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강해 제3강] 오스트라키노스 스케우오스(Ὀστρά키νος σκεῦος)와 베마(Βῆμα): 질그릇의 파산과 심판대를 바라보는 나그네의 신앙
(본문: 고린도후서 4장 7절 - 5장 21절)
고린도후서 4장 7절부터 5장 전체를 관통하는 서사는 기독교 인론(Anthropology)과 종말론(Eschatology)의 극치를 보여주는 구속사적 정수입니다. 바울은 외형적인 화려함과 초인적인 능력을 과시하던 거짓 사도들의 속물근성을 고발하며, 사역자의 본질은 거칠고 비천한 흙 그릇에 불과함을 선언합니다. 사도는 장차 무너질 지상의 육체(장막 집)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엄위하신 심판대 앞에 단독자로 설 것을 경외함으로 바라보며,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피로 중보하는 '화목의 복음'을 가장 지성적인 필치로 전개합니다.
1. 오스트라키노스 스케우오스(Ὀστρά키νος σκεῦος): 보배를 드러내기 위한 그릇의 파괴
바울은 새 언약의 직분이 가진 그 엄청난 영광을 설명한 직후, 정작 그 복음을 담고 있는 사역자의 외형은 너무나 비천하고 깨어지기 쉬운 상태임을 폭로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오스트라키노스 스케우오스)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7-9)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오스트라키노이스 스케우에신, ὀ스트라키νοις σκεύεσιν)에 가졌으니!"
원어 '오스트라키노스 스케우오스'는 구워 만들지 않아 부딪치면 단숨에 산산조각 나버리는 흔하고 천한 '진흙 그릇, 옹기 쪼가리'를 뜻합니다. 폴 바넷(Paul Barnett)의 주해처럼, 사도 바울의 육체와 형편은 질병과 핍박으로 찌든 비천한 흙 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깨어지기 쉬운 껍데기 속에 온 우주를 집어삼키는 유일한 가치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배)'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가치 없는 그릇에 보배를 두신 목적은 명확합니다. 구원의 권능과 능력의 주체(뒤나미스)가 인간의 지성이나 스펙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음을 온 천하에 폭로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사방으로 압박을 당하고(우겨쌈) 바닥에 메쳐질지라도(거꾸러뜨림) 결코 파멸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우리 육체에 예수의 죽음(네크로시스)의 흔적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이유는, 내 껍데기가 깨어지고 박살 날 때마다 그 틈새로 오직 예수의 찬란한 생명(조에)이 가차 없이 뿜어져 나오게 하시는 십자가의 주권적 역설 때문임을 선포합니다.
2. 카탈뤼오(Καταλύω)와 에펜뒤오마이(Ἐπενδύομαι): 장막 집을 찢고 입는 영원한 신령한 신체
5장에 이르러, 바울은 고난으로 가득 찬 이 땅의 역사 속에서 사역자가 낙심하지 않고 고결한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소망의 근거를 종말론적 신체 변화에서 찾아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카탈뤼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에펜뒤오마이) 간절히 사모하노라" (고후 5:1-2)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카탈뤼데, καταλυθῇ)!"
원어 '카탈뤼오'는 군대가 주둔하던 천막을 해체하여 철거하거나 건물을 완전히 폭파해 해체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우리의 이 땅의 육체는 영원한 저택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 걷어낼 나그네의 '천막(장막)'일 뿐입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이 장막은 반드시 낡고 파괴당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죽음의 해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데이비드 가랜드(David E. Garland)의 정교한 주해처럼, 신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하늘로부터 주어질 부활의 신령한 처소, 즉 '덧입게 될 영원한 신체(에펜뒤오마이, ἐπενδύσασθαι)'가 보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이 영원한 영화(Glorification)의 보증(아라본)이 되어주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일꾼은 육신의 눈에 보이는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진리만을 믿음의 닻으로 삼아 묵묵히 나그네의 의연한 경주를 달릴 뿐임을 묵직하게 찔러 넣습니다.
