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恨 많은 한의대여!
이제까지 핏대를 세워 떠든 말들은 공허하다.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은 진실로 위장한 허구에 불과
하다. 이처럼 코끼리 이야기가 가벼운 언어의 유희로 전락한 원인은 우리 현실에 있다. 우리는 이미
상상하는 힘을 잃어버렸다. 거창하게 코끼리까지 갈 필요 없이 늘 보는 강아지의 모습마저도 눈 감으
면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자유로운 상상을 위해선 대상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 바로 그 느낌이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이를 거부한다. 무언가 느낄 시간을 주지 않으며 오히려 그런 시간을 낭비라
한다. 잠시라도 두 눈이 책 밖에 있으면 비과학非科學, 미신迷信이라는 죄를 씌워 온몸을 움츠리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미쳤다. 하기 싫은 책파기를 억지로 하느라 미쳤다. 끔찍한 본本3, 책파기의 극치인 본本3 생활을 거치면서 정말로 나는 미쳐 버렸다. 그래서 미친년 널뛰듯이 이글을 쓰고 있다.
나는 산만하다. 좀이 쑤셔 한자리에 오래 못 있는 것도 그 원인이지만 머리 속이 온통 코끼리 사냥으
로 가득 차 있기에 그렇다. 이런 낭창한 성격은 시험때면 더욱 발휘되는데 항상 답안지를 일등으로
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욕먹을 말이지만 솔직히 나는 거짓말 지꺼리는 데에 신물이 난다. 남들이 모두 교과서로 신봉하는 책에 있는 말이니 나도 억지로 쳐먹고 답안지 위에 배설해 놓지만 찝찝한
것이 마치 밑 안딱고 화장실에서 나온 기분이다. 결국 이런 기분이 쌓이고 쌓여 폭발하고 말았다.
시험지를 받으면 갑자기 쓰기 싫어지면서 심계항진心悸亢進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꽁꽁 뛰는 가슴을 붓잡고 이렇게 지껄였다.
'드디어 내가 미쳤구나 미쳤어.'
쪽팔리게 나의 사생활을 밝히는 것은 제발 여러분은 나처럼 되지 말아 달라는 의미에서이다. 나처럼
쓸데 없는 생각으로 괜히 먼 산만 바라보지 말고 속편히 책만 열심히 파달라는 의미에서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미쳐버렸으니 이제부턴 완전히 돌아버리려 한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철학의 원동력인 '느낌'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면 지금 우리의 교육환경으로는
절대 그 느낌을 얻을 수 없다고 감히 생각한다. 교수님들께서 얻지 못하셨기에 우리 학생들 또한 그럴
수 밖에 없다는 논리는 틀리다. 느낌이란 것은 스스로의 몫이지 누군가에 의해 주어짐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솔직히 말해 느낌의 여유를 방해하는 것이 문제다. 개떼같이
모여 하는 고등학교식, 학원식의 수업도 문제고, 교과서 하나 달달 잘 외우면 누구는 장학금 주고
누구는 짜르는 것도 문제고, 멀쩡한 사람의 간肝, 심心, 비脾, 폐肺, 신腎을 갈기갈기 쪼개어 죽은 시체를 배우는 것도 문제고, 학생의 엉뚱한 질문을 무시하는 교수님도 문제고, 교수님들을 스승으로 모시지 못하는 학생도 문제고, 식당도 도서관도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등록금만 하늘높은 줄 모르는 것도 문제고...
매사를 삐딱하게 보는 나의 눈에는 이처럼 모든 것이 문제이다.
특히 교과서에 문제가 많은데 이 부분은 학생의 입장으로서 함부로 말할 수 없지만 선생님들께 용서
를 빌며 논의하고자 한다. 어떤 주제를 놓고 <내경內經>에는 이렇게, <상한론傷寒論>에는 이렇게, <제병원후론諸病原候論>에선 이렇게, 금원사대가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고 나열하는 것이 우리 교과서의 형식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달달 외워야 한다. 그래야 학년 올라가니까. 그러나 이런 방식은 나의 '코끼리론'에 따르면 큰 모순이 있다. 이 사람의 코끼리 그림에서 뗀 다리와 저 사람의 코끼리 그림에서 뗀 모가지, 또 다른 사람의 코끼리 그림에서 뗀 몸통을 서로 억지로 붙인 후 이것이 진짜 코끼리라고 믿겠끔 만들기 때문이다. 애당초 각각의 코끼리 그림이 서로 같은 것이라면 몰라도 어떤 것은 돼지 모양이고, 어떤 것은 송아지 모양이라면 이건 우습게 된다. 코끼리를 두고 다리는 돼지 족발이고 머리는 소대가리라면 이건 코메디를 떠나 한편의 비극이 된다. 그러한 꼴불견 기형 동물앞에서 코끼리를 상상해 내기란
완전히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돼지와 송아지에 대한 느낌마저도 무너져 늘 보는 돼지를 보고도
돼지임을 의심케 만든다.
