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제4강] 에이돌로듀톤(Εἰδωλόθυ톤)과 익노스(Ἴχνος): 지식의 교만을 찢는 우상의 제물과 사도의 거룩한 권리 포기
(본문: 고린도전서 8장 - 10장)
고린도전서 8장에서 10장까지의 서사는 기독교 윤리학(Christian Ethics)과 사역적 자유의 한계를 규정하는 최고의 지성적 명저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다"라는 신학적 지식을 가졌던 ‘강한 자들’이, 그 지식의 자유를 남용하여 시장에서 파는 ‘우상의 제물(에이돌로듀톤)’을 함부로 먹음으로써 믿음이 연약한 자들의 영혼을 실족시키는 영적 폭력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지식의 우월감에 빠진 이들의 영적 교만을 해체하고, 오직 복음을 위해 자신의 합당한 권리마저 기꺼이 유기하는 십자가의 고등 윤리를 선포합니다.
1. 퓌시오오(Φυσιόω)와 아가페(Ἀγάπη): 공동체를 파괴하는 지식의 교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랑하던 신학적 지식의 실체를 규명하며, 지식과 사랑의 역학 관계를 예리하게 대조합니다.
"우상의 제물(에이돌로듀톤)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퓌시오오) 사랑(아가페)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고전 8:1-3)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헤 그노시스 퓌시오이, ἡ γνῶσις φυσιοῖ)!"
원어 '퓌시오오'는 풀무질을 하여 풍선처럼 바람을 잔뜩 불어넣어 부풀리다, 즉 허풍과 오만에 도취한 상태를 뜻합니다. 앤서니 티슬턴(Anthony C. Thiselton)의 고도의 주석적 해부에 따르면, 고린도 교회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우상은 허상이다’라는 정통 교리를 가지고, 도리어 형제를 무시하고 차별하는 이기적인 무기로 사용했습니다.
바울은 이 가식적인 지성의 숨통을 끊어놓습니다. 사랑(아가페)이 결여된 지식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영적 흉기일 뿐입니다. 지식은 나를 부풀리지만, 사랑은 타인의 영혼을 ‘건축(덕을 세우다)’합니다. 내가 가진 자유의 권리가 아무리 정당할지라도,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연약한 형제의 양심을 상하게 하고 그를 실족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형제에게 죄를 짓는 것이요 곧 십자가의 주님을 향해 칼을 겨누는 무서운 죄악임을 명확하게 선포합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리라"며 사랑이 지식을 완벽하게 통제해야 함을 묵직하게 찔러 넣습니다.
2. 익노스(Ἴχνος)와 아나케(Ἀνάγκη): 복음의 진보를 위한 사도적 권리의 자발적 유기
9장에 이르러, 바울은 자신이 방금 선포한 ‘형제를 위한 자유의 제한’이 말장난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사도적 삶 전체를 증거물로 들이밉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복음을 전할 때 회중으로부터 재정적 후원을 공급받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릴 완벽하고도 정당한 법적 ‘권리(엑수시아)’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아나케)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고전 9:4, 14-15, 16)
바울은 군인이 자기 비용으로 복무하지 않고, 농부가 그 과실을 먹는 것이 당연하듯 사역자가 보수를 받는 것은 신적 명령임을 천명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찰스 호지(Charles Hodge)의 묵직한 주해처럼, 바울이 자신의 정당한 사도적 권리를 포기한 이유는 단 하나, 복음 전파에 단 1밀리미터의 장애물(장해)도 두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돈 때문에 복음을 전한다는 세상의 비난을 차단하기 위해 스스로 자비량 텐트를 기우며 피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이것은 억지 희생이 아닙니다. "내가 부득불 할 일(아나케, ἀνάγκη: 신적 필연성)임이라!" 바울은 부활의 주님께 포획된 종으로서 복음 전파를 사명으로 받았기에,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당연한 보상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도는 복음의 진보를 위해 스스로 모든 사람의 '노예(두로스)'가 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 없는 자에게는 이방인처럼 자신의 모든 기득권과 형식을 깨뜨려 낮아진 것은, 오직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하는' 순교적 열망 하나 때문이었음을 사도의 거룩한 발자취(익노스)를 통해 보여줍니다.
