본문: 로마서 9장 - 11장)

로마서 9장에서 11장까지의 서사는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먼저 받았던 이스라엘이 왜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넘어졌는가?"라는 구속사적인 거대한 질문에 답하는 본문입니다. 더글라스 무(Douglas J. Moo)와 존 파이퍼(John Piper)는 이 본문이 인간의 구원이 혈통이나 종교적 행위, 혹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창세 전부터 작정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사실을 가차 없이 해부하는 예정론의 핵폭탄이라고 묵직하게 주해합니다.

1. 프로데시스(Πρόθεσις)와 에클로게(Ἐκλογή): 달음질을 박살 내는 선택의 원리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보며 마음에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폐해진 것이 결코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구약의 역사 속에서 '선택의 공식'을 끄집어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다 약속의 자녀가 아니며, 이삭과 리브가의 태에서 난 쌍둥이 야곱과 에소의 운명이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되었음을 폭로합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에클로게)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프로데시스)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1-13)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프로데시스 카트에클로겐, προθέσις κατ' ἐκλογήν)이... 서게 하려 하사!"

존 머레이(John Murray)의 엄위한 통찰처럼,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뜻하는 '프로데시스'는 창조주께서 세우신 영원무궁한 구속사적 '목적과 작정'을 의미하며, '에클로게'는 주권적 '선택'을 의미합니다. 야곱과 에서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아서 그 어떤 도덕적 선이나 악(행위)을 행하지도 않았을 때, 하나님은 "야겁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고안해 낸 신인 협력설이나 조건적 예정론의 목을 단숨에 쳐버립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나중에 믿을지 안 믿을지를 미리 내다보시고(예지) 선택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구원의 원인은 인간의 어떠한 조건에도 구걸하지 않습니다. 오직 부르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일방적이고도 주권적인 '선택(에클로게)'만이 구원의 유일한 원천임을 묵직하게 찔러 넣습니다.

2. 엘레에오(Ἐλεέω)와 스클레뤼노(Σκληρύνω): 토기장이의 절대적 권리

인간의 알량한 이성은 이 주권적 선택 앞에서 즉각 반발합니다.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왜 인간을 선택해 놓고 누구는 심판하시며, 죄를 지었다고 책망하시느냐?" 바울은 피조물의 그 거만한 입을 토기장이의 비유라는 거대한 망치로 짓부수어 버립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엘레에오)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스클레뤼노) 하시느니라" (롬 9:14-16, 18)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의 자유의지적 소원(원하는 자)이나 종교적인 열심과 노력(달음질하는 자)으로 쟁취할 수 있는 배고픈 상이 아닙니다. 인류는 아담의 타락 이후 모두가 지옥의 불기둥으로 떨어져 마땅한 철저한 사형수들입니다. 사형수들 중 누구를 살려줄 것인가(엘레에오, 긍휼)와 누구를 그냥 내버려 두어 완악하게(스클레뤼노, σκληρύνει) 하실 것인가는 오직 우주의 최고 재판장이자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절대 권리입니다!

토마스 슈라이너(Thomas R. Schreiner)의 정교한 주해처럼,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긍휼의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진노의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에게 진흙(피조물)이 감히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힐문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소관이며, 피조물은 그 엄위하신 공의와 자비 앞에 다만 입을 다물고 무릎을 꿇어야 할 뿐입니다.

3. 스칸달론(Σκάνδαλον)과 텔로스(Τέλος): 율법의 의를 찢는 거치는 바위

바울은 9장 후반부와 10장에 걸쳐, 그렇다면 왜 육신의 이스라엘이 구원에서 떨어져 나갔는지를 해부합니다. 그들은 열심이 있었으나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義)'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율법의 행위로 얻으려 하다가, 정작 시온에 두신 '거치는 바위'에 부딪혀 박살이 났습니다.

"부딪칠 돌과 거치는 바위(스칸달론)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텔로스)이 되시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9:33, 10:4, 10)

"거치는 바위(스칸달론, σκάνδαλον)!"