그래서 나는 또 한번 시건방진 생각한다. 기존의 후랑켄스타인 교과서 대신에 금원사대가의 저술을, <의학입문醫學入門>을, <경악전서景岳全書>를,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쪼개지 말고 온전히 배우고
싶다. 이미 돼지, 송아지에게 친숙해 있는 우리들에겐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기형 동물보다 돼지 모양
의, 송아지 모양의 코끼리가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름다운 음악에 감동받을 수 있음은 음악의 전체적인 느낌을 통해서다. 도, 레, 미, 파, 솔,
라, 시의 조화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지 '도'라는 한음에만 매달려 이 음악에 '도'가 몇번
나왔으니 무척 감동적이다라고 할 수 없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천재 아니면 크게 모자란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와같은 천재와 바보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
궁-상-각-치-우, 오음五音의 조화를 연주하는 음악가처럼 우리는 한의사로서 간-심-비-폐-신, 오장五臟의 조화로 이루어진 인체를 다룬다. 그러나 우리는 오음五音의 조화로 이루어진 음악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먼저 느낀 후 궁, 상, 각, 치, 우에 각각 매달리는 연주가와 달리 오장五臟의 조화로 이루어진 인체의 생명력은 전혀 느끼지 못한체 간, 심, 비, 폐, 신을 쪼개어 오로지 그 각각에만 매달리고 있다. 전체적인 음의 조화를 느끼지 못하는 음악가가 과연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는 모두들 NO! 라고 대답하면서 실제 자신들은 오장五臟 조화에 대한 느낌보다 오장五臟을 갈기갈기 찢는 데에 앞장서고 있다.
그래서 교과목상 간계, 심계, 비계, 폐계, 신계로 나뉜 현실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정체 의학整體 醫學을 내세우는 한의대에서의 이런 모습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꼴이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 A계 내과와 B계 내과에서 말하는 것이 서로 다르니 이래 가지곤 제대로 된 연주를 할 수 없다. 만약 어떤 학생이 '도'만 가르치는 선생님, '레'만 가르치는 선생님, '미'만 가르치는 선생님 등 각각 7명의 선생님 밑에서 공부한다고, 전체적 느낌 없이 그가 과연 훌륭한 음악가가 될 수 있을까?
전체 느낌이 중요하다 해서 각각의 5개 내과 대신에 '인체 느낌과'라는 새로운 교과목을 만들 필요는
없다. 그 느낌은 책상위에서, 교과서에서, 시험지에서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정신으로
인체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과정에서만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이 들어 경험이 풍부할수록 훌륭한 한의사가 되는 것이다. 젊은 나이에 새로운 의학지식을 빨리빨리 흡수해야 위대한 의사가 되는
양방洋方과는 달리 한방韓方에선 오랜 세월동안 인체에 대한 많은 느낌을 가진, 깊은 철학을 소유한 의사만이 인정받을 수 있다. 그래서 한의사를 정년퇴직이 없는 유일한 직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20대의 우리들이 어서 빨리 깊은 철학을 소유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팔팔한 청년들에게
젊음 끝, 늙음 시작을 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겐 우리에 맞는 철학이 있고, 느낌이 있다. 비록
해답은 구할 수 없지만 남들이 당연시 여기는 것들에 대한 왜? 라는 의문, 늘 깨어있는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늘 깨어있기가 힘들다. 왜? 라는 의문점을 갖기가 어렵다. 그것은 1+1=2 라는
극히 교과서적 내용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왜 2지? 라는 의문은 완전히 사람 미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질문에 대한 답이 없으면 결국 유급 당하는 현실에 큰 두려움을 가진 시험 노이로제 환자인 우리는
쉽게 해답을 찾을 길없는 왜? 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심한 거부감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주일에
42시간, 16과목을 테엽감은 로보트처럼 반복하는 지금 여건에선 철학과 느낌을 강조하는 여유를 애당
초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학교로 향한 발걸음 속에서 다음과 같이 중얼거린다.
아, 한많는 한의대여! 빨리 졸업하는 것만이 살길이다.