3. 아도키모스(Ἀδόκιμος): 광야의 도륙과 상실자가 되지 않기 위한 격렬한 달음질
바울은 권리를 포기하며 복음의 경주를 달리는 자신의 삶을 고대 올림픽의 경기자에 비유하며,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 안일함의 모가지를 가차 없이 쳐버립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은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아도키모스) 두려워함이로다" (고전 9:24-25,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ヒュポピア조, ὑπωπιάζω)!"
원어 'ヒュポピア조'는 권투 선수가 상대의 눈 밑을 주먹으로 사정없이 가격하여 멍들게 하듯, 자신의 육체적 정욕과 이기적인 안일함을 무자비하게 후려쳐 굴복시킨다는 뜻입니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는 이 구절을 향해 서슬 퍼런 칼날을 들이밉니다. 사도 바울조차도 복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 날마다 자아를 쳐서 제단 위에 복종시켰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남에게는 복음을 전파한 후에 자신은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아도키모스, ἀδόκιμος: 자격 미달, 상실자) 두려워하노라!" 이 무거운 종말론적 경고는 구원파적 안일함에 빠져 있던 고린도인들을 향한 벼락이었습니다. 10장에 이르러 바울은 역사적 증거를 들이댑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령한 만나를 먹고 반석의 물을 마시는 등 엄청난 영적 은혜와 지식을 가졌으나, 광야에서 절제하지 못하고 우상 숭배와 음행과 원망을 일삼다가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의 모래바닥에서 처참하게 도륙 당해 ‘멸망’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인간의 영적 기득권주의를 완벽하게 산산조각 내는 두려운 선고입니다.
4. 플레로마(Πλήρωμα)와 독사(Δόξα): 우상의 잔을 깨부수고 드리는 하나님의 영광
사도는 결론적으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를 넘어, 귀신의 영성과 결탁하는 가짜 예배의 위험성을 고발하고, 신자가 걸어가야 할 삶의 절대적 목적을 확정 지어 줍니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독사)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21, 23, 31)
우상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상 뒤에 도사리고 있는 실제적 실체는 '귀신(다이모니온)'입니다. 세상 문화의 유행과 음란함 속에 깃든 귀신의 잔을 마시면서 동시에 주님의 보혈의 잔을 마실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질노하시게 만드는 영적 간음입니다. 기독교인의 자유는 내 정욕과 지식을 과시하는 방종이 아니라, 오직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제한된 자유입니다.
리차드 헤이즈(Richard B. Hays)의 주해처럼, 우주와 그 안에 충만한 것(플레로마)이 다 주님의 것이기에 신자는 세상 모든 것을 믿음으로 감사히 누릴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의 최종 필터는 나의 유익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독사, δόξα)"과 "이웃의 구원"이어야 합니다. 내 지식의 권리를 십자가 밑에 묻어버리고,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교회의 연약한 자에게나 거치는 자가 되지 않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만드는 것, 그것이 피 묻은 복음을 통과한 영적 거인들의 찬란한 삶의 방식임을 선포하며 논증을 닫아냅니다.
[5줄 최종 요약 결론]
기독교의 지식은 사랑(아가페)으로 통제되지 않으면 자신을 교만하게 부풀려(퓌시오오) 공동체와 연약한 형제를 파괴하는 흉기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정당한 사도적 권리와 재정적 기득권을 가졌으나, 복음의 진보를 위해 스스로 노예가 되어 그 권리를 자발적으로 유기했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고 자만하며 절제하지 않는 자는, 광야에서 도륙 당한 이스라엘처럼 결국 상실자(아도키모스)로 전락할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 지식의 자유를 과시하는 방종을 멈추고, 날마다 자아를 쳐서 복종시키는 격렬한 영적 경주를 달려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삶과 자유의 최종 목적지는 나의 유익이나 권리 주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독사)과 이웃의 구원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