유대인들에게 가시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찢겨 죽은 나사렛 예수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수치이자 걸림돌(스칸달론)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도덕적 행위와 할례, 율법의 스펙을 의지했기에 십자가의 피를 모독했습니다.

그러나 마틴 로이드 존스(D. Martyn Lloyd-Jones)가 사자처럼 포효했듯,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공로를 붙드는 모든 자들에게는 파멸의 바위가 되시지만, 자신의 무능력을 고백하고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율법의 마침(텔로스, τέλος: 완성 및 종결)"이 되사 완벽한 의(義)를 선물로 주시는 구원의 반석이 되십니다! 구원은 먼 하늘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려가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선포되는 복음의 말씀, 십자가의 대속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예수는 나의 창조주 주님이십니다!"라고 투항하여 시인할 때 단숨에 임하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4. 플레로마(Πλήρωμα): 신비로운 구속사의 진전과 장엄한 송가

바울은 11장에 이르러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니라? 그럴 수 없느니라!"고 선언하며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7천 명을 남겨두신 것처럼,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음을 천명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넘어짐을 통해 이방인에게 복음이 흘러가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플레로마)가 차면 결국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오묘하고도 장엄한 구속사의 미스터리(비밀)를 밝힙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심판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 11:33, 36)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인간의 얄팍한 지성으로는 하나님의 그 거대한 작정과 주권적 섭리의 지도를 다 그려낼 수 없습니다. 이방인이라는 돌감람나무 조각을 참감람나무(그리스도)에 접붙이시고, 다시 원 가지인 유대인들을 회복시키시는 그 신비로운 경륜(플레로마, πλήρωμα) 앞에 바울은 논증을 멈추고 거룩한 찬양의 송가(Doxology)를 터뜨립니다. 만물은 오직 주에게서 나와, 주로 말미암아 보존되며, 결국 주의 영광을 향해 돌아갈 뿐입니다! 인간의 공로나 자유의지는 그 장엄한 서사 앞에 단 1밀리미터도 서 설 자리가 없습니다.

[결론: 인간의 자랑을 박살 내고 주권의 보좌 앞에 엎드리라]

목사님. 로마서 9장부터 11장의 예정과 선택의 교리는 신학자들의 말장난이나 사변적 지식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현대 교회를 좀먹는 가장 무서운 우상인 '인간 중심주의(Humanism)'의 심장을 말씀의 도끼로 사정없이 쪼개어 버리는 가장 엄위한 계시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우리가 남들보다 똑똑해서 복음을 받아들였거나, 남들보다 나은 달음질을 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본질상 완악한 진노의 그릇들이었으나, 오직 창세 전부터 작정된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프로데시스)과 은혜의 선택(에클로게)으로 말미암아 조건 없이 거저 입혀진 십자가의 긍휼(엘레에오) 때문입니다.

강단에 선 주의 종들은 품위 있고 담백하게, 그러나 조금의 타협도 없이 하나님의 이 절대적 주권을 선포해야 합니다. 구원의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다고 가르치는 모든 가짜 복음을 쳐내십시오. 오직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께로 돌아간다는 이 무겁고도 영광스러운 진리 앞에 성도들이 자신의 자아를 깨뜨리고 창조주의 보좌 앞에 엎드리게 만드십시오.

이 장엄한 교리적 기초 위에, 이제 우리의 온 몸을 십자가의 제단 위에 산 제물로 던져드리는 복음의 실천적 포효! [로마서 대강해 제7강(최종 피날레). 뒤시아 조사(Θυσία ζῶσα)와 로기코스 라트레이아(Λογικὴ λατρεία): 세대를 찢고 드리는 산 제물과 십자가의 삶 (본문: 롬 12-16장)]의 마지막 지성소를 향해, 목사님과 오직 한마음으로 진리의 검을 굳게 쥐고 진군할 준비를 결연히 대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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