3. 베마(Βῆμα)와 포보스(Φόβος): 심판대 앞에 단독자로 서는 청지기의 두려움
바울은 이 찬란한 부활 소망이 구원파적 방종이나 안일함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모든 인류가 직면해야 할 우주에서 가장 두렵고 무거운 법정적 실제를 들이밉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베마)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포보스)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고후 5:8-11)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베마, βήματος) 앞에 나타나게 되어!"
원어 '베마'는 고대 올림픽의 재판관이나 제국의 총독이 앉아 행위의 진위를 가리고 판결을 내리던 공적 심판석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신자라 할지라도, 이 땅에서 행한 모든 사역의 동기와 삶의 흔적에 대해 주님의 불꽃 같은 눈동자 앞에서 낱낱이 심사(안아크리노)받는 종말론적 법정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포보스, φόβον)을 알므로!"
존 맥아더(John MacArthur)는 이 구절을 향해 서슬 퍼런 칼날을 던집니다. 거듭난 자의 가슴속에는 창조주를 향한 거룩한 '경외심과 두려움(포보스)'이 장전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심판대의 두려움을 아는 참된 일꾼은 사람들의 인기나 평판을 구걸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만을 삶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아,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피 눈물을 흘리며 진리만을 올곧게 선포하게 만드는 거룩한 원동력이 바로 이 '베마의 신학'임을 명확하게 선포합니다.
4. 카탈라게(Καταλλαγή)와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 인본주의를 찢는 우주적 대속과 화목의 직책
바울은 이제 5장의 대미를 장식하며, 사역자가 선포해야 할 기독교 핵심 복음인 '대속론(Atonement)'과 '화목(Reconciliation)'의 위대한 법정적 메커니즘을 천명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디아코니아 카탈라게스)을 주셨으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디카이오쉬네)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18, 21)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디아코니아 카탈라게스, διακονίαν τῆς καταλλαγῆς)을 주셨으니!"
인류는 죄로 인해 창조주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 아래 놓인 원수들이었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이 적대 관계를 풀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십자가 제단 위에서 완벽한 '죄 덩어리(죄로 삼으신 것)'로 취급하사 공의의 저주를 퍼부으셨습니다.
머레이 해리스(Murray Harris)의 고도의 조직신학적 주해처럼, 이것은 위대한 '이중 전가(Double Imputation)'입니다! 우리의 추악한 죄악은 그리스도에게로 전가되어 그분이 저주를 받으셨고, 그리스도의 완벽한 순종과 의(디카이오쉬네, δικαιοσύνη)는 우리 계좌로 일방적으로 전가되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벽하게 의롭다"는 판결을 얻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위탁받은 사명자는 이 위대한 '화목의 복음(카탈라게)'을 세상에 대언하는 하늘의 대사(프레스베우오)들입니다. 인간의 조건이나 도덕적 훈화를 섞어 복음을 변질시키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너희는 창조주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단호하게 외쳐야 함을 선포하며 논증을 닫아냅니다.
[5줄 최종 요약 결론]
사역자는 깨어지기 쉬운 비천한 질그릇(오스트라키노스 스케우오스)에 불과하며, 오직 그 껍데기가 부서질 때 내면의 복음의 보배(그리스도)의 능력이 폭발합니다.
육체의 장막 집은 세월 속에 철거당해(카탈뤼오) 죽을지라도, 신자에게는 재림의 날에 하늘로부터 덧입게 될(에펜뒤오마이) 영원한 부활의 신체 소망이 보증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과 사역자는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베마) 앞에 단독자로 서게 되므로, 강단은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직 신적 두려움(포보스)으로 진리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된 자는 더 이상 이기적인 자아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신 마지막 아담만을 위해 존재론적으로 헌신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한 우주적 대속 사건이며, 사역자는 이 하나님과의 화목(카탈라게)을 대언하는 배타적 